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2023 주일설교

기도시리즈 V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Give Us Today The Food

마태복음 4:1-4, 6:11

유민용 목사

1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심> 그후, 예수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내내 금식하셔서, 매우 배가 고팠습니다. 3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고 명령해 보시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6: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쉬운 성경)

1 Then Jesus was led by the Spirit into the wilderness to be tempted there by the devil. 2 For forty days and forty nights he fasted and became very hungry.3 During that time the devil came and said to him, “If you are the Son of God, tell these stones to become loaves of bread.”4 But Jesus told him, “No! The Scriptures say, ‘People do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6: 11 Give us today the food we need (New Living Translation)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번주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에 이르기까지 40일동안 그리스도의 빛이 가장 어두워지는 영적 여정을 걷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기 위한 영적 순례의 여정으로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두 가지의 양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말씀이고 또 하나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어떤이들은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무익한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죄를 회개하기 위해 음식을 삼가며 금식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금식을 통해서 욕망과 욕구를 죽이고 십자가를 더 가까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주님은 육체는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마음 안에 머무를 때에 식탁의 자리도 떡을 떼며 소중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일상의 변화로 이어지며, 예배는 삶의 자리와 분리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주기도문의 간구 중에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은 기도하지 않아도 일용할 양식이 넉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고도 쌓아 둘 만큼 넉넉한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의 기도가 어떻게 느껴질까요? 이제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우리의 삶과는 편차가 너무 크게 느껴지기에 이 기도는 배고픔을 겪는이들에만 필요한 기도일까요? 아니면 가난에 굶주리고 있는 빈민국가의 사람들에만 해당되는 기도일까요? ‘

‘일용할 양식’의 원어는 헬라어로 ἐπιούσιος, ‘에피우시오스’입니다. 로고스 주석에 보면 ‘에피우시온’ 단어의 뜻은 ‘날마다의 것을’인데, 이 단어는 ‘에피’와 ‘우시아’의 합성어입니다. ‘우시아’에 대한 단어의 의미를 추적해 보면, 첫째는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한’이란 뜻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날마다 그날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달라는 의미겠지요. 둘째는 ‘오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내일의 위한 양식을 공급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다가오는 날을 위하여 공급되는’뜻으로 일용할 양식을 받아들였습니다. 즉,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때 앞으로의 24시간을 가리킵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 동안 필요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두가지의 뜻은 하나님의 시간에서 보면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의 인식 차원이 아니라 다차원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가지 해석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현재는 과거가 되지요.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거하시려면 우리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행하실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억하고 기념하라 말씀하고 있는ㄴ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고 기억합니다. 예배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예배자가 현재에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영원한 시간과 교차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른 상황과 다른 시대에 쓰여진 책인데 모든 책이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알게 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를 성령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많은 성서의 기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2천년 전 그리스도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주셨구나 믿어지는 일도 성령께서 해주십니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되고,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간섭하시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시간이 우리의 시간 안에 뚫고 들어 온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쉼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이 힘이 들고 불편한 일이라면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아가는 일과 봉사하는 일들이 불편하고 고생스럽다는 것은 이미 믿음생활이 ‘누림’이 아니라 ‘의무’가 되어 형식, 위선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를 하는 것도 이러한 개념에서 보면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들어오심’과 ‘간섭하심’은 인류의 역사 전체에 걸쳐 이루어 졌고, 지금도 이루어 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한몸을 이루었습니다. 마치 밀가루들이 하나로 모여서 빵이 되듯이 떡을 떼는 교인들은 하나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한몸이기에 연약한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됨을 기억하며 일용할 양식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기도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떡도 포함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인간이 육체적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그래서 음식으로 인해 몸을 해치면 안됩니다. 몸이 아프면 밥맛을 잃게 됩니다.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소화기관이 정상이어야 하고, 식욕이 있어야 되는데 일용할 양식을 잘 먹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들은 식탁의 교제속에서 이 은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요.

