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스물 한번째 주일)
내 삶에 찾아오신 주님
The Lord Who Comes to My Life
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 성읍에 들어가, 거리를 지나가실 때였다. 2 거기에는 ‘삭개오’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큰 부자였다. 3 삭개오는 예수를 보려고 애썼지만, 키가 작은데다가 사람들에게 떠밀려 예수를 볼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그는 일행을 앞질러 달려가, 길가에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5 일행이 그곳에 이르자, 예수께서 위를 쳐다보시고 삭개오를 부르셨다. “삭개오여! 어서 내려오시오. 오늘은 내가 당신의 집에서 묵어야 하겠소.” 6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크게 기뻐하면서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들였다. 7 이것을 보고서, 사람들이 서로 수군거리며 “아니,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묵으시려고 들어가시다니!” 하고 말했다. 8 삭개오는 일어서서 주님 앞에 이렇게 말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남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9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소. 이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오. 10 보시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이 땅에 왔소.” (쉬운말 성경)
1 Jesus entered Jericho and made his way through the town. 2 There was a man there named Zacchaeus. He was the chief tax collector in the region, and he had become very rich. 3 He tried to get a look at Jesus, but he was too short to see over the crowd. 4 So he ran ahead and climbed a sycamore-fig tree beside the road, for Jesus was going to pass that way.5 When Jesus came by, he looked up at Zacchaeus and called him by name. “Zacchaeus!” he said. “Quick, come down! I must be a guest in your home today.”6 Zacchaeus quickly climbed down and took Jesus to his house in great excitement and joy. 7 But the people were displeased. “He has gone to be the guest of a notorious sinner,” they grumbled.8 Meanwhile, Zacchaeus stood before the Lord and said, “I will give half my wealth to the poor, Lord, and if I have cheated people on their taxes, I will give them back four times as much!”9 Jesus responded, “Salvation has come to this home today, for this man has shown himself to be a true son of Abraham. 10 For the Son of Man[a] came to seek and save those who are lost.”(New Living Translation)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편안한 길로만 안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것을 들으면서도 삭개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보는 편안함을 등지고 불편함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 같습니다. 그 절정이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수군거림 속에는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 라는 타인을 향한 불완전한 자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그 불편함도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절실한 마음에 매일 찾아오십니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캐내며 묵상하다 보면, 각자의 상황속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시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거룩함으로 살아갈 힘이 됩니다.
여리고 성읍에 살던 삭개오는 키가 작고 큰 부자였습니다. 그는 일에 대한 열심으로 재력을 쌓고 세리장까지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세리라는 직업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동족들의 세금을 빼앗고 로마사회를 위해 일하던 세리를 ‘허가받은 도둑’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아마도 삭개오도 삶의 관심이 재물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재산이 늘어나면 늘어 날수록 적지 않는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 속에서 외로웠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받는 정죄감도 고민거리였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은 삭개오를 더 악착같이 현실을 살도록 했을 것이며, 더 깊은 어둠으로 밀어 넣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보고자 할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떠밀려 주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일행들을 앞질러 달려가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기질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보시고 “어서 내려 오시오. 오늘은 내가 당신의 집에서 묵어야 하겠소” 말씀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크게 기뻐하며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결단하고 남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삶의 목적을 변화 시켰을까요? 삶의 관심이 달라지면 실제적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18장에 율법을 잘 지키던 부자 관리와 예수님의 대화를 염두에 둔다면, 그 차이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기 위해 온 부자 관리에게 그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와서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어려서 부터 종교적인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소유와 영생을 바꿀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취급받던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부를 축적하던 삶을 내려놓고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나누고, 속여 빼앗은 것은 네배로 갚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부자 관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영생의 주님을 만난 믿음의 반응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예수님 중심으로 보면서 구원의 과정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삭게오의 집을 찾아가시자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방식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입니다. 예수님은 수군거림을 넘어 삭개오의 집을 찾아 가셨습니다. 18장에 35절도 보면, 여리고에 가까이 도착했을때, 한 소경이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구원을 향한 마음의 절박함입니다. 