2.5.23 주일설교

기도시리즈 III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

Keep on Asking, Keep on Seeking, Keep on Knocking

누가복음 11:9-13

유민용 목사

11:9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다.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문이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생선을 주지 않고 뱀을 주겠느냐?12 또 계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하더라도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려고 한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간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쉬운 성경)

9 “And so I tell you, keep on asking, and you will receive what you ask for. Keep on seeking, and you will find. Keep on knocking,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10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Everyone who seeks, finds. And to everyone who knocks, the door will be opened. 11 “You fathers—if your children ask for a fish, do you give them a snake instead? 12 Or if they ask for an egg, do you give them a scorpion? Of course not! 13 So if you sinful people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heavenly Father give the Holy Spirit to those who ask him.” (New Living Translation)

누가복음 11장은 기도의 장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에게 먼저 주기도문을 알려주신 후 기도의 핵심인 ‘간청’을 설명하시기 위해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간청’은 무엇입니까? 떼를 쓰는 것일까요? 소원이 이뤄질 때까지 기도의 양을 채우는 것일까요?

성경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것이지요.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기도를 드리며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낙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더디 응답될 때 낙심되기도 하고 조급해 지기도 합니다. 물론 기도의 응답이 안될 때 낙심되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낙심되는 마음을 이겨내고 인내하도록 해줍니다.

유대사회에서 이방인이었던 누가가 볼 때 기도하는 것이 익숙치 않았을 것입니다. 직업이 의사였던 누가의 시선으로 볼 때에 예수님의 이 기도의 가르침은 새롭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누가는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며 하신 예수님의 비유를 기록했습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인데요.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 이 사람은 다른 친구집을 찾아가 떡 세덩이를 꾸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한밤중에 피곤하고 힘들었을텐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 다른 친구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립니다.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이기적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절실한 필요를 안 친구는 그 밤에 찾아온 친구의 간청을 들어줍니다. 이것이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살아온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직무를 수행하며 수천만명의 장애인을 대변한 강영우 박사입니다. 그의 삶에는 예수님의 기도의 간청이 담겨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중학교 3학년 때, 축구를 하다 친구가 찬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시력을 잃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8시간 만에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납니다. 믿고 따랐던 누나마저 공장에서 일하던 중 과로로 숨져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절망스러워 보였던 그 시절 눈을 고쳐 달라고 기도 했을때 하나님은 ‘No’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그는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기 위해서 중학교 시절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끝임 없는 노력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1972년에 장애가 유학의 결격조항으로 있던 시절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미국 유학을 못 가는 불평등한 조항을 없애 달라는 청원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여, 당시 민관식 장관으로 부터 승인 받아 한국 장애인 최초로 유학생으로 도미 유학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각 장애인으로 유학을 가서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가 탄생하게 됩니다. UN 세계 장애위원회 부의장,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로 강영우 박사는 세상의 장애인들이 함께 어우러진 세상을 만드는데 밀알의 삶이 되었습니다.” 그가 유학을 왔을 때 LA공항 그를 맞아준 사람은 미국 양부모였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기여가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눈을 뜨지 못했더라면,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해 놓으신 사람들의 만남은 불가능 했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그의 인생에 닫힌 문을 열어 주었고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도구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11:9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다.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문이 열릴 것이다

멕시코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 여자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친아버지에게 학대 받던 아이였는데, 하나님이 그 아이를 입양하라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이제 너는 내 딸이야, 무엇이든지 필요하면 말해’라고 했지만 아이는 어떤 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한번도 울지 않고, 뭘 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고 버림 받을까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아이가 선교사님에게 다가와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빠, 신발 끈이 하나 필요해요. 선교사님이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합니다. 아이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는데 감사하더랍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며 하나님께 간청하지 않는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를 원문으로 보면 ‘아이테이테’, ‘제테이테’, ‘크루에테’라고 되어 있는데, 모두 ‘현재 명령형 동사’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영어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의미가 더 자세히 보여집니다. ‘Keep on Asking, Keep on Seeking, Keep on Knocking’ 기도는 지속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녀들에게 숨겨진 하나님 나라를 밝히 드러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부터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줄기차게 다가 오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예언자적 상상력을 갖는 것은 새로운 삶을 향한 도전이며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라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prophetes인데, 이는 예언자의 기본 성격을 암시하는 말로 다른 이를 위하여 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중심 개념은 신적(神的) 교제를 나타냅니다. 기도란 단순히 듣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자기 일을 전부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을 뜻합니다. 온몸을 바쳐 기도 드리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대부분의 삶을 마칠 때까지 자기 삶이 얼마나 메마르고 황폐해 있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욕망의 벌판위에서 방향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수 없습니다.

