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3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5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누가복음 10:25~37

10:25 ○ 하루는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를 떠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26 예수께서 그에게 되물으셨다. “모세의 율법에는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소?” 10:27 그 율법 교사가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10:2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옳소. 그렇게 행하시오. 그리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오.” 10:29 그러자 그 율법 교사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예수께 다시 물었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10:30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소.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몽땅 빼앗은 다음, 그를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놓고 달아났소. 10:31 그때 마침 한 유대인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게 되었소. 그 제사장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얼른 피해서 지나갔소. 10:32 이와 같이 한 레위 사람도 그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도 역시 그대로 지나가 버렸소. 10:33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소. 10:34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그를 태워, 근처 여관으로 데려가서 밤새워 보살펴 주었소. 10:35 다음날, 그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모두 갚아 드리겠소.’ 하고는, 길을 떠났소. 10:36 자, 그렇다면 당신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생각하시오?” 10:37 그 율법 교사가 대답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옳소. 당신도 가서, 그와 같이 행하시오.” (쉬운말 성경)

25 One day an expert in religious law stood up to test Jesus by asking him this question: “Teacher, what should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26 Jesus replied, “What does the law of Moses say? How do you read it?” 27 The man answered, “‘You mu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ll your soul, all your strength, and all your min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28 “Right!” Jesus told him. “Do this and you will live!” 29 The man wanted to justify his actions, so he asked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30 Jesus replied with a story: “A Jewish man was traveling from Jerusalem down to Jericho, and he was attacked by bandits. They stripped him of his clothes, beat him up, and left him half dead beside the road. 31 “By chance a priest came along. But when he saw the man lying there, he crossed to the other side of the road and passed him by. 32 A Temple assistant[d] walked over and looked at him lying there, but he also passed by on the other side. 33 “Then a despised Samaritan came along, and when he saw the man, he felt compassion for him. 34 Going over to him, the Samaritan soothed his wounds with olive oil and wine and bandaged them. Then he put the man on his own donkey and took him to an inn, where he took care of him. 35 The next day he handed the innkeeper two silver coins,[e] telling him, ‘Take care of this man. If his bill runs higher than this, I’ll pay you the next time I’m here.’ 36 “Now which of these three would you say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was attacked by bandits?” Jesus asked. 37 The man replied, “The one who showed him mercy.” Then Jesus said, “Yes, now go and do the same.”(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경강림절기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이번 텍사스 홍수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재지변 앞에 놓인 인간의 무력함을 느낍니다. 가족을 잃고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주의 손길이 실제적 소망으로 전달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고통받고 눈물 흘리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옳다는 것’의 헬라어 디카이오사이: δικαιῶσαι는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29절에 보면, ‘율법 교사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기 위해 질문한 것으로 보여지고, 예수님 앞에서도 율법의 계명을 충분히 지켰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죄된 본성은 우리 안에 잠재된 위험성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옳다고 여기는 의로움을 추구하다가도 자기만의 의에 빠지게 되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율법교사는 성경의 사람들, 율법을 꿰뚫고 있던 사람들이라 불렸으며, 성경을 연구하며 정확하게 해석하려고 애쓰며 생애를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삶의 원칙과 의무로 받아들였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든 율법교사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적대시 했다고 일반화 할수 없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은 주의 뜻을 진지하게 구하기 위해 한밤중에 주님을 찾아 와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다시 태어나는 것의 의미를 궁금해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예수를 환대하고 자신의 집에 초대했던 사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6절에 보면, “그때에 바리새인 중에서 한 사람이 자기와 함께 음식을 들자고 주께 청하니 주께서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하려고 앉으시더라.” 물론 이 바리새인은 주변의 예수를 적대시한 바리새인들로 인해서 예수를 초대하고 대화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언약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즉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우리의 믿음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며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주신 예수님의 시선에서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바라보는 예수님께서 주인공이시고, 그 시대에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구원)이 성취되는 사건을 기록한 증언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묵상할때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주님 앞에 우리가 일꾼으로 순종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마가복음을 읽으면서는 섬기는 종으로 오신 주님처럼 우리의 삶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섬김의 모습을 본 받고 있는지? 누가복음을 읽으면서는 이방인을 환대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묵상할때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 주시며, 주님께서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로 걸어 가도록 인도해 줍니다.

둘째,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삶의 일부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몽땅 빼앗은 다음, 그를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놓고 달아났습니다. 이후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해서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 안에는 강도만난 사람을 바라보는 측은한 마음이 보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마음입니다. 10:34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그를 태워, 근처 여관으로 데려가서 밤새워 보살펴 주었소. 10:35 다음날, 그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모두 갚아 드리겠소.’ 하고는, 길을 떠났소.

비유속의 세 사람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은 시체를 만져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되는 정결례 율법을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워낙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다 보니까 두려움으로 인해서 의도적으로 사고 현장을 피해서 지나갔을까요? 사마리아 사람은 분명히 강도 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꼈고, 강도가 또 다시 출몰할수 있을꺼란 두려움을 떨쳐내고 그를 도와줍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누가 참된 이웃이 되어 줄수 있는가?’의 비유로 뒤흔드셨습니다. 주체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중심적 관점이 아니라 어떻게 참된 이웃이 될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율법교사의 마음에 이웃에 대한 범위가 이미 유대인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이웃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셨습니다.

지난주 예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보내시며 돈이나 양식 자루나 여벌 신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사역을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전통에서 안부를 묻고 인사할 때 포옹하거나 입을 맞추는 관습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사명의 길에서 유대의 전통에 매여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 자비의 마음 그 어느것도 놓쳐서는 안됨을 말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길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고 참된 길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들입니다. 주어진 길을 가면서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시간은 저마다 다르고, 그 시간이 다 한정되어 있습니다. 비유속에 나오는 제사장, 레위사람, 사마리아 사람 모두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거룩함과 부정함을 구분하지 않고, 누가 참된 이웃이 되어 줄수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어떤 직업에 있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실천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임재를 갈망하는 이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속도가 달라도 서로를 성장하게 해주는 서로의 이웃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을 받은 성도는 매일이 새로운 날입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해주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에게 성찰하도록 하는 거울이 되고, 다른 이들을 향해서는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주님의 시야를 열어 줍니다.

