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21.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5주)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What Will You Give to God?

누가복음 16:1~13

16: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 집 청지기가 정직하지 못하여,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2 주인이 그 청지기를 불러 말했다. ‘자네에 대해 나쁜 소문이 들리던데, 그게 어찌 된 일인가? 빠른 시일 내에 장부를 정리해서 내게 넘겨주게. 더 이상 자네에게는 일을 맡길 수가 없네.’ 3 그 청지기는 혼자 중얼거렸다. ‘주인이 날 쫓아내려 하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 아닌가. 4 옳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내가 여기서 떠나더라도, 나를 돌보아 줄 친구들을 만들어 놓아야겠다!’ 5 그래서 그 청지기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들였다. 그가 첫 번째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을 졌소?’ 6 그 사람이 ‘올리브기름 백 말입니다.’ 하고 말하자, 청지기가 말했다. ‘자, 당신이 도장 찍은 빚 문서가 여기 있으니, 쉰 말을 빌렸다고 고쳐 쓰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청지기가 다음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을 졌소?’ 그 사람이 ‘밀 백 섬입니다.’ 하고 말하자, 청지기가 말했다. ‘자, 여기 당신의 빚 문서가 있으니, 가져다가 여든 섬이라고 고쳐 쓰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청지기가 이처럼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나중을 대비하여 영리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 식으로 거래를 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게 군다. 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다 없어지게 될 때, 그 친구들로 하여금 너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들이게 하라. 10 지극히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역시 성실하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일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큰일에도 역시 정직하지 못하다. 11 너희가 세상 재물을 다루는 데에도 성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에게 하늘의 참된 재물을 믿고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재산을 다루는 데에도 신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 몫을 떼어 주겠느냐? 13 어느 누구도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한편을 미워하면 다른 편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한편을 존중하면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 (쉬운말 성경)

1 Jesus told this story to his disciples: “There was a certain rich man who had a manager handling his affairs. One day a report came that the manager was wasting his employer’s money. 2 So the employer called him in and said, ‘What’s this I hear about you? Get your report in order, because you are going to be fired.’ 3 “The manager thought to himself, ‘Now what? My boss has fired me. I don’t have the strength to dig ditches, and I’m too proud to beg. 4 Ah, I know how to ensure that I’ll have plenty of friends who will give me a home when I am fired.’ 5 “So he invited each person who owed money to his employer to come and discuss the situation. He asked the first one, ‘How much do you owe him?’ 6 The man replied, ‘I owe him 800 gallons of olive oil.’ So the manager told him, ‘Take the bill and quickly change it to 400 gallons.’ 7 “‘And how much do you owe my employer?’ he asked the next man. ‘I owe him 1,000 bushels of wheat,’ was the reply. ‘Here,’ the manager said, ‘take the bill and change it to 800 bushels.’ 8 “The rich man had to admire the dishonest rascal for being so shrewd. And it is true that the children of this world are more shrewd in dealing with the world around them than are the children of the light. 9 Here’s the lesson: Use your worldly resources to benefit others and make friends. Then, when your possessions are gone, they will welcome you to an eternal home. 10 “If you are faithful in little things, you will be faithful in large ones. But if you are dishonest in little things, you won’t be honest with greater responsibilities. 11 And if you are untrustworthy about worldly wealth, who will trust you with the true riches of heaven? 12 And if you are not faithful with other people’s things, why should you be trusted with things of your own? 13 “No one can serve two masters. For you will hate one and love the other; you will be devoted to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God and be enslaved to money.”(New Living Translation)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 가운데 ‘달리는 기부천사’로 불리는 가수 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 815광복절을 기념해 독립 유공자 후손들을 돕기 위해 81.5km 마라톤(‘815런’)을 완주하는 모습이 방송에 소개되었습니다. 81.5km를 완주하기 위해서 그는 8시간 동안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이 거리는 단순한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아픈 아이들, 희귀병 환자와 가족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 운동가들과 후손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최선을 다해 감사의 편지를 전하는 마음으로 달린 길이었습니다.

본 적 없는 사람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내 삶의 최선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얼마나 훈련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삶의 고단함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위한 삶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의 편지가 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은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 대목을 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옳지 않은 일을 했음에도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비유속에 한 부자는 청지기가 자신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해고 하기로 결정합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는 것을 알고 쉽게 돈을 벌 일들을 찾아 고민합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쫓겨 나더라도 자신을 돌보아 줄 친구들을 만들어 놓아야겠다 결심하고 머리를 써서 한명씩 불러 들입니다. 이후 그는 올리브 기름 백 말을 빚진 사람에게는 오십 말로, 밀 백 섬을 빚진 사람에게는 여든 섬으로 빚을 줄여 주었습니다. 불의한 일로 빚은 진 사람들에게 엄청난 선심을 쓴 것입니다. 참으로 불의한 일입니다. 성경은 불의를 반드시 심판하시고 죄에는 마땅한 결과가 따른다고 말씀합니다(롬 6:23).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불의한 청지기의 행위를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초점은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 이땅에서 제자들이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재물관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도 일시적 재물로 친구를 삼으려고 지혜를 발휘하는데, 영원한 집을 향해 가는 제자인 너희도 정신을 차려 돈을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하시는 이 비유를 듣던 바리새인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청지기라는 헬라어 ‘οἰκονόμος’는 ‘집의 관리인, 일을 맡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청지기에게 필요한 자세는 신실함입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선한 일을 하면서 그것이 연극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멋진 연극에 사람들의 눈을 속일지 몰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박수는 우리의 마음을 향합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나 자신을 위한 기대가 아니라 주인을 향한 마음이 커져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맡겨진 것을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청지기의 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오늘 본문으로 한 존 웨슬리의 설교 “돈의 사용(The Use of Money)을 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웨슬리는 재물이 고귀한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며, 기독교 가치로만 사용한다면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생명과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몸과 마음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돈을 벌라. 무엇보다 이웃의 건강을 해치며 돈을 버는 악한 직업을 갖는 것을 두려워 하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낭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돈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만한 거룩한 제물이 되도록 살아가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서 돈이 가진 양면성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 이유는 그가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행위는 멀리하되,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맡겨진 재물을 지혜롭게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매순간 낭비하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 잘 흘려 보낼지, 의미있게 쓸지를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를 준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땅에 쌓아 두는 돈과 하늘에 쌓아 두는 돈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6:19 “여러분은 땅 위에 재물을 쌓아 두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는 좀이 먹어 없어지거나, 도둑을 맞기 쉽습니다. 6:20 그러므로 여러분의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십시오. 거기에서는 좀이 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는 일이 없고, 도둑이 훔쳐갈 염려도 전혀 없습니다. 6:21 여러분의 재물이 있는 그곳에 여러분의 마음도 역시 있습니다.”

