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8 2026 주일설교

사순절 세번째 주일

오늘의 예배

Today’s Worship

시편 95편

95:1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같이 주님께 기쁨의 노래를 불러 드리자. 소리 높여 우리 구원의 반석이신 주님을 찬양하자. 2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분께 나아가자. 그분을 기리는 즐거운 찬송을 부르자. 3 주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 깊디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디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이다. 5 주께서 바다를 지으셨으니 바다도 주님의 것이요, 마른 땅도 주님이 손수 빚으신 것이다. 6 그러므로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함께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7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이요 그분께서 돌보시는 양 떼라. 오늘날 너희는 주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 8 ○ “므리바에서 너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맛사에서 너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희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고 완고한 마음을 품지 말아라. 9 그때에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들을 똑똑히 보고서도, 나를 거듭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 10 그러므로 나는 40년 동안이나 그 백성들에게 분노하며 말하기를 ‘저들은 마음이 삐뚤어진 백성이요, 내 길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이로다.’ 하였고, 11 또 나는 화가 나서 맹세하기를 ‘저들은 내가 편히 쉬라고 저들에게 허락한 그 땅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쉬운말 성경)

1 Come, let us sing to the Lord!
    Let us shout joyfully to the Rock of our salvation.
2 Let us come to him with thanksgiving.
    Let us sing psalms of praise to him.
3 For the Lord is a great God,
    a great King above all gods.
4 He holds in his hands the depths of the earth
    and the mightiest mountains.
5 The sea belongs to him, for he made it.
    His hands formed the dry land, too.

6 Come, let us worship and bow down.
    Let us kneel before the Lord our maker,
7     for he is our God.
We are the people he watches over,
    the flock under his care.If only you would listen to his voice today!
8 The Lord says, “Don’t harden your hearts as Israel did at Meribah,
    as they did at Massah in the wilderness.
9 For there your ancestors tested and tried my patience,
    even though they saw everything I did.
10 For forty years I was angry with them, and I said,
‘They are a people whose hearts turn away from me.
    They refuse to do what I tell them.’
11 So in my anger I took an oath:
    ‘They will never enter my place of rest.’”(New Living Translation)

산을 오르는 사람은 정상을 향합니다. 입구에서 첫 발을 내딛을 때와 정상까지 올랐을때의 감격은 전혀 다릅니다. 같은 산이지만 도달해 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올랐습니다. 믿음의 길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들 이삭과 함께 올라갑니다. 그리고 정상에서 순종의 손을 들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양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소로 올라가며 시편 95편을 함께 노래했을 것으로 봅니다. 1절에서 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는 마음으로 성소 안으로 올라갑니다. 그 첫단어가 ‘오라’입니다.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같이 주님께 기쁨의 노래를 불러 드리자” 6절도 보시면, “오라, 모두 와서 우리 다 함께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라’는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절로 5절은 주를 처음 만난 기쁨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3 주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 4 깊디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디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이다. 5 주께서 바다를 지으셨으니 바다도 주님의 것이요, 마른 땅도 주님이 손수 빚으신 것이다.’ 넓은 바다도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땅도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빚으셨기에 성도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작은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합니다. 오늘날 미세한 반도체 칩 하나에 세상 모든 정보가 담기고, 작은 화면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들여다 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잃어버린 시대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믿음을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됩니다. 그리고 그 동행 안에서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입니다.

7절에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라는 선언과 함께 시편의 분위기가 갑자기 전환됩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광야에서의 사건, 곧 므리바와 맛사에서 조상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했던 일을 상기시켜 줍니다. 므리바(מְרִיבָה)는 ‘다툼’, 맛사(מַסָּה)는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물이 없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다투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만나를 먹었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앞서 가는 것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출 17:7)를 물었습니다. 므리바와 맛사에서의 사건은 하나님을 불신하며 불평했던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38년을 광야에서 연단받고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약속의 땅을 보지 못했습니다. 시편 95편을 묵상하며 우리가 기억해야 교훈을 나누겠습니다.

첫째, ”오늘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완고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할 때 시편 95편을 인용합니다. “7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는다면, 8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시험받던 기간에 반역했던 것처럼,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히3:7-8)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4장에서도 히브리서 기자는 다윗을 통해 ‘오늘의 예배’가 무엇인지 다시금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시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그 말에 순종하고 너희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히 4:7). 우리의 ‘오늘’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단어 ‘하이욤’은 지금 주의 음성을 듣고 현재를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어제의 말씀으로 오늘을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예배’는 매일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매일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십자가에 이끌림으로 우리의 강팍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불평과 불신의 언어가 시작됩니다. 예배는 주의 음성을 ‘오늘’ 듣고, ‘지금’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주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광야 1세대는 하나님을 불신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기억하고 마음을 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자리를 채우십니다. 7절을 보시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이요 그분께서 돌보시는 양 떼라. 오늘날 너희는 주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

둘째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입니다.

