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18. 2025 주일설교

(부활절 제 5주)

찬양의 자리로 돌아오라

Return to the place of praise

시편 148 편

1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를 찬양하고, 저 높은 곳에서 주를 찬양하여라. 2 주의 모든 천사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주의 모든 하늘 군대야, 주를 찬양하여라. 3 해와 달아, 주를 찬양하여라. 반짝이는 별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4 가장 높은 하늘 위의 하늘아, 주를 찬양하여라. 하늘 위에 있는 물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5 너희 만물이 주의 명령에 따라 창조되었으니, 모두가 소리 높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6 주께서 명령을 내리시어 너희가 있을 각자의 자리를 거기에 영원히 세워 두셨으니, 너희가 어찌 그 자리를 지키지 않을 수 있으랴! 7 ○ 땅에서도 주를 찬양하여라. 너희 바다의 괴물들과 깊은 바다야, 모두 다 주를 찬양하여라. 8 번개와 우박아, 눈과 구름아, 그리고 주께서 명하신 대로 따르는 세찬 폭풍아, 모두 다 주를 찬양하여라. 9 책모든 산들과 언덕들아, 열매 맺는 과일나무들과 우람한 백향목들아, 주를 찬양하여. 10 모든 들짐승들과 가축들아,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새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11 온 세상의 모든 왕들과 백성들아, 너희 모든 고관들과 재판관들아, 모두 다 주를 찬양하여라. 12 청년들과 처녀들아, 노인들과 아이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13 ○ 너희 모두는 다 함께 주의 이름을 소리 높여 찬양하여라. 오직 그분의 이름만이 홀로 위대하시고, 그분의 드높은 영광이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하도다. 14 주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그 뿔을 한껏 높이셨으니, 그분의 모든 성도들 곧 그분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 높여 주를 찬양함이 마땅하도다. 할렐루야! (쉬운말 성경)

1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from the heavens! Praise him from the skies!
Praise him, all his angels! Praise him, all the armies of heaven!
Praise him, sun and moon! Praise him, all you twinkling stars!
Praise him, skies above! Praise him, vapors high above the clouds!
Let every created thing give praise to the Lord, for he issued his command, and they came into being.
He set them in place forever and ever.  His decree will never be revoked.

Praise the Lord from the earth, you creatures of the ocean depths,
fire and hail, snow and clouds,[a] wind and weather that obey him,
mountains and all hills,fruit trees and all cedars,
10 wild animals and all livestock,small scurrying animals and birds,
11 kings of the earth and all people,rulers and judges of the earth,
12 young men and young women,old men and children.

13 Let them all praise the name of the Lord.For his name is very great;his glory towers over the earth and heaven!
14 He has made his people strong, honoring his faithful ones the people of Israel who are close to him. Praise the Lord!(New Living Translation)

부활절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가 교우들에게 함께하길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시편 148편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며, 천지창조의 순서에 따라 온 하늘과 땅에 있는 피조물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촉구합니다. 1절부터 6절은 하늘의 성가대가 부르는 합창소리와도 같습니다. 시인은 높은 곳에 있는 하늘과 모든 천사들, 해와 달과 별들아, 하늘 위의 하늘아, 하늘 위에 물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7절부터 12절에서는 시인이 눈길을 돌려, 이 땅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에게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모든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13절과 14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혀 줍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질서가 깨어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보다 자기자신의 욕망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깨어진 세상은 돈과 명예, 성공 그리고 자기자신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이라는 고전이 있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작가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 완성한 12권의 위대한 서사시입니다. 어느날 그는 시력을 차츰 차츰 잃어 가다가 44세에 완전히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삶의 목적을 상실한 것과도 같은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밀턴은 그 어둠 속에서 오히려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갈망,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대한 소망을 노래했습니다. 이후 그의 나이 57세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절망의 끝에서 복음을 만났다면 그 사람은 축복받은 인생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도전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마음을 점점 더 갈급하게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이 더 어렵고 불편할 것이라는 유혹들은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을 따라 순종 하기보다는 스스로 인생이 주인이 되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은 인간의 즐거움과 자유를 억압하는 분이실까요? 성경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억압하는 분이 아니라 회복을 주시는 분임을 알수 있습니다. 430년의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고 듣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과는 많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고통스런 환경에 있던 민족을 선택하셨고, 하나님이 먼저 고통 받은 인간에게 찾아 오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찬양할수록 더 자유케 됩니다.

고대사회에서 자연은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자연속에 설명되지 않는 힘에 대한 두려움은 고대인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자연숭배 사상와 썩어질 피조물들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우상으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며 세상 안에 질서를 두셨습니다. 이 질서는 과학과 의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의료기술로 질서가 무너진 인간의 몸을 치료합니다. 창조의 질서는 우주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성경은 이미 수천년 전에 셀수 없을 만큼의 별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천문학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하늘의 별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히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편의 기자들은 이미 꿰뚫어 알고 있던 것 같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별들을 다 세시고 각각의 이름까지 부르신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때, 그 약속의 깊이와 풍성함을 보여 주시기 위해 네 자손이 별처럼 많이 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존재는 우주에 비하면 모래 알갱이 처럼 작고 연약했지만 그가 약속을 믿고 나아갔을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별과 같이 많아지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밤 하늘의 별들이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그 찬양은 인생의 한 밤중에 울려 퍼지는 노래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의 모든 하늘 군대야, 주를 찬양하여라.’라는 구절은 찬양의 대열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빛이 더 빛나는 것처럼 성도는 절망과 탄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에 있는 수천억의 별들에게 각각 이름을 부여 하시고, 어둠속에도 여전히 빛나게 하십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 설때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은 상처 입은 자들의 치유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주가 말씀하시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쳐 쓰러질 때, 때로는 등을 돌려 마음을 닫아둘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리시며 인도하십니다. 세상은 소란스럽고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폭풍속에 흔들리는 배에 탄 것 같아서 불안과 갈등, 두려움으로 가득하지만,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듯 믿음의 흔들림 앞에서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만족과 편안함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 어떤 믿음의 도전과 자기부인없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우리를 변화없는 형식적인 신앙에 갇히게 할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세상 임금 느브갓네살 왕이 자신을 찬양하라고 명령했을 때,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풀무불에 던져질지라도, 우리는 결코 당신에게 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는 찬양받을 분이 없음을 고백한 것이고, 죽음을 무릅쓰고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후 고난의 풀무불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리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시편148편6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명령을 내리시어 너희가 있을 각자의 자리를 거기에 영원히 세워 두셨으니, 너희가 어찌 그 자리를 지키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 모두는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를 되찾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회복의 자리에서 온 마음으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의 방식이 달라도 괜찮습니다. 기쁨의 찬양도 있고, 눈물의 찬양도 있습니다. 승리의 찬양도 주어지지만 탄식의 찬양도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찬양의 대열에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모든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만일 천상의 피조물들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다면, 그래서 궤도가 무질서하게 움직인다면 우주와 지구에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인간은 지구에서 살아 갈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 만물의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습니다. 