디너처치(dinner church)라는 것을 들어보셨나요? ‘평범한 저녁’ 그리고 ‘교회’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인데, 말 그대로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먹으며, 비기독교인들을 초대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주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디너처치(dinner church)라 이름한 것이지요. 초대교회의 문헌인 ‘디다케’에 보면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교회의 건물이 없었으니까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떡을 나누고(성찬) 제사(예배)를 가정에서 드리며 생명의 교제를 나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갈릴리 호수로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제자들은 다시 고기 잡은 일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잡지만 고기 한마리 잡지 못하고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구우시고, 떡까지 준비하셨습니다. 배고픈 제자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을 알고 마련하시고 기다리셨습니다.(요 21장) 교회마다 공동체를 위해 식당에서 섬기시는 분들의 손길을 보면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왜 헌신하는 것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공동체의 식탁을 위해 주님의 사랑으로 준비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 가족모임, 팀모임,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이런 일들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모임 가운데 믿지 않는 이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믿음이 자라가고 섬김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자주 만나서 식사를 함께하면 그 사람과 친밀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학교에서 배운 것은 밥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는 훈련입니다. 오늘날 일용할 양식의 개념에는 자녀들을 위한 양육비가 필요하고, 집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렌트비, 그 밖에 하루 동안의 사용하게 되는 모든 양식이 충당이 되어야 합니다. 이뿐입니까? 소비문화는 소비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라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대중매체를 통해서 특정상품이 유행이 되면 소유하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생각을 지니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입학시킨 것입니다.

광야라는 죽음의 땅에서 매일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40년이라는 방랑생활 동안에 매일의 양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주시며 그들을 낮추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학교가는 자녀에게 일주일 전에 지었던 밥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라면 매일 새밥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광야의 시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날마다 ‘새로운 양식’을 주시며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밥만이 아니라 일용할 마음, 일용할 삶의 활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삶의 의미와 새마음, 정결한 마음이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매일 공급하시는 삶의 너머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아야 합니다. 시간도, 건강도, 물질도 주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함 가운데 하나님이 매일 공급해 주시는 것에 대한 훈련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만나가 하늘에서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안되었을까요?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배가 고프다고 불평한 것이 문제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새밥을 해주시며 출애굽 공동체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사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나가십니다. 예수님 정도면 광야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 사역을 하셔도 되었을텐데, 주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십니다.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를 하셔서 배가 고프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때 시험하는 자가 와서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돌을 떡으로 바꿔 보라고 하니 주님은 처해진 현실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떡속에 담긴 삶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와 같은 고통의 시간을 하나님은 언제든지 거둬 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광야의 시간은 자신의 백성들이 영원한 생명의 관점을 바라보며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다루심’입니다. 예수님은 시험하는 자를 쫓으실때에 신명기 8장 3절을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8:3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낮추시고, 굶기셨다가 만나를 먹여 주셨소. 만나는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조상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까닭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오.”

예수님은 성도들이 세상속에서 단지 떡 하나에 의지해 사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적 생존방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에서 진리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일용할 양식’을 내가 열심히 벌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라고 착각합니다. 식당에 가서 내가 번 돈을 지불하고 먹었으니 내가 이룬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생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가 살아 있고, 매일 생명력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교회 역사학자가 알렌크라이더가 쓴 초대교회 교인들의 일상을 보면, 초대 교인들은 도시의 음식을 먹고, 시민으로서 모든 일에 참여하지만 ‘거주하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초대교인들은 도시 문화속에 들어가서도 당시 로마 문화를 비판하며 시대 흐름에 도전하는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며 ‘거주하는 나그네’들이라 불렸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경제적 능력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억눌린 자들을 자유로 인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새하늘과 새땅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은 ‘일용한 양식’을 채우는 일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400년 종살이에서 출애굽 시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루라도 잊어 버리시면, 이스라엘 전체가 굶게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일용할 양식’에 담긴 공동체의 과업을 발견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의 구성을 보면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간구가 나오고 ‘우리를 향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를 위한 첫번째 간구가 일용한 양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라는 수식어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라는 말 안에는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 단지 먹을 것만이 아니라 어려움으로 하루를 살아갈 힘 조차 없는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양식은 단지 먹을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 모든 자원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일용할 양식이 넘치는 사람은 이웃과 나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있는 존재들이기에 일용할 양식을 더 누리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취하고 부당하게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을 드리는 성도들은 ‘우리에게’로 시작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의 그릇을 넓혀가야 합니다. 한국사람은 어릴때 내 아빠 내 엄마 하지 않고 우리 엄마 우리 아빠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우리’의 개념이 내 자녀, 내 가족, 내 식구가 먹을 양식이라는 개념에 익숙합니다. ‘우리에게’라는 수식어는 형제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 절박한 상황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만나를 남겨 두면 다음날 다 썩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탐욕에 물든 마음, 욕망의 노예로 살게 되는 삶은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허기진 마음을 채우려고 소유하고 또 소유해도 배고픔이 없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가요?

