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08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주일)

‘그래도’  

Do it anyway

요한복음 14:16-18

14:16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분’을 너희에게 보내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하게 하실 것이다. 14: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살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14:18 명심하여라. 나는 너희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꼭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쉬운말 성경)

16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who will never leave you. 17 He is the Holy Spirit, who leads into all truth. The world cannot receive him, because it isn’t looking for him and doesn’t recognize him. But you know him, because he lives with you now and later will be in you. 18 No,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I will come to you.(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당시 유대 전통에 따라 천하 각국에서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각국의 방언으로 말하자, 어떤 이들은 그들을 이상히 여기며 새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은 요엘 선지지를 통해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며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에 지친 마음 위에 주의 권능이 임하고, 낮아진 심령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고아의 아버지’로 알려진 조지 뮬러목사(George Müller, 1805 -1898)의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청소년때 부터 온갖 죄를 다 저지르며 집 보다 많은 시간을 감옥에 오가며 살았습니다. 그런데1825년 11월 뮬러가 스무살이 되던 해, 어느 기도 모임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후 뮬러는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던 하나님이란 도대체 어떤 분이실까? 고민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이후 그의 삶에 대한 태도와 관점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수년간 성경 말씀을 통해 속죄의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이후 뮬러 목사는 1898년 3월 10일 별세할 때까지 60년의 사역을 통해서 수천명의 고아들을 돌보고 한 끼도 굶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역의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뮬러는 “내가 완전히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인정이나 비난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는 다만 나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살아갔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은 그는 단지 고아들의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돌보며,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종종 자기가 죽은 후에도 고아원들이 진부한 인습들에 얽매이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는 고아들에게 남겨진 가장 귀한 유산일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기도해도 평안을 잃을때가 있고, 하나님을 붙들면서도 세상의 가치와 인정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본질이요, 대상입니다. 뮬러에게 하나님은 수천명, 수만명도 먹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내려놓으면 약해질까 두렵지만 하나님 앞에 삶을 맡길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심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안에 짓누르는 죄의 짐 앞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자아가 죽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럴때에 연약한 우리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주시고 시대적인 혼란과 불안을 넘어설 수 있게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믿음의 성도들이 붙들어야 할 신앙의 정체성입니다.

14:16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분’을 너희에게 보내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하게 하실 것이다. 14: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살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14:18 명심하여라. 나는 너희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꼭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하실 일에 대해서 알려 주셨는데 3가지로 정리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또 다른 돕는 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곁에 와서 도와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둘째, 성령은 고아처럼 너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실 분이십니다. 오늘날처럼 변화가 빠른 시대에 ‘영원히’ 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 있습니다. 낯선 이민땅에서 문화적, 언어적, 환경적인 긴장감 속에 점점 작아지는 것만 같은 우리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셋째, 성령은 진리의 영(Spirit of the Truth)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하시며 영(spirit)과 진리(truth)로 예배할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어디서 드려지는 예배가 진짜 예배인지 묻는 여인의 질문에 주님은 장소의 차원이 아니라 성령 안에 거하는 예배(Worship in the Holy Spirit), 진리 안에 거하는 예배(Worship in the truth)를 드릴 때가 온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당시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마와 빌립의 질문만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준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시자, 그때 제자들 중 하나인 도마는 “주님, 우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요 14:5) 빌립도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대답하시며, (요 14:6)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너희가 믿지 못하느냐? 내가 하는 말은 나 자신의 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셨지만, 이제는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너희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된 시대를 살아갑니다. 세상속에서 수없이 무너지고 낙심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분명해질때 세상의 기준과 판단, 그리고 정죄하며 불안해 하는 관계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비난과 정죄의 끝에는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구원자가 되신 사건입니다. 성육신과 부활은 우리의 지식과 논리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능력이 됩니다.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을 회복시킵니다.(엡 4:15)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떠나신다고 하시니 제자들은 두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가 함께 했던 것처럼 성령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며 도우실 것이다라고 약속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안에 내주(內住) 하고 계시는 성령은 때때로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적인 상실감과 거절감 속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핍박속에서도 제자들이 믿음을 지킬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어린아이로 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주를 믿는 이들 가운데 거하시는 진리의 영(Spirit of the Truth)입니다. 죽음의 권세도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고단한 삶의 현실 속에서도 기쁨의 근원이 외적 환경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의 샘처럼 솟아납니다.

바울은 몇 사람에게라도 이 복음이 전해 질수 있다면, 자신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에게는 연약한 자처럼 살았습니다. 우상에 바쳐진 고기도 먹을 수 있었지만 믿음 없는 이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평생 제사 음식을 먹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고 이해받으려 하기보다 이해하는 존재로 살기 위해 성령을 따라 살아간 것입니다.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결박과 핍박이 기다리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성령의 힘으로 주의 길을 따라 갑니다. 성령께서 하늘의 상급을 보게 하셨을 것이고, 바울은 영원한 소망을 지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롬8:15 여러분 꼭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을 또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닙니다. 삶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무감에 따라 행동하는 종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육신대로 살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몸의 행실을 죽여서 우리를 살리는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육신의 감정과 욕망따라 행하다가 오랜 세월 쌓아 둔 믿음의 탑을 허물어 뜨리는 일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믿음의 겉모습은 경건해 보이나 성령의 도우심 없는 삶의 속사람은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고, 결국 기쁨을 잃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거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을 몸을 살리신 하나님께 기뻐하며, 또한 성령으로 인해 죽을 몸 또한 살리실 것을 소망하며 참된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로마서 8:9 ○ 그러나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면, 여러분은 육신에 따르지 않고 성령에 따라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므로 그리스도께 속할 수 없습니다. 8:10 하지만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이지만, 여러분의 영은 의로 인해 살아 있게 됩니다. 8:11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자신의 영 곧 성령으로 인해 여러분의 죽을 몸 또한 살리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고문과 박해를 견딘 힘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함께한 성령님의 권능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성령님은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여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고난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얻게 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앞서지 않으며 내 힘으로 길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 고백은 주 안에 거하는 은혜의 삶을 만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무너지고 실패하는 것 같은 두려움을 숨겨야만 할것 같은 염려에 묶이지 마시고 우리 영혼을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기쁨만이 아니라 실패 안에서의 기쁨을 찾아 가시는 성령강림절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Do it anyway) / 마더 테레사의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래도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래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도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래도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래도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캘커타 어린이 집 ‘쉬슈 브라반’ 벽에 있는 표지판