2022년 한국일보에 소개된 특별한 생일파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볼티모어에 있는 한 이민자가 운영하는 옷 수선 가게 이야기였습니다. 그 가게의 주 고객들은 대부분 상류층 백인이었습니다. 그 중에 단골인 백인 노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혼자 가게를 찾아와 아내의 70세 생일파티 초대장을 전했다고 합니다. 아내에겐 비밀이니 꼭 와달라는 당부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 친구들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미국인 생일 파티에 몇 번 가본 경험은 있지만, 백인 노부부의 칠순 잔치가 혹여나 낯설면 어쩌나 마음이 쓰였답니다. 파티 날이 되어 갔는데, 그곳에는 평소 이 부부가 자주 이용하던 꽃집, 아이스크림 가게 등 동네 가게 주인들이 함께 초대되어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이름난 백화점이나 고급 상점이 아니라,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소박한 가게들을 삶의 일부로 여기며 이웃처럼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노부부의 남편은 초대 받아 온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내 아내의 삶의 일부입니다.’ 그날의 생일파티는 누군가의 삶을 귀하게 여긴 사랑의 실천이었고, 존중과 환대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이웃됨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사에 적힌 고백이 제 마음을 뭉클하게 해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이민자로 미국에 살면서 몇 번 겪었던 불쾌한 경험을 꺼내 길에다 털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받은 존귀한 경험을 가슴 구석구석에 채워 넣었다. 그것들을 근간으로 우리도 그들의 삶을 닮아가기를 소망했다. 그날의 교훈으로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내면의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또 그것은 우리보다 약한 자 앞에서 교만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었다.’

참된 이웃의 사랑을 경험한 부부는 가슴 구석구석에 그 존귀한 경험을 채워 넣었습니다. 아주 작은 경계가 무너지고 환대와 사랑으로 채워진 특별한 생일 파티는 이민자로 살았던 설움과 불안함과 상처들을 털어 버리게 했습니다. 가볍게 지나간 말 한마디에도 잠 못 이루며 마음이 괴로웠던 시간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찾아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서로의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주셨던 것처럼 서로에게 든든한 이웃이 되어 서로의 삶속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는 불안했던 삶의 근본적인 문제도 사랑으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들이 실천했던 계명의 기준을 더 높이 상향 조정하셨고, 계명의 본질을 내면의 동기까지 확장하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생명의 시작과 마침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은 하루의 시작을 밤으로 보았습니다. 인생의 큰일은 예고없이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주어진 날은 날마다 새날이고, 주님께 보시기에 좋은날입니다. 때때로 현실적인 문제에 갇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잊고 살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소망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인생의 어둠의 터널에 들어서게 되면, 수많은 질문이 찾아 오지만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은 주님께서 인생의 길이 되심을 믿으며 은혜 안에서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빛도 없었고, 공허하며 어두움이었지만 하나님이 영이 머무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인생의 칠흑같은 밤의 시간에도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기반이 무너진 듯, 일어날 힘이 전혀 없을때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며 일어나 빛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걸어가야 합니다. 시편의 말씀을 보면, 139:12 주님 앞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도 전혀 어둡지 않으며, 깜깜한 밤도 대낮처럼 밝을 것입니다. 주님께는 어둠과 빛이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내 삶에 빛이 보이지 않아도 두려움과 낙심에 갇히면 안됩니다. 참된 믿음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도, 어둠속에서 빛이 보이지 않아도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낙심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믿음의 시선은 생명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주신 완전한 길, 그 은혜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 갈수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알려주는 알람과도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이 질문은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날마다 새롭게 부어주시는 주의 복이 시작이 됨을 말해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복음을 나누기 힘쓰는 것은 사명의 자리, 때로는 가난한 마음의 자리로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누며 오직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이웃이 되어 주십니다. 제자의 길은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욕됨과 모욕을 당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영광의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믿음과 삶을 살아내는 실력이 너무나 다른 내 모습을 볼때에 이 모습도 주가 사랑하실까 자신 없는 내 모습 그저 주님앞에 있네. 나같은 자도 사랑하여 주시고 한번도 나를 떠나지 않으셨네 아픔속에 주를 작게 여긴 날 꾸짖지 않으시고 내 손잡아주시네. ‘

믿음과 삶이라는 찬양의 가사입니다. 살아낼 실력이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 속에서도 주앞에 서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의 참된 이웃이 되어 주셨다면 이제 우리도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줄 차례입니다. 익숙한 안전지대를 벗어나 강도 만난 이웃의 곁으로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야 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믿음의 길이 됩니다. 내가 걷고 싶어 걷는 길이 아닌 하나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이고 지금도 여전히 함께 걸어가 주시는 길입니다.  지치고 포기하여 쓰러져 있던 그 자리에 찾아와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힘이 다 빠져버린 저희를 끌어 안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셔서 우리도 누군가의 이웃으로 다시 섭니다. 그 은혜의 회복이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0706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4주)

우리를 부르신 곳에서

The Place Where God Has Called Us

누가복음 10:1-12

1 그 후, 주님은 일흔 제자들을 가려 뽑아 세우신 뒤, 자신이 장차 가시려고 계획한 동네와 마을로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2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너무도 적다. 그러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보다 많은 일꾼을 보내 달라고 하여라. 3 자, 가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구나. 4 너희는 갈 때, 돈이나 양식 자루나 여벌 신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하고 빌어라. 6 평화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평화가 임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면 너희에게로 그 평안이 되돌아올 것이다. 7 어느 마을에 들어가면, 오직 한 집에서만 계속 머물러라. 사양하지 말고, 주인이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제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8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거든, 너희에게 차려 주는 음식은 무엇이나 먹어라. 9 그리고 그 마을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여라. 10 그러나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곳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든, 그 마을의 큰길로 나와서 말하기를, 11 ‘우리는 우리 발에 묻은 너희 마을의 먼지조차도 붙이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하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장차 심판의 날에, 그 마을에 내릴 벌이 옛날 소돔이 받은 벌보다 더 가혹할 것이다.” (쉬운말 성경)

1 The Lord now chose seventy-two other disciples and sent them ahead in pairs to all the towns and places he planned to visit. 2 These were his instructions to them: “The harvest is great, but the workers are few. So pray to the Lord who is in charge of the harvest; ask him to send more workers into his fields. 3 Now go, and remember that I am sending you out as lambs among wolves. 4 Don’t take any money with you, nor a traveler’s bag, nor an extra pair of sandals. And don’t stop to greet anyone on the road. 5 “Whenever you enter someone’s home, first say, ‘May God’s peace be on this house.’ 6 If those who live there are peaceful, the blessing will stand; if they are not, the blessing will return to you. 7 Don’t move around from home to home. Stay in one place, eating and drinking what they provide. Don’t hesitate to accept hospitality, because those who work deserve their pay. 8 “If you enter a town and it welcomes you, eat whatever is set before you. 9 Heal the sick, and tell them, ‘The Kingdom of God is near you now.’ 10 But if a town refuses to welcome you, go out into its streets and say, 11 ‘We wipe even the dust of your town from our feet to show that we have abandoned you to your fate. And know this—the Kingdom of God is near!’ 12 I assure you, even wicked Sodom will be better off than such a town on judgment day.(New Living Translation)

성경강림절기 네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위로가 성도들 마음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에서 양은 인내와 순종, 온유한 성품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양은 사나운 동물로 부터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동물이라 목자를 따라 다닙니다. 반면에 이리와 같은 공격성이 강한 동물은 성질이 사납고 밤에 먹이를 찾아 다닙니다. 먹이사슬 관계로 보면 양은 이리에게 속수무책으로 잡혀 먹히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양이라는 단어로 양의 연약함을 더 부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서 장자의 죽음을 피할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흠 없는 어린양은 죽음의 심판으로 부터 구원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께서 이 땅에 흠이 없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치열한 세상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며 불편함도 겪게 되고, 손해도 보게 되지만 부르심의 자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장소입니다.