기도가 단순히 내 소원을 구하는 간구가 되어 ‘내 뜻이 무조건 이뤄지이다’라고 요구하는 도구쯤으로 여긴다면 도리어 해가 될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구하는 간청의 입을 닫아 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이 드린 기도의 간청을 드릴때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즉 그의 수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고 야고보서를 결론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동시에 인간의 기도와 행동을 사용하시는 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작과 끝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움직이신다면 인간의 행위는 의지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도의 소리도 듣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기도의 힘이 강력하게 영향력이 있고 일정부분 기도의 힘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기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여호와께 바라는 일 한가지 일을 구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기도의 바른 출발을 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게 되면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다음으로 다윗을 언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하십니다. 3,000년 이상 되는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 혈통에 관계되는 족보에 아브라함과 다윗이 언급됩니다. 구약의 역사속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사람을 제외하고 오직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길을 닦아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매일 옷장에서 입을 옷을 고르는 것처럼 새로운 마음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어제의 기도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기도를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일평생 고아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했던 죠지뮬러가 있습니다. 평생 고아들을 돕는 일을 위해 그가 드린 기도는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였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1938년 11월 28일. 오늘 아침 기도할 때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상황이 암담하였지만 주님께서 도와 주시려는 확신이 들었다. 평상시와 같이 형제들과 기도모임을 가졌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을때 나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위에 놓여 있는 편지 한통이 눈에 띄었다. 그 편지는 기도중에 배달된 것이었다. 그 안에 고아들을 위해 쓰라고 10파운드가 들어 있었다”

이 일기는 죠지물러의 기도의 응답의 일부분입니다. 죠지물러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공급해 주셨둣이 고아들을 돕는 일에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11 너희 가운데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생선을 주지 않고 뱀을 주겠느냐? 12 또 계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하더라도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려고 한다.

어떤 부모가 자녀들에게 뱀과 전갈을 그 손에 들려 주겠습니까? 성경에 뱀과 전갈은 악한 세력이고 자녀를 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죄를 짓는 악의 씨가 있는 것을 아십니다. 그런 까닭에 악에 빠져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내 손에 들린 것이 내가 소원하고 있는 것이 나를 해치는 것인지 내게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일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더듬더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 보면 동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이 시대는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향할 때입니다. 마음을 돌이켜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 고통으로 인해 기도를 잃어버린 성도들입니다. 아버지는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얼마나 학수고대(鶴首苦待)하며 기다렸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아들이 용기 내어 아버지께 다시 돌아왔을때 아버지는 어떻게 맞아주십니까? 멀리서 부터 오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달려가 목을 안아 입을 맞춰주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으로 내어 다가 입혀 주셨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 주셨습니다. 발에는 신발을 신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고,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아들은 아버지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기도하기를 좋아하십니까? 매일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요. 하루의 시간을 들여 진실한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천년의 사랑과 애정을 부어 주실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바다를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망가진 몸보다 크고,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가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으로 나아갈때에 십자가 사랑을 확증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발견한 사람은 보화를 찾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 집에 돌아가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서 그 밭을 사는 것입니다. 보화를 발견했으면 원래의 밭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윤리적인가? 도덕적인가, 근면한가에 관해서 초점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우리가 간청함으로 역동적으로 누리는 나라임을 설명합니다.

소비주의 사회는 기도가 세상의 기준에서 필요한 걸 마땅히 조달해 주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애통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게 중요합니다. 삶의 문제를 만나서 비관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애통하며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기에 우리는 애통해도 됩니다. 일어설 용기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기뻐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위선적인 신앙으로 갈 경향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할 때에 인생의 상실감, 고통과 상처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 주십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간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눈을 뜨지 않는 이들에게는 스스로 눈을 감고 있으니 보이는 것은 사방이 어두움 뿐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편 40:1-3

칼빈은 성령께서 인간의 정욕을 바라 잡아 주시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정욕은 우리를 웅덩이와 수렁으로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시며 우리의 정욕을 통제해 주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빚어 가십니다. 우리 안에 죄를 죽이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넘치게 하고, 육체의 열매에 반하는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게 함으로 죄를 이기게 해 주십니다.