매일 아침 해가 뜨고, 생명이 자라나는 것도 하나님의 섬세한 돌보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나침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 삶에 깨어짐과 아픔이 찾아올지라도 다시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깨어짐과 아픈 마음을 변화시키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도록 힘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닿은 사랑의 흔적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이나 고난을 만나더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림 안에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부름받은 존재들입니다. 시대는 변해도 믿음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본이 되는 선배들의 삶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찬양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69장 “온 천하 만물 우러러”는 앗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n Francesco d’Assisi, 1182~1226)가 아픔과 고통을 겪는 중에서도 시편 148편의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찬송가입니다.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다 주를 찬양하여라  저 금빛 나는 밝은 해 저 은빛 나는 밝은 달 하나님을 찬양하라. 힘차게 부는 바람아 떠가는 묘한 구름아 저 돋는 장한 아침, 해가 지는 고운 저녁 놀, 저 흘러가는 맑은 물 다 주를 노래하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는 건강할때나 병들때에나 즐거우나 괴로울때나 부할때나 가난할 때나 평생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시편 148편은 누군가의 간증이나 감동의 스토리가 아닙니다. 찬양하며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부르심 앞에 무엇을 드릴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리고 찬양의 감동과 기쁨을 찾아내기 위해 여전히 애쓰는 사람들에게 시편 148편은 계속해서 찬양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안에 잃어 버린 마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잃은 채로 멈추어 있지 말아야 합니다. 찬양의 기쁨이 회복되도록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통하여 참된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한 청년의 스마트폰 화면에 ‘오직 예수’ 라는 문구를 보았습니다. 그 짧은 고백 앞에서 제 마음을 깊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라고 적혀진 작은 화면속의 문구는 거대한 세상의 물결을 헤치고 나갈 힘과 소망이 강하게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속에서 자신의 믿음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익숙해지면 은혜의 감동도 무뎌짐으로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감당할 영적 힘이 부족한 연약한 존재입니다. 삶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순간을 만나지 못하면 진정한 찬양의 삶은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현혹시키는 우상들이 가득합니다. 그것들은 마치 내 삶의 주인인 것처럼 마음을 빼앗아 가지만 결코 우리를 만족시켜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갈급하고 허전하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기쁨도 어떤 소유도 우리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기쁨이 사라지고 내 열심 조차도 무력하게 느껴지는 그 자리에서 다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아픔의 자리에서 드리는 고백이 상한 영혼을 일으키는 진정한 찬양이 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의 곳곳에서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시편 148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땅 곳곳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일상의 평범한 순간에도 불평이 아닌 감사를 선택하고, 끝까지 사랑하기를 선택하며 우리의 삶 전체가 주를 찬양하는 생명력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삶의 은혜가 식고, 기대가 사라지며, 반복되는 믿음의 여정 속에서 무기력함에 빠져 있었다면 다시 깨어나 찬양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지휘자가 되어 주셔서 그 완벽한 지휘 아래 움직이는 찬양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광대한 우주의 심포니를 지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세심하게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편안한 신앙안에 머무르지 말고 멈추어 있던 곳에서 한발 더 내딛어 매일의 삶 속에서 살아있는 예배를 경험하시는 성도들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5. 11. 2025 주일설교

(어버이주일/ 졸업예배)

주는 나의 목자시니

The Lord is My Shepherd

시편 23: 1-6

23:1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무 부족함이 없도다. 23:2 주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눕히시어 편히 쉬게 하시고, 나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23:3 내 영혼을 생기 넘치게 다시 살리시고, 자기 이름을 위해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다. 23:4 비록 내가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깊숙한 골짜기를 지난다 해도, 내게는 아무 두려움이 없으니, 주께서 항상 내 곁에 계셔서, 권능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잘 보살펴 주시기 때문입니다. 23:5 정녕 주께서는 내 원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내게 풍성한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또한 내 머리에 기름까지 발라주시니, 내 잔이 철철 넘쳐납니다. 23:6 아, 진실로 주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내 평생 나와 항상 함께 하실 터이니, 내가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쉬운말 성경)