‘기르시다’의 히브리어 마르이트(מַרְעִית)를 영어성경은 pasture로 번역했습니다. 풀밭, 목초지입니다. 목초지에서 풀을 먹고 살아가는 양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양식이 되시는 것입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이 먹을 풀밭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에게 “나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 왔다”라고 말씀셨습니다. 양은 주의 말씀을 들을때 영혼이 살찌웁니다. 주의 자녀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것은 세상의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업에 성공한 사람도, 실패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태어난 아이를 안고 헌아예배를 드리는 부부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들도 주의 말씀을 듣고 영혼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조용히 병이 자라납니다. 반면에 주가 인도하는 양들은 깊은 골짜기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은 하나님의 훈련이었습니다. 광야에 풀이 없으니, 하나님은 매일 아침 어김없이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광야가 없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알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광야의 시간에 있는 이들에게 그 은혜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광야는 어제 저장해 놓은 은혜로 살수 없는 땅입니다. 욕심을 낼때 그 만나에 악취가 나고 벌레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만나로 사는 것이 아닌 오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내 삶의 안정을 위해 살아갑니다. 집을 장만하고, 자녀를 위해 많은 것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선명하던 목자의 음성이, 삶이 안정될수록 왜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것일까요? 하루의 양식이 넉넉해질수록 왜 기도의 절박함은 사라져 가는 것일까요? 아는 것은 많아지고 경험도 깊어지는데 하나님께 무릎 꿇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그러나 양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옛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고, 마음이 굳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현실의 문제를 넘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는 시간이 지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진 사람의 손을 잡아 주고,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함께 걸어 주며, 아직 길을 잡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기르시는 백성의 책임입니다.

셋째 문제는 밖에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8-10)

기적을 보았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마음이 굳어진 것은 기적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기적이 아니라 참된 순종입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그것이 우리가 지금 드려야 할 ‘오늘의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을 주셨다면 우리에겐 오늘을 살아내야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내려 놓아야 합니까? 기도의 중심에 있었던 나만을 위한 날카로운 검, 겸손한 척 포장된 교만, 손과 발은 움직이지만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린 종교적 형식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왜 예수여야만 했는지,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다시 진지하게 그 음성 앞에 서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예배 드리러 올라가는 공동체에게 굳이 광야의 실패를 상기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배하는 자들도 동일한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여전히 완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오늘 너희에게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의 설교 가운데 「거의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이라는 설교문이 있습니다. 웨슬리는 Almost Christian을 겉으로는 신앙의 모든 모양을 갖추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그 은혜가 삶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야 할 예배는 내 삶의 ‘거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거의 다 온 것 같지만, 거의 다 드리는 것 같지만, 거의 다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 같지만 내 전부를 드리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오늘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어제의 양식으로 살 수 없었고, 오늘 주시는 믿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려는 유혹 앞에 서 있었습니다. 끝까지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두드리십시오.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배척받고 조롱받으신 예수께서 그 길을 먼저 걸으셨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드럽게 마음을 열고, 그 길 위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나의 몸은 주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점점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보다,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말에 더 끌립니다.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보다 내 상처를 공감해 주는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편리한 도구가 많아질수록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헌신은 점점 가벼워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13 도리어 여러분은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일의 그날그날 동안에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마음이 완고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히3:13)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고 얻게 되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을 보증해 주지 않습니다. 신실한 성도는 서로가 깨워주고 복음이 치료제가 될수 있도록 서로를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부부도 서로의 정서적 외로움만을 채워주는 관계라면 세상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부부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도록 서로를 깨우고 ‘오늘의 복음’으로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이 시간 지금 이곳은 거룩한 공간입니다. 시편 기자가 전하는 ‘주의 음성을 들으라’는 권면 앞에 더 진지하게 마음에 새기며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닫혀있던 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종의 자리가 어디인지,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나 홀로 씨름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던 것이 무엇입니까?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함께 올라가며 주 앞에 엎드렸습니다. 엎드려 고개를 숙일때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요, 주님께서 우리를 풀밭이 되시고 풍성한 목초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라’로 시작된 시편 95편은 ‘들어가지 못하리라’로 끝이 납니다. 광야 세대에게 닫혔던 그 문이 우리에게는 ‘오늘’로 열려 있습니다. 그 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열어 주셨습니다. 깊고 깊은 땅도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높고 높은 산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바다를 지으신 분, 마른 땅을 손수 빚으신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의 풀밭이 되시고 풍성한 목초가 되어 끝까지 돌보아 주십니다.  이 ‘오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