성경은 돈을 바르게 잘 사용하는 삶이 종말을 준비하는 삶임을 가르칩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16: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다 없어지게 될 때, 그 친구들로 하여금 너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들이게 하라. 즉 세상 재물은 결국 없어지게 되지만 그 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면 영원한 집에서 우리를 맞이할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 재물이 없어지게 될 때를 말씀합니다. 종말론적으로 보면 돈은 우리의 손에서 언젠가 떠나갈 때가 옵니다. 주님 앞에서 결산할 때입니다. 세상 재물은 이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만 사용할수 있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의한 청지기도 자신을 위해 돈을 사용해서 친구를 사귀는데, 제자인 너희도 영원한 집을 위해 세상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돈은 내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이 돈은 인간의 탐욕과 욕망만을 채우는 도구가 될 때 독이 될수 있습니다. 돈이 인간의 타락한 마음과 힘으로 잘못 사용되면 우리의 삶은 물론 영혼까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 상대적 박탈감과 끝없는 비교속에서 불안을 느낍니다. 이런 우리의 삶에서 세상의 재물이 아닌 믿음의 삶을 지켜 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폴 트립의 “돈과 영성”에서는 돈과 세상의 유혹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주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길을 잃고 방황할 것이다.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망각하는 순간이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내가 영광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길 때가 것이다. 우리는 사지 않아도 되고 만족도 느낄 없는 물건에 돈을 것이다. 돈을 허비하고는 돈이 없다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혼자 잘해 보라고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은혜는 다시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고, 죄를 일깨울 것이다. 은혜의 주님은 거룩한 사랑의 팔로 우리를 다시 안아 주실 것이다. 은혜는 우리가 훗날 감사하고 만족하는 사람이 것이라고 약속한다. 은혜의 힘으로 우리는 날마다 그런 사람으로 변해 간다.”《폴 트립돈과 영성》

주님은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가난한 자들과 그리스도인에게 구제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의 재물을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나눔은 소비 사회속에서 돈으로 인한 유혹을 막아주는 믿음생활의 ‘둑’이 됩니다. 상대적 빈곤감과 결핍은 지금의 삶을 부족하다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돈과 세상 가치를 따라가면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갈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남의 것을 잠시 맡아줄 때 결핍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돌려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내 삶과 물질과 시간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릴 때 삶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부족함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 나라

본문 속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며 불의했지만, 최소한 자신의 앞날을 위해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부름 받은 제자된 우리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며 더 지혜롭게 재물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의한 청지기가 일시적인 친구를 얻기 위해 돈을 썼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영혼들을 위해 맡겨진 것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채우시고 주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신실한 제자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불의한 일들이 가득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붙들고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영광과 존귀를 비우시고 우리를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배우지 못했던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 삼으셨고, 세리나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실패하고 지쳐 있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 가셔서 모든 민족의 모든 사람에게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는 어둔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돈의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내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잠시 맡겨주신 것으로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님을 깨달으면 고난과 어려움속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주인으로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택할 때 책임 있는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몸은 하나님 가까이에 있으니 너무나 좋습니다.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견고한 도피처로 삼았으니, 이 몸은 주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널리널리 전파하렵니다.” 시73:28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생을 주관하시다가 드러낸 나라가 주님이 걸아가신 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삶의 문제, 세상의 가치, 부족함을 내려놓고 시편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나의 견고한 도피처로 삼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전의 방식대로 내 것을 다 챙기며 하나님 나라를 준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널리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삶의 전부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임을 깨닫고, 한 주간도 믿음 지니고 넉넉히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09 14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4주)

주님이 찾으신 그 한사람

The One Whom the Lord Seeks

누가복음 15:1~10

15: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2 그런 광경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 교사들이 수군거리며 투덜댔다.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여, 그들과 어울려 함께 음식을 먹는다.” 3 ○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4 “당신들 가운데 누군가가 양 일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들에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서지 않겠소? 5 그래서 양을 찾으면, 그는 크게 기뻐하며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6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할 것이오. ‘우리 다 함께 기뻐하자. 잃어버린 내 양을 내가 도로 찾았다.’ 7 내가 진정으로 당신들에게 말하겠소. 이와 같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욱 기뻐한다오.” 8 ○ “또 어떤 여자가 은화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하겠소? 등불을 켜 들고, 온 집안을 쓸며, 부지런히 돈을 찾지 않겠소? 9 그러다가 돈을 찾으면, 그 여자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놓고 함께 기쁨을 나눌 것이오. 10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크게 기뻐한다오.” (쉬운말 성경)

1 Tax collectors and other notorious sinners often came to listen to Jesus teach. 2 This made the Pharisees and teachers of religious law complain that he was associating with such sinful people—even eating with them! 3 So Jesus told them this story: 4 “If a man has a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gets lost, what will he do? Won’t he leave the ninety-nine others in the wilderness and go to search for the one that is lost until he finds it? 5 And when he has found it, he will joyfully carry it home on his shoulders. 6 When he arrives, he will call together his friends and neighbors, saying, ‘Rejoice with me because I have found my lost sheep.’ 7 In the same way, there is more joy in heaven over one lost sinner who repents and returns to God than over ninety-nine others who are righteous and haven’t strayed away! 8 “Or suppose a woman has ten silver coins[a] and loses one. Won’t she light a lamp and sweep the entire house and search carefully until she finds it? 9 And when she finds it, she will call in her friends and neighbors and say, ‘Rejoice with me because I have found my lost coin.’ 10 In the same way, there is joy in the presence of God’s angels when even one sinner repents.”(New Living Translation)

세상을 바꾸는 시간, ‘세바시’라는 강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2011년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15분 동안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콘텐츠입니다. 어느 방송에서 세바시 PD가 이 프로그램을 만든 이유를 소개했는데,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장(場)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이 프로그램이 만들어졌습니다.