1 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all that I need. 2 He lets me rest in green meadows; he leads me beside peaceful streams. 3 He renews my strength. He guides me along right paths, bringing honor to his name. 4 Even when I walk through the darkest valley,[a]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 Your rod and your staff protect and comfort me. 5 You prepare a feast for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honor me by anointing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with blessings. 6 Surely your goodness and unfailing love will pursue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live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 예배를 함께 드립니다. 졸업은 단순히 학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시작입니다. 매일을 살아내며 치열하게 버텨낸 곳을 떠나는 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동역자로, 믿음의 어른으로, 신앙의 격려자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여정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믿음을 지켜 살아갈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다윗도 유다 광야에서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물맷돌을 던지며 훈련을 했을 것입니다. 그 훈련이 없었다면 거인 골리앗의 이마를 돌 하나로 명중시킬수 없었겠지요. 학업과 연구의 현장은 끊임없이 성과를 요구하고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좋은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 손끝에 물집이 생기도록 연습을 해야 했고, 밤낮으로 외로움과 씨름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홀로 남은 연구실은 마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과도 같은 장소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졸업은 수고와 인내의 시간을 다 보내고 평화롭게 지난날을 돌아보며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쌓이고 사랑의 흔적이 가득한 이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떠나 낯선 외국 땅에 와서 만나게 된 우리 모두는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시편 23편은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많이 사용되어 집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인도는 슬픔을 당한 자들을 위로해 줍니다. 저는 시편 23편을 묵상할 때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슬픔의 자리, 고난의 깊은 골짜기,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아픔의 자리가 떠오릅니다. 모두가 다르지만 우리는 꺼내 보이지 못하는 아픔을 품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을 마주해야 하기도 하고, 홀로 있는 자리에서 버티고 견디며 하루를 살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픔의 자리에서 이 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를 만나게 되고, 그 위로가 우리의 삶에 은혜의 간증이 됩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무 부족함이 없도다”라는 구절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입니다. 다윗의 삶을 돌아보면 부족함이 가득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이새에게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기름 부을 왕을 찾으러 왔을 때, 처음엔 다윗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형들은 그를 하찮게 여겼고, 심부름하러 전장에 나간 다윗을 향해 첫째형 엘리압은 교만하다고 오해했습니다. 이후에도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광야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고,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왕궁에서 도망쳐야 하는 고통도 겪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삶은 순탄치 않았지만, 다윗은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무 부족함이 없다’라고 고백합니다. 당시에는 다 이해할수 없는 일들도 지나고 나면 깨닫는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주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눕히시어 편히 쉬게 하시고, 나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현대인들이 쉬지 못하는 이유는 몸은 쉬어도 경쟁사회에서 내 삶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매일 쫓기듯 살아가다 보면, 정서적 피곤함, 마음의 불안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눕히시어’라는 구절은 주께서 우리를 편하게 누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은 몸과 마음이 지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평안으로 이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돌보심의 손길 보다 경쟁의 구조안에서 안식을 놓치며 살아가곤 합니다. 지나친 경쟁심리는 현대인들을 멈추지 않고 달려가게 합니다. 낙오될지 모른다는 불안은 우리를 더 바쁘게 만들지만, 멈추지 않으면 진정한 회복과 안식을 누리기가 어렵습니다.

매일 주어진 일들속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고요히 자신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돌아 볼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인생의 교훈은 성취하는 삶을 통해서도 경험되지만 내려놓음을 통해서도 얻게 됩니다. 젊은날의 아름다움도 소중하지만 나이 들어가며 얻는 성숙함도 귀한 것이겠지요. 삶은 우리에게 앞으로 달려가게 하지만 때때로 말없이 묵묵히 걸어가는 걸음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더 깊이 있는 사람으로 빚어 줍니다.

다윗의 삶은 죽음의 골짜기 같아서 원수의 위협이 그를 둘러 싸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셨음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푸른 풀밭’과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깊숙한 골짜기’라는 대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안식이 얼마나 완전한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권세나 명예로 인해 일시적 만족과 기쁨을 경험할 수는 있겠지만 삶의 진정한 만족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토록 올라가려는 길도 막상 올라가 보면 더 높은 길이 있고, 소유하고 채우는 길도 그 한계가 없습니다. 결국 세상은 우리를 계속 목마른 사람들로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많을 것을 가질수록 잠깐의 안정과 누림의 만족을 얻을 수 있지만 여전히 풍요로움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거 100년 전과 비교하면 훨씬 더 편리하고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과거에 비해 의식주의 문제도 풍요로워 졌고, 스마트 폰의 개발은 우리의 삶에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 폰의 보급은 또 다른 형태의 불안감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노모포비아’란 말이 있습니다. 이 용어는 NO MOBILE POBIA의 준말입니다. 스마트폰을 멈출 때 느끼는 공허감과 불안한 마음을 말하는 용어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 영적인 결핍을 가져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진정한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해 전자기기가 아니라 성경책을 붙들고, 다른 이들이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나의 삶의 길을 차분하게 따라가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우리를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은 목자를 하나님에 비유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고 전했습니다. 에스겔 34장입니다. “34:15 나 주가 말한다. 그때에 내가 손수 내 양 떼의 목자가 되어,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먹이고 눕혀 그들로 편히 쉬게 할 것이다. 34:16 또 그때에 내가 잃어버린 내 양들을 찾고, 길 잃은 내 양들을 다시 데려오며, 다친 내 양들을 싸매어 주고, 병든 내 양들을 튼튼하게 기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 양들을 해치고 못 살게 구는 살찐 양들과 힘센 양들은 내가 다 없앨 것이니, 이렇게 나는 공의에 따라 내 양 떼를 보살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오셔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빗대어 하셨던 배경이 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에스겔 말씀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예수님을 암시해 줍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 희생을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것은 너무도 놀라운 구원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선한목자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시간, 마음이 머무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 되시고 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구원자이시고 우리의 목자이심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졸업생들은 새로운 길을 향해 문을 열게 됩니다. 때로는 그 길에서 갈바를 알지 못해 멈춰야 할때도 있을 것이고, 치열하게 씨름하고 헤쳐 나가야 할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와 두려움속에서도 이길 힘을 주시고 감당할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불안한 미래를 바라보지 마시고 그 과정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가는 목자 없는 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우리를 푸른 풀밭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현실이 편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자나 곰, 이리로 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기를 들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골짜기에서도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위해 지팡이를 들고 계십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생각하며 시편을 묵상하면, 슬픔과 절망은 사라지고 참된 만족함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는 정신을 바짝 차리십시오. 탐욕이 여러분을 좀먹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십시오. 사람의 생명은 그가 가진 재산의 많고 적음에 결코 달려있지 않습니다.”(눅 12:15) 참된 만족함이 의식주의 문제의 해결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만족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부터 옵니다. 히브리어로 ‘푸른 초장’은 단순히 양들이 먹을 수 있는 풀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양이 안전하고 공급받는 풍성한 ‘거주지’를 의미합니다. 자녀에게 부모는 ‘안전한 품’이고 ‘사랑의 품’이 되어 줍니다. 나만을 위해 살아가다가 부모가 되어 보니 사랑스러운 자녀에게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희생과 섬김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교회는 외국에서 공부하며 살아가는 청년들과 교우들에게 단순한 안식처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며 그 사랑을 통해 영적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로 서야 합니다. 양들이 옳은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23:3 내 영혼을 생기 넘치게 다시 살리시고, 자기 이름을 위해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다.