이번 주간에 팔복에 대한 새벽 설교를 준비하며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 1926 –2015) 의 ‘고통은 헛되지 않아요’ 책을 읽다가 제 마음에 다가 온 간증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1820년 생후 6주밖에 되지 않은 한 여자 아이의 눈에 염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뜨거운 찜질약을 바르는 바람에 각막이 타버렸고, 아기는 그만 영영 앞을 볼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 아홉살이 되었을때 그 아이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비록 볼수 없으나 나는 얼마나 행복한 영혼인가요. 만족하며 살기로 결심했어요. 나는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복을 누리고 있어요. 눈이 멀어서 눈물을 흘릴수도 한숨을 쉴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이 소녀는 나중에 찬송가 615장 그 큰일을 행하신, 찬송가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찬송가 275장 저 죽어 가는 자 다 구원하고를 비롯해 8천 편에 달하는 찬송가를 썼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패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 1820-1915)입니다. 9살된 소녀가 어린 나이에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성령께서 그 소녀의 애통함을 복으로 바꿔주신 결과입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고통이 복이 되는 위대한 교환이 이뤄지는 장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밝은 면만 있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도 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삶의 슬픔과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부인하는 것은 스스로 진실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은 척하고 살게 되면 반드시 누려야 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실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주시는 힘을 통해 마지막 숨을 내시게 될 그 날을 향해 용기 내어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생명줄입니다. 기쁨보다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찾아 가십시요. 어려운 시기를 걷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친구가 되어 주십시요.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주님의 길로 돌봄의 사람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환대의 문을 활짝 열고 쉴 수 있도록 안식처가 되는 기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문을 열고 접촉할때에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한주도 사람들의 닫힌 마음에 기쁨을 실어 나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22.23 주일설교

기도시리즈 II

“네가 낫고자 하느냐?”

“Do You Want To Be Made Well?”

요한복음 5: 1-9

유민용 목사

1 얼마 후, 유대인의 명절이 되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불리는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 주위에는 다섯 채의 행각이 있었다. 3 이 행각 안에는 절름발이, 맹인, 중풍병자 등 수많은 병자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 그 이유는, 주의 천사가 그 연못에 가끔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그렇게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다 나았기 때문이었다.) 5 그곳의 병자들 가운데 38년 동안 병을 앓아 온 사람이 있었다. 6 예수께서는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그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병을 앓아 온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물으셨다. “당신은 낫기를 원하시오?” 7 그 병자가 대답했다. “물이 움직일 때 저 연못에 들어가야 하는데, 제가 연못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으면, 늘 다른 사람이 앞질러 들어가 버립니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시오! 일어나서, 당신의 자리를 챙겨들고, 걸어가시오!” 9 바로 그 순간, 그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리를 챙겨들고 걸어갔다. 그런데 이 일이 일어난 때는 마침 안식일이었다.(쉬운말 성경)

1 After this there was a feast of the Jews, and Jesus went up to Jerusalem. 2 Now there is in Jerusalem by the Sheep Gate a pool, which is called in Hebrew, Bethesda, having five porches. 3 In these lay a great multitude of impotent folk, of blind, halt, withered, waiting for the moving of the water. 4 For an angel went down at a certain time into the pool and stirred up the water; then whoever stepped in first, after the stirring of the water, was made well of whatever disease he had. 5 Now a certain man was there who had an infirmity thirty-eight years.6 When Jesus saw him lie, and knew that he had been now a long time [in that case], he saith unto him, Wilt thou be made whole? 7 The sick man answered Him, “Sir, I have no man to put me into the pool when the water is stirred up; but while I am coming, another steps down before me.” 8 Jesus saith unto him, Rise, take up thy bed, and walk. 9 And immediately the man was made well, took up his bed, and walked. And that day was the Sabbath. (King James Version)