<부시맨Bushmen>이라는 영화를 보셨지요? 원제는 ‘The Gods Must Be Crazy’인데 , 영화속 배경은 아프리카 덤불 속에 사는 부시맨들입니다. 경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 상공을 낮게 비행하던 백인이 콜라를 마시고 빈 병을 비행기 밖으로 던졌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병이 부시맨 마을에 떨어지게 됩니다. 부시맨들에게 하늘에서 내려 주신 그 병은 신비로운 요술 방망이 같기도하고, 밀가루 반죽을 밀어 보기도 하고,  과일을 놓고 내려치니 과일 즙이 됩니다.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난감이었지요. 용도가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문제는, 하늘이 내려 주신 그 신비한 콜라병을 서로 독차지하려다 부시맨들이 그만 원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침내 족장은 자신이 아는 세상 끝까지 가서 콜라병을 절벽 아래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부시맨들은 다시 평화를 되찾게 됩니다. 콜라병 하나 때문에 온 부시맨이 원수지간이 된 이유는, 하늘이 내려 주신 것을 ‘우리’가 함께 쓰려 하지 않고 저마다 ‘나’ 혼자 독점하려 하니, 콜라병 하나를 놓고도 분란이 생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은 빵을 저축하고 싶어합니다. 성공하고 싶고, 좋은 차를 타고 싶고, 유명해 지고 싶고, 세상속에서 거장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먼저 지녀야 합니다. 성공과 축복만을 향해서 기도하는 일은 자본주의적 가치일 뿐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의 메시지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청지기의 삶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바르게 모으고 사용하겠다는 기도입니다. 양식을 왜 모으는지, 쓴다면 왜 쓰는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명확한 기준과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 내 2024년 하계올림픽 개최 후보지로 선정된 보스턴시가 유치 신청을 철회했다고 합니다. 보스턴 시의 발전 보다 다음세대들에게 재정적 부담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마틴 월시 보스턴 시장은  “올림픽을 다시 유치하는 것이 미국에도 좋고 보스턴에도 장기적 혜택을 가져오리라 믿는다 하지만 어떠한 혜택도 우리 시의 재정적 미래를 넘겨줄 만큼의 가치는 없다고”고 밝혔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질의 축적과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보다 좋은 미래를 가져다 줄 것 같지만 하나님으로 떠나게 만듭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매일의 기도는 우리가 가진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거둬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바른 생각과 옳은 기준으로 하나님 앞에 있음을 매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셋째로, 일용할 양식은 쉼을 주시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먹는 것을 앞두고 매일 식사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의 영성은 매순간 노동을 하며 안식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안식도 필요한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기도를 드리며 죄, 불안, 경쟁, 불평, 정죄, 불확실함으로 부터 안식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죄인들이 자주 초대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나누는 자리에 주인이시고, 그 자리에 온 모든 죄인들은 떡을 나누며 교제를 즐겼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때에 장래에 예수님의 식탁 앞에서 믿음의 교우들이 둘러 앉을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때에는 십자가에서 우릴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손수 떡을 떼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예배는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들을 마시며 생명을 누리지만 언젠가 우리에게 임할 날을 기다리며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안식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선교사들은 일용할 양식을 나누지 않는 것을 죄라고 여기며 조선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이 떡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1901년 한국 이교의 심장 속으로 오랫동안 잊어버린 노래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파고들어 갔습니다. 그 멜로디는 무교의 정령숭배에 있는 두려움의 중얼거림을 삼켜버리고, 조상 제사에 있는 절망적인 실망의 속삭임과 불교의 윤회 사상에 내재된 고뇌의 신음 소리를 그리스도 십자가 영생에서 부르는 즐거운 승전가로 변화시켰습니다. 그 옛날 뱃길을 따라 전해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기도는 한국땅에 수많은 십자가와 교회를 세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 형성사’라는 책에 실린 카우퍼의 장시 ‘자비’(Charity)의 일부분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한국에도 옛날 항로를 따라 전해진 주님의 떡은 하늘과 소통하는 어떤 이가 순수한 강물이 발원하는 곳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미천한 우리의 물과 다시 섞었는데 이는 마치 천사가 날개를 치는 것과 같았다. 불멸의 향기가 순례자의 길을 가득 채우고 그의 보물을 어디서 구했는지 우리에게 말한다. 그래서 보물을 가득 실은 범선은 태양이 인도의 향신료 해안에서 이글거릴 때 서구 세계의 어떤 안전한 항구에 그 닻을 내리고 돛을 접었다. 그 배가 어느 항구로 갔는지 묻는 것은 헛되다고 향기에 젖은 바람이 우리에게 알려 준다.