우리는 단순히 높은 곳만을 추구하는 리더가 아니라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알고 걷는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성취감이나 인정받는 것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에서 마주하는 영혼들을 돌보며 책임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삶에서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속에서 크고 작은 불안감으로 부터 위협받기도 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은 지속적으로 찾아 옵니다.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조언하는 능력은 있지만 정작 내 삶을 살아 낼 실력과 힘은 점점 약해져 갑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의 자리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단순한 격려나 위로가 아니라 삶의 고백이 되고 은혜의 간증이 됩니다. 하나님은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여전히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받은 은혜와 축복의 잔이 흘러 넘쳤습니다. 23:5 정녕 주께서는 내 원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내게 풍성한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또한 내 머리에 기름까지 발라주시니, 내 잔이 철철 넘쳐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풍성한 상을 차려 주시는데 우리는 늘 배고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데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만족함을 잃곤 합니다. 하늘의 영광 보다 이땅의 영광만을 추구하다가 정작 하나님의 식탁의 자리로 나아가질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마저 떠나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원수의 목전에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하나님은 예수의 이름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이셨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의 잔에 흘러 넘치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바울은 인생의 고난과 핍박속에서 사명을 지니고 이방인의 사도로 살아갔습니다. 바울은 어둔 감옥에서도 후회가 아니라 감사와 찬양을 불렀고, 그날에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며 끝까지 예수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23:6 아, 진실로 주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내 평생 나와 항상 함께 하실 터이니, 내가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임하는 미래적 은혜는 그날에 베풀어 주실 하나님의 나라의 최후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살아서 호흡하는 동안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이라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은 영원히 함께 할것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밖에서 하루 하루를 애쓰며 살아갑니다. 더 안전한 장소를 찾기 위해 사랑할 시간조차 없이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세상은 사랑해야 할 사람들로 부터 멀리 떨어지라고 유혹합니다. 세상은 내가 베푼대로 그대로 되돌려 받기를 기대합니다. 기다려도 되돌아 오지 않으면 상처 받고, 불편한 마음이 찾아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집은 한결같은 사랑이 넘쳐 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참된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평생 동안 따른다면 우리가 무엇을 염려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사랑은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그의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약과 신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잠언 3장 27절입니다. “3:27 너의 손에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선을 행하도록 하여라.” 로마서 12장 18절입니다. “12:18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 쪽에서 먼저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며 우리의 삶에 맡겨 주신 사람들을 성실히 돌보고 돕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대 폭풍 속을 걷고 있을 때, 비바람을 마주해야 할 때, 불빛조차 보이지 않아도 그대 혼자 걷지 않을거예요.’ 이 찬양의 가사는 인생의 폭풍과 비바람, 외로움 속에서도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신다는 돌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 속해 살아가지만, 가정과 교회 안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현실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힘을 줍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 시편 23편은, 믿는 자들이 걸어가야 할 평생의 여정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씀합니다.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상을 베푸시는 은혜를 선포하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때에도 주님이 함께 걸어가 주신다고 선언합니다. 이 시는 단순히 위로와 격려를 주는 시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삶으로는 진짜 믿음을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복음은 인생의 골짜기를 지날 때, 목자 되시는 주님을 붙드는 믿음의 자리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부족하다 느낀 내 인생에 목자 되시는 주님을 만나서 연약하고 부족한 삶이 감사의 삶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던 삶에서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따르는 삶으로 진정한 변화와 신앙의 성장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어떤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집에 머물고 있음을 믿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과 그가 반드시 상 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히11:6)

주님과 동행하며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서로 기도하고 사랑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믿음의 걸음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주의 인도하심 따라 기뻐하고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에게 기도의 품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504 2025 주일설교

(부활절 제3주)

 진노는 잠깐, 은총은 영원

Anger for a Moment, Grace Forever

시편 30: 5–12

5 그분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분의 은총은 영원하도다. 비록 밤에는 슬피 눈물을 흘렸을지라도, 아침이 되면 기쁨이 흘러넘치리라. 6 내가 잘 나가던 형통의 시절에는 “이제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장담하였지만, 7 오 주여, 나를 어여삐 여기시어 산처럼 크고 든든한 은혜로 나를 지켜주시던 주님께서 그 얼굴을 돌려 나를 외면하시자, 나는 그만 큰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8 그때에 내가 주께 부르짖고, 주의 은혜를 바라며 간구하기를, 9 “주여, 내가 이렇게 죽어, 저 아래 구덩이로 떨어지는 것이 주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죽어, 한 줌의 티끌 된 자가 어떻게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주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널리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10 하오니 주여, 내 간구를 들어 주소서. 이 몸을 어여삐 여겨 주소서. 제발 나를 도와주소서!” 하였더니, 11 그제야 주께서 내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고, 나에게서 통곡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 옷을 입혀 주셨도다. 12 그러므로 내 영혼이 어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이까? 내가 어찌 입 벌려 주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오 주여, 내 하나님이시여, 내가 영원토록 주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리렵니다.(쉬운말 성경)

5 For his anger lasts only a moment, but his favor lasts a lifetime!Weeping may last through the night, but joy comes with the morning.

6 When I was prosperous, I said,“Nothing can stop me now!”
7 Your favor, O Lord, made me as secure as a mountain. Then you turned away from me, and I was shattered.

8 I cried out to you, O Lord. I begged the Lord for mercy, saying,
9 “What will you gain if I die,if I sink into the grave? Can my dust praise you? Can it tell of your faithfulness?
10 Hear me, Lord, and have mercy on me. Help me, O Lord.”