성경 안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잃은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보여 주시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잃었던 양을 찾아 주님의 품으로 데려오는 이야기는 사람을 살리는 깊은 기쁨을 보여 줍니다. 마치 소방관들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사람을 구할 때 느끼는 기쁨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을 살리는 기쁨입니다.  잃은 양 한마리를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해 쓴 복음서입니다. 누가는 12명의 제자중의 한 사람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었지만 자신이 만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붓을 들었습니다. 누가복음 외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퍼져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책이 시작되는 누가복음 1장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하고 차례대로 기록한 여러 사람들이 많음을 언급하며 자신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정확히 전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고 기록의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잃은 양을 끝까찾으신주님의 사랑

김형석 교수님은 ‘교회밖 하나님 나라’에서 신앙의 본질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목사나 신학자라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적 같은 체험을 많이 했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만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은총의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만 그분을 만난 사람은 모든 게 문제가 안 됩니다. 《김형석-교회 밖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15장은 잃은 양, 잃은 은화, 잃은 아들의 세 가지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서로 연결된 하나의 비유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한 영혼을 찾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양한 상황을 통해 보여 주는 연속된 이야기입니다.

잃은 것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삶이 완전히 회복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삶의 모든 문제를 덮고, 하루하루의 순간들을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 줍니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난 그 기쁨과 감격을 기억하시나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고 초라하고 보잘것 없던 내 삶이 자녀됨으로 완전히 새로워지는 그 순간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배제되고 소외된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우리도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인해 탄생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성도들의 삶은 당시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습니다. 이 성령의 감동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마음이 잊혀지면, 교회는 형식과 전통만 남고 율법주의로 변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최종 목적지는 교회의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삶을 구현하고 실천하도록 도우시고 이끄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본문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광야로 나서는 목자와 잃은 은화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부지런히 살피는 여인의 간절함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힘들고 지치면 포기하려 하지만, 목자는 끝까지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기쁨의 잔치를 엽니다.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크게 기뻐합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열방을 향해 가라』에서 “교회는 선교가 아니라 예배를 위해 존재한다. 선교가 없는 곳에 예배가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선교는 단순히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예배가 없는 곳, 하나님의 마음과 기쁨을 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하는 예배가 선교입니다. 예수의 생명은 죽었던 우리의 마음을 살려 냅니다. 십자가의 흔적이 우리의 삶에 남겨질때 우리의 몸에도 생명의 흔적이 남는 것입니다. 고난과 연약함 속에 주님의 생명이 드러나고, 그 은혜가 흩어져 있던 우리의 마음을 모으고, 날마다 새롭게 회복시키십니다.

주위에 소망을 잃어 버리고,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전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선교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의 생명을 회복하는 예배의 현장으로 나아가고 육신의 삶에 매여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적 삶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율법과 규율로 사람들을 나누었고,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인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를 이탈한 어린양이 우리의 시선에는 작은 존재일지는 몰라도 하나님께는 반드시 찾아야 할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은화 한 개 역시 전체와 같은 가치로, 잃어버렸을 때 그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개의 은화는 보통 한 세트로 결혼할때 남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주는 사랑의 증표였을거란 해석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버지에게 둘째 아들은 귀하고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끊어질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는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본문에서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 드는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비방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행위를 지키며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던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부정하다고 여겨진 자들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판단과 경계안에 갇히지 않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 앞에서 우리의 한계를 느끼고 상처 받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만 사랑하다가 포기하기도 하고 힘든 현실속에서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세리와 죄인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쉽게 닫아 버리기도 합니다. 불의한 저들과 우리의 삶이 다르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에는 언제나 내가 가장 불의한 죄인일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 자신부터 하나님과 더 친밀하게 연결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타인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열심과 내 경험만으로 살아가면 결국 실패와 상처 앞에서 원망과 불만이 쌓이고 영적으로 텅빈 삶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과 세상의 길이라는 경계에 서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듯 살아갑니다. 순수한 열정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사람을 놓치기도 하고 소망을 잃어버린 자리에 서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잃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믿고 따를 때 죽었던 우리의 믿음이 살아납니다. 마음이 외롭고 고독할때, 잃어버린 양을 끝까지 찾아가신 주님의 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이 끝까지 찾으시는 잃어버린 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이유입니다.

7절 말씀을 통해 양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욱 기뻐한다오.” 이 비유의 배경에는 바리새인들의 수군거림이 있었습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란 의미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곧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는 완전한 의인이라고 여겼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내 안에 가려져 있던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돌아온 아들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새옷을 입혀주며 잔치를 차려주신 아버지의 마음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향해 수군거리며 투덜대던 바리새인들과 달랐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이었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집에 사는 우리는 주님의 마음이 부어질때 한 영혼을 귀히 여기며, 그들의 곁에서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사람입니다.