2.12.23 주일설교

기도시리즈 IV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In The Name Of Jesus

요한복음 10:7-18

유민용 목사

7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앞에 온 사람들은 다 도둑이며, 강도들이다. 양들은 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9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10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11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2 품삯을 받고 양을 돌보는 사람은 사실 목자가 아니며, 양도 자기 양이 아니다. 그 사람은 늑대가 오는 것을 보면, 양만 남겨 두고 멀리 도망가 버린다. 그러면 늑대는 양을 공격하여 양들을 흩트린다. 13 그 사람은 단지 품삯을 받고 양을 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양을 돌보지 않는다.”14 “나는 선한 목자다. 나도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알아본다.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안다. 그리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내게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인도해야 한다. 그 양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래서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나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18 아무도 내게서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없고, 다만 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그것을 다시 찾을 권세도 있다. 나는 이 계명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쉬운 성경)

7 so he explained it to them: “I tell you the truth, I am the gate for the sheep. 8 All who came before me[a] were thieves and robbers. But the true sheep did not listen to them. 9 Yes, I am the gate. Those who come in through me will be saved.[b] They will come and go freely and will find good pastures. 10 The thief’s purpose is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My purpose is to give them a rich and satisfying life.11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sacrifices his life for the sheep. 12 A hired hand will run when he sees a wolf coming. He will abandon the sheep because they don’t belong to him and he isn’t their shepherd. And so the wolf attacks them and scatters the flock. 13 The hired hand runs away because he’s working only for the money and doesn’t really care about the sheep.14 “I am the good shepherd; I know my own sheep, and they know me, 15 just as my Father knows me and I know the Father. So I sacrifice my life for the sheep. 16 I have other sheep, too, that are not in this sheepfold. I must bring them also. They will listen to my voice, and there will be one flock with one shepherd.17 “The Father loves me because I sacrifice my life so I may take it back again. 18 No one can take my life from me. I sacrifice it voluntarily. For I have the authority to lay it down when I want to and also to take it up again. For this is what my Father has commanded.”(New Living Translation)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마칠 때 똑같은 말로 기도를 마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인데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치는 것은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6: 2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다양성으로 인해 화합과 포용이 강조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인지 교회 안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빼고 기도를 마치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지난 2021년 1월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때 기도를 맡은 흑인 목사는 기도를 마칠 때에 “In the strong name of our collective faith, Amen”으로 기도를 마쳤습니다. 의역하자면, 다양한 종교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미국사회 안에 여러 종교와 민족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물론 정치적 행사이며 공적인 자리였기에 다양한 종교를 지닌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을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알라나 브라만 등 여러 종교의 신에게 드린 기도일 수도 있겠지요. 사실 이미 오랜전부터 북미 캐나다 연합교단에서도 종교적인 차이를 만들어 내는 분쟁을 줄이기 위해서 기도를 마칠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단안에서 보수주의 목회자들은 기독교의 정체성이 와해되는 두려움과 위험성을 이야기 하고 있지요. 진보주의적 목회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배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공공선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사전적 의미로는 개인을 포함하는 사회 전체를 위한 선을 의미합니다.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새하늘과 새땅의 회복은 예수의 구속을 흐릿하게 해놓아야 화합이 이뤄질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의 회복도 선교의 관점에서 유일한 중보자를 드러내지 않아야 종교간의 화합이 이뤄진다는 것이죠. 유일한 중보자는 내적으로 인식만하고 겉으로는 고백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 사라져 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34장은 양과 목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11절 12절을 보면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 낼지라” 당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으며, 이스라엘의 땅은 바벨론 제국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목자가 없으니 흩어져서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양들이 처한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흩어지게 된 중심에는 죄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죄로 인해 내양들이 흩어졌지만 목자는 내 양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찾아오시겠다는 것이죠. 대략 600년 후에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를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물들어 있지만 새로운 생명을 얻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찾고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을 지워 버리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영혼들은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죄를 법으로 제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의 구속이 없으면 화합하고 수용하는 것은 답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 자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을 하실 때에 에스겔 34장을 염두에 두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목자로 부르는 것에 익숙했지요. 다윗도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선언을 하시는데 ‘나는 양들의 문이다. 그리고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양의 문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첫째로, 주님은 양의 문입니다.

