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주일)
‘그래도’
Do it anyway
요한복음 14:16-18
14:16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분’을 너희에게 보내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하게 하실 것이다. 14: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살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14:18 명심하여라. 나는 너희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꼭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쉬운말 성경)
16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who will never leave you. 17 He is the Holy Spirit, who leads into all truth. The world cannot receive him, because it isn’t looking for him and doesn’t recognize him. But you know him, because he lives with you now and later will be in you. 18 No,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I will come to you.(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당시 유대 전통에 따라 천하 각국에서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각국의 방언으로 말하자, 어떤 이들은 그들을 이상히 여기며 새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은 요엘 선지지를 통해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며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에 지친 마음 위에 주의 권능이 임하고, 낮아진 심령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고아의 아버지’로 알려진 조지 뮬러목사(George Müller, 1805 -1898)의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청소년때 부터 온갖 죄를 다 저지르며 집 보다 많은 시간을 감옥에 오가며 살았습니다. 그런데1825년 11월 뮬러가 스무살이 되던 해, 어느 기도 모임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후 뮬러는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던 하나님이란 도대체 어떤 분이실까? 고민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이후 그의 삶에 대한 태도와 관점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수년간 성경 말씀을 통해 속죄의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이후 뮬러 목사는 1898년 3월 10일 별세할 때까지 60년의 사역을 통해서 수천명의 고아들을 돌보고 한 끼도 굶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역의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뮬러는 “내가 완전히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인정이나 비난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는 다만 나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살아갔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은 그는 단지 고아들의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돌보며,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종종 자기가 죽은 후에도 고아원들이 진부한 인습들에 얽매이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는 고아들에게 남겨진 가장 귀한 유산일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기도해도 평안을 잃을때가 있고, 하나님을 붙들면서도 세상의 가치와 인정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본질이요, 대상입니다. 뮬러에게 하나님은 수천명, 수만명도 먹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내려놓으면 약해질까 두렵지만 하나님 앞에 삶을 맡길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심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안에 짓누르는 죄의 짐 앞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자아가 죽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럴때에 연약한 우리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주시고 시대적인 혼란과 불안을 넘어설 수 있게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믿음의 성도들이 붙들어야 할 신앙의 정체성입니다.
14:16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분’을 너희에게 보내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하게 하실 것이다. 14: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살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14:18 명심하여라. 나는 너희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꼭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하실 일에 대해서 알려 주셨는데 3가지로 정리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또 다른 돕는 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곁에 와서 도와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둘째, 성령은 고아처럼 너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실 분이십니다. 오늘날처럼 변화가 빠른 시대에 ‘영원히’ 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 있습니다. 낯선 이민땅에서 문화적, 언어적, 환경적인 긴장감 속에 점점 작아지는 것만 같은 우리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셋째, 성령은 진리의 영(Spirit of the Truth)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하시며 영(spirit)과 진리(truth)로 예배할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어디서 드려지는 예배가 진짜 예배인지 묻는 여인의 질문에 주님은 장소의 차원이 아니라 성령 안에 거하는 예배(Worship in the Holy Spirit), 진리 안에 거하는 예배(Worship in the truth)를 드릴 때가 온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당시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마와 빌립의 질문만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준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시자, 그때 제자들 중 하나인 도마는 “주님, 우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요 14:5) 빌립도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대답하시며, (요 14:6)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너희가 믿지 못하느냐? 내가 하는 말은 나 자신의 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셨지만, 이제는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너희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된 시대를 살아갑니다. 세상속에서 수없이 무너지고 낙심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분명해질때 세상의 기준과 판단, 그리고 정죄하며 불안해 하는 관계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비난과 정죄의 끝에는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구원자가 되신 사건입니다. 성육신과 부활은 우리의 지식과 논리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능력이 됩니다.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을 회복시킵니다.(엡 4:15)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떠나신다고 하시니 제자들은 두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가 함께 했던 것처럼 성령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며 도우실 것이다라고 약속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안에 내주(內住) 하고 계시는 성령은 때때로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적인 상실감과 거절감 속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핍박속에서도 제자들이 믿음을 지킬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어린아이로 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주를 믿는 이들 가운데 거하시는 진리의 영(Spirit of the Truth)입니다. 죽음의 권세도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고단한 삶의 현실 속에서도 기쁨의 근원이 외적 환경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의 샘처럼 솟아납니다.