11 You have turned my mourning into joyful dancing.You have taken away my clothes of mourning and clothed me with joy,

12 that I might sing praises to you and not be silent. O Lord my God, I will give you thanks forever!(New Living Translation)

교회력에서 부활절기는 7주간 지속되며, 이 절기를 보내고 나면 성령강림절이 옵니다. 지난주에 비해 한주 사이에도 더 많은 풀들이 자라고 꽃들이 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생명을 지닌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칼빈(John Calvin:1509-1564)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아는 감각이 인간 안에 내재해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멀리하게 만들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한 회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아는 감각을 깨우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정한 시간에 드리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삶의 예배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분의 말씀 앞에 떠는 사람을 찾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은 복음이 필요한 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심각한 질병에서 회복된 것을 기념하는 감사시입니다. 다윗은 6절에서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진술합니다. 30:6 내가 잘 나가던 형통의 시절에는 “이제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장담하였지만, 30:7 오 주여, 나를 어여삐 여기시어 산처럼 크고 든든한 은혜로 나를 지켜주시던 주님께서 그 얼굴을 돌려 나를 외면하시자, 나는 그만 큰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가 번영의 시기에 그 형통함으로 인하여 교만의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제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자기를 과신하는 교만과 자만이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시기를 다윗 통치의 말기로 봅니다. 당시 다윗의 왕권은 견고했고, 그를 위협하던 주변의 적들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번영과 안정이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에도, 다윗은 그것을 자신의 인간적 성취로 착각했습니다. 이처럼 죄는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감각이 무뎌지면, 결국 하나님과의 교제가 멀어지게 됩니다. 다윗의 마음에 교만을 보시고,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 -1963)는 『순전한 기독교』 에서 “교만은 본성이 경쟁적입니다. 그래서 한없이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모든 나라와 가정을 불행하게 만든 주된 원인은 바로 교만입니다. 다른 악들은 그래도 사람들을 맺어 주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여러분은 술 취한 사람들이나 방종한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거나 농담을 주고받거나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언제나 적대감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대감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숨겨진 교만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은 통치 말기에 인구조사를 합니다. 왕이 인구조사를 한 것이 무슨 문제라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가 했던 인구조사는 자기 나라의 국력을 확인해 보고 싶은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후에 그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7만명이나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로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내면에 자만한 마음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교만은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며 하나님을 보여지는 것으로 대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의 교만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인간 안에는 내가 높아져서 인정과 영광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말씀만을 고집하다 보면 이것도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빚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욕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십계명 1, 2계명에 보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것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출애굽기 20:3-4)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주께서는 그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아주 싫어하시므로, 그런 자들은 반드시 주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잠 16:5) “교만은 멸망으로 이끄는 앞잡이요, 거만한 마음은 몰락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잠 16:18). “주께서는 교만한 사람의 집은 사정없이 헐어 버리시지만, 과부의 담장은 튼튼하게 지켜 주신다”(잠 15:25)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가 함께 언급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징계는 상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결국 회복을 위한 길로 이끄시는 사랑입니다. 오히려 죄를 지어도 죄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하나님 징계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인구조사 이후 하나님의 징계에 양심에 가책을 받고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면 자신이 한 줌의 티끌일 뿐임을 깨닫습니다. 1절로 4절에 보면, 그는 죽음에 빠진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울부 짖었고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위기에 처했던 이유가 자신의 죄에 대한 주님의 진노 때문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다윗을 그냥 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푸시고 다윗을 죽을병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모습을 자신이 경험과 삶에 비추어 연결 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릴 적 아버지가 엄하고 무서웠던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더 두려움을 갖는 경향이 있을 것이고, 아버지의 부재 속에 결핍을 경험하며 자란 사람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실감하는 것이 어려울수도 있습니다.

본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30:5 그분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분의 은총은 영원하도다. 비록 밤에는 슬피 눈물을 흘렸을지라도, 아침이 되면 기쁨이 흘러넘치리라.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나 구속적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가요? 우리의 인생에 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고, 얼굴을 돌리신 것 같기도 합니다. 또한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하기도 합니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밤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진노는 끝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때면 하나님의 은총은 짧고,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한 것 같다 여겨지겠지만 다윗의 이 고백은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되는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8절로 12절입니다. 30:8 그때에 내가 주께 부르짖고, 주의 은혜를 바라며 간구하기를, 30:9 “주여, 내가 이렇게 죽어, 저 아래 구덩이로 떨어지는 것이 주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죽어, 한 줌의 티끌 된 자가 어떻게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주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널리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30:10 하오니 주여, 내 간구를 들어 주소서. 이 몸을 어여삐 여겨 주소서. 제발 나를 도와주소서!” 하였더니, 30:11 그제야 주께서 내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고, 나에게서 통곡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 옷을 입혀 주셨도다. 30:12 그러므로 내 영혼이 어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이까? 내가 어찌 입 벌려 주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오 주여, 내 하나님이시여, 내가 영원토록 주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리렵니다.

한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 왔습니다. 불순종은 교만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순종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 안에 자랑 할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을 좀더 낮은데 두시고, 주님의 겸손함을 배워 보시면 좋겠습니다. 복음이 효과적이려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빌립보서의 이 기록을 보시기 바랍니다. “2:2 여러분은 한마음과 한뜻으로,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 행함으로써,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2:3 무슨 일을 하든지, 이기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기십시오. 2:4  무엇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자세를 본받으십시오.”

예수께서 죄인들의 편에 서자 당시 스스로 의롭다 여기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 버린 그들의 외식적인 모습을 드려내셨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복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율법적 행위로 의로워 질수 있었다면 주님께서 인간의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를 위한 구속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이러한 겸손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심으로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주님을 믿는 자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할 때 종종 인간의 분노처럼 감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불안정하거나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함과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공의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본 정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표제어는 ‘성전 봉헌하는 찬양시’입니다. 하지만 성전이 다윗 시대에는 건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 봉헌과 다윗의 시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후대에 시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표제가 붙여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유대인들이 성전을 완공하고 찬양을 불렀던 그들의 심정은, 마치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병고침을 받은 후 다시 살 기회를 얻고 부른 노래와 같았을 것입니다. 죄로 인해 무너졌던 마음의 회복은, 마치 고칠 수 없었던 중병이 의사의 손길을 통해 완전히 치유된 뒤, 밀려오는 깊은 감사와 기쁨을 노래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죽을 병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마음의 성전을 다시 점검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낮과 밤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건강할때와 질병이 찾아올때, 기쁠때나 슬플때, 멈춰야 할때가 있고 나아가야 할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밤의 시간은 절망과 좌절, 답답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로 비유되는 밤의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잠시 동안 그러나 더 큰 긍휼과 자비로 자기 백성을 품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깊은 밤이라도 기쁨의 아침이 오게 됩니다.

