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네번째 주일
눈을 뜬 사람들
Those Whose Eyes Were Opened
요한복음 9:1-7
1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만나셨다. 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왜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그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것은,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4 해가 있는 낮 동안,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서, 거기에 진흙을 갠 다음, 그 맹인의 눈에 바르시고 말씀하셨다. 7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시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이다.) 그 맹인이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눈을 씻자, 즉시 눈이 밝아졌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쉬운말 성경)
1 As Jesus was walking along, he saw a man who had been blind from birth. 2 “Rabbi,” his disciples asked him, “why was this man born blind? Was it because of his own sins or his parents’ sins?”3 “It was not because of his sins or his parents’ sins,” Jesus answered. “This happened so the power of God could be seen in him. 4 We must quickly carry out the tasks assigned us by the one who sent us.[a] The night is coming, and then no one can work. 5 But while I am here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6 Then he spit on the ground, made mud with the saliva, and spread the mud over the blind man’s eyes. 7 He told him, “Go wash yourself in the pool of Siloam” (Siloam means “sent”). So the man went and washed and came back seeing!(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설교를 준비하며 눈을 뜬 후의 사람이 아니라, 눈을 뜨기 전 그가 지녔을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 그에게 세상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캄캄한 어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사람은 왜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답은 제자들이 예상한 것과 달랐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그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것은,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왜? 라는 질문에 답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인과 이유를 묻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지금을 바라보기 보다 나에게 왜 이런일이 생겼는지를 고민합니다.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묻습니다. 이 길이 맞을까? 내 눈이 정말 떠지는 걸까? 그 삶의 무게를 안고 우리의 매일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은 ‘어떻게’라는 세상의 수많은 방법과 ‘왜’라는 내가 이제껏 정해 놓은 확신을 내려놓고, 지금 누가 이 일을 하고 계시는가에 집중할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지금 누가 그의 눈을 열고 계시는지 보도록 하시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시선을 새롭게 바꾸어 주셨습니다.
첫째 현실의 고통을 다르게 읽는 시선
맹인은 자신의 삶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시선이 보지 못하는 어둠보다 더 무겁게 그의 삶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눈을 뜨고 세상을 보기 전에 들어야 할 것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평생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며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실로암으로 갑니다.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했을까요? 보여서 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붙들고 간 것입니다.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뜨고 본 세상은 분명 새로운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고통속에서 전혀 다른 것을 보셨습니다.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목적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다릅니다. 눈이 열리기 전에는 아픈 사람 옆에서 “왜 저렇게 됐을까”를 묻습니다. 힘든 형제 옆에서 “본인이 좀 더 잘했어야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적이 이끄는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도 누가 이 일을 행하고 계신지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과거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옛생활은 끝이나고 언제나 회복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는 사람들은 판단하지 않고 함께 기도합니다. 지금 우리는 내게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유대교의 열심이던 종교인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삶의 목적이 종교적 열심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감옥에서 쓴 편지의 고백을 보면, 죽음과 삶이 놓인 상황 속에서도 주어진 삶을 예수를 위해 온전히 살아야 하는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에게 죽음과 삶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자리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은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는 힘인 것입니다. 이 복음은 결코 가볍거나 얕지 않습니다.
1914년, 미국의 찬송 시인 루퍼스 맥대니얼(Rufus H. McDaniel)은 아들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로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어둠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 고백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시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다가 밝은 빛 홀연히 비쳐 저 멀리 하늘문 환하게 보임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이 고백이 어둠속에서 참빛을 찾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눈을 뜨고 시선이 바뀐 사람들 안에는 고통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복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곳에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시선은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미래로 향하며, 현재의 삶을 살아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삶을 위해 분주하게 달려갈 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도 주님을 위한 일에 생명을 다합니다. 여전히 과거에 짓눌려 아파하는 사람과 도와야 할 사람을 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일하실 것을 봅니다. 제자들은 누구의 죄인지를 물었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을 보여주신 것처럼, 예수님의 사람은 어떠한 자리도 보내신 이를 드러내는 영광의 자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
창조기사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잃은 사람을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렇게 빚으셨을까? 하는 상실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명령입니다.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행하신 이 행동은, 태어날 때부터 결핍을 가진 사람에게도 새롭게 보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걷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길에서 주님의 말씀 하나 붙들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한걸음 한걸음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맹인에게 하신 일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눈을 뜬 사람이 당신들의 아들이 맞냐고 낱낱히 캐묻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서도 예수의 말씀을 불편하게 듣고, 오히려 자신들에게 맹인이라고 하는 것이냐고 반문합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확신 때문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당신들이 맹인이라면, 죄가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들이 지금 본다고 주장하니, 당신들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소.” (9:41)
성 어거스틴은 자신의 옛 자아와 씨름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늦었습니다. 너무나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내 안에 계셨는데 나는 밖에 있었습니다. 당신은 빛나고 계셨는데 나는 눈이 멀어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지만 자기 안에 갇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편견과 생각을 넘어섭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자기의 의까지 무너뜨리시려고 십자가의 길을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자아가 있습니다. 나의 종교적 확신, 내 기준이 앞설 때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날 것임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나의 의로움을 완전히 내려놓을때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해 주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우리 힘으로 걷는 길이라면 누구도 이 길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신데 자신을 비워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께 마음을 닫고 눈을 뜨지 않는 이들에게, 주님은 끝까지 은혜의 문을 열어두시고 나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일은 믿으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눈을 뜨게 하신 것은 한 사람의 사건이 아닙니다. 세상의 미움을 사랑으로 이기신 것이고, 어둠이 하나님의 의로 뒤집어진 사건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도 그렇습니다. 잘 믿고 제대로 살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 흔들릴 때도 있고 외로운 여정이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수록 손해 보는 것 같고 가정에서도 나 혼자만 씨름하며 무릎 꿇고 있다고 느껴지는 홀로 서는 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그 자리, 세상에서 버림받고 낮은 마음으로 서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믿음 안에서 눈을 뜬다는 것은 더 많이 알고 보는 것의 차원이 아닙니다. 나의 옆 사람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홀로 선 자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아픔 가운데에서 살아가다가 다시 이곳으로 찾아왔을 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사랑으로 안아주는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찾아오신 그 사랑으로 함께하는 실로암이 우리 교회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시오
이제 우리의 삶에도 말씀으로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확실하지 않아도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토요일 새벽기도에서 청년 임원들이 특송을 준비했습니다.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불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 폭풍 가운데 무너질 때도 주님 내 곁에 함께 하시네,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나도 그들을 용납하는 것, 나를 위해 달리신 십자가 사랑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
우리는 매일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도 아무일 없는 하루를 꿈꿉니다. 주의 자녀로 살아가지만 불 가운데로 걸어가는것, 폭풍 가운데 살아가는것, 그들을 용납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주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날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이 실로암에서 눈을 씻고 돌아 왔을 때 그가 본 것은 자신을 심문하는 바리새인, 부모도 이웃들도 외면하였던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이 외면하던 그를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4절 보시면, 4 “해가 있는 낮 동안,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새 삶에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성공과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제한된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보내신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홀로 있는것 같은 자리에서도 우리 곁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로 기도해 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마음을 함께 해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맹인은 말씀을 붙들고 실로암으로 갔습니다. 우리도 말씀안에서 한 걸음 한걸음을 걸어가야 합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은 자’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실로암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자리에서 말씀으로 눈을 뜨고 세상으로 보냄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걷는 이들은, 정리된 답을 찾는 여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린 순종의 여정에 서게 됩니다. 이 고백 위에 서서, 보냄받은 성도의 삶을 담대히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