우리 삶에 ‘그래도’ (Do it anyway)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결심이나 사람의 마음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중심이 되어 진리와 사랑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지만 성령님의 능력은 우리 마음의 굳어 있던 돌이 은혜 앞에서 부서지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고백이 없습니다. 주를 아는 기쁨으로 감사하며 내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인해 절망 중에도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빚을 안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은 다시 일으켜 세우며 ‘그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막막하지만 이 세상이 감당 못할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기쁨으로 이 길을 함께 걸으시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열번을 깨어지고 무너졌다면 말씀 앞에서는 수 백번을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더 이상 내 힘으로 서려고 하지 않는 철저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굳어진 마음의 돌이 깨어지고 형식적인 신앙과 무관심, 사람들과의 갈등, 세상을 향한 불신, 그리고 우리 안에 숨겨진 상처가 성령님과 함께 울고 또 울며 진리로 이끄시는 회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도’의 믿음은 단순한 결단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붙드는 몸부림입니다. 이 믿음은 어렵고 힘들어서 답을 찾지 못해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도 주님을 붙들겠다는 결단입니다. 비록 어제의 기쁨이 오늘의 근심이 될 지라도 우리는 이 땅의 소망이 아닌, 영원한 소망이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습니다. 성령강림절, 사람들의 비난이 무서웠고 박해가 두려워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했습니다. 불신과 의심, 두려움에 머물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강한 역사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이 능력은 삶 속에서 나 혼자만의 믿음에 갇혀 고립되어 살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떡을 나누며 서로의 연약함을 감추지 않고 아픔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품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06 01 2025 주일설교

(부활절 제 7주, 승천주일)

주께서 다스리시니

The Lord Reigns!

시편 97:1-5, 10-12

97:1 주께서 다스리시니, 온 땅아, 기뻐하여라. 바다의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97:2 짙은 구름과 흑암이 주님을 에워쌌고, 공의와 공평이 주님 보좌의 기초가 되었도다. 97:3 불이 주님 앞에서 나와, 사방의 적들을 모두 태워 버리는구나. 97:4 주께서 일으키시는 번개가 번쩍번쩍 온 세상을 두루 비추니, 땅이 보고서 무서워 벌벌 떨고, 97:5 산들이 주님 앞에서, 온 땅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서, 양초처럼 녹아내리는구나 …… 97:10 주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여라. 주께서는 신실한 성도들의 영혼을 지켜주시고, 모든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신다. 97:11 의로운 자들에게는 빛이 비추일 것이고,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에게 기쁨이 넘쳐나리라. 97:12 너희 의인들아, 주님을 기뻐하여라.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에 감사를 드려라. (쉬운말 성경)

1 The Lord is king! Let the earth rejoice! Let the farthest coastlands be glad.
2 Dark clouds surround him. Righteousness and justice are the foundation of his throne.
3 Fire spreads ahead of him and burns up all his foes.
4 His lightning flashes out across the world. The earth sees and trembles.
5 The mountains melt like wax before the Lord, before the Lord of all the earth.

10 You who love the Lord, hate evil! He protects the lives of his godly people and rescues them from the power of the wicked.
11 Light shines on the godly, and joy on those whose hearts are right.
12 May all who are godly rejoice in the Lord and praise his holy name!(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부활절 7번째 주일로, 다음주일 부터 성령강림절기가 시작됩니다. 한 철학자가 중력과 은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중력은 아래로 떨어지게 한다. 그러나 은총은 들어 올린다. 은총이 없다면 우리는 오직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세상은 중력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이 걸음마를 하면서 수천번 넘어지는 것도 중력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어릴적부터 걷기 위해서 넘어지고 일어나며 스스로 일어날 힘을 키워갑니다. 장성한 어른이 되어도 인생의 무거운 짐은 마음을 짓누르지만, 소망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줍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말씀과 씨름할때 넘어짐과 일어섬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주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넘어짐을 보셨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스스로 불균형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묵상하며 인생의 넘어짐 속에서도 회복을 경험합니다. 날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 앞에 설때 한 사람의 일생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 앞에 저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1절에서 ‘온 땅아, 기뻐하여라. 바다의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선언하는데, 온땅과 많은 섬들은 이땅의 성도들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눈에 공평하지 않게 보이는 캄캄한 곳, 외딴 섬처럼 고립된 듯 느껴지는 때에도 하나님의 통치는 계속되며, 실패의 자리, 넘어짐의 자리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통치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온 땅이며, 바다의 많은 섬들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97:1 주께서 다스리시니, 온 땅아, 기뻐하여라. 바다의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97:2 짙은 구름과 흑암이 주님을 에워쌌고, 공의와 공평이 주님 보좌의 기초가 되었도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듯한 상황 앞에서 믿음이 무기력해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의 눈에는 그저 부조리하게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짙은 구름과 흑암이 주님을 에워싸고 있어서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의와 공평을 기초삼아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그것을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성경은 그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는 그림 이상의 메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중앙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전에는 중후한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는데, 미켈란젤로가 그린 예수는 근육질의 인간의 몸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 안에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강력한 권위를 가지면서도, 우리를 십자가의 은총과 회복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그날에 주의 의를 따라 살아온 이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셨습니다. 좁은 문 앞에서 은총에만 기대어 머뭇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좁은 길을 주와 함께 걸어 온 이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 에서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죄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자아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갖게 되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자기 자신을 앞세울 가능성—스스로 중심에 있고 싶어할 가능성, 사실상 하나님이 되고 싶어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상관 없는 행복이나 평화를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스스로 중심에 있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매일 성령의 불로 자기 의로움을 소멸시키고, 마음 안에 아집과 교만을 태워가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의 꺼지지 않는 불은 마음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인간의 죄성을 태우시며 양초가 녹듯 우리의 자아를 천천히 녹여 가십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수없이 녹아지고 깨어지며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가게 됩니다. 주의 크신 신비 앞에서 우리는 더 녹아지고 작아지지만 그 삶에 불꽃이 타오르게 됩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다 이해하지 못할때에도 그 길을 신뢰하도록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더 밝히 깨닫게 하십니다.

다윗은 육신의 정욕으로 인해 죄를 짓고 난 후,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난 후에 회복시켜 달라고 했던 기도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는 통회하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스스로 정직한 길로 갈수가 없습니다. 시편 97편은 기뻐하라. 즐거워하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 의로운 자들에게 빛이 비추일 것이고,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에게 기쁨이 넘쳐나리라 고백합니다. 즉 의로운 자들과 마음의 정직함이 연결되어지고, 그 빛은 하나님의 기쁨으로 구체화 됩니다. 다윗이 죄로 인해 무너졌다가 다시 회복될 수 있던 것은 하나님께 나아간 정직한 마음이었습니다.