1. 우리는 부르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스스로 결정하거나 교회를 나가기로 선택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랍비들의 세계에서는 개인이 랍비를 선택하여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름에 믿음으로 응답한 사람들이 제자의 길을 따랐습니다. 이 부르심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라는 말씀을 믿을때, 우리는 나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신 구원의 감격에 붙들려 살아가게 됩니다. 아무 자격없는 우리를 예수께서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합니다. 만일 그 길을 떠나는 70인의 전도단이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전도를 할까 생각해야 한다면 양이 이리와 싸워서 이길 방법이 없으니 두렵고 걱정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어떤 일을 행하실까? 어떤 일들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생각한다면 주님께서 하실 일들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더 커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흔명의 제자들을 가려 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신중하게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열두제자를 세우실때에도 주님은 밤새 기도하시며 제자들을 신중하게 선택하셨습니다. 70명의 전도단을 보내실 때에도 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둘씩 짝이 되게 하셨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 4:9…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혼자서 애쓰는 것보다는 둘이서 함께 일하고 노력할 때 더욱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4:10 둘이면, 길을 가다가 그중에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얼른 자기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불쌍하게도 그를 일으켜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예수께 훈련받는 70명의 제자들이 서로 짝을 이루었다면, 35개의 팀입니다. 그 중심에 주님이 함께하실 때, 그 관계와 사역은 세 겹 줄처럼 견고해집니다. 주님의 능력이 주어진다면 사람이 흔들수도 없고, 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겹 밧줄은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 교회, 일터의 현장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죄로 인해 무질서 안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 이 땅을 회복시켜 가십니다. 사역의 현장에 일꾼이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으로 결단하면 됩니다. 그런데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기억해야 할 주님의 당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돈이나 양식 자루나 여벌 신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사명의 핵심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하고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당부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라는 의미 보다는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복음을 전하라는 권면입니다. 주님은 사역을 감당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7 어느 마을에 들어가면, 오직 한 집에서만 계속 머물러라. 사양하지 말고, 주인이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제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8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거든, 너희에게 차려 주는 음식은 무엇이나 먹어라.

바울이 선교사역을 끝까지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은 여러 동역자들의 후원과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역을 감당하게 하신 분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주님께 부름을 받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빛을 보고 눈이 멀어 사흘 동안 보지 못한 채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가 보낸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을때 눈에 비늘이 벗겨지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후 바울에게 삶의 우선순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보면, 성령께서 시작하셨습니다. 바울의 자기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장 1절입니다.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따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Ἀπόστολος라는 헬라어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기시고 세례를 주신 후에 ‘보냄을 받은 존재’로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사명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편한 길,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버티고 인내하며 끝까지 맡겨진 임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수많은 인생의 고비마다 무엇을 선택하고 따라가야 할지 매 순간을 고민합니다. 조금 더 잘 살아내고 싶고, 많은 것을 이루고 싶고 지금의 것을 지키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선택 속에서 살아갑니다.

TV 프로그램 ‘크레이지 리치 코리안’이라는 방송에 뉴욕 할렘가의 대모로 불리우는 베티박이라는 분이 소개되었습니다. 할렘가에서 40년째 식당을 하고 있는데, 자수성가해서 리치 코리안이 된 인물입니다. 그녀는 식당을 운영하며 여러 차례 권총 강도 피해도 입었는데, 그 할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믿었던 흑인 직원에게 큰돈을 횡령 당해 피해를 입었을때는 희망이 없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렘가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지역 사회를 돕고 베풀며 자신의 사업을 일궈냈습니다. 그러던 어떤 날 함께 일하던 둘째 아들이 갑작스런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가슴 아픈 사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둘째 아들의 이름으로 그 지역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들어 장학 사업을 하는 것이 소개되었습니다. 힘겨웠던 그 자리를 사랑과 헌신으로 품으며 포기하지 않았더니 그 땅에서 변화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두번째 주님의 당부는 가는 곳마다 평화를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평화입니다. 에이레네(εἰρήνη)라는 단어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는 기쁜 소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했던 사역의 현장은 늘 긴장과 갈등,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사람들에게서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과 치유도 이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세상에는 폭력과 비방, 죽음의 문화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저들과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됩니다. 다툼과 불화가 있는 곳에 주님의 평화를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죽음의 문화를 이길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갈때 죽음도 무력해 집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지만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그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12) 오늘날 분쟁의 시대에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단어를 적으시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세상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잃어가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0장은 ‘그 후’라고 시작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 길로 가는 중에 극단적인 요청을 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신 사건 이후입니다. 그리고 찾아와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제자도를 무장해야 한다고 역설적으로 대답하신 말씀 이후에 이어지는 본문입니다.

요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편한 길이 아닙니다. 세상이 얼마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지 우리는 매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당시 70명의 제자들이 파송받고 들어간 지역은 갈릴리 지방의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예수께서 많은 기적과 권능을 행하신 지역이지만 지역의 사람들이 복음 듣기를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장차 심판의 날에, 그 마을에 내릴 벌이 옛날 소돔이 받은 벌보다 더 가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복음에 응하지 않을 선택이 가능합니다. 회개의 기회를 져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진지하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거부당할 때도 낙심하지 마십시요. 정죄하는 마음보다, 간절히 기도하며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더 느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통당하고 매를 맞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며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가능할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의 마음에 영생에 대한 믿음을 간직했기 때문이고, 성령께서 이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손경민 목사님의 찬양인 가장 귀한 삶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삶이라 하여도 스치듯 지나는 삶이라 하여도 후회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것은 가장 귀한 삶을 앎이라 내가 꿈꾸는 일 이루지 못해도 내가 바라는 것 다 갖지 못해도  낙심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것은 가장 귀한 삶을 삶이라 내가 복음을 알고 복음을 믿고 내가 복음을 전하며 살아간다면 내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고 내가 예수를 전하며 살아간다면 나의 삶은 가장 귀한 삶이라” 때로는 아무도 모르는것 같은 삶, 실패에 주저앉아 포기하려고 했던 그 삶속에도 후회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것이 가장 귀한 삶입니다.