‘찾다’라는 의미를 지닌 제테오(ζητέω) 는 ‘발견할 때까지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여인이 잃어버린 은화 하나를 찾기 위해 쉬지 않고 집을 쓸고 부지런히 찾았듯 주님은 길을 잃은 한 영혼을 끝까지 찾으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믿음생활과 내면의 상처로 인해 닫힌 마음, 사라진 마음의 평안 이것들이 우리가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은화입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은 진리의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생명을 다해 찾는 사람들, 기도하는 삶을 우선시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쉬지 않고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고니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전제가 주 안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기뻐하라’는 헬라어 ”카이로(χαίρω)는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때 얻는 기쁨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아프고 비극적인 일들이 가득합니다. 총성없는 전쟁터가 되어가는 세상은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의 자리가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둡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을 끝까지 찾으십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내신 주님은 기쁨과 감격에 겨워 그 양을 목에 업고 돌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에게도 그 마음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잃어버린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서 있다면 우리를 끝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기쁨은 우리의 의지를 넘어 주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에는 아픔과 고통이 가득하지만 우리 모두를 끝까지 찾고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앞에 설 때,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길 잃은 양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지닌 성도이며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이 기쁨이 우리 안에만 머물지 않도록 주님의 마음으로 그 기쁨을 넉넉히 흘려 보내며 살아야 합니다. 아프고 고단했던 시간, 상처로 힘겨웠던 순간들 조차도 하나님 안에서는 주님의 기쁨이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태주 시인의 너무 늦게 라는 시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신이 주신 첫날처럼 맞이하고 하루하루 이 세상 마지막 날처럼 살다 가리라 만나는 사람마다 오직 한 사람으로 대하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으로 맞이하리라 하나란 숫자가 세상에서 얼마나 크고 무거운 것인가를 나는 너무 늦게 알아갑니다.” 주님이 끝까지 찾으시는 한 영혼,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할 때, 우리 마음에 잃어버렸던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09 07 2025 주일 설교

내 제자

My Disciple

누가복음 14:25~33

14:25 ○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면서 길을 가고 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14:26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보다 나를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더욱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14:28 여러분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 사람은 먼저 전체 비용이 얼마나 들 것인지 계산부터 뽑아 보지 않겠습니까? 14:29 그렇게 하지 않아서, 만일 그 사람이 기초공사만 해놓고 비용이 모자라 망대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사람들마다 그를 비웃으며 말하기를, 14:30 ‘저 사람이 건축을 한답시고 시작만 해놓고는 마무리를 못하는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14:31 또 만일 어떤 왕이 다른 왕과 전쟁을 해야 한다면, 1만 명의 자기 병사로 2만 명의 적들을 과연 물리칠 수 있을 것인지, 미리 헤아려 보지 않겠습니까? 14:32 그렇게 헤아려 보아서, 아무래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면, 적군이 아직 먼 거리에 있을 때 화친을 맺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14:33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쉬운말 성경)

매년 새학기가 되면 보스턴의 곳곳에는 이삿짐 트럭과 손수레를 끌고 짐을 옮기는 학생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청년들의 모습에서는 설레임과 기대가 느껴지지만 자녀들을 새로운 땅에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부모들에게는 염려와 애틋한 마음이 함께 할 것입니다. 이제 이곳에 온 청년들은 자신의 꿈을 향해 새롭게 도전하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낯선 환경에서 공부를 해야 하고, 끼니를 챙기는 것도 지치는 날이 있을 것이며 외로움이 찾아 올때면, 눈물로 마음을 달래고 기도하며 꿈을 향한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낯선 땅에서 홀로 서게 되는 자녀들은 세상과 믿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결단을 해야하고, 자녀를 떠나 보내는 부모는 이제 하나님께 나의 자녀를 맡기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여러 호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 성도,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입니다. 이 호칭들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뿌리를 둡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믿음 안에서 거룩한 성도로 선택을 받았으며, ‘제자’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여러 표현들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된 호칭이 제자입니다.신약성경에 ‘제자가 되다’ 라는 동사는 25회 정도 나오고, ‘제자’라는 명사는 246회 이상 나옵니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서  요한은 특별히 사랑을 많이 받는 제자였습니다.  그의 서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제자, ‘마데테스:μαθητής’는 ‘배운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제자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입니다. 선생과 제자는 배움을 통하여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잇는 제자의 삶을 살았고, 엘리사는 엘리야의 가르침을 받아 그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예수님도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셔서 가르치셨습니다. 12제자 외에도 70여명의 제자를 훈련하여 파송하셨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을 보고 엘리야와 같다고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라고 말하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누가 내 제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분명하고도 강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카일 아이들먼(Kyle Idleman)의 ‘오늘 제자로 살기’에 보면 제자됨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줄줄 읊을 줄 안다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지식이나 재능에 감동하시지 않는다그분이 정말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주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다십자가라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말이다그분이 지독히도 낮아지셔서 타인을 이타적으로 섬기신 궤도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여기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의 조건을 말씀하시며, 그 조건을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세번씩이나 말씀 하셨습니다. ‘내 제자’라는 말은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요구와 내가 기대하는 것 사이에서 충돌을 경험 해본 적이 있다면, 우리는 ‘내 제자’라는 말이 부담스러운 조건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내 제자’는 주님과 특별한 관계임을 의미합니다.

“쉬운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부모나 아내와 자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라고 번역합니다. 반면 개역개정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고 번역하여 보다 강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즉 어떤 대상도 예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가족보다도 나를 더 사랑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면, 그때 나를 선택할 수 있겠느냐?” 묻고 계신 것입니다. 당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모두가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이 질문 앞에 서게 하셨을때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쉽지 않겠다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가정은 마음의 안식처이자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든든한 울타리와 같습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을 배워갑니다. 하지만 주님은 혈연적 가족보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름 받았음을 더 우선순위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주님을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면 주저하지 말고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의 가족, 물질, 명예가 중요하여 내 삶의 평안을 지키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질문은 우리가 진정한 제자인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제자의 길을 가기 전에 반드시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네’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않아’ 이 고백은 주님의 초청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만 제시하신 분이 아닙니다. 제자의 길이 힘들고 험난할 수 있지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 28:19) 마지막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끝날까지 내 제자들과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부모는 자녀의 부족함에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말씀 하신 망대 비유는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망대는 전쟁시 적의 동태를 살피는 높은 탑입니다. 만일 망대를 건축하다가 기초공사만 하고 멈추게 되면, 적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오히려 안 짓는 건만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망대를 세울 비용을 먼저 계산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길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으나 대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시작하면, 사명의 무게 앞에서 쉽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승리를 보장 받은 믿음의 경주자들입니다. 만일 건축회사들이 이곳 저곳 기초공사만 해놓고, 힘들다고 포기하고 중단해 버린다면 그 도시는 황폐해 보일 것입니다.