97:3 불이 주님 앞에서 나와, 사방의 적들을 모두 태워 버리는구나. 97:4 주께서 일으키시는 번개가 번쩍번쩍 온 세상을 두루 비추니, 땅이 보고서 무서워 벌벌 떨고, 97:5 산들이 주님 앞에서, 온 땅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서, 양초처럼 녹아내리는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는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교만과 욕심과 죄를 녹여 주시는 불을 경험해야 합니다. 단순히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말씀 앞에 엎드릴 때 내 안에 있는 죄성이 녹아지고 내 교만과 욕심이 하나님의 불앞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새롭게 하고 존재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사방의 적들이 태워지고 땅이 벌벌 떨며 산들이 주님 앞에서 양초처럼 녹아 내린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삶에 태워져야 할 것이 무엇이며 내가 올라가려고 하는 인생의 높은 산은 무엇입니까? 좋은 직장, 재물과 안정된 삶, 자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와 경쟁심, 내가 쌓은 지식과 믿음과 경험이 자칫 복음의 능력을 가리우는 인생의 높은 산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인생의 평화를 가로 막고 있는 산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더 잘하고자 했던 나의 열심,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고, 높아지려고 했던 마음이 하나님 보다 더 소중한 우상이 되어가지 않도록 날마다 말씀 앞에서 조금씩 내려 놓아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잃어버린 기쁨과 평안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예배의 삶 가운데에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마음 안에 숨겨진 죄된 본성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말씀 앞에서 수없이 엎드려 주어진 삶을 마주할 때 내 안에 죄로 가려진 것들이 벗겨지고 진짜 ‘나’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세상의 우상들이 하나님 앞에서 녹아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은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나의 삶을 내어드릴 때 시작됩니다.

97:6 하늘은 주의 의로우심을 선포하고, 온 세상 사람들은 그분의 영광을 우러러 보도다. 97:7 조각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치욕을 당하고, 헛된 우상을 자랑하는 자들은 모두 다 수치를 당하리라. 모든 신들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경배하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의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능력도 갖게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갈림길에 서게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다고 경고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바람처럼 흔들리고 하나님을 끝까지 붙드는 삶을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이 일로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출 32:28) 북이스라엘 열지파가 금송아지를 단과 벧엘에 만들고 섬겼을 때에도(왕상 12:25-33) 그 끝은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하여 열지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왕하 17:24) 남유다가 결국 망하게 된 것도 왕국말기의 우상숭배가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도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숨어 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선택하고 일상의 무뎌짐속에서 마음과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우상에게 내어줍니다. 감춰진 마음의 우상들이 하나님보다 세상과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고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고 있습니다.

97:10 주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여라. 주께서는 신실한 성도들의 영혼을 지켜 주시고, 모든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신다. 97:11 의로운 자들에게는 빛이 비추일 것이고,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에게 기쁨이 넘쳐나리라. 97:12 너희 의인들아, 주님을 기뻐하여라.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에 감사를 드려라.

하나님의 사랑은 빛과 같아서 마음 안에 어둠을 몰아냅니다.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 안에 악을 더 미워하게 되고,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며 제자들을 직접 찾아가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굳게 잠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는 못 박혔던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도마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찾아가셨습니다. 밤새 허탕을 친 날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그의 실패를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베드로를 또 다시 사명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죄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시작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총은 한 사람이 점점 더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도록 해줍니다.

믿음을 붙들고 살아간다고 해도 항상 평화롭고 평안할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사회적 불평등, 차별과 폭력, 경제적 억압으로 고통 받는 이들로 가득합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면, 마치 외딴 섬에 고립된 듯한 마음이 찾아 올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오직 주의 이름만 붙들 때, 진정한 기쁨이 우리 안에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공평과 공의로 새로운 삶을 살수 있도록 고민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 뜻에 동참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붙드는 진짜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 시대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눈물을 닦아주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무릎 꿇은 기도의 자리에서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능력으로 붙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 위에 인생을 세워갑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숨김없이 드러나는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합니다.

본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의로운 삶을 살라고 촉구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 붙들릴때 삶의 토대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워지게 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고, 그 빛 속에서 진짜 기쁨이 시작됩니다. 이 기쁨은 정직함으로 악의 유혹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땅에 몰입하여 뿌리내릴 때 결국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갑니다. 사탄은 하나님으로 채울수 있는 마음을 정욕으로 땅의 것으로 만족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정직함과 신실함으로 삶의 예배를 세워가야 합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 예배하며 살아갈 때 진정한 주의 나라가 임하는 기쁨을 허락하십니다. 반복되는 일상을 마주하고, 불안한 미래를 끌어안고 살아가더라도, 말씀 안에서 악을 미워하고 선을 따르며, 겸손히 섬기는 삶으로 나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너무 완벽해지기 위해 애쓰는 인생의 짐을 조금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더 깊어지고 더 가까이 함께 성장해 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한 웨슬리의 언약 기도문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이 기도에는 주님의 뜻대로 우리를 사용하시고, 높이시려거든 높이시고 낮추시려거든 낮추어 달라는 깊은 겸손과 순종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언약 기도문 John Wesley’s Covenant Prayer

“주님, 저는 더 이상 저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뜻 가운데, 주님 원하시는 곳에 저를 두소서. 수고의 자리에도 두시고, 고난의 자리에도 두소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물리치기도 하소서. 높이시려거든 높이시고, 낮추시려거든 낮추소서. 저를 채우기도 하시고, 비우기도 하소서. 주님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마음 다해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내어놓습니다. 영광스럽고 복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주님은 저의 것이며,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소서. 제가 이 땅에서 맺은 언약이 하늘에서도 맺어지게 하소서. 아멘.”

요한 웨슬리의 기도문의 고백처럼 주어진 환경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세상이 줄수 없는 진실한 찬양의 기쁨이 넘쳐나야 합니다. 시편 97편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서로가 다른 이해와 믿음의 여정을 넘어서는 평안과 기쁨을 전해줍니다. 때로 인생의 허무함과 두려움에 마음이 흔들릴 때에도, 말씀 안에서 우리 삶을 다스리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들며 오직 한분 하나님만 드러내는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05. 18. 2025 주일설교

(부활절 제 5주)