‘감정은 어떻게 전염되는가?’(Strange Contagion)라는 책은 사회 전염 현상을 과학적으로 흥미롭게 풀어 쓴 책입니다. 이 책의 작가 리 대니얼 크라비츠(Lee Daniel Kravetz)는 2009년 실리콘 밸리의 부유하고 재능도 많던 고등학생들의 연쇄 자살 사건을 추적합니다. 여러가지 원인을 찾아 내었을 것입니다. 대중 매체의 영향. 집단을 따라가려는 영향. 실리콘 밸리에 이미 퍼져 있는 성공주의로 인한 탐욕. 히스테리.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 수많은 원인과 배경이 뒤따르겠지요. 저자는 감정이 집단적으로 빠르게 전염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감정 전염’은 눈에 보이는 전염병이 아니기에 더욱 위험하고 제어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과시하거나 증명해 낼 것들을 찾습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우리는 사람들의 감정적 영향을 받습니다. 이 감정이 분명 나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정 전염’으로 인해 다른 이들의 경험과 스트레스. 분노를 원래 나의 감정이었던 것처럼 빠르게 흡수하기도 합니다. 이 비극적 사고 앞에서 책은 건강한 공동체를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회도 환경도 공동체도 이상적인 모델을 찾으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그 안에서 내가 올바른 나로 살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성경은 예수님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죽게 됨을 고민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는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전 뜰 앞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보면서는  분노하셨습니다. 70인의 제자들이 전도하고 돌아 왔을 때는 크게 기뻐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감정은 자극에 대한 몸의 반응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도 자극에 따라 웃고 울며 감정이 반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의 감정은 지금 어떠십니까? 믿음의 사람들에게 대답은 늘 정해져 있을 때가 많지요. 솔직하게 대답하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불안한 감정을 부정적이고 나쁜것이라고 생각하면, 오래 신앙생활을 할수록 때로는 아닌척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평안한 감정만을 강요 받기도 하지요.

본문 베데스다 연못에는 전설처럼 떠도는 미신 같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천사가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 들어서 몸을 씻는 사람의 질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간절한 믿음을 지닌 채 찾아온 많은 병자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였음에도 물이 끓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의 간절한 믿음은 폭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먼저 들어가기 위한 경쟁으로 무자비한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베데스다(Bethesda)는 ‘집’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트’ 와 ‘자비,인자,긍휼’등을 가리키는 ‘헤쎄드’ 의 합성어입니다. ‘자비의 집’은 서로를 향한 책임과 긍휼의 마음으로 가득해야 하는데, 그곳은 인간됨을 잃어버린 채  절망의 자리가 될  뿐입니다. 천사의 기적을 바라는 소문에 전염된 많은 병자들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고, 물이 끓게 될 때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만 낫게 된다는 전설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께 한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물이 움직일 때 저 연못에 들어가야 하는데, 제가 연못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으면, 늘 다른 사람이 앞질러 들어가 버립니다.” 당시 베데스다 연못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성경은 어떤 병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38년동안 병을 앓아 온 사람이라고 언급합니다.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어떤이에게 38년이라는 시간은 평생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긴 세월동안 베데스다 연못에 서서히 퍼져가는 사회현상을 보면,  남들에게 뒤쳐지게 되면 안되고. 1등으로 들어가야만 소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점차적으로 연못에는 패배감과 절망감이 퍼져가고 희망에 대한 무감각함이 전염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38년 된 병자는 주님이 오셔서 물으실 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물어보실때 자신의 상한 감정을 보여드리기가 쉽지 않았을 꺼예요. 누워 있으면서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상한 감정들은 우리를 자신만의 동굴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무감각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38년 된 이 사람의 원망과 탄식의 소리는 기도일까요? 기도가 아닐까요? 넓은 의미에서 보면 기도입니다. 주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모든 고백은 기도입니다. 부모를 잃고 슬퍼하는 가족들의 울음도 기도이고, 새생명이 태어나 미소 짓는 엄마의 기쁨도 기도입니다. 산책길에 주님을 생각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그러면, 생각과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는건가요? 묻는 분들도 계실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을 내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의 탄식의 소리를 듣는 영적 감수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성령의 탄식이 마음 안에 느껴지게 되니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조율됩니다.