십자가는 짐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지고’라는 헬라어 동사 바스타조 (βαστάζω)는 ‘참다’, ‘짐을 짊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로마는 자국의 통치에 반항한 범죄자나 전쟁 포로를 처형할 때 십자가에 못박히는 자가 처형 장소까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도시 한복판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며, 이를 통해 로마 제국이 사형을 집행한 것이 옳고, 죄수들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침묵으로 인정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주님께서 옳고 참됨을 시인하는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무거울수록, 그 길에는 고통과 부담이 따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리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무게를 끝까지 감당하며 지고 가야만 합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시인하겠다.’(마 10:32)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제자들의 삶을 헛되지 않게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증거는 십자가를 짐어지는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녀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짐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공부하며 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주를 위해 흘린 땀과 시간은 언제가 내 인생에 유익이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견뎌야 할 폭풍속의 문제들도 산적히 쌓여 있습니다. 자녀의 십자가, 직장에서 져야 할 십자가, 사명의 길에서 져야 할 십자가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픈 몸을 맡기며 기도하고 있고, 사랑하는 가족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길에서 홀로 있는 것만 같은 외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삶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며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아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 다른 이들은 병이 낫게 되었지만 정작 자신이 지녔던 육체적 질병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고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해결되지 않은 육체의 가시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고후12:7 그리고 내가 받은 계시가 너무나 크고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너무 교만해질까 봐 내 몸에 가시 같은 병을 주셨습니다이것은 내가 교만하지 않도록 나를 괴롭히는 사탄의 사자입니다.  12:8 나는 이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12:9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러므로 나는 나의 약한 것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자랑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머물러 있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세상의 거대한 풍조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믿음의 시련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기에 허락하신 것이라면, 십자가의 짐이 무거울수록 그만큼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녀임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있으나 열심은 사라지고, 지식은 많으나 순종은 없고, 알고 있어도 삶으로 헌신하고 포기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나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으로만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피하고 싶던 아픔과 고난의 자리, 외로움과 눈물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인생의 높은 산을 넘어 갈때마다 우리가 교만하지 않도록 주님과의 관계를 더 깊어지게 합니다. 지나고 보면 내가 진 십자가가 나를 바르게 살아가도록 안내해 주는 것이었구나 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때 비로소 성령께서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제자의 길은 우리의 힘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포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도는 MADE BY GOD,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삶입니다. 우리는 분명 죄인이었는데 주님께서 거룩한 사람이라 일컬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모든 권리와 소유권을 하나님께 넘기고 하나님이 내 삶에 주인 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님은 ‘내려놓음’이 포기보다 굉장히 적극적인 행위라고 말합니다. 선교사님께서 하신 인터뷰의 내용 일부입니다.

저라고 하는 사람은 제 안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어떤 생각들미움이라든지 남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인정 욕구 같은 걸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어요해결한 척 포장은 할 수 있겠지만 제 안에는 그런 힘이 없어요하지만 앞이 막막하고 희망이 안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질 때 제 삶이 여전히 감사가 넘치고 행복하고 더는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저는 삶 속에서 체험했습니다.”진정한 내려놓음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는 내 제자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외롭고 지친 순간에도 다시 일어납니다. 마라톤 경주를 하기 위해서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달려야 하는 것처럼 인생의 경주에서도 짐이 많을수록 경주는 더 힘들어집니다. 주님은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 가운데 있을때 우리가 손에 붙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의 높고 크신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주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제자들이 보여줄 믿음의 태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안에는 우리의 선택과 책임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이기심으로 쌓아올린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이고, 견디기 힘들고 낙심되는 자리에서도 주님의 명령을 책임있게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치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끝까지 심고 나누고, 십자가를 지는 삶에 있습니다.  상처와 아픔이 있어도 주님이 가신 길을 기꺼이 따라가야 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돌아보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보다 나를 위해 살았고, 눈 앞에 보이는 세상을 따라가기에 급급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놓치며 믿음의 길에서 돌아서서 쉽고 형식적인 신앙의 자리에 머무르게 됩니다. 바울이 고난 중에도 영광을 바라본 이유는, 그 길 끝에 주님이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Kate B. Wilkinson 이 빌립보서 2장 5절의 말씀을 담은 찬양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찬송시는 처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매주 부르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돕기 위해 쓰였습니다. 삶의 간절한 고백으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내 구주 그리스도의 마음이 날마다 내 안에 살게 하시고 그분의 사랑과 능력이 내 모든 행동과 말을 다스리게 하소서. 2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시간마다 풍성히 거하게 하시고 내가 보는 모든 것에서 오직 그분의 능력으로 이기게 하소서. 3내 아버지 하나님의 평안이 내 모든 삶을 다스리게 하시고 아플 때나 슬플 때 고요히 위로 받게 하소서. 4예수님의 사랑이 물이 바다를 채우듯 나를 채우게 하시고 그분이 높아지고 나는 낮아지게 하소서. 5 내 앞에 놓인 경주를 하며 강하고 담대하게 적과 싸우며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전진하게 하소서. ” (Kate B. Wilkinson, “May the Mind of Christ, My Savior)

경기에 나가는 선수가 자신의 의욕만으로 경주를 끝까지 완주할 수가 없습니다. 매일 훈련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믿음의 경주 중입니다. 아직 내 인생이 더 중요하고 내 가족이 더 소중합니다. 내 목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는 고백도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고백속에서도 죄와 싸우며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인생의 공사는 우리의 삶이 여전히 폭풍 속과 같지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달려갈 때 포기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무거운 짐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8 31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2주)