찬양의 자리로 돌아오라

Return to the place of praise

시편 148 편

1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를 찬양하고, 저 높은 곳에서 주를 찬양하여라. 2 주의 모든 천사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주의 모든 하늘 군대야, 주를 찬양하여라. 3 해와 달아, 주를 찬양하여라. 반짝이는 별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4 가장 높은 하늘 위의 하늘아, 주를 찬양하여라. 하늘 위에 있는 물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5 너희 만물이 주의 명령에 따라 창조되었으니, 모두가 소리 높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6 주께서 명령을 내리시어 너희가 있을 각자의 자리를 거기에 영원히 세워 두셨으니, 너희가 어찌 그 자리를 지키지 않을 수 있으랴! 7 ○ 땅에서도 주를 찬양하여라. 너희 바다의 괴물들과 깊은 바다야, 모두 다 주를 찬양하여라. 8 번개와 우박아, 눈과 구름아, 그리고 주께서 명하신 대로 따르는 세찬 폭풍아, 모두 다 주를 찬양하여라. 9 책모든 산들과 언덕들아, 열매 맺는 과일나무들과 우람한 백향목들아, 주를 찬양하여. 10 모든 들짐승들과 가축들아,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새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11 온 세상의 모든 왕들과 백성들아, 너희 모든 고관들과 재판관들아, 모두 다 주를 찬양하여라. 12 청년들과 처녀들아, 노인들과 아이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13 ○ 너희 모두는 다 함께 주의 이름을 소리 높여 찬양하여라. 오직 그분의 이름만이 홀로 위대하시고, 그분의 드높은 영광이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하도다. 14 주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그 뿔을 한껏 높이셨으니, 그분의 모든 성도들 곧 그분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 높여 주를 찬양함이 마땅하도다. 할렐루야! (쉬운말 성경)

1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from the heavens! Praise him from the skies!
Praise him, all his angels! Praise him, all the armies of heaven!
Praise him, sun and moon! Praise him, all you twinkling stars!
Praise him, skies above! Praise him, vapors high above the clouds!
Let every created thing give praise to the Lord, for he issued his command, and they came into being.
He set them in place forever and ever.  His decree will never be revoked.

Praise the Lord from the earth, you creatures of the ocean depths,
fire and hail, snow and clouds,[a] wind and weather that obey him,
mountains and all hills,fruit trees and all cedars,
10 wild animals and all livestock,small scurrying animals and birds,
11 kings of the earth and all people,rulers and judges of the earth,
12 young men and young women,old men and children.

13 Let them all praise the name of the Lord.For his name is very great;his glory towers over the earth and heaven!
14 He has made his people strong, honoring his faithful ones the people of Israel who are close to him. Praise the Lord!(New Living Translation)

부활절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가 교우들에게 함께하길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시편 148편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며, 천지창조의 순서에 따라 온 하늘과 땅에 있는 피조물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촉구합니다. 1절부터 6절은 하늘의 성가대가 부르는 합창소리와도 같습니다. 시인은 높은 곳에 있는 하늘과 모든 천사들, 해와 달과 별들아, 하늘 위의 하늘아, 하늘 위에 물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7절부터 12절에서는 시인이 눈길을 돌려, 이 땅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에게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모든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13절과 14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혀 줍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질서가 깨어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보다 자기자신의 욕망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깨어진 세상은 돈과 명예, 성공 그리고 자기자신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이라는 고전이 있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작가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 완성한 12권의 위대한 서사시입니다. 어느날 그는 시력을 차츰 차츰 잃어 가다가 44세에 완전히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삶의 목적을 상실한 것과도 같은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밀턴은 그 어둠 속에서 오히려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갈망,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대한 소망을 노래했습니다. 이후 그의 나이 57세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절망의 끝에서 복음을 만났다면 그 사람은 축복받은 인생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도전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마음을 점점 더 갈급하게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이 더 어렵고 불편할 것이라는 유혹들은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을 따라 순종 하기보다는 스스로 인생이 주인이 되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은 인간의 즐거움과 자유를 억압하는 분이실까요? 성경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억압하는 분이 아니라 회복을 주시는 분임을 알수 있습니다. 430년의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고 듣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과는 많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고통스런 환경에 있던 민족을 선택하셨고, 하나님이 먼저 고통 받은 인간에게 찾아 오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찬양할수록 더 자유케 됩니다.

고대사회에서 자연은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자연속에 설명되지 않는 힘에 대한 두려움은 고대인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자연숭배 사상와 썩어질 피조물들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우상으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며 세상 안에 질서를 두셨습니다. 이 질서는 과학과 의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의료기술로 질서가 무너진 인간의 몸을 치료합니다. 창조의 질서는 우주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성경은 이미 수천년 전에 셀수 없을 만큼의 별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천문학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하늘의 별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히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편의 기자들은 이미 꿰뚫어 알고 있던 것 같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별들을 다 세시고 각각의 이름까지 부르신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때, 그 약속의 깊이와 풍성함을 보여 주시기 위해 네 자손이 별처럼 많이 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존재는 우주에 비하면 모래 알갱이 처럼 작고 연약했지만 그가 약속을 믿고 나아갔을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별과 같이 많아지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밤 하늘의 별들이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그 찬양은 인생의 한 밤중에 울려 퍼지는 노래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의 모든 하늘 군대야, 주를 찬양하여라.’라는 구절은 찬양의 대열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빛이 더 빛나는 것처럼 성도는 절망과 탄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에 있는 수천억의 별들에게 각각 이름을 부여 하시고, 어둠속에도 여전히 빛나게 하십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 설때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은 상처 입은 자들의 치유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주가 말씀하시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쳐 쓰러질 때, 때로는 등을 돌려 마음을 닫아둘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리시며 인도하십니다. 세상은 소란스럽고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폭풍속에 흔들리는 배에 탄 것 같아서 불안과 갈등, 두려움으로 가득하지만,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듯 믿음의 흔들림 앞에서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만족과 편안함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 어떤 믿음의 도전과 자기부인없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우리를 변화없는 형식적인 신앙에 갇히게 할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세상 임금 느브갓네살 왕이 자신을 찬양하라고 명령했을 때,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풀무불에 던져질지라도, 우리는 결코 당신에게 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는 찬양받을 분이 없음을 고백한 것이고, 죽음을 무릅쓰고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후 고난의 풀무불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리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시편148편6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명령을 내리시어 너희가 있을 각자의 자리를 거기에 영원히 세워 두셨으니, 너희가 어찌 그 자리를 지키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 모두는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를 되찾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회복의 자리에서 온 마음으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의 방식이 달라도 괜찮습니다. 기쁨의 찬양도 있고, 눈물의 찬양도 있습니다. 승리의 찬양도 주어지지만 탄식의 찬양도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찬양의 대열에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모든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만일 천상의 피조물들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다면, 그래서 궤도가 무질서하게 움직인다면 우주와 지구에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인간은 지구에서 살아 갈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 만물의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습니다. 