현재 내 삶이 고통스러운 밤의 시간이라면 주어진 상황과 환경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바로 그 시간에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흔들리지 않으리라 장담해도 주님이 나를 외면하시면 우리는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 조차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믿음으로 반응할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믿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믿음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은 단순히 은혜의 간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한 살아있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은혜와 사랑은 단지 말과 경험의 고백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었고, 십자가에서의 피흘림으로 남겨진 생명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세상의 유혹의 속삭임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 세상 속에서 거룩함을 선택하는 담대함, 가정과 직장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복음을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치열하게 살아내고, 엎드려 기도로 나아가는 삶이 진정한 복된 삶임을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내 평생 살아온 길 뒤 돌아보니 짧은 내 인생길 오직 주의 은혜라 달려갈 길 모두 마치고 주 얼굴 볼때 나는 공로 전혀 없도다 오직 주의 은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나의 공로를 포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바쁘게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지만 주 얼굴볼때 주앞에 설때 나의 공로 전혀 없음을 고백하게 될텐데, 왜 이렇게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움켜쥐고 갈등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면서도 진정한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로마서 5장 20절은 ” 사실 율법이 더해짐으로써 죄가 더욱 증가되었습니다. 하지만 죄가 많아진 그만큼, 은혜 또한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통해서는 자신의 죄가 드러나고 그 죄가 많아졌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죄보다 더 크다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걷는 걸음이 참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끊임없는 경쟁과 세상의 가치 앞에서 복음을 아는 삶, 복음을 전하는 삶이 외로울지라도 힘써 지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실력이 없기에 반복되는 쓰러짐에 길을 잃어 버릴지라도 값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값진 은혜 앞에서 결단하고, 두렴 없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박우정의 “나의 하나님” 이라는 찬양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참 귀하다 어느 보석보다 귀하다 네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 너를 온전히 사랑하고 너와 함께 하려 내가 왔노라 주의 사랑 이 사랑은 결코 변치 않아 모든 계절 돌보시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신실해 실수가 없으신 주만 바라라 주님의 나라와 뜻이 나의 삶 속에 임하시며  주님 알기를 주만 보기를 소망해 거룩히 살아갈 힘과 두렴 없는 믿음 주실 나의 하나님 완전한 사랑 찬양해”

다윗은 영원토록 주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리겠다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잠시의 기쁨이 아닙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우리를 돌보시고 거룩히 살아갈 힘과 두려움 없는 믿음을 주실 하나님을 찬양함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기뻐할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감사의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은혜의 기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살아냄 속에서 그 은혜를 발견하고, 은혜 받은 자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을 모신 사람들이지만 매 순간 마음을 돌아 보아야만 합니다. 형통하고 평안할 때 일수록 주님을 더 깊이 의지하고 곤고한 날에는 주께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교만과 은혜는 같은 자리에 설 수가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임하고, 겸손한 자에게 허락됩니다. 교회 문을 열고 삶의 자리로 나아가실때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을 남겨두고 가지 않도록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04. 27. 2025 주일설교

(부활절 제2주)

주께서는 언제나 내 가까이 오른편에 계시니

The Lord is Always at My Right Hand

시편 16: 8–11

8 내가 항상 주님을 내 앞에 모셔 두고, 주께서는 언제나 내 가까이 오른편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9 그러므로 나의 마음은 한없이 기쁘고 즐거우며, 나의 육체도 소망 가운데서 안전하게 살아갑니다. 10 정녕 주께서는 이 몸을 보호하시어 무덤에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고, 또한 주의 거룩한 자를 무덤에서 썩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11 주께서 내게 참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실 것이니, 주 앞에서 나의 기쁨이 항상 흘러넘칠 것이요, 주 옆에서 나의 즐거움이 영원히 충만할 것입니다. (쉬운말 성경)

8 I know the Lord is always with me. I will not be shaken, for he is right beside me.

9 No wonder my heart is glad, and I rejoice. My body rests in safety.
10 For you will not leave my soul among the dead or allow your holy one to rot in the grave.
11 You will show me the way of life, granting me the joy of your presence and the pleasures of living with you forever. (New Living Translation)

부활절을 지나 꽃이 피어나는 봄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교회 화단 앞에도 튤립과 수선화가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길에서 다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하나님의 섭리와 생명의 힘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함께 묵상할 말씀은 시편 16편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지은 메시야의 예언시로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인용했던 말씀입니다.

10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0 정녕 주께서는 이 몸을 보호하시어 무덤에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고, 또한 주의 거룩한 자를 무덤에서 썩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며 다윗이 먼 미래를 내다보며 한 말씀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증언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가 그 일의 증인이라고 설교합니다. 사도행전 2장 31절, 32절입니다. 2:31 그래서 다윗은 장차 올 일을 미리 내다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분은 무덤 속에 버려지지 않을 것이며, 그분의 몸 또한 썩지 않을 것이다. 32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증인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시편 2편과 본 시편의 구절을 인용하며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우리 조상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셨다고 설교합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로 35절입니다. 13:33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들의 후손인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시편 제2편에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13:34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지 않게 하신 이 사실은, 성경에 ‘내가 다윗에게 약속한 거룩하고도 확실한 복을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13:35 또 다른 시편에도 기록되기를 ‘주님께서는 주님의 거룩하신 분을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 하였습니다. 시편의 예언과 사도들의 증언은 우리에게도 부활의 주님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부활의 믿음은 죽음보다 강한 생명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이 믿음을 증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의 인생에는 위기와 위험의 순간들이 참 많았고,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광야에서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항상’이라는 단어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며 그가 내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16:8) 다윗은 삶과 죽음의 외나무 다리 위를 걸으면서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했을때 하나님은 더욱 더 그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항상’ 그리고 ‘언제나’라는 표현 안에 다윗의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양을 돌보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신다는 보호의 의미를 삶을 통해 배웠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언제나 내 가까이 오른편에 계시니’ 라는 구절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사랑하는 딸의 손을 붙잡고 결혼식장에서 함께 걷는 친정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딸의 손을 사위의 손에 넘겨주는 것은 앞으로 딸을 든든히 지켜주고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또한 험한 세상 마지막까지 보호해 주고 싶은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는 옆이 아니라 뒤에서 든든히 지켜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며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오른편은 하나님의 힘과 보호, 구원과 축복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자로 서 계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주님의 절규는 승리의 선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손을 놓치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 주님의 손쳤을 때에도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강한 손으로 우리를 변함없이 붙잡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새사람으로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이 사랑의 즐거움이 아니고서는 바울과 베드로의 생애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사단이 왕 노릇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항상 위기 가운데 살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즐거움입니다. 성도는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 믿음의 길 위에서 즐거움의 대상이 바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이전에 우리가 살았던 옛삶의 마침을 의미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새사람된 성도는 주님이 여전히 함께 계신다는 참된 믿음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 10:16) 말씀을 하실때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양과 이리의 싸움은 당연히 이리의 승리일 겁니다. 양은 이리보다 느리고, 겁도 많고 약합니다. 양의 입장에서는 위태롭고, 불안하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 세상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연단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여 온전한 즐거움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가면서 ‘나는 언제 믿음을 불들게 되는가’ 라는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문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마주하는 불확실한 삶은 우리의 삶을 흔들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기쁨은 우리에게 불안이 아닌 소망을 전해줍니다. 때때로 우리는 현실 속에서 주님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전의 습관과 삶의 패턴,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참된 믿음으로 이끄시는 연단의 여정 속에서 예수님은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한알의 씨앗이 죽어져야 이를 통해서 뿌리 깊은 곳에서 부터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의 길을 주신 것입니다. 죄의 지배아래 살던 우리를 건져내시고 존귀한 자녀로 삼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속에서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신앙의 여정은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며, 세상 속에 감춰진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하나씩 삶속에서 풀어내며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속에서 믿음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척박한 땅에서도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려, 우리가 평생 붙잡고 가야 할 생명의 말씀을 찾아냅니다.

