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05 2026 주일설교

(부활주일설교)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기

Dying And Rising with Christ

빌립보서 3:10-11

김태환 목사

10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 그분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도 마지막 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쉬운성경)

10 I want to know Christ—yes, to know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participation in his sufferings,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11 and so, somehow, to attain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NIV)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41년 전,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당시 이름은 제물포) 항구에 입국했습니다. 그날은 4월 5일 부활절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미국 북감리교 소속 선교사로, 언더우드는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해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우연히도 올해 부활절이 4월 5일이어서 감회가 더욱 새롭습니다.

부활절은 우리에게 특별한 주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주신 것을 축하하고,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기로 결단하는 주일입니다. 바울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하는 것이 이 세상에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9) 왜 그렇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삶을 소망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믿음 생활에 필수적(必須的)입니다. C.S. Lewis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가 거짓이라면 기독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참이라면, 그것은 무한히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는 결코 적당히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 -C.S. Lewis, God in the Dock 기독교를 좋은 종교라고 말하거나, 삶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나, 마음에 위로를 주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런 정도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면, 이것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만큼 중대한 사건입니다. 맞습니까? 반대로, 기독교가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우리 삶에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이스가 기독교는 적당히 믿을 수 있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 믿음의 주춧돌(cornerstone)과 같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기초가 없는 모래 위에 세운 집 같아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쉽게 무너집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단단하지 않습니다. 사는 방식이 단순하고, 현세적(this worldly)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단단한 주춧돌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견고합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잘 이겨냅니다. 쉽게 무너지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관심을 두고 삽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삽니다(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고린도후서 5:7) 아펜젤러가 한국에 왔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7살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그보다 한 살 적은 26살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한국 땅에 첫 발을 딛고 이런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습니다. 이날 죽음의 굴레를 끊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묶고 있는 모든 사슬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그들은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왔습니다. 그들이 세상적인 성공이나 명예나 이익을 따라 살았다면, 조선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따라 산 사람들이었기에, 조선을 위해 자신을 드리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오늘 제 설교를 통해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활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부활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참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한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11, 현대어 성경)

바울은 그의 인생의 주된 목적을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기노스코(γινώσκω)’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같이,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요한복음 10: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사용하신 말이 ‘기노스코’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우리가 관계의 깊이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깊이 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조선 후기는 성리학(性理學)이 심화된 때였습니다. 이 때, 정약용이라는 뛰어난 학자가 나왔습니다. 정약용의 바로 위 형이 정약종이고, 제일 큰 형이 정약전입니다. 모두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입니다. 정약종은 엄격한 유학자였는데, 천주 교인이된 이벽(李蘗)과 밤샘 토론에서 잡득(雜得)을 얻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천주는 참으로 계신 분이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왔다면, 그분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리고 자기 부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부인, 어젯밤 나는 참된 도(道)를 보았습니다. 천주께서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의 영혼도 그분께서 돌보십니다. 이 도는 사람을 바르게 하고 가정을 평안하게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 도 안에서 참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제 천주를 섬기겠습니다. 이것이 내가 찾던 도이며, 내 삶을 바르게 하는 길입니다.” 정약종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장남 정철상과 함께 순교합니다. ‘주교요지(主敎要旨, 1795년경)’라는 한글 교리서를 남겼습니다. 부인 류소사,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합니다. 아들 정하상은 왕에게 올린 ‘상재상서(上宰相書, 1839)’와 교황청에 사제 파견을 요청한 ‘조선교우서(朝鮮敎友書, 1824년)’로 유명합니다. 당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정하상의 편지 번역본을 읽고 “동방에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다”라고 하면서 크게 감동했다고 합니다.

정약종은 이벽과의 밤샘 토론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그의 삶은 하루 아침에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변화되었고, 자녀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천주교의 역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머리로는 알지만 행동이 없고, 실천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문제입니다. 정약종의 고백처럼,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온 것을 알았다면, 그의 피조물인 우리는 마땅히 그분을 섬기고 따르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두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Amplified Bible에 보면, 부활의 능력이라는 말이 ‘신자들 안에서 넘쳐나고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which overflows and is active in believers)’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이 말씀을 하면서 박해로 예루살렘을 떠나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을 고난 속에서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힘은 그들 속에서 역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그 능력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수요예배를 ‘삼일예배’라고 불렀습니다. 주일마다 한 번씩 예배드리는 것으로는 모자라 주일이 지난 후 삼 일째 되는 수요일 저녁에 다시 모인 것입니다. 삼일예배는 사도신경의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는 구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어렸을 때 삼일예배를 경험한 저는, 삼일예배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주중에도 기억하며 살겠다는 신앙적인 열망을 담은 아름다운 전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지신 십자가의 정신을 내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함께 아파해주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알고 함께 울어주고, 다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함께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어느 집 안에 계셨습니다. 이미 사람들이 집 안까지 빽빽하게 모였기 때문에 병든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 네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그 집의 지붕을 뜯고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침상 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긍휼이 여기는 마음과, 예수님께 데리고 가면 친구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예수님께 대한 ‘적극적인 행동하는 믿음(active faith)’을 보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겪고,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함께 울어주고,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내 주는 일, 이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나누는 일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던 이유는, 그 자신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3:11, 현대어성경)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 이것을 위해서 자기는 어떤 희생과 대가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말하면서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 신앙이 반드시 고난을 통해 주어진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그는 고난을 단순한 고통으로 보지 않고 부활에 참여하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발견한 부활 신앙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는 이 비밀을 로마서 6:8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If we died with Christ)”이라고, 과거형 동사를 썼습니다. 미래형을 써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면”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우선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비밀을 ‘밀알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요한복음 12:24) 땅에 심은 씨앗은죽지만, 그 자리에서 새 생명의 싹이 돋고,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그를 믿는 수많은 생명들을 얻었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누가복음 9:23)”고 말씀하셨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주시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실천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부활의 새 생명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No’라고 말하고, 예수님의 삶을 닮고, 그의 고난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Yes’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바울은 부활 신앙의 비밀을 알았기에 “우리 사도들은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린도후서 4:10)”고 했습니다. 또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고(고린도전서 15:31),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했습니다(갈라디아서 2:20).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에게 부활의 삶이 열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람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부활 신앙은 실제적(實際的)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유익(有益)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가진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고 해석합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4:8).” “우리는 고난을 받아도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다.” (로마서 12:12) 예수님의 고난을 나누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고난의 시간을 즐거움으로 이겨냅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현재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931년 10월 18일, 혼수 상태에서 잠시 깨어난 에디슨은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저기 보이는 그곳은 참 아름답습니다(It is very beautiful over there),”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증하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5:1-5). 바로 이것이 왜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 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사모해야 하는지, 그 이유입니다.

부활 신앙은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할 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삶으로 들어오라!” 이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