우리는 성경속에서 성공한 영웅들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연약함으로 쓰러지고 있지만 그 연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고 작은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이루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보내진 곳에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2. 부르심에는 헌신과 희생이 따릅니다.

2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너무도 적다. 그러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보다 많은 일꾼을 보내 달라고 하여라. 예수님은 우리를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일꾼은 추수할 일들을 하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실패처럼 보여도 그 자리에 복음이 뿌리 내려집니다.

래디컬의 작가 데이비드 플랫 목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예수를 따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왜 좋은것인지 수많은 질문에 한가지로 대답합니다. “Follow Jesus!”

예수를 믿으면 갑자기 완벽해져서 다시는 죄와 씨름할 일이 없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순간부터 지난날의 라이프 스타일을 단호하게 정리하고 과감히 새로운 생활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크리스천은 말 그대로 죄와 자신(자기중심, 자기소모, 독선과 방종, 자기노력, 자만)에 대해 죽은 존재다. 그리스도가 내면에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든 게 변하기 시작한다… … 마침내는 삶의 이유마저 변한다. 재물과 지위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안락하고 안정적인 생활환경 역시 관심사가 아니다. 자신을 우상으로 삼지 않으므로 안전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명보다 더 갈구하기에 이른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할수록 크리스천이 된다는 게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더 확고하게 깨닫는다. 속지 말라. 개인적으로 어떤 결단을 내렸고, 어떤 기도를 드렸으며, 무슨 카드에 서명을 했고, 몇 년 전 어느 집회에서 손을 들었었는지 등은 예수님과의 관계라든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영적인 지위의 토대가 될 수 없다. 초대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데이비드 플랫-FOLLOW ME 팔로우 미》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부르심의 자리는 내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 안에서 하나 될 때,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을 바로 잡아 주시고 참사랑과 기쁨의 나라를 이뤄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평화를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복음 앞에서 분명히 서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내 삶 안에만 머무르게 된다면 하나님의 일하심보다 사람의 열심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곳은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편하고 힘들고 이해 못하는 길 앞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갈등과 아픔 앞에서 내 상처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제자로서 함께 살아가다보면 서로의 삶을 통해 십자가를 살아내는 복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곳에서 복음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눈물과 기도의 흔적이 담겨 있는 자리에는 갈등과 아픔도 함께하지만 그 아픔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치열하게 부대끼는 삶의 현장에서 비로소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부르심 앞에서 무너졌던 순간, 모든 것을 다 내어 드려야 하는 온전한 순종 앞에서 느낀 불안, 내 안의 분노와 내 안의 상처와 마주하는 그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시작될 것입니다. 편안한 일상 속에 가려졌던 우리의 신앙생활은 위기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지 못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쌓아 둔 신앙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를 부르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신 일상의 자리에서 살아내야 할 시간입니다.

06 25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3주)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I Will Follow the Lord

누가복음 9:51-62

9:51 ○ 예수께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실 때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에 굳게 결심하시고, 52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냈다. 그들은 사마리아 동네에 들어가서 방을 구하려다가 그냥 돌아왔다. 53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54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리게 해서 그들을 태워 버릴까요?” 55 그러자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다. 57 ○ 예수 일행이 길을 가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58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소. 하지만 인자는 머리 누일 곳조차 없소.” 59 또 한 번은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가서, 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60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를 지내게 하고, 당신은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상에 전파하시오.” 61 한번은 또 다른 사람이 예수께 말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집안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62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소.” (쉬운말 성경)

51 As the time drew near for him to ascend to heaven, Jesus resolutely set out for Jerusalem. 52 He sent messengers ahead to a Samaritan village to prepare for his arrival. 53 But the people of the village did not welcome Jesus because he was on his way to Jerusalem. 54 When James and John saw this, they said to Jesus, “Lord, should we call down fire from heaven to burn them up?” 55 But Jesus turned and rebuked them.[k] 56 So they went on to another village. 57 As they were walking along, someone said to Jesus, “I will follow you wherever you go.” 58 But Jesus replied, “Foxes have dens to live in, and birds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s no place even to lay his head.” 59 He said to another person, “Come, follow me.” The man agreed, but he said, “Lord, first let me return home and bury my father.” 60 But Jesus told him, “Let the spiritually dead bury their own dead![l] Your duty is to go and preach about the Kingdom of God.” 61 Another said, “Yes, Lord, I will follow you, but first let me say good-bye to my family.” 62 But Jesus told him, “Anyone who puts a hand to the plow and then looks back is not fit for the Kingdom of God.”(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절기 세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평안이 교우들 마음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The Purpose Driven Life’이라는 책을 아실겁니다. 이 책은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도 번역되었고, 성경적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데 도전을 주었습니다. 40일의 훈련을 통하여, 내면의 상처, 피해의식, 삶의 죄된 습관이 변화되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땅에 교회가 세워진 목적, 예배를 드리는 목적, 주안에서 교제하는 목적이 분명할때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때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에 ‘굳게 결심하시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굳게 결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예루살렘 길은 십자가로 향하는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뜻이었습니다. 그 길은 수난과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간절히 기도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가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 한 마을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숙소를 구하기 위해 일행중 몇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요단강 동편으로 우회해서 가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서 통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와 그 일행들을 배척합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이 분노해서 말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리게 해서 그들을 태워 버릴까요?” 이는 구약의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때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한 것을 떠올리며 사마리아 사람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심판하자고 요청한 것입니다.

54절을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시겠습니다. “이에 그분의 제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목격하자 그들이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께서는 우리가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도록 명령하여 바로 엘리야가 한 것처럼 저들을 소멸시키기를 원하시나이까?” 하였더라.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종교 혼합주의로 인해 경멸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할수 없었고, 대신 그리심 산에 독자적으로 성전을 세워놓고 예배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계속에서 사마리아 사람들 내면에는 피해의식과 분노가 깊이 뿌리 박혀 있어서 유대인들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일부 극단적인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유대인 순례자들을 위협하고 살해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적대적인 분위기속에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극단적인 요청을 들으셨지만, 동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55절 56절을 킹제임스 성경 버전으로 보시겠습니다. 55 그러나 그분께서 돌이키시어 그들을 꾸짖으셨고 이같이 말씀하셨더라. “너희는 어떤 부류의 영이 너희에게 있는지 모르는도다 56 이는 인자가 사람들의 생명들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라.” 그런즉 그들이 또 다른 촌락으로 갔더라. 요한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사랑과 인내의 길을 선택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목적을 잘 몰랐기에 감정에 휘둘려 심판하자는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목적지를 향해가는 여행과도 같습니다. 때로는 가는 길이 막히기도 하고 우회해야 하는 상황도 있지만 목적지만 분명하면 우리가 겪는 거절이 끝은 아닙니다.