2025년 2월 5일 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황가람이라는 가수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음악을 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고, 돈을 아끼기 위해 노숙자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꿈을 찾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던 그의 인생에는 드라마틱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돈을 아끼기 위해 건물 옥상에서 자기도 하고, 라디에이터가 켜져 있는 화장실에서 자기도 했답니다. 쓰레기를 모아 생활하고 노숙생활을 하면서 몸무게는 40kg까지 빠지고, 이러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온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벌레 같았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무명의 삶을 벗어나 빛나는 별이 되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벽에 부딪히고, 현실의 어둠을 만나기도 하고, 절망 가운데 있기도 합니다. 스스로 빛이 날거라 기대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빛날수 없었던 존재입니다. 그의 오랜 무명생활은 “나는 반딧불” 이라는 노래를 통해 알려졌고 그의 고통과 눈물의 시간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황가람이 부른 “나는 반딧불” 이라는 노래 가사를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

우리 인생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새 생명을 허락하신 그분 안에서 빛의 자녀인 것을 깨닫는 성도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성공과 실패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믿음의 길을 걷는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주의 자녀들은 빛처럼 세상을 밝히고, 소망의 빛을 품고 살아가는 빛나는 존재입니다. 주님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새하늘과 새땅의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 시민의 명예를 지켜 나가야 합니다.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책임은 믿음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앞서 걸어가신 주님을 따라가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에서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마주하기도 하고, 죄된 본성을 거슬러야 하며, 계획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무너지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말씀을 붙들고 나갈 힘이 부족하다 여겨질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더욱 견고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본 시편은 메시아의 예언시로 우리로 하여금 부활과 영생의 소망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11 주께서 내게 참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실 것이니, 주 앞에서 나의 기쁨이 항상 흘러넘칠 것이요, 주 옆에서 나의 즐거움이 영원히 충만할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을 3가지로 표현합니다. 참된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는 분, 나의 기쁨을 흘러 넘치게 해 주시는 분, 나의 즐거움을 영원히 충만하게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 마음 안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언제나 저 멀리에 있기에 현실은 여전히 흔들림 속에 있습니다. 막막할 때도 있고 잘 해내고 있지 못하는것 같은 마음에 하루에도 몇번씩 자책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주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불안속에 머물러 있는것이 아니라 새 삶을 살아갈 믿음의 용기와 인내의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불안에 흔들리고 상처에 무너지더라도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에서 말하는 화려한 성공이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의 삶의 위기를 변화시키는 능력이며, 비록 그 안에서 느린 걸음일지라도, 분명한 믿음의 발자국이 남겨질 것입니다. 옛것을 잃고, 놓아버린 자리에서, 현실의 유혹 속에서도 우리가 진짜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붙들고 살아 가는가?” 삶에서 진지하게 반복되는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분은 오직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 답이 명확하지 않으니 우리가 씨름하고 반복적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헨리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 ~ 1996)의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 라는 책에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요? 감히 제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 죄 때문에 다 내어 주셨습니다. 거기에 합당한 반응을 찾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주님의 거룩한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노라면 저는 겸손히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수난과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고 주님의 십자가는 소망의 새 징표로 이 세상에 우뚝 섰습니다. 오 주님 십자가 아래 살면서 십자가의 소망을 끊임없이 전파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믿음의 여정에 분명한 소망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들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영원에 이르도록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들리고 주저 앉게 될 때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믿음의 여정은 단순히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위로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 생활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천국의 기쁨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구체적인 실천의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깊이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주님은 우리 모두의 속도에 맞춰가며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해 가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에게 보여주신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완고했던 뜻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풀어가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아픔과 죄의 모습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죄로부터 돌아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압박과 미래를 향한 불안함은 우리를 낙심하게 하지만 부활의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작고 낮은 자리 그리고 여전히 상처 난 자리, 반복적으로 씨름하는 자리에서 믿음의 훈련과 순종을 통하여 부활의 능력이 생명의 길이 되는 부르심의 현장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깊은 영적 기쁨과 부활의 소망은 우리의 삶에서 생명의 능력이 되어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죽은 것 처럼 보였던 꽃이 다시 피어나듯 무감각 했던 우리의 삶과 마음에 참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주 앞의 기쁨과 주의 오른편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며 진정한 생명의 기쁨을 찾아가시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4 20 2025 주일설교

 (부활절 설교/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 설교36)

내가 세상을 이겼다!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1-33

김태환 목사

31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제 너희가 믿느냐? 32 그러나 잘 들어라. 너희가 뿔뿔이 흩어질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이미 그 때가 되었다. 너희는 저마다 자기 집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버려 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33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쉬운성경)

31 Jesus asked, “Do you finally believe? 32 But the time is coming—indeed it’s here now—when you will be scattered, each one going his own way, leaving me alone. Yet I am not alone because the Father is with me. 33 I have told you all this so that you may have peace in me.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New Living Translation)