은혜의 자리

The Place of Grace

누가복음 14:7~14

7 ○ 하루는 예수께서 초대 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식탁의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눈여겨보시고는,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다. 8 “결혼 잔치에 초대받아 가거든, 여러분은 윗자리에 앉지 마십시오. 여러분보다 더 귀한 손님이 초대를 받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9 그렇게 되면, 주인은 여러분이 앉은 자리에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주시오.’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안을 당하면서 구석진 자리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10 그러니 초대를 받거든, 여러분은 아예 잔치 자리 중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십시오. 그러면 주인이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친구여, 이리로 올라와서 윗자리에 앉으시오.’ 하고 권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손님들 앞에서 당신이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11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 12 ○ 그러고서 예수께서는 자기를 초대한 집 주인에게 말씀하셨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에 사람을 초대하려거든, 친구들이나 형제들이나 친척들이나, 또는 잘 사는 이웃들은 초대하지 마시오. 그들은 너를 다시 초대하여 되갚을 것이기 때문이오. 13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과 절름발이들과 맹인들을 초대하시오. 14 그리하면, 당신은 복을 받을 것이오. 비록 그들을 당신에게 되갚아주지 못하겠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되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오.” (쉬운말 성경)

7 When Jesus noticed that all who had come to the dinner were trying to sit in the seats of honor near the head of the table, he gave them this advice: 8 “When you are invited to a wedding feast, don’t sit in the seat of honor. What if someone who is more distinguished than you has also been invited? 9 The host will come and say, ‘Give this person your seat.’ Then you will be embarrassed, and you will have to take whatever seat is left at the foot of the table! 10 “Instead, take the lowest place at the foot of the table. Then when your host sees you, he will come and say, ‘Friend, we have a better place for you!’ Then you will be honored in front of all the other guests. 11 For those who exalt themselves will be humbled, and those who humble themselves will be exalted.” 12 Then he turned to his host. “When you put on a luncheon or a banquet,” he said, “don’t invite your friends, brothers, relatives, and rich neighbors. For they will invite you back, and that will be your only reward. 13 Instead, invite the poor, the crippled, the lame, and the blind. 14 Then at the resurrection of the righteous, God will reward you for inviting those who could not repay you.”(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리가 어디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초대 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식탁의 윗자리(The most important seat)에 앉으려는 것을 눈여겨 보시고는, 이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간 사람들에게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을 강조하는 것은 최종 평가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우리에겐 언제나 익숙한 자리가 있습니다. 내가 앉는 자리, 내 눈에 보여지는 자리입니다. 눈에 띄고 싶고 인정 받고 싶은 자리도 있고, 겉으로는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불안과 비교, 불만족으로 인해 내가 숨기고 싶은 자리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며 섬길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갈 것인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에겐 여전히 남들보다 더 우월해지고자 하는 마음, 칭찬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겸손은 내가 가진 능력을 부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높이지 않고, 주신 능력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참된 겸손

라파엘 메리 델 발(Rafael Merry del Val, 1865-1930) 추기경의 겸손의 기도(Litanies of Humility) 의 일부입니다.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칭찬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무시당할까 두려워하는 저를 구해주소서.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는 저를 구해주소서. 다른이들이 저보다 더 사랑 받기를 바라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다른이들이 저보다 더 존경 받기를 바라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이 기도문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욕망과 두려움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우리의 이런 욕구는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 중 가장 특이한 것은 자리 배치였습니다. 이러한 배치 원리는 오늘날 경쟁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비행기 안에도 좌석에 따라 등급이 나눠져 있고, 영화 시사회에서도 주연과 조연의 자리가 다르게 배치됩니다. 당시 로마의 영향을 받은 유대사회에도 식탁을 ‘ㄷ’자형으로 배치하고, 존경 받는 손님이 앉을 자리를 별도로 준비하고, 삼면의 중앙자리가 가장 지위가 높은 자리였습니다. 사회적 권위와 명예를 나타내는 자리였습니다. 초대 받은 바리새인들은 서로 주인의 눈에 드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비유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 속에서 말씀하신 “높은 자리”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권력으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자리입니다.

믿음과 삶을 살아낼 실력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먼저 그 자리로 가셨습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예수를 핍박하던 바울의 삶이 바뀐 것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높은 자리나 끝자리가 아니라 혼인 잔치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후 12: 9-10)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곳, 그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까지 함께 갑시다. 서로의 약함이 조금은 불편해도 품어줄때 우리는 잔치의 은혜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자랑하고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 안에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향해 경멸하고 박해하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섬기고 희생하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나의 공로와 이름을 내세우고자 한다면, 그것 역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간 훈련을 받았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서로 높아지려 다투지 않았습니까?

오늘을 위해서는 오늘의 은혜가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의 평가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살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은혜가 우리의 의지를 깨우고, 주님을 닮아가도록 행동하게 합니다. 만약 은혜는 없고 율법과 형식만 의지하면, 금식과 기도, 전도와 같은 행위도 우리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영혼이 건조해집니다. 은혜가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마주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가 아니라 주를 아는 겸손함에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 붙들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겸손한 삶은 세상의 시각에서는 나약한 삶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으로 낮아지는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 깊어지는 시간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서 실력 있는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일상의 평범한 시간속으로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삶 전체의 자리에서도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자리에서 마음이 지쳐 있지는 않으신가요? 예수님은 주를 찾는 마음에 진실한 믿음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주님과 만나는 자리는 새힘이 임하는 자리입니다. 사모함과 무뎌짐 사이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겨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폴트립은 ‘우리의 과거의 후회와 회한을 예수님의 보혈이 완전히 덮어 가려주었다고 말하며 이제 더이상 과거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나 자신을 완전히 바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폴 트립의 365 아침 묵상)