예루살렘행은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창조의 목적대로 다시 회복하는 것은 섬김과 낮아짐을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이나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은 우리 안에도 존재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숨막히는 광야, 답답하고 낙심되었던 삶의 순간들이 나를 고통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뤄지게 해달라고 진심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종종 부딪히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 영적 싸움에서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승리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도와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되게 하는 영이고, 성령이 임했을때 사람들은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salvation)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거룩함의 중요성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에 치중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거룩함이 없이 주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히12:14)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거룩함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 또한 가볍지 않습니다. 때때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위기의 순간도 마주합니다. 때로는 그 길에서 많은 눈물과 아픔, 갈등도 있지만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생명의 은혜가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우리는 고난의 시간 앞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주가 걸으신 길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주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현실이 믿음대로 펼쳐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헛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얽매이기 쉬운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한 짐은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어렵게 만듭니다. 때로는 고난이 두려워 등을 돌리기도 했고 성공이 아니면 실패인 것처럼 두려워 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 (James Packer, 1926-2020) 는 ‘거룩의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거룩함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추구하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사적인 면이나 대인관계에서 죄를 대적하며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 거룩한 삶이란 구별된 삶, 즉 하나님을 위해 성별되고 그분의 능력에 의해 내적으로 새롭게 된 삶의 향기이다.’《제임스 패커-거룩의 재발견》

본문에 보면 한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57 “선생님,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58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소. 하지만 인자는 머리 누일 곳조차 없소.”

주께서 머물 곳 없는 이 길을 걸어가신 것은 우리의 짐과 고통을 가볍게 해주시기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믿음의 수천 수만의 앞서간 증인들도 인내로 이 경주를 뛰었고, 지금은 둘러싸서 믿음의 길을 걷는 자들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습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응원하는 승리의 함성으로 주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에는 결심과 포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야 할 길이 결코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편안한 곳, 낙심이 없는 곳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머리 누일 곳 조차 없는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손해 보고 싶지 않고 많은 것을 보장 받고 싶은 삶에서 그것이 약속되지 않고 보장받지 못한다면 나의 기대와 다른 그 길이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는 참 소망을 이미 얻었습니다. 복음은 조율되거나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림 없이 우리에게 찾아온 구원의 삶이며 우리를 소망 가운데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또 다른 제자가 말합니다. “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를 지내게 하고, 당신은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상에 전파하시오.”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주님의 말씀 안에는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절박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이 땅에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땅의 일은 잠시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장례식을 치르며 세상의 아픔과 슬픔속에 멈춰 있을 수 밖에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은 변하지 않으시고 잠시 머무르는 이 땅보다 더 큰 기쁨과 소망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슬픔 앞에서도 하늘 소망을 구하는 것은 주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제자의 말을 들어보실까요?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집안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62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소.”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분명한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방해 요소가 참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메시아 였습니다. 그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이유가 있었겠지요. 표적을 보고 따라온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에만 주목했고, 예수의 제자들 마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정치적인 승리를 가져 오실 분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의 가르침도 자신들의 뜻으로 해석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를 따라가는 길에는 돌아보아야 할것도 많고 챙겨야 할것도 많고 안되는 이유가 가득합니다.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 모든 것을 드리지 못할 것을 알기에 여전히 손에 쥐고 그것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뒤를 돌아보는 내 삶의 안전지대 안에만 서 있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성공도 포기하고 명예도 구하지 말고 자녀를 잘 키워내고자 함도 다 내려놓고 현실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두는 선택을 하며 내 삶의 안전 지대를 벗어나야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내 안의 것을 내려 놓는다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약속과 소망을 붙들겠다는 결단입니다.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는 소망을 가진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상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 건강은 큰 축복이지만, 건강을 직접적이고 주된 목표로 삼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노상 어디가 병들지는 않았나 노심초사하며 까다롭게 살피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받은 교육은 전부 이 세상에 마음을 붙들어 놓는 것들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볼 줄만 안다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바란다는 사실, 그것도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C. S. Lewis 순전한 기독교》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결단은 실패와 낙심의 그림자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담대하게 걸어가는 삶입니다. 성공을 통해서만 인생의 길을 찾아가려고 한다면 실패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가 어렵겠지만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 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겪는 현실속에서 그 뜨거운 눈물과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닫고 그 사랑을 풍성히 누릴수록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능력과 은혜가 우리를 참된 제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 고백은 사람의 계산과 타협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길입니다. 불확실한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분명한 고백이고 결단입니다.

06. 22.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2주)

누가복음 8:26-39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Where Are We Now?

26예수 일행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 호수 맞은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 닿았다. 27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실 때, 그곳에 사는 귀신 들린 사람과 마주쳤다. 이 사람은 오랫동안 귀신에게 사로잡혀, 옷도 입지 않고 집도 없이,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28 그는 예수를 보자 비명을 지르며 예수 앞에 엎드리더니 크게 외쳤다. “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저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29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그를 단단히 묶어 놓아도, 그 사람은 수시로 귀신에게 강하게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끊어 버리고 광야로 뛰쳐나가곤 했다.) 30 예수께서 그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들이 대답했다. “군대입니다.” 마치 군대처럼, 수많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31 귀신들은 지금 당장은 자기들을 지옥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께 계속 빌었다. 32 ○ 마침, 그곳과 가까운 산기슭에 놓아기르는 돼지 떼가 있었다. 귀신들이 그 돼지 떼를 보고,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33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우르르 몰려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들이 갑자기 산비탈을 내리달리더니, 몽땅 호수에 빠져죽고 말았다. 34 이 광경을 보고, 돼지 치던 사람들이 가까운 읍내와 마을을 다니면서 그 사실을 알리고 다녔다. 35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나왔다가, 귀신 들렸던 그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하게 예수의 발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모두 크게 겁에 질렸다. 36 그동안의 일을 처음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들이 나서서, 그 귀신 들린 자가 어떻게 치유를 받게 되었는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37 그러자 거라사 인근의 모든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예수께 그곳을 떠나 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떠나시려고 배에 오르셨다. 38 귀신 들렸던 사람이 자신도 함께 따라가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셨다. 39 “당신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베푸셨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주시오.” 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 뒤,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예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크고 놀라운 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낱낱이 알렸다. (쉬운말 성경)