매일 아침 해가 뜨고, 생명이 자라나는 것도 하나님의 섬세한 돌보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나침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 삶에 깨어짐과 아픔이 찾아올지라도 다시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깨어짐과 아픈 마음을 변화시키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도록 힘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닿은 사랑의 흔적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이나 고난을 만나더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림 안에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부름받은 존재들입니다. 시대는 변해도 믿음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본이 되는 선배들의 삶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찬양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69장 “온 천하 만물 우러러”는 앗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n Francesco d’Assisi, 1182~1226)가 아픔과 고통을 겪는 중에서도 시편 148편의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찬송가입니다.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다 주를 찬양하여라  저 금빛 나는 밝은 해 저 은빛 나는 밝은 달 하나님을 찬양하라. 힘차게 부는 바람아 떠가는 묘한 구름아 저 돋는 장한 아침, 해가 지는 고운 저녁 놀, 저 흘러가는 맑은 물 다 주를 노래하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는 건강할때나 병들때에나 즐거우나 괴로울때나 부할때나 가난할 때나 평생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시편 148편은 누군가의 간증이나 감동의 스토리가 아닙니다. 찬양하며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부르심 앞에 무엇을 드릴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리고 찬양의 감동과 기쁨을 찾아내기 위해 여전히 애쓰는 사람들에게 시편 148편은 계속해서 찬양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안에 잃어 버린 마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잃은 채로 멈추어 있지 말아야 합니다. 찬양의 기쁨이 회복되도록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통하여 참된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한 청년의 스마트폰 화면에 ‘오직 예수’ 라는 문구를 보았습니다. 그 짧은 고백 앞에서 제 마음을 깊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라고 적혀진 작은 화면속의 문구는 거대한 세상의 물결을 헤치고 나갈 힘과 소망이 강하게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속에서 자신의 믿음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익숙해지면 은혜의 감동도 무뎌짐으로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감당할 영적 힘이 부족한 연약한 존재입니다. 삶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순간을 만나지 못하면 진정한 찬양의 삶은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현혹시키는 우상들이 가득합니다. 그것들은 마치 내 삶의 주인인 것처럼 마음을 빼앗아 가지만 결코 우리를 만족시켜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갈급하고 허전하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기쁨도 어떤 소유도 우리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기쁨이 사라지고 내 열심 조차도 무력하게 느껴지는 그 자리에서 다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아픔의 자리에서 드리는 고백이 상한 영혼을 일으키는 진정한 찬양이 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의 곳곳에서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시편 148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땅 곳곳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일상의 평범한 순간에도 불평이 아닌 감사를 선택하고, 끝까지 사랑하기를 선택하며 우리의 삶 전체가 주를 찬양하는 생명력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삶의 은혜가 식고, 기대가 사라지며, 반복되는 믿음의 여정 속에서 무기력함에 빠져 있었다면 다시 깨어나 찬양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지휘자가 되어 주셔서 그 완벽한 지휘 아래 움직이는 찬양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광대한 우주의 심포니를 지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세심하게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편안한 신앙안에 머무르지 말고 멈추어 있던 곳에서 한발 더 내딛어 매일의 삶 속에서 살아있는 예배를 경험하시는 성도들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5. 11. 2025 주일설교

(어버이주일/ 졸업예배)

주는 나의 목자시니

The Lord is My Shepherd

시편 23: 1-6

23:1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무 부족함이 없도다. 23:2 주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눕히시어 편히 쉬게 하시고, 나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23:3 내 영혼을 생기 넘치게 다시 살리시고, 자기 이름을 위해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다. 23:4 비록 내가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깊숙한 골짜기를 지난다 해도, 내게는 아무 두려움이 없으니, 주께서 항상 내 곁에 계셔서, 권능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잘 보살펴 주시기 때문입니다. 23:5 정녕 주께서는 내 원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내게 풍성한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또한 내 머리에 기름까지 발라주시니, 내 잔이 철철 넘쳐납니다. 23:6 아, 진실로 주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내 평생 나와 항상 함께 하실 터이니, 내가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쉬운말 성경)

1 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all that I need. 2 He lets me rest in green meadows; he leads me beside peaceful streams. 3 He renews my strength. He guides me along right paths, bringing honor to his name. 4 Even when I walk through the darkest valley,[a]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 Your rod and your staff protect and comfort me. 5 You prepare a feast for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honor me by anointing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with blessings. 6 Surely your goodness and unfailing love will pursue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live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 예배를 함께 드립니다. 졸업은 단순히 학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시작입니다. 매일을 살아내며 치열하게 버텨낸 곳을 떠나는 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동역자로, 믿음의 어른으로, 신앙의 격려자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여정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믿음을 지켜 살아갈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다윗도 유다 광야에서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물맷돌을 던지며 훈련을 했을 것입니다. 그 훈련이 없었다면 거인 골리앗의 이마를 돌 하나로 명중시킬수 없었겠지요. 학업과 연구의 현장은 끊임없이 성과를 요구하고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좋은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 손끝에 물집이 생기도록 연습을 해야 했고, 밤낮으로 외로움과 씨름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홀로 남은 연구실은 마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과도 같은 장소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졸업은 수고와 인내의 시간을 다 보내고 평화롭게 지난날을 돌아보며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쌓이고 사랑의 흔적이 가득한 이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떠나 낯선 외국 땅에 와서 만나게 된 우리 모두는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시편 23편은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많이 사용되어 집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인도는 슬픔을 당한 자들을 위로해 줍니다. 저는 시편 23편을 묵상할 때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슬픔의 자리, 고난의 깊은 골짜기,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아픔의 자리가 떠오릅니다. 모두가 다르지만 우리는 꺼내 보이지 못하는 아픔을 품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을 마주해야 하기도 하고, 홀로 있는 자리에서 버티고 견디며 하루를 살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픔의 자리에서 이 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를 만나게 되고, 그 위로가 우리의 삶에 은혜의 간증이 됩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무 부족함이 없도다”라는 구절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입니다. 다윗의 삶을 돌아보면 부족함이 가득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이새에게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기름 부을 왕을 찾으러 왔을 때, 처음엔 다윗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형들은 그를 하찮게 여겼고, 심부름하러 전장에 나간 다윗을 향해 첫째형 엘리압은 교만하다고 오해했습니다. 이후에도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광야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고,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왕궁에서 도망쳐야 하는 고통도 겪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삶은 순탄치 않았지만, 다윗은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무 부족함이 없다’라고 고백합니다. 당시에는 다 이해할수 없는 일들도 지나고 나면 깨닫는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주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눕히시어 편히 쉬게 하시고, 나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현대인들이 쉬지 못하는 이유는 몸은 쉬어도 경쟁사회에서 내 삶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매일 쫓기듯 살아가다 보면, 정서적 피곤함, 마음의 불안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눕히시어’라는 구절은 주께서 우리를 편하게 누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은 몸과 마음이 지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평안으로 이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돌보심의 손길 보다 경쟁의 구조안에서 안식을 놓치며 살아가곤 합니다. 지나친 경쟁심리는 현대인들을 멈추지 않고 달려가게 합니다. 낙오될지 모른다는 불안은 우리를 더 바쁘게 만들지만, 멈추지 않으면 진정한 회복과 안식을 누리기가 어렵습니다.