7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앞에 온 사람들은 다 도둑이며, 강도들이다. 양들은 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9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양들에게는 위험이 닥치는 순간이 있습니다. 지진만 해도 양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해입니다. 생각지 못했던 삶의 위기, 말없이 찾아오는 질병들, 인간 관계의 상처로 인한 고통 등 생명을 앗아가는 위험이 있는데, 주님은 양의 문 앞에서 지키시는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키시는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부터 해방되는 사건을 넘어서 구속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의 피가 없었으면 출애굽도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유월절은 어린양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죽음의 천사가 애굽 전역을 휩쓸고 갈때에 애굽 사람의 집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구분하기 위함이라면 굳이 어린양을 죽이지 않아도 문 앞에 양 한마리 묶어두면 되었겠지요. 그러나 유월절 어린양은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피가 문 앞에 뿌려져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27:37절, 마가복음 15:26절에 보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그분의 죄명을 적은 글’이 있었습니다. 그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인데 양의 문이 되기 위해서 온갖 수치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재판관인 빌라도 역시 그분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으셨습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의 깊이를 알지도 못한 채 기독교 교리에만 문자적으로 매달리고 계시지는 않나요?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죄인를 살릴 방법이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세상이 설정해 놓은 기준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도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그 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죄와 죽음을 부터 놓여지는 경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어린양 대신 주님이 대신 죽고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에 대한 깊은 경험은 오직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도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게 되면 생명의 진리를 거부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 다 안다고 생각했기에 주님의 초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주님을 거부하는 일도 없습니다. 양의 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전체 운명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양의 문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고, 목자에게 운명을 맡기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실존이 양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온순하거나 의존적으로 보이는 게 싫은 것입니다. 분명한 주관을 세우며 자기의 뜻대로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100세에 얻는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모리야 산에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를 이를 독자 였는데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스스로 파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시험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네 자손이 밤하늘에 별들처럼 번성할 것이라 약속에 대한 테스트였습니다. 그럼에도 시험조차 부당한 요구이고, 부조리한 하나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모리야 산에 올라가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헤아리기도 어렵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내놓으라는 말에 순종할 사람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그것도 100세에 귀하게 얻는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산을 오르는 동안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내게 이럴 수 있을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닥쳐온 현실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제단에서 드린 것은 자신의 뜻과 고뇌를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번제단 앞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드리려는 아브라함을 2번이나 부르시며 더 친밀한 경험을 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경험하며 믿음안에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은 인간의 본성이 제단에서 태워지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등한히 여기게 된 이유 중의 하나를 꼽자면 하나님에 대한 경험부족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묵상하는 일에 쉽게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가며 돈과 권력에 지배를 받다 보니까, 하나님의 경험은 부족해지고, 기도할 힘은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오늘날 전세계에 인구 숫자가 79억명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안에 있는 양들은 얼마나 될까요? 코카콜라를 전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로버트 우드러프(Robert Woodruf)회장은 유명한 말들을 남겼는데요. “나의 꿈은 내 세대에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코카콜라를 한 잔이라도 맛보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훗날 사업 성공의 비결을 물어보는 기자에게 “내 혈관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른다.”고 대답했지요. 우드러브가 얼마나 자신의 일에 열정과 마음을 쏟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죄로 오염되어 있어서 그대로 두면 죄를 향한 방향으로 이끌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피속에 흐르게 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성장 시키시는 양분을 얻는 것입니다.