26 So they arrived in the region of the Gerasenes,[c] across the lake from Galilee. 27 As Jesus was climbing out of the boat, a man who was possessed by demons came out to meet him. For a long time he had been homeless and naked, living in the tombs outside the town.28 As soon as he saw Jesus, he shrieked and fell down in front of him. Then he screamed, “Why are you interfering with me, Jesus, Son of the Most High God? Please, I beg you, don’t torture me!” 29 For Jesus had already commanded the evil[d] spirit to come out of him. This spirit had often taken control of the man. Even when he was placed under guard and put in chains and shackles, he simply broke them and rushed out into the wilderness, completely under the demon’s power.30 Jesus demanded, “What is your name?”“Legion,” he replied, for he was filled with many demons. 31 The demons kept begging Jesus not to send them into the bottomless pit.32 There happened to be a large herd of pigs feeding on the hillside nearby, and the demons begged him to let them enter into the pigs.So Jesus gave them permission. 33 Then the demons came out of the man and entered the pigs, and the entire herd plunged down the steep hillside into the lake and drowned.34 When the herdsmen saw it, they fled to the nearby town and the surrounding countryside, spreading the news as they ran. 35 People rushed out to see what had happened. A crowd soon gathered around Jesus, and they saw the man who had been freed from the demons. He was sitting at Jesus’ feet, fully clothed and perfectly sane, and they were all afraid. 36 Then those who had seen what happened told the others how the demon-possessed man had been healed. 37 And all the people in the region of the Gerasenes begged Jesus to go away and leave them alone, for a great wave of fear swept over them.So Jesus returned to the boat and left, crossing back to the other side of the lake. 38 The man who had been freed from the demons begged to go with him. But Jesus sent him home, saying, 39 “No, go back to your family, and tell them everything God has done for you.” So he went all through the town proclaiming the great things Jesus had done for him.(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절기 두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평안이 교우들 마음에 가득하길 바랍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삶과 성령 없이 사는 삶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삶의 자리를 말씀에 맡깁니다. 성령은 굳어진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영적인 생각을 하고,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양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비한 체험을 하고, 은사를 받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될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성도들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면, 여러분은 육신에 따르지 않고 성령에 따라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므로 그리스도께 속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살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도 그리스도께 속하면 다른 차원에서 바로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믿음이 자라가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주의 말씀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인생을 설계하는 수많은 세상의 이론 가운데에서 가장 확실한 이론은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이론일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을 거룩한 삶의 자리로 이끕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때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인 거라사 지역은 팔레스타인 땅 경계에 가까웠던 이방인들이 살던 지역입니다. 그 마을에 악한 영에 불들린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집도 없이 배회하며 무덤에서 머물러 살았고, 공동체 안에서도 난폭하고 통제가 어려운 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이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단단히 묶어 봤지만 워낙 힘이 강해서 다 끊어버리고 광야로 뛰쳐 나가곤 했습니다. 무덤 곁에 머물렀다는 것은 그가 온전한 삶보다는 죽음의 자리에 더 가까이 있던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 사람 곁에 가까이 다가가자, 악한 영에 붙들린 사람은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애원합니다. 예수가 그의 이름을 묻자 자신의 정체성을 군대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속에서 군대는 중무장한 6천여명의 보병, 120명 가량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강한 영이 이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마귀의 활동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며 사역을 시작하셨고, 팔레스타인에서 펼친 그의 모든 사역들은 인류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시니 ‘귀신들은 지금 당장은 자기들을 지옥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께 계속 빌었습니다. 마침, 그곳과 가까운 산기슭에 놓아기르는 돼지 떼가 있었고. 귀신들이 그 돼지 떼를 보고,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우르르 몰려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갑자기 산비탈을 내리달리더니, 몽땅 호수에 빠져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돼지는 유대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악한 영이 돼지떼에 들어가자 돼지들이 미친 듯이 물속으로 달려가 몰살당합니다. 이 장면은 죽음을 불러오는 마귀의 정체성을 보여 줍니다. 악한 영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여 절망에 빠뜨리고 결국 죽음으로 이끄는 영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다릅니다. 성령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사람을 살리며 마음에 참 평안을 주십니다.

악한 영에 붙들린 한 사람은 가정과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 오지도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본문 27절과 39절을 보면 ‘이 사람은 오랫동안 귀신에게 사로잡혀, 옷도 입지 않고 집도 없이,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 뒤,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예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크고 놀라운 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낱낱이 알렸다.”

두 구절 속에 ‘집’과 ‘무덤’이라는 단어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덤에 살고 있던 그가 무슨 행복이 있었을 것이며,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무슨 기쁨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치유받고 난 후에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베푸신 크고 놀라운 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낱낱히 알렸다고 기록합니다. 악한 영이 나갔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회복되고,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주님께 속하기 전에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본성과 충돌하게 되어서 말씀 앞에 자기 본성을 죽이는 삶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성경 말씀의 요구가 상당히 부담스럽고 어리석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관점입니다.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전서 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게 들리겠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이방인의 땅 거라사로 발걸음을 옮기신 이유는 억눌려 있던 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시선은, 성령의 사역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지키고 싶어하는 경계가 있는데 그것을 침해 당하면 성령의 다가오시것 조차도 불편하게 여기며 방어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인간의 교만과 아집을 다듬어 가시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십니다. 신앙은 이 거룩한 힘을 길러가는 과정입니다. 회복은 무너진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고 새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저절로 쉽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삶속에서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지만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를 의지하면 반복되는 실패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말씀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주께서 이끄시는 거룩한 삶으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과 바울이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바울은 사역을 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을 크게 느꼈고,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를 배척한 동족들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안에는 영원한 소망과 충만한 기쁨이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는 탄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묵상하면서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이라는 찬양의 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 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로마서 9장 2-3절입니다. “9:2 나는 지금 마음 깊은곳에서 큰 슬픔을 느끼고 있고,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9:3 내 형제요 내 동족인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비록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는 저주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차라리 그 편을 택할 것입니다.”

이에 반해 당시 거라사 마을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이 회복 되었는데 기뻐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마음과 대조적입니다.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인데,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 하여 예수님께 마을을 떠나달라고 요구합니다. 거라사 사람들을 사로잡은 두려움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돼지떼의 몰락으로 갑작스럽게 닥친 경제적 손실이었을까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 앞에 서면 마음의 죄성이 드러나기에 두렵고, 삶의 주도권을 내어 드리는 것은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삶에 언제든지 일어 날수 있습니다.