매일 주어진 일들속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고요히 자신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돌아 볼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인생의 교훈은 성취하는 삶을 통해서도 경험되지만 내려놓음을 통해서도 얻게 됩니다. 젊은날의 아름다움도 소중하지만 나이 들어가며 얻는 성숙함도 귀한 것이겠지요. 삶은 우리에게 앞으로 달려가게 하지만 때때로 말없이 묵묵히 걸어가는 걸음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더 깊이 있는 사람으로 빚어 줍니다.

다윗의 삶은 죽음의 골짜기 같아서 원수의 위협이 그를 둘러 싸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셨음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푸른 풀밭’과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깊숙한 골짜기’라는 대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안식이 얼마나 완전한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권세나 명예로 인해 일시적 만족과 기쁨을 경험할 수는 있겠지만 삶의 진정한 만족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토록 올라가려는 길도 막상 올라가 보면 더 높은 길이 있고, 소유하고 채우는 길도 그 한계가 없습니다. 결국 세상은 우리를 계속 목마른 사람들로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많을 것을 가질수록 잠깐의 안정과 누림의 만족을 얻을 수 있지만 여전히 풍요로움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거 100년 전과 비교하면 훨씬 더 편리하고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과거에 비해 의식주의 문제도 풍요로워 졌고, 스마트 폰의 개발은 우리의 삶에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 폰의 보급은 또 다른 형태의 불안감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노모포비아’란 말이 있습니다. 이 용어는 NO MOBILE POBIA의 준말입니다. 스마트폰을 멈출 때 느끼는 공허감과 불안한 마음을 말하는 용어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 영적인 결핍을 가져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진정한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해 전자기기가 아니라 성경책을 붙들고, 다른 이들이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나의 삶의 길을 차분하게 따라가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우리를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은 목자를 하나님에 비유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고 전했습니다. 에스겔 34장입니다. “34:15 나 주가 말한다. 그때에 내가 손수 내 양 떼의 목자가 되어,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먹이고 눕혀 그들로 편히 쉬게 할 것이다. 34:16 또 그때에 내가 잃어버린 내 양들을 찾고, 길 잃은 내 양들을 다시 데려오며, 다친 내 양들을 싸매어 주고, 병든 내 양들을 튼튼하게 기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 양들을 해치고 못 살게 구는 살찐 양들과 힘센 양들은 내가 다 없앨 것이니, 이렇게 나는 공의에 따라 내 양 떼를 보살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오셔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빗대어 하셨던 배경이 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에스겔 말씀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예수님을 암시해 줍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 희생을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것은 너무도 놀라운 구원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선한목자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시간, 마음이 머무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 되시고 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구원자이시고 우리의 목자이심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졸업생들은 새로운 길을 향해 문을 열게 됩니다. 때로는 그 길에서 갈바를 알지 못해 멈춰야 할때도 있을 것이고, 치열하게 씨름하고 헤쳐 나가야 할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와 두려움속에서도 이길 힘을 주시고 감당할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불안한 미래를 바라보지 마시고 그 과정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가는 목자 없는 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우리를 푸른 풀밭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현실이 편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자나 곰, 이리로 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기를 들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골짜기에서도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위해 지팡이를 들고 계십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생각하며 시편을 묵상하면, 슬픔과 절망은 사라지고 참된 만족함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는 정신을 바짝 차리십시오. 탐욕이 여러분을 좀먹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십시오. 사람의 생명은 그가 가진 재산의 많고 적음에 결코 달려있지 않습니다.”(눅 12:15) 참된 만족함이 의식주의 문제의 해결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만족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부터 옵니다. 히브리어로 ‘푸른 초장’은 단순히 양들이 먹을 수 있는 풀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양이 안전하고 공급받는 풍성한 ‘거주지’를 의미합니다. 자녀에게 부모는 ‘안전한 품’이고 ‘사랑의 품’이 되어 줍니다. 나만을 위해 살아가다가 부모가 되어 보니 사랑스러운 자녀에게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희생과 섬김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교회는 외국에서 공부하며 살아가는 청년들과 교우들에게 단순한 안식처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며 그 사랑을 통해 영적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로 서야 합니다. 양들이 옳은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23:3 내 영혼을 생기 넘치게 다시 살리시고, 자기 이름을 위해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다.

우리는 단순히 높은 곳만을 추구하는 리더가 아니라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알고 걷는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성취감이나 인정받는 것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에서 마주하는 영혼들을 돌보며 책임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삶에서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속에서 크고 작은 불안감으로 부터 위협받기도 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은 지속적으로 찾아 옵니다.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조언하는 능력은 있지만 정작 내 삶을 살아 낼 실력과 힘은 점점 약해져 갑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의 자리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단순한 격려나 위로가 아니라 삶의 고백이 되고 은혜의 간증이 됩니다. 하나님은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여전히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받은 은혜와 축복의 잔이 흘러 넘쳤습니다. 23:5 정녕 주께서는 내 원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내게 풍성한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또한 내 머리에 기름까지 발라주시니, 내 잔이 철철 넘쳐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풍성한 상을 차려 주시는데 우리는 늘 배고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데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만족함을 잃곤 합니다. 하늘의 영광 보다 이땅의 영광만을 추구하다가 정작 하나님의 식탁의 자리로 나아가질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마저 떠나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원수의 목전에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하나님은 예수의 이름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이셨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의 잔에 흘러 넘치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바울은 인생의 고난과 핍박속에서 사명을 지니고 이방인의 사도로 살아갔습니다. 바울은 어둔 감옥에서도 후회가 아니라 감사와 찬양을 불렀고, 그날에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며 끝까지 예수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23:6 아, 진실로 주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내 평생 나와 항상 함께 하실 터이니, 내가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임하는 미래적 은혜는 그날에 베풀어 주실 하나님의 나라의 최후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살아서 호흡하는 동안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이라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은 영원히 함께 할것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밖에서 하루 하루를 애쓰며 살아갑니다. 더 안전한 장소를 찾기 위해 사랑할 시간조차 없이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세상은 사랑해야 할 사람들로 부터 멀리 떨어지라고 유혹합니다. 세상은 내가 베푼대로 그대로 되돌려 받기를 기대합니다. 기다려도 되돌아 오지 않으면 상처 받고, 불편한 마음이 찾아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집은 한결같은 사랑이 넘쳐 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참된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평생 동안 따른다면 우리가 무엇을 염려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사랑은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그의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약과 신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잠언 3장 27절입니다. “3:27 너의 손에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선을 행하도록 하여라.” 로마서 12장 18절입니다. “12:18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 쪽에서 먼저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며 우리의 삶에 맡겨 주신 사람들을 성실히 돌보고 돕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대 폭풍 속을 걷고 있을 때, 비바람을 마주해야 할 때, 불빛조차 보이지 않아도 그대 혼자 걷지 않을거예요.’ 이 찬양의 가사는 인생의 폭풍과 비바람, 외로움 속에서도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신다는 돌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 속해 살아가지만, 가정과 교회 안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현실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힘을 줍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 시편 23편은, 믿는 자들이 걸어가야 할 평생의 여정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씀합니다.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상을 베푸시는 은혜를 선포하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때에도 주님이 함께 걸어가 주신다고 선언합니다. 이 시는 단순히 위로와 격려를 주는 시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삶으로는 진짜 믿음을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복음은 인생의 골짜기를 지날 때, 목자 되시는 주님을 붙드는 믿음의 자리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부족하다 느낀 내 인생에 목자 되시는 주님을 만나서 연약하고 부족한 삶이 감사의 삶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던 삶에서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따르는 삶으로 진정한 변화와 신앙의 성장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어떤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집에 머물고 있음을 믿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과 그가 반드시 상 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히11:6)