1세기 요한이 기록한 베데스다 연못의 이야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줍니다. 이 시대 신앙공동체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베데스다의 연못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도 경쟁의 원리가 스며 들어 있습니다. 세상과 사회는 1등을 해야만 살 수 있고, 1등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그 자리에 치유가 있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여전히 공허할 뿐입니다. 육신의 만족을 위한 그곳에는 허상만 있는 믿음일 뿐입니다. 그곳은 인간 내면의 실존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장소였습니다. 모두가 아프지 않은 척 하며 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일뿐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신 그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도 묻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네가 정말 회복되기를 원하느냐?” “네가 정말 변화되어지기를 원하느냐? 우리 안에 있는 교만함과 습관적으로 짓는 죄, 값없이 주시는 구원에 대한 무감각함이 이미  견고한 진이 되어 하나님을 등지며 살고  있지는 않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이는 엄마가 잠시만 보이지 않아도 정신없이 엄마를 찾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목놓아 웁니다. 엄마가 보일때까지 울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엄마가 간절히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성도는 하나님이 보일때까지 간절히 찾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목마름으로 찾으십시요. 주님의 사랑은 육신의 치유만이 아니라 온 몸과 영혼을 구원해 주십니다.

1.기도는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경쟁력을 확보하라’ 혹은 ‘실적을 내야한다’는 메세지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세상의 소리에 익숙해져 저항없이 무뎌진 마음은 기도를 통해 회복이 됩니다. 주님은 갈망을 잃어버린 이들의 마음을 기도할때에 깨우시기 때문입니다. 안일해진 마음안에 성령의 생각을 넣어 주시므로 마음의 갈등을 일으킵니다. 기도하는 이들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를 정말 원하는지를 물으십니다. 진정한 변화는 주님이 오시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 보면 깨달음이 홀연히 임합니다. 그때 밀려오는 감동은 마음에 참 깊게 남습니다. 물감이 번져 나가듯이 마음을 하나님의 나라의 색깔로 물들이게 됩니다.

중국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가 극도로 쇠약해지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은 작은 침상 위 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대에는 중국 지도가 걸려 있었습니다. 1875년이 밝아 왔을 때 이제 그는 병상에서 연필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했고 중국 선교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내용의 기사를 신문에 의뢰했습니다. “이 글을 읽은 기독교인에게 호소합니다. 귀하께서 지금 바로 1분만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그가 병상에서 기다리는 동안 놀랍게도 18명의 선교사가 찾아왔습니다. 기도의 역사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건강해서 선교사를 구하려고 다녔다면 아마 제 힘으로 이들을 보내서 선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병상에 있었기에 완전한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랜 세월 병을 앓아 온 병자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비록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느꼈을 끝없는 아픔과 좌절과 절망의 무게는 희망을 포기해도 될 세월일텐데, 끝없이 희망을 품고 있던 그를 주님께서는 찾아와 주셨습니다. 임계점(臨界點, the Critical Point)’이란 물질이 액체에서 기체로 변화하는 지점이지요. 쉽게 말해서 98도, 99도도 아닌 100도가 되어야 물이 끓는데, 물에 있어서 100도가 ‘임계점’입니다. 기도에도 ‘임계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십자가에서 당하실 고통을 기도로 이기셨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하여 떨어지도록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으시고, 기도의 시간에 십자가의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 내셨습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임계점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기도의 자리로 초청하셨습니다. 이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진액을 쏟아낼 정도로 하신 후에 자신의 뜻이 하나님 앞에서 꺾여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를 마치셨습니다.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2.기도는 고통받는 이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6 예수께서는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그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병을 앓아 온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물으셨다. “당신은 낫기를 원하시오?” 7 그 병자가 대답했다. “물이 움직일 때 저 연못에 들어가야 하는데, 제가 연못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으면, 늘 다른 사람이 앞질러 들어가 버립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지날때 왜 나에게 이런 시간이 찾아오는것일까 인정하고 싶지 않을때가 있습니다. 끝이 없는 터널을 지나는것만 같고 앞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서있는것만 같습니다.