사람이 회복된 일 보다, 경제적인 이익이 삶의 우선순위가 된다면, 말씀을 따르는 삶에는 끊임없은 현실의 염려와 두려움이 찾아 올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삶의 목적이 사역의 성공과 결과에 치중하게 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떠나 달라고 요청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된 사람만이 주님을 따라 가겠다고 요청합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겉으로 온전해 보이지만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며 비판하고 추궁하기 보다 영적인 회복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인간적 본성을 따르는 일들은 주님 보시기에는 무덤에서 배회하는 인생과도 같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목격한 후에도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은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무덤 사이에 머물고 계십니까? 본향집을 향하여 걸어 가고 계십니까? 주님은 죽음의 무덤에 있던 사람을 살리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기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39 “당신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베푸셨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주시오. 온 마을 사람들을 위해 증인이 되라는 사명입니다. 자신의 과거 허물을 알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와 어둠에 붙들렸던 그를 통해 주가 행하신 일이 전해졌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 깊이 확신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뒤에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새옷을 입어야 합니다. 만일 새옷을 입지 않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옛모습이 부끄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암을 판정받고100차례 이상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불린 천정은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안티 기독교인이었던 천정은 집사는 다큐멘터리 영화 <부활: 그 증거>의 주인공입니다. 사업가로, 피아니스트로 살면서 ‘노력해서 안 되는건 없다’고 믿어왔던 집사님은 암이라는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집사님의 고백의 글입니다.

“아마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멈추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인생의 목적도 모른 채 그저 살기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어요. 예수님 안에서는 무조건 안전하다. 이것이 제 담대함의 근원이에요. 사람들이 두려움에 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주님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내 구속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너는 내 것이니까 내가 보호할 거야, 안전하게 보호할 거야, 라고 하셨는데, 지금 난 아프고 무서우니까 당장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해요. 두려움과 불평을 끊을 수 있는 길은 사람이 위로해 줘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해해 줘서 되는 것도 아니에요. 정확하게 복음 앞에 이 사람이 굴복했을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러 가는 발걸음을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생애 마지막은 소망을 주신 주님의 증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불평과 두려움, 부활의 소망과 평안 어디쯤에 머물러 있습니까? 우리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고통을 참아내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12:2 우리는 오직 믿음의 창시자이시요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영광스런 기쁨을 위해 모든 부끄러움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 내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에게 고통과 영광스런 기쁨이 공존하는 자리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통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기억하셨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 외로운 길을 걸어가신 주님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누구보다 억울했던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다시 살아난 성도는 죽음의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서 소망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는자로 멈추지 말고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복음을 믿는다면 살아냄의 자리에서 우리가 두려워 하는 거라사 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그곳으로 들어 가라는 사명을 담대하게 붙잡고 돌아갑니다. 우리에게도 주시는 사명입니다.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거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은 단지 머리 속으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다거나 그를 본받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그들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픔을 마주하며 괴로움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우리의 ’거라사’ 땅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곳에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복음을 품고 살아가는 삶은 반복되는 일상과 치열한 현실에서도 주의 말씀을 마음에 심는 삶입니다. 그 생명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의 사명은 쉽게 지치게 됩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믿음의 여정은 불편하고 힘들어도 반드시 우리가 살아내야 할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피할수 만은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낼때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새힘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06. 15.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주)

불안한 시대에 붙드는 소망

The Anchor of Hope in Uncertain Times

로마서 5:1-5

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우리의 성품을 단련시켜 주며, 그러한 성품은 마침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5 우리가 품는 소망은 우리를 절대로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가득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쉬운말 성경)

1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faith, we have peace[a] with God because of what Jesus Christ our Lord has done for us. 2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3 We can rejoice, too, when we run into problems and trials, for we know that they help us develop endurance. 4 And endurance develops strength of character, and character strengthens our confident hope of salvation. 5 And this hope will not lead to disappointment. For we know how dearly God loves us, because he has given us the Holy Spirit to fill our hearts with his love.(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은총이 이곳에 모인 우리에게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19세기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1813-1855)는 『죽음에 이르는 병』(The Sickness Unto Death)이 ‘절망’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는 책에서 ‘절망’을 자기인식의 단계로 구분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무지(無知)로 인한 절망,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고 회피하려는 소극적인 절망, 하나님 없이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적극적인 절망입니다. 가령 살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낙심하는 마음이 들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 마음에 머물러 있으면, 낙심된 마음은 완전히 포기하는 상태인 절망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만일 소망이 없다면, 절망은 우리를 더 깊은 어둠속으로 끌고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번쯤 삶의 영역에서 기대하는 것으로 부터 무너졌던 경험이 있을 겁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다가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믿었던 관계속에서 상실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애쓰지만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마주하며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75세에 받았던 하나님의 약속을 25년 동안 기다렸는데 인간적으로 소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100세가 되었을때에 자신은 죽은 자처럼 연약해 졌고, 아내는 태의 기능이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지니고 약속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대로’ 말씀이 성취가 됩니다. 이 믿음은 ‘나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성도들을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된 약속입니다. 로마서 4장의 증언을 보시겠습니다.

4:18 모든 소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아브라함은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4:19 아브라함은 백 살이 거의 다 되어 자기 몸이 죽은 자처럼 연약해졌고, 아내 사라의 태 또한 기능이 다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조금도 연약해지지 않았습니다. 4:20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믿음이 날로 더욱 굳건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에서 ‘소망’이라는 단어 엘피스(ἐλπὶς)는 헛된 기대라든지 두려움의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고, 항상 좋은 것에 대한 기대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속에서 하게 되는 감정적인 기대감과 성경이 말하는 소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감정적 기대감이라는 것은 사람과의 인간관계의 거리, 주어진 환경에 따라 상대적이고, 쉽게 흔들립니다. 이에 반해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변하지 않는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본문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확신으로 소망(ἐλπὶς)이라는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고난과 죽음에 직면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좋은 것 만을 기대하는 엘피스(ἐλπὶς) 소망을 바라 볼 수 있었을까요? 로마서 5장 1절과 2절을 보시겠습니다.