주님과 동행하며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서로 기도하고 사랑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믿음의 걸음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주의 인도하심 따라 기뻐하고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에게 기도의 품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504 2025 주일설교

(부활절 제3주)

 진노는 잠깐, 은총은 영원

Anger for a Moment, Grace Forever

시편 30: 5–12

5 그분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분의 은총은 영원하도다. 비록 밤에는 슬피 눈물을 흘렸을지라도, 아침이 되면 기쁨이 흘러넘치리라. 6 내가 잘 나가던 형통의 시절에는 “이제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장담하였지만, 7 오 주여, 나를 어여삐 여기시어 산처럼 크고 든든한 은혜로 나를 지켜주시던 주님께서 그 얼굴을 돌려 나를 외면하시자, 나는 그만 큰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8 그때에 내가 주께 부르짖고, 주의 은혜를 바라며 간구하기를, 9 “주여, 내가 이렇게 죽어, 저 아래 구덩이로 떨어지는 것이 주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죽어, 한 줌의 티끌 된 자가 어떻게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주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널리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10 하오니 주여, 내 간구를 들어 주소서. 이 몸을 어여삐 여겨 주소서. 제발 나를 도와주소서!” 하였더니, 11 그제야 주께서 내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고, 나에게서 통곡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 옷을 입혀 주셨도다. 12 그러므로 내 영혼이 어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이까? 내가 어찌 입 벌려 주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오 주여, 내 하나님이시여, 내가 영원토록 주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리렵니다.(쉬운말 성경)

5 For his anger lasts only a moment, but his favor lasts a lifetime!Weeping may last through the night, but joy comes with the morning.

6 When I was prosperous, I said,“Nothing can stop me now!”
7 Your favor, O Lord, made me as secure as a mountain. Then you turned away from me, and I was shattered.

8 I cried out to you, O Lord. I begged the Lord for mercy, saying,
9 “What will you gain if I die,if I sink into the grave? Can my dust praise you? Can it tell of your faithfulness?
10 Hear me, Lord, and have mercy on me. Help me, O Lord.”

11 You have turned my mourning into joyful dancing.You have taken away my clothes of mourning and clothed me with joy,

12 that I might sing praises to you and not be silent. O Lord my God, I will give you thanks forever!(New Living Translation)

교회력에서 부활절기는 7주간 지속되며, 이 절기를 보내고 나면 성령강림절이 옵니다. 지난주에 비해 한주 사이에도 더 많은 풀들이 자라고 꽃들이 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생명을 지닌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칼빈(John Calvin:1509-1564)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아는 감각이 인간 안에 내재해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멀리하게 만들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한 회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아는 감각을 깨우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정한 시간에 드리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삶의 예배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분의 말씀 앞에 떠는 사람을 찾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은 복음이 필요한 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심각한 질병에서 회복된 것을 기념하는 감사시입니다. 다윗은 6절에서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진술합니다. 30:6 내가 잘 나가던 형통의 시절에는 “이제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장담하였지만, 30:7 오 주여, 나를 어여삐 여기시어 산처럼 크고 든든한 은혜로 나를 지켜주시던 주님께서 그 얼굴을 돌려 나를 외면하시자, 나는 그만 큰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가 번영의 시기에 그 형통함으로 인하여 교만의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제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자기를 과신하는 교만과 자만이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시기를 다윗 통치의 말기로 봅니다. 당시 다윗의 왕권은 견고했고, 그를 위협하던 주변의 적들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번영과 안정이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에도, 다윗은 그것을 자신의 인간적 성취로 착각했습니다. 이처럼 죄는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감각이 무뎌지면, 결국 하나님과의 교제가 멀어지게 됩니다. 다윗의 마음에 교만을 보시고,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 -1963)는 『순전한 기독교』 에서 “교만은 본성이 경쟁적입니다. 그래서 한없이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모든 나라와 가정을 불행하게 만든 주된 원인은 바로 교만입니다. 다른 악들은 그래도 사람들을 맺어 주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여러분은 술 취한 사람들이나 방종한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거나 농담을 주고받거나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언제나 적대감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대감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숨겨진 교만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은 통치 말기에 인구조사를 합니다. 왕이 인구조사를 한 것이 무슨 문제라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가 했던 인구조사는 자기 나라의 국력을 확인해 보고 싶은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후에 그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7만명이나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로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내면에 자만한 마음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교만은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며 하나님을 보여지는 것으로 대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의 교만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인간 안에는 내가 높아져서 인정과 영광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말씀만을 고집하다 보면 이것도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빚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욕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십계명 1, 2계명에 보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것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출애굽기 20:3-4)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주께서는 그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아주 싫어하시므로, 그런 자들은 반드시 주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잠 16:5) “교만은 멸망으로 이끄는 앞잡이요, 거만한 마음은 몰락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잠 16:18). “주께서는 교만한 사람의 집은 사정없이 헐어 버리시지만, 과부의 담장은 튼튼하게 지켜 주신다”(잠 15:25)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가 함께 언급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징계는 상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결국 회복을 위한 길로 이끄시는 사랑입니다. 오히려 죄를 지어도 죄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하나님 징계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인구조사 이후 하나님의 징계에 양심에 가책을 받고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면 자신이 한 줌의 티끌일 뿐임을 깨닫습니다. 1절로 4절에 보면, 그는 죽음에 빠진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울부 짖었고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위기에 처했던 이유가 자신의 죄에 대한 주님의 진노 때문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다윗을 그냥 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푸시고 다윗을 죽을병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모습을 자신이 경험과 삶에 비추어 연결 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릴 적 아버지가 엄하고 무서웠던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더 두려움을 갖는 경향이 있을 것이고, 아버지의 부재 속에 결핍을 경험하며 자란 사람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실감하는 것이 어려울수도 있습니다.