일상의 시간에서 거룩함은 주님과 친해지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인간의 본성과 충돌하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에서 시험과 유혹을 받으셨지만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 세상의 가치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관계를 풀어가는 일 만큼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힘을 그 안에서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하게 만드신다고 생각합니다. 창 자체가 밝아서 햇빛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먼저 창을 비추었기 때문에 밝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C.S 루이스)

참된 겸손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이끄시는 값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삶이 때때로 흔들리거나 불안한 순간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좁은 길로 걷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

참된 자비를 베풀어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는 모두가 허물과 죄가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지극히 가난한 사람들과 같았고, 병들어 걷지 못하고, 한 치 앞도 볼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갚을 길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결핍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갚을 능력이 없는 염려에도 눌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8-11 절 비유의 대상이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에 관한 것이라면, 12절부터는 초청하는 자로 바뀌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에 사람을 초대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점심으로 번역된 ‘아리스톤’은 일반적인 식사 자리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즉 일상에서 크고 작은 식사를 베풀때에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과도 비슷합니다. “마 6:1 “남들에게 보이려고 선행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아무런 상도 받을 수 없습니다. 3 그러므로 당신이 친절을 베풀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십시오. 심지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조차도 모르게끔 하십시오. 4 그렇게 해서, 당신의 자선 행위를 아무도 모르게 고이 숨겨 두십시오.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는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일들, 이름 없이 행하는 모든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상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4장 29절입니다. 14:29 여러분과는 달리 토지를 나누어 받지 못한 레위인들이나, 여러분의 마을에 함께 사는 외국인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인의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보상을 받게 될 그 시기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부활 시기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때는 우리가 행한대로 받게 될 날입니다. 복이 될 시기는 부활의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에 기쁘게 달려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부활의 때에 임할 복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가 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하게 될 것이며,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보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답을 받는 자가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삶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고통과 슬픔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주저앉아 있는 이들, 갈길이 보이지 않아 소망 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계산으로 하나님의 초대를 망설이는 사람들, 학업과 직장, 가정의 자리에서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버티고 견뎌내지만 여전히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인해 지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방식 안에 자비의 삶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 삶이 성도에게는 복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부르심 가운데 허락하실 복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선수들의 수고와 땀은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이미 승리한 사람의 넉넉함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4장 본문에 이어지는 또 다른 잔치 비유에서는 주인이 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을 초대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갖구실을 대면서 거절했습니다. 밭을 샀으니 가서 밭을 보아야 하겠다며 생계와 자기 일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장가를 들었으니 해야 할 책임 때문에 갈수 없다고 거절하고, 장사를 시작했으니 경제적 이유 때문에 잔치 자리를 거절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삶이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편안하고 익숙한 곳에만 앉고 싶어 합니다. 일부러 불편한 자리로 찾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학교와 직장, 가정과 교회 안에서 잘 살아가고는 있지만 여기에 삶의 책임의 무게가 더해지면 가끔은 길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광야의 시간을 통하여 버거웠던 눈물의 자리, 불안과 외로움의 자리가 주님의 마음을 만나게 되면, 영혼을 살게하는 은혜의 자리가 됩니다.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은혜의 자리, 자비의 자리는 비교와 경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삶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이웃을 사랑으로 돌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낮은 자리에서 눈물로 드리는 믿음과 기도입니다.

우리의 분주한 마음 뒤에 감추어진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혼인잔치의 진정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인정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지 말고, 축복에 참여하게 될 의인들의 자리를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08 24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11주)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

Building God’s Kingdom in Daily Life

누가복음 13:10~17

13:10 ○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그런데 그곳에는 18년 동안이나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허리가 굽어져 있어, 몸을 똑바로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그녀를 앞으로 불러내어 말씀하셨다. “여인이여, 당신이 병마에서 해방되었소.” 13 그리고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시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똑바로 펴고는, 하나님을 찬양했다. 14 ○ 그러자 안식일에 예수께서 병을 고치신 것에 크게 화가 난 회당장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일을 하게 되어 있는 날이 일주일에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날에 와서 병을 고쳐 달라고 하시오. 하지만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 말을 듣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들 위선자들이여! 당신들은 안식일이라고 하여, 외양간에 매여 있는 당신들의 소나 나귀의 고삐를 풀어 물을 먹이지도 않는단 말이오? 16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도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소. 그런데 안식일이라고 하여, 이 여자를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오?” 17 이 말씀에, 예수를 반대하던 자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쉬운말 성경)

10 One Sabbath day as Jesus was teaching in a synagogue, 11 he saw a woman who had been crippled by an evil spirit. She had been bent double for eighteen years and was unable to stand up straight. 12 When Jesus saw her, he called her over and said, “Dear woman, you are healed of your sickness!” 13 Then he touched her, and instantly she could stand straight. How she praised God! 14 But the leader in charge of the synagogue was indignant that Jesus had healed her on the Sabbath day. “There are six days of the week for working,” he said to the crowd. “Come on those days to be healed, not on the Sabbath.” 15 But the Lord replied, “You hypocrites! Each of you works on the Sabbath day! Don’t you untie your ox or your donkey from its stall on the Sabbath and lead it out for water? 16 This dear woman, a daughter of Abraham, has been held in bondage by Satan for eighteen years. Isn’t it right that she be released, even on the Sabbath?” 17 This shamed his enemies, but all the people rejoiced at the wonderful things he did.( New Living Translation)