이때에도 주변의 사람들은 소경을 향해 잠잠하라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소경은 사람들의 시선과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간절한 믿음으로 나아간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영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주님의 구원을 증거해야 할 교회가 마치 스스로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처럼 행하는 연약함에서 비롯됩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볼수 있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과 행위로 구원을 얻는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비롯되며, 구원의 결과는 성도의 삶속에 나눔과 섬김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교회를 평가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그 모든 판단이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세상의 관점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되며, 성경의 기준대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며, 진리 안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조금씩 타협하며 그 경계에 서 있습니다. 믿음과 세상의 즐거움 사이에서 적당히 믿고 살아가고 있고, 미움과 분열, 갈등의 마음 앞에서도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분리하려고 합니다. 세상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하고, 주님의 기쁨을 온전히 구하지도 못한 채 여전히 주님과 세상과의 경계에서 예수님을 멀리에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기준과 틀을 넘어 우리의 마음에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삭개오 본문에서 2가지를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서로를 세워주고 사랑으로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수군거림은 다름이 이해되어 지지 않을때 찾아오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지극히 자연스런 인간의 정서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옛사람이 살아 있는 본성으로 인하여 불편함을 마주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길로 걷게 하시고 믿음의 용기를 내도록 이끄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죄인 중의 죄인인 삭개오를 엄하게 꾸짖고 심판하고 정죄하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들의 수군거림 가운데 삭개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불편함이 찾아올때 무의식적으로 불평의 말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를 믿는 자녀들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에 대한 모든 대가를 지불하시고 다 갚아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응원하는 마음이 될때 자신에게도 새로운 삶이 열려집니다. 하나님 주시는 간증들을 경험하게 되고 서로를 향한 지지와 응원은 공동체를 놀라운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세상은 치열하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성공을 향해 나아가지만 예수님은 말씀에 길들여 지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케 하여 매일 빚으시고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삶의 다른 차원의 목적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시지요?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열두번째 대표선수가 되어 한마음으로 응원했습니다. 그 시간에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가치가 같아서 응원한 것이 아니라 한 민족으로의 지지와 응원이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한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이렇게 구름 떼처럼 수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오늘날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들과 쉽사리 얽혀들게 하는 모든 죄악을 다 떨쳐 버리고, 믿음으로 우리 앞에 놓인 목표를 향해 끝까지 참고 견디며 달려갑시다.”(히 12:1) 믿음의 성도는 홀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신 길입니다. 앞서간 수많은 증인들이 이미 승리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하면 됩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과 그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합니다. 믿음의 길에서 불편함은 잠시이지만 구원은 변하지 않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앞에 보이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온갖 모욕과 수치와 조롱까지 참으시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끝이없고 보장된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이 땅에 왔소.”
삭개오의 집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처럼,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 오십니다. 기쁨을 잃고 삶에 지친 마음, 세상의 수군거림 속에서 상처받은 마음, 외로움에 갇힌 마음, 나만이 아는 완악한 불평의 마음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 마음안에 구원을 향한 절박함을 보시고, 그의 집에 머물러야 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의 집을 죄인의 집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순간 거룩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영생이 보장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나의 자존심과 인생의 목표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무 위에 있었던 삭개오를 내려오게 하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귀한 것을 되찾아 주시는 분입니다. 지금의 이 자리에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도 살피시는 주님께 우리에게 숨겨진 어둠까지도 거룩하고 새롭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아 주시기 위해서 말씀 속에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시험을 받은 순간은 아들 이삭을 바쳐야 했던 모리아 제단에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자리에서 미리 예비하신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은 시험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어둠속 혼돈, 불신과 수군거림은 우리를 어두운 밤으로 인도하지만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을때 성도들은 가장 안전합니다.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라는 찬양의 가사입니다.
“내 아버지 그 품안에서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주 손길로 내 삶을 안으시니 그 평강이 나를 덮습니다. 나 비록 넘어지며 흔들리지만 주 내 안에 거하며 나를 붙드시니 내 생각을 주께로 돌리고
주시는 평강의 옷을 입습니다. 주 약속 안에서 내 영혼 평안해 내 뜻보다 크신 주님의 계획 나 신뢰해 두려움 다 내려놓고 주님만 의지해 주 안에서 내 영혼 안전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품 안에서 안전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주의 성전이 되게 하시며 주님의 약속 안에서 평강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도 내 힘으로 지키려고 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갈 책임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받은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아침의 공기를 마실수 있음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주신 삶과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수많은 문화와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고 책임있는 성도로 살아가는 힘을 주님 안에서 얻어야 합니다. 새 삶은 단순한 자유나 권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말씀 앞에 설때 주시는 깨달음이며,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거룩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이번 한주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깨달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