본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30:5 그분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분의 은총은 영원하도다. 비록 밤에는 슬피 눈물을 흘렸을지라도, 아침이 되면 기쁨이 흘러넘치리라.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나 구속적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가요? 우리의 인생에 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고, 얼굴을 돌리신 것 같기도 합니다. 또한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하기도 합니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밤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진노는 끝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때면 하나님의 은총은 짧고,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한 것 같다 여겨지겠지만 다윗의 이 고백은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되는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8절로 12절입니다. 30:8 그때에 내가 주께 부르짖고, 주의 은혜를 바라며 간구하기를, 30:9 “주여, 내가 이렇게 죽어, 저 아래 구덩이로 떨어지는 것이 주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죽어, 한 줌의 티끌 된 자가 어떻게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주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널리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30:10 하오니 주여, 내 간구를 들어 주소서. 이 몸을 어여삐 여겨 주소서. 제발 나를 도와주소서!” 하였더니, 30:11 그제야 주께서 내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고, 나에게서 통곡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 옷을 입혀 주셨도다. 30:12 그러므로 내 영혼이 어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이까? 내가 어찌 입 벌려 주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오 주여, 내 하나님이시여, 내가 영원토록 주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리렵니다.

한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 왔습니다. 불순종은 교만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순종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 안에 자랑 할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을 좀더 낮은데 두시고, 주님의 겸손함을 배워 보시면 좋겠습니다. 복음이 효과적이려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빌립보서의 이 기록을 보시기 바랍니다. “2:2 여러분은 한마음과 한뜻으로,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 행함으로써,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2:3 무슨 일을 하든지, 이기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기십시오. 2:4  무엇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자세를 본받으십시오.”

예수께서 죄인들의 편에 서자 당시 스스로 의롭다 여기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 버린 그들의 외식적인 모습을 드려내셨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복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율법적 행위로 의로워 질수 있었다면 주님께서 인간의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를 위한 구속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이러한 겸손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심으로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주님을 믿는 자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할 때 종종 인간의 분노처럼 감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불안정하거나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함과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공의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본 정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표제어는 ‘성전 봉헌하는 찬양시’입니다. 하지만 성전이 다윗 시대에는 건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 봉헌과 다윗의 시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후대에 시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표제가 붙여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유대인들이 성전을 완공하고 찬양을 불렀던 그들의 심정은, 마치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병고침을 받은 후 다시 살 기회를 얻고 부른 노래와 같았을 것입니다. 죄로 인해 무너졌던 마음의 회복은, 마치 고칠 수 없었던 중병이 의사의 손길을 통해 완전히 치유된 뒤, 밀려오는 깊은 감사와 기쁨을 노래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죽을 병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마음의 성전을 다시 점검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낮과 밤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건강할때와 질병이 찾아올때, 기쁠때나 슬플때, 멈춰야 할때가 있고 나아가야 할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밤의 시간은 절망과 좌절, 답답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로 비유되는 밤의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잠시 동안 그러나 더 큰 긍휼과 자비로 자기 백성을 품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깊은 밤이라도 기쁨의 아침이 오게 됩니다.

현재 내 삶이 고통스러운 밤의 시간이라면 주어진 상황과 환경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바로 그 시간에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흔들리지 않으리라 장담해도 주님이 나를 외면하시면 우리는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 조차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믿음으로 반응할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믿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믿음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은 단순히 은혜의 간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한 살아있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은혜와 사랑은 단지 말과 경험의 고백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었고, 십자가에서의 피흘림으로 남겨진 생명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세상의 유혹의 속삭임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 세상 속에서 거룩함을 선택하는 담대함, 가정과 직장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복음을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치열하게 살아내고, 엎드려 기도로 나아가는 삶이 진정한 복된 삶임을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내 평생 살아온 길 뒤 돌아보니 짧은 내 인생길 오직 주의 은혜라 달려갈 길 모두 마치고 주 얼굴 볼때 나는 공로 전혀 없도다 오직 주의 은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나의 공로를 포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바쁘게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지만 주 얼굴볼때 주앞에 설때 나의 공로 전혀 없음을 고백하게 될텐데, 왜 이렇게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움켜쥐고 갈등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면서도 진정한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로마서 5장 20절은 ” 사실 율법이 더해짐으로써 죄가 더욱 증가되었습니다. 하지만 죄가 많아진 그만큼, 은혜 또한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통해서는 자신의 죄가 드러나고 그 죄가 많아졌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죄보다 더 크다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걷는 걸음이 참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끊임없는 경쟁과 세상의 가치 앞에서 복음을 아는 삶, 복음을 전하는 삶이 외로울지라도 힘써 지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실력이 없기에 반복되는 쓰러짐에 길을 잃어 버릴지라도 값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값진 은혜 앞에서 결단하고, 두렴 없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박우정의 “나의 하나님” 이라는 찬양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참 귀하다 어느 보석보다 귀하다 네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 너를 온전히 사랑하고 너와 함께 하려 내가 왔노라 주의 사랑 이 사랑은 결코 변치 않아 모든 계절 돌보시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신실해 실수가 없으신 주만 바라라 주님의 나라와 뜻이 나의 삶 속에 임하시며  주님 알기를 주만 보기를 소망해 거룩히 살아갈 힘과 두렴 없는 믿음 주실 나의 하나님 완전한 사랑 찬양해”

다윗은 영원토록 주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리겠다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잠시의 기쁨이 아닙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우리를 돌보시고 거룩히 살아갈 힘과 두려움 없는 믿음을 주실 하나님을 찬양함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기뻐할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감사의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은혜의 기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살아냄 속에서 그 은혜를 발견하고, 은혜 받은 자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을 모신 사람들이지만 매 순간 마음을 돌아 보아야만 합니다. 형통하고 평안할 때 일수록 주님을 더 깊이 의지하고 곤고한 날에는 주께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교만과 은혜는 같은 자리에 설 수가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임하고, 겸손한 자에게 허락됩니다. 교회 문을 열고 삶의 자리로 나아가실때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을 남겨두고 가지 않도록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