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인정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후에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으며, 과거의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며 즐거워 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기 있는 식당을 가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고 줄을 섭니다. 단지 입소문만으로도 사람들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누군가의 만족과 기대를 이미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고 소유하는 것에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도 쉽게 신뢰하고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증명하기 원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찾기 원하지만 정작 분명하고 확실한 복음 앞에서는 수없이 고민하고 의심하며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듣고 싶은 말에만 귀를 기울이게 되고 편한 관계들로만 관계 형성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소망은 세상과 사람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의롭다 하시는 믿음이며, 그 사랑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혀진 담이 있고, 깨어져 있을 때 오는 절망은 인간의 노력으로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자리에 있는 성도들에게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관계에 틈이 생기면 점점 더 버거워집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속적으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령 죄를 반복적으로 짓다보면 마음이 굳어지지만,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나아가면 용서를 통하여 새마음을 주십니다. 은혜는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서로의 연약함에 집중하느라 이미 주신 화평의 자리를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휘장을 찢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주셨습니다. 은혜 밖에 있던 삶이 은혜 안에 초대 되었기에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성도들이 삶에서 만나는 어떤 풍랑속에서도 은혜의 자리에서 떠내려 가지 않도록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복음 안에서 살아가기로 결단하면 할수록 믿음의 길은 좁고 낮은 길이지만 우리가 지닌 소망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6장 19절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같은 소망은 안전하고 튼튼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휘장 안의 지성소에까지 곧장 들어가게 해줍니다.”

찬송가 490장은 제가 참 좋아하는 찬송시입니다. “마음 괴롭고 아파서 낙심 될 때 내게 소망을 주셨으며 내가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니 앞길 환하게 보이도다. 세상 풍조는 나날이 변하여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이 세상에서 이슬같은 삶을 살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찬양의 참된 의미를 알고 그 소망을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미 참된 삶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소망은 고난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어지게 합니다. 우리의 꿈은 주님의 얼굴 뵙기를 소망하는 것이고 그 소망은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바울은 소망의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5: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인내를 낳고, 5:4 인내는 우리의 성품을 단련시켜 주며, 그러한 성품은 마침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견디며 인내를 낳습니다. 그 인내는 우리의 성품을 단련시켜 주며, 그렇게 다듬어진 성품은 마침내 소망을 이루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에서는 소망(ἐλπὶς)의 인내를 말하며 소망을 인내의 원천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8절에서는 소망(ἐλπὶς)의 투구라고 표현하며, 사단으로 부터 믿음을 지키는 방어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찾아오는 고난은 두가지의 얼굴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끝이라 여기는 절망의 얼굴과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소망의 얼굴입니다. 소망 없는 마음은 영적으로 사단에게 우리의 마음을 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사단은 “너는 절대 회복할 수 없어”, “이겨내기엔 너무 늦었어” “하나님은 너와 함께 하지 않어”라고 속삭이며 우리 안에 소망이 사라지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 가운데에 있는 우리들을 끝까지 품고 새힘을 주십니다. 주님은 책망하시기 보다 따스한 손길로 우리를 먼저 감싸 안아 주십니다. 다윗은 세상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조롱하고, 마치 사막에 홀로 있는 것 같아서 밤낮으로 눈물을 흘릴때 중요한 선택을 합니다. 그가 선택한 소망의 기도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42:5 오 나의 영혼아, 어찌 그리 풀이 죽어 낙심하느냐? 어찌 그리 불안해하며 괴로워하느냐? 오직 너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살아라. 이제 나는 내 구원자이신 나의 하나님을 도리어 찬양하며 살리로다. 다윗의 이 고백은 우리를 믿음의 시선으로 전환시켜 줍니다.

다니엘은 소망의 근거를 말씀에서 깨닫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포로생활이 70년간 지속될 것을 깨닫고 상황을 탓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단 9:2 곧 다리오가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하던 첫 해에, 나 다니엘이 두루마리 책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다가, 주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황폐함에 관한 연수를 정해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70년 만에 끝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9:3 그러므로 나는 굵은 베옷을 걸치고 잿더미에 앉아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며 간구했다. 9:4 그때 나는 우리 동족이 지은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오, 크시고도 두려우신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진실로 주께서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고 또 주님의 크신 자비를 풍성히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니엘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민족을 향한 중보자로 서서 아픈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하란 땅으로 도망가는 신세였습니다. 가장 깊은 외로움의 자리에서 돌을 베고 잠이 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 말씀 하시는데 “내가 너희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창28:15) 야곱은 그 소망을 붙잡고 연단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며 과거에 아버지와 형을 속였던 자신의 죄성을 직면했을 것입니다. 무려 20년 동안 외삼촌의 집에 머물며 연단을 받는 동안 하나님은 그의 성품을 다듬어 가십니다. 야곱은 인내하며 마침내 형과도 극적인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야곱의 삶의 여정은 바울의 말씀처럼 어려움-인내-성품-소망의 열매를 맺어가는 복음의 예표를 보여줍니다.

5:5 우리가 품는 소망은 우리를 절대로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가득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의료의 방향을 바꾼 감동적인 포옹 The hug that helped change medicine’이란 제목의 CNN 토픽 영상이 있습니다. 1995년 10월 17일 우스터의 매사추세츠 메디컬 센터에서 쌍둥이 여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좋은 진전을 보이고 있었지만 한 아이는 호흡과 심박수에 문제가 있었고, 산소 수준은 낮았습니다. 의사들은 이 아이의 병세를 지켜보았고 계속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얇은 팔과 다리는 푸르스름한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아이의 심박수가 천천히 뛰었고, 그의 부모는 어린 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며 지켜보았습니다. 절박한 순간에 간호사는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사용했던 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절차를 시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부모의 허락을 받고 그녀를 쌍둥이 언니의 같은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녀가 인큐베이터 문을 닫자마자, 건강한 언니가 작은 여동생을 왼팔을 뻗어서 감쌌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었습니다. 아팠던 아이의 심박수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더니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통의 자리에 있을 때 진짜 믿음이 드러납니다. 때로는 서로의 마음의 온기를 통해서도 회복되고 살게 되는것 처럼 고통과 절망 가운데에서도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실 소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더딘 길, 내 약점이 드러나는 자리,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자리에서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품은 소망은 영광의 소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삶 속에서 진정한 십자가를 만났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인생의 갈보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실패의 길이 아니라 구원의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과의 성공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찾아내려 애쓰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무너진 자리, 실패의 자리에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불 가운데서도 우리를 신실하게 지키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세상의 절망 앞에 지칠때마다 주님께서 소망이 되심을 기억하십시오. 고난이 깊어질수록 은혜도 커집니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안아 주시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로마서 5장 1-5절의 말씀은 불안한 시대에서도 소망을 품고 살아내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음의 메세지입니다. 공허한 세상의 말로 위로받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반드시 주님의 일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의 품으로 소망을 기대할 것입니다. 서로의 기도 제목을 품고 함께 성장하는 성도, 말씀을 통해 현실을 살아내며 복음의 기적을 경험하는 삶,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영원한 소망을 품고 하나님 안에서 다스림 받는 공동체가 되어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붙드시는 소망의 하나님과 함께 오늘을 살아내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