주님은 고통 받는 이들에게 먼저 가셨습니다. 유대인의 명절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 갈때에 주님은 병든 자들을 찾아가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우리를 향한 교제이며, 나와 너의 관계를 이뤄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의 영이 깃든 곳에는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의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새해가 시작되고 새벽 기도의 제단을 지키고 예배하는 이들을 만납니다. 각자의 기도 제목을 품고 살아가지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이 땅을 중보하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일곱 가지 표적 (Seven Signs) 중에 세번째 표적(The Third Sign)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는 이유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고통이 가득한 베데스다 연못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이 되신 것은 위대함 힘이 있습니다. 나아이가라 폭포는 분당 17만톤의 물이 떨어진다고합니다. 이를 수력 발전에 사용하는데, 하나님이 인간의 옷을 입고 땅으로 내려 오신 것은 이보다 더 큰 힘입니다. 성도들은 이 힘을 기도를 통해 얻게 됩니다. ‘표적’은 사건 자체보다는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의미가 중요하지요.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신비한 경험들은 그 표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라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곳곳에 세워진 영적 표지판을 보며 주님의 보여주신 섬김과 긍휼한 마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년 동안이라…”(신 2: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38년이나 광야에서 방황합니까? 가데스바네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12명의 정탐꾼이 돌아와 한 보고를 받고 이스라엘이 겁에 질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 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들어갔어야 했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를 38년이나 더 방황하여 광야 생활 40년을 채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군대를 의지한 결과입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속에서 모세와 아론를 탓한 대가입니다. 이 시대는 기도의 이기성과 하나님이 뜻이 충돌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자들이 긍휼한 마음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이라는 기도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손으로 누구를 돕고 계신가요? 교회를 섬기는 모든 이들의 삶의 자리를 기도로 도우십시오. 우리의 기도와 섬김을 끝까지 이끄실 분이 오직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3.하나님은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시오! 일어나서, 당신의 자리를 챙겨들고, 걸어가시오!”  9 바로 그 순간, 그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리를 챙겨들고 걸어갔다…”

주님은 38년된 병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일어나 걷는 것이었습니다. 38년의 소원을 주님께서는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존재를 인정해 드리고, 그분의 뜻을 묻기 위해서 우리의 시간을 떼어 바쳐야 합니다. 주님은 하루 24시간 한주의 7일 일년 365일을 함께하고 계십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은 영적생활을 더 깊이, 더 넓게 경험하게 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을 주목하는데 , 기도의 전제가 되는 구절이 바로 삶의 주인을 바꾸라는 것이지요.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일어나는 변화가 기도인 것입니다. 왜 기독교 책들 중에 기도와 관련된 책들이 베스트 셀러가 됩니까? 기도가 영적생활의 풍성함을 더해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정신이 맑은 시간에 기도의 성소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분명해 질 때 말씀이 나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도를 통해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피조물은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분은 오직 창조자 뿐입니다. 본문에서 ‘일어나라’라는 단어는 부활을 묘사하는데 사용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혼이라는 단어는 ‘네페쉬’인데 생명을 의미하합니다. 원래 이 단어는 ‘목구멍’을 뜻했는데, ‘호흡’과 ‘생명’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기도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호흡이 끊기면 부활의 생명력의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호흡은 우리가 가진 전 재산을 다 드린다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주어진 일들이 힘들고, 공부하는 것이 힘들고, 직장 생활하며 지칠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무거운 짐이 마음을 짓누를때마다 주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자리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전한 삶을 위해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전쟁이 없는 땅, 부유한 재산, 안정적인 직장과 안전한 환경을 위해 살아가지만 주의 뜻이 이뤄지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쉼과 평안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 부터 샘솟게 되지요. 말씀을 맺으며 그렇게 살아가리 라는 찬양의 가사를 소개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 분주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며 지쳤다고 습관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지칠만큼 주님을 위하여 일 하였나 생각해 봅니다.  이 땅에 사는 내 소망 주 위해 사는것. 이 한줄 가사만으로도 나의 삶의 분명한 목적을 깨닫게 됩니다. 이 가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리’ 나의 일생 사는 동안 주 예수만 따라가리 주님이 보여주신 삶 나 그렇게만 살으리 환란이 닥쳐와도 내 목숨을 빼앗으려 해도 내 주님 바라보며 그렇게 살아가리 내게 주신 사명 모두 마치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으리 쉬지도 않으리 내 생명도 아끼지 않으리 이 땅에 사는 내 소망 주 위해 사는것  오직 예수만 오직 예수만 내 삶에 드러나길 하늘의 크신 능력이 나를 이끄시네  그 이름만 그 이름만 외치며 살리.

사랑하는 케임브리지 모든 교우님들의 삶에 오직 예수만 드러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