신생아가 처음에는 엄마와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경험적으로 엄마를 알지 못합니다. 엄마의 음성도 익숙치 않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품에서 모유를 먹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가 부르는 소리와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를 구분하게 되지요. 아이가 엄마의 소리에 반응하게 되는 것은 엄마의 음성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매일 엄마의 모유를 먹으며 아기는 엄마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말씀을 읽고 성전에 있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전제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쳤다 해서 예수 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주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오래 참으사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본이 되어 주셨다는 것을 마음 깊이 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죄를 저지를수 있고, 문밖에 서 있다가 어느날 흐리고 캄캄한 날을 맞이 할수 있습니다. 기도의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주님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양의 문이 되시는 주안에 머무르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14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내게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인도해야 한다. 그 양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래서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나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18 아무도 내게서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없고, 다만 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내놓는다’는 단어가 11절, 15절, 17절, 18절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선한목자는 목숨을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한 목자인지 삯군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길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가 아니면 달아나는가에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솔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위해 나의 목숨을 내어 놓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고백은 할수 있으나 누군가를 위해 실제로 목숨까지 내놓은 일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은 누구나 삯군이 될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믿음생활 오래 하신분들이 지식은 커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삯군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선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도 그 길을 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 선한 목자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선한목자가 되어야 양들이 생명을 풍성하게 얻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널 위해 죽었어’라고 하시는 주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가족을 잃고 형제를 잃고 아파하는 이들도 선한목자를 만나면 변화가 됩니다. 가난한 자도 병든 자도 이 주님을 만나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양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죄인임을 깨닫고 선한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속에서 목숨까지 내려놓지 못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에서부터 섬기고 희생하며 청지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서둘러 죄를 회개하고 안도의 숨을 쉬는 것입니다. 목자를 따르는 일은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 받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선한 목자가 삶을 지키시며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시기 위해 삶속에서 믿음의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셋째로, 예수의 이름안에 풍성한 생명이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풍생초’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풍성한 생명으로의 초대라는 말을 줄여보았습니다. 주님은 겸손한 마음 위에 풍성한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1978년 시작된 교회의 역사 앞에서 우리 모두가 서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배운다는 마음으로 주일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새 옷을 매일 입어야 합니다. 풍성한 생명의 복은 현재에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묵묵히 오랜시간 헌신의 자리를 지켜오신 분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성도들, 매일 삶의 자리에서 은혜를 구하는 교우들의 기도가 공동체를 따뜻하게 해줍니다. 말씀데로 살아보자고 삶을 고백하는 모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과 함께 울며 위로하는 성도들을 보며 풍성한 생명이 더 깊이 느껴집니다. 아직 이런 말들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서 ‘주님이 필요해’라고 매일 고백해 보십시요. 지체들을 볼때에는 ‘교회야 사랑해’라고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풍성한 생명은 목자와 양의 바른 관계 안으로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도 아들 예수를 잘 알았습니다. 양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존웨슬리의 ‘그리스도의 완전’이라는 설교를 보면 ‘완전’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무지, 실수, 연약함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한사람이 완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 경험, 지식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매일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전세계 모든 사람이 호흡하기에 충분한 영입니다. 성령으로 부터 흐르는 생기는 계속적으로 불어옵니다. 주님안에서 우리는 그 호흡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주권을 성령님께 드려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성령님께서 우리 교회, 우리 가정과 삶의 자리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온전히 드려 보시지 않겠습니까? 성령님께 삶을 내어드리면 식었던 사랑도 회복이 되고, 형식과 틀에 매여 있던 마음에 알지 못했던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삶이 불확실하고 미래가 불투명해서 기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복된 일임을 기억 하십시요. 아브라함도 모리야 산을 오르며 고민과 고통이 가득했습니다. 번제단 앞에 내려 놓을 때 비로소 풍성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깊은 차원으로 들어 가십시요.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슬퍼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사랑을 통해 잃어버린 양떼들이 선한 목자되시는 주의 문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한주도 무너진 삶의 자리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주님의 손과 발이 되시는 교우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