바울은 몇 사람에게라도 이 복음이 전해 질수 있다면, 자신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에게는 연약한 자처럼 살았습니다. 우상에 바쳐진 고기도 먹을 수 있었지만 믿음 없는 이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평생 제사 음식을 먹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고 이해받으려 하기보다 이해하는 존재로 살기 위해 성령을 따라 살아간 것입니다.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결박과 핍박이 기다리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성령의 힘으로 주의 길을 따라 갑니다. 성령께서 하늘의 상급을 보게 하셨을 것이고, 바울은 영원한 소망을 지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롬8:15 여러분 꼭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을 또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닙니다. 삶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무감에 따라 행동하는 종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육신대로 살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몸의 행실을 죽여서 우리를 살리는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육신의 감정과 욕망따라 행하다가 오랜 세월 쌓아 둔 믿음의 탑을 허물어 뜨리는 일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믿음의 겉모습은 경건해 보이나 성령의 도우심 없는 삶의 속사람은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고, 결국 기쁨을 잃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거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을 몸을 살리신 하나님께 기뻐하며, 또한 성령으로 인해 죽을 몸 또한 살리실 것을 소망하며 참된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로마서 8:9 ○ 그러나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면, 여러분은 육신에 따르지 않고 성령에 따라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므로 그리스도께 속할 수 없습니다. 8:10 하지만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이지만, 여러분의 영은 의로 인해 살아 있게 됩니다. 8:11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자신의 영 곧 성령으로 인해 여러분의 죽을 몸 또한 살리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고문과 박해를 견딘 힘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함께한 성령님의 권능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성령님은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여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고난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얻게 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앞서지 않으며 내 힘으로 길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 고백은 주 안에 거하는 은혜의 삶을 만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무너지고 실패하는 것 같은 두려움을 숨겨야만 할것 같은 염려에 묶이지 마시고 우리 영혼을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기쁨만이 아니라 실패 안에서의 기쁨을 찾아 가시는 성령강림절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Do it anyway) / 마더 테레사의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래도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래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도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래도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래도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캘커타 어린이 집 ‘쉬슈 브라반’ 벽에 있는 표지판–
우리 삶에 ‘그래도’ (Do it anyway)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결심이나 사람의 마음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중심이 되어 진리와 사랑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지만 성령님의 능력은 우리 마음의 굳어 있던 돌이 은혜 앞에서 부서지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고백이 없습니다. 주를 아는 기쁨으로 감사하며 내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인해 절망 중에도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빚을 안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은 다시 일으켜 세우며 ‘그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막막하지만 이 세상이 감당 못할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기쁨으로 이 길을 함께 걸으시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열번을 깨어지고 무너졌다면 말씀 앞에서는 수 백번을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더 이상 내 힘으로 서려고 하지 않는 철저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굳어진 마음의 돌이 깨어지고 형식적인 신앙과 무관심, 사람들과의 갈등, 세상을 향한 불신, 그리고 우리 안에 숨겨진 상처가 성령님과 함께 울고 또 울며 진리로 이끄시는 회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도’의 믿음은 단순한 결단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붙드는 몸부림입니다. 이 믿음은 어렵고 힘들어서 답을 찾지 못해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도 주님을 붙들겠다는 결단입니다. 비록 어제의 기쁨이 오늘의 근심이 될 지라도 우리는 이 땅의 소망이 아닌, 영원한 소망이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습니다. 성령강림절, 사람들의 비난이 무서웠고 박해가 두려워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했습니다. 불신과 의심, 두려움에 머물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강한 역사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이 능력은 삶 속에서 나 혼자만의 믿음에 갇혀 고립되어 살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떡을 나누며 서로의 연약함을 감추지 않고 아픔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품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