웨슬리는 1791년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임종 전에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이작 와츠 (Isaac Watts, 1674-1748, 영국)의 찬송가 ‘숨쉬는 동안 나는 창조주를 찬양하리라 (I’ll Praise My Maker While I’ve Breath)’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임종을 지켜보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오늘 요한복음 16장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나게 되겠지만 그 때도 나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엄청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떻게 나를 지켜줄 수 있는지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신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시편 46편 말씀을 한번 보세요. 이 시편은 ‘고라의 자손 (the descendants of Korah)’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므로, 그 성(城)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도우실 것입니다 (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NLT).” (5절) 이 말씀에서 ‘성’은 문자 그대로 ‘castle’ 혹은 ‘city’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이 세상을 그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우리의 산성 (fortress)이신 전능하신 ‘엘 샤다이 (El Shaddai)’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온 종일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나요?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고린도후서 4:17). 이 말씀에서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이란 말과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이란 말을 대조해서 읽어 보세요. 우리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당장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많이 있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된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희망이고, 우리가 가진 믿음입니다 (로마서 8:28).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믿었던 사람들(히브리서 11:27)’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로마서 8:24).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1).

그러면, 예수님이 이기신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그리스어 원문에 ‘코스모스 (κόσμος)’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 속에 다양한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간단하게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영적인 실체 (實體)’를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 ‘마귀’, ‘바알세불’이란 말을 사용하셨고, ‘이 세상의 통치자 (the ruler of this world)’라는 말도 사용하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힘을 가진 존재를 말합니다. 바울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the commander of the powers in the unseen world, NLT, 에베소서 2:2)’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마음을 붙어 넣습니다. 이밖에 ‘이 세상의 신’, ‘속이는 영’, ‘빛의 천사 (고린도후서 11:14)’라는 말도 사용했습니다.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의로운 하나님의 일꾼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사탄은 제자 베드로의 마음에 들어와 마치 예수님을 위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 일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8:32-33). 사탄은 제자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일을 했습니다(요한복음 13:26-28). 이처럼 사탄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짓게 만들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영적인 죽음 (spiritual death)’이라고 합니다.

죄를 히브리어로 ‘하타트(חַטָּאת)’라고 하고, 그리스어로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고 합니다. 모두 ‘과녁에서 빗나가다 (missing the mark)’라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떠난 자기 시대 백성들을 향해서 “우리는 다 (목자를 떠난)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All we like sheep have gone astray. We have turned, every one, to his own way., NKJV, 이사야 53:6, 베드로전서 2:25)”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길을 잃은(astray)’, ‘돌아서다(turn)’, ‘제 자신의 길로(to his own way)’라는 말들은 모두 ‘과녁에서 빗나간’ 죄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들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보면 인생의 목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셨습니까? 어느 책을 읽다가 본 것입니다만,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 미국)가 이런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목적과 방향이 없다면 노력과 용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Efforts and courage are not enough without purpose and direction).” 무조건 열심히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하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만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또,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으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목적이 올바로 설정되지 않으면 그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은 삶의 목적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삶의 목적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유용하고, 고결하며, 동정심을 가지며, 잘 삶으로 말미암아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The pur­pose of life is not to be happy. It is to be useful, honorable, and compassionate, making a difference by living well).” 삶의 목적이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은 삶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참된 삶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고귀한 희생과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산 사람들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한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서른 세 살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1)”라고 기록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을 때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학생이고, 언제까지 청년으로 내 젊음이 계속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 시라도 빨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What on earth am I here for)?” 이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가 잘못된 과녁을 설정하고 우리의 시간과 젊음의 화살을 낭비하도록 우리를 유혹해서 죄의 길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죄에 대하여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6:23에 있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쉬운 말씀 같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wages’는 보통 우리가 ‘임금’, ‘급료(給料)’, ‘대가(代價)’, 혹은 순수한 우리 말로 ‘삯’이라고 해석하잖아요? 하지만, “죄의 삯은 죽음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그 뜻이 금방 들어오지 않지만 ‘wages’라는 말을 ‘대가’로 번역하면 뜻이 금방 들어옵니다. 이 경우 ‘대가’라는 말에 ‘결과(結果)’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혹은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우리를 위협하는 어떤 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고난도, 그 어떤 환난도, 죄의 권세도, 죽음도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담대하여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살아계신 주 (Because He Lives)’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게이더 부부 (William J. & Gloria Gaither)가 가사를 쓰고 작곡을 했습니다. 이 찬양의 후렴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주께서 살아 계시니 내일을 마주할 수 있네).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주께서 살아 계시니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네). Because I know He holds the future (주께서 나의 미래를 주관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내 삶은 살 가치가 있네. 주께서 살아 계신다는 이유만으로). 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그리고, 성경적인 가사입니까?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두려움 없이 내일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 때문에 삶에 의미가 생기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생기고, 삶의 의미와 목적과 이유가 생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당시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들입니다.’…..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여 오히려 기뻐하면서 공의회를 나왔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 뜰에서,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며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내용을 쉬지 않고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5:29-30, 32, 5:41-42).” 이들이 ‘예수님 때문에’ 불안한 내일을 마주할 수 있었고, ‘예수님 때문에’ 고난도 달게 받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살아야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톰 라이트 (N.T. Wright)라는 영국의 성서 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완성하는 사건입니다…..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로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부활절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드러났으며, 이제 당신도 그 나라에 속할 수 있도록 초대받았다는 것입니다 (The resurrection completes the inauguration of God’s kingdom…. It is the decisive event demonstrating that God’s kingdom really has been launched on earth as it is in heaven. The message of Easter is that God’s new world has been unveiled in Jesus Christ and that you’re now invited to belong to it).” —Surprised by Hope: Rethinking Heaven, the Resurrection, and the Mission of the Church (N.T. Wright, 2008)

톰 라이트는 사탄이 패배하고 무력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프로젝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9-13)”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대로, 이제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이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초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이렇게 확장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습니까?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학교에서나 우리가 주어진 일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충실하게 살고, 진리와 거짓이 싸울 때 망설이지 않고 진리 편에 서고, 정의와 불의가 싸울 때는 주저하지 않고 정의 편에 섭니다. 그리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어둠이 있는 곳에는 빛을 밝힙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완성하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초대받은 우리는 나만 위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공동체를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를 구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