영국의 복음주의 목회자 마틴로이드 존스 (Martin Lloyd-Jones, 1899-1981)는 1963년 웨스트 민스터 채플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을 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복음이 선포된 지 2천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오해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지금 직면한 현실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히 다가올 미래만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현실임을 강조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나? 참 바쁘고 분주한 요즘입니다. 한주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게 일상의 분주함 속에 있습니다. 생각해야 할일은 너무 많고, 해야 할 일도 더해집니다. 이렇게 바쁜 우리의 삶에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가는 여정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때 임하냐는 질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18년 동안 보이지 않는 악한 힘에 사로잡혀 있던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는 긴 세월 동안 허리가 굽은 채로 굳어져 있었고, 이로 인해 하늘 한번 쳐다 보지 못했을 것이며, 땅만 바라보며 살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악한 힘에 사로 잡혀 있었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병을 죄의 결과로 여겼기에, 그녀는 부정한 자로 배척당하며 사회와 종교 공동체에서 소외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고통 속에 갇혀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매여 근심하고, 내 힘으로 안되는 일로 걱정의 시기를 보내는 분들, 감당해야 하는 문제와 책임 앞에서 잠못 이루는 날들을 보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회복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힘겹게 버티고 있는 그 일상의 자리도 보이지 않는 문제에 묶일때가 있지만 굽은 마음의 자리에도 주님이 오시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1.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께서 회당에 나온 이 여인을 보셨고, 불러 내어서 여자에게 손을 얹자 여자는 즉시 허리를 똑바로 펴고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눅 13:13) 그 동안 누려보지 못했을 해방과 자유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은혜가 이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어둠과 죽음의 권세는 힘을 잃고, 죄에 사로 잡힌 인생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사단은 지금도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들의 영혼을 흔들며 유혹합니다. 수시로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팔복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미움과 탐욕, 분노와 시기심의 소리에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한 척 할때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겉도는 대화속에서 관계가 깊어질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위선적 모습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시들어 집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병을 고치신 사건으로 회당을 책임지던 회당장과 예수님 사이에 정면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회당장이 분노한 이유는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회당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안식일에 일만 할수 없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들어서도 안되고 심지어 불을 피어도 안되도록 엄격하게 규정했습니다. 지금도 정통파 유대교(Orthodox Judaism)인들은 전기를 켜고 끄는 행위가 ‘불을 지피는’ 것과 유사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자동 타이머를 설정해 놓고 전기를 미리 켜고 끄는 방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는 회당장의 관점에서 여인을 치료하는 예수의 행동이 안식일의 전통과 충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과 종교적 형식을 중시하던 회당장의 충돌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의 참된 정신이 무엇인지,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안식’이란 단어 샤바트(שַׁבָּת, Shabbat)는 ‘쉬다, 멈추다, 그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며 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5장 말씀에 보면, “5:15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펼친 팔로 해방시켜 주신 것을 기억하여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쉬도록 너희에게 명령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해방하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안식일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의 율법과 규정의 이유로 분노했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며 오히려 그 여인에게 회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형식과 규칙에 매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놓칠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억눌리고 갇힌 자 자유함이 없는 자에게 다가가 회복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의 은혜를 찬양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거룩한 주일을 지키며 그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할때 우리 안에 참된 안식과 회복이 경험될 줄로 믿습니다.

2. 내 마음을 방해하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13장 16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병 고침을 받은 이 여인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딸’ 이라고 부르 셨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전통에 매였던 자들은 가축을 돌보는 데에는 세심한 배려를 했으면서도 예수께서 사람을 치유하신 것에 대해서는 율법 해석의 자기 의에 매여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여전히 우리도 마음 안에 완악함과 교만함으로 인해 굳어진 마음을 마주하고 사랑을 거부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일하심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교만일 것입니다. 교만은 현대인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단은 예수님 조차 ‘너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라’고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셔서 힘과 폭력 대신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사단은 우리 안에 악한 마음을 심어 하나님께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하고 성령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교만은 하나님과 단절되는 죄의 시작이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1828-1917)는 겸손은 예수님의 지상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 물은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서 가득 채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피조물이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분의 영광과 능력이 가득 흘러들어 한껏 높임과 축복을 받게 하신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자기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데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결국 높임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강한 능력과 위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사람을 높여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도 잘 뿌리 내리지 못하지만, 마음이 깨끗하면 작은 겨자씨 같은 말씀도 자라나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요즘 시대에 크게 영항을 끼치는 것 중 하나가 미디어입니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세상 곳곳에 타락한 권세들이 얼마나 많이 퍼져 있는지 보게 됩니다. 전 세계의 사건과 사고에 우리의 시선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무질서한 경쟁, 비인격적인 언어와 물리적인 폭력들, 모든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생각들, 불안감을 조장하는 수많은 공포심,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생각들, 상처와 결핍의식을 통해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일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의미없는 짧은 영상들을 보다 보면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영적인 감각은 점점 무뎌지고 마음의 중심에도 비교와 불안, 불신과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영성 신학자 마르바 던(Marva J. Dawn,1948-2021)은 안식의 4단계를 그침(ceasing), 쉼(resting), 받아들임(embracing), 향연(feasting)임을 보여 줍니다. 그침(ceasing)은 ‘나’ 중심에서 비롯된 성과에 대한 보상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을 멈추고(ceasing) ‘하나님’ 중심의 리듬을 찾는 것이며, 쉼(resting)은 모든 긴장과 근심되는 일들을 멈추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활동으로 부터의 자유함을 말합니다. 무엇보다 ‘샬롬(שָׁלוֹם, Shalom)’을 온전히 받아들이기(embracing) 위해 끈기를 지니고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적이지만, 안식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경험하도록 정기적으로 안식하는 습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인 항연(feasting)은 참된 예배를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특별히 친구들이나 낯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과 나눔을 통해 향연속에서 곳곳에 숨겨진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마음이 머물 곳을 알게 해줍니다. 우리가 이전에 가보지 않던 길을 가게 하시고, 할수 없는 것을 할수 있도록 새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때 은혜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 밖에 영원히 머물러야 할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다 덮어 주시고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합니다.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 주님을 바라보며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또 때를 따라 도우시는 그분의 은혜를 받도록 합시다.”(히 4:16)  

3. 우리의 예배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참된 예배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한주간 살면서 많은 긴장감과 삶의 무게로 인해 힘겨울 때가 있지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끊임없이 찾아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관계속에서의 상처, 아픔의 문제들, 현실의 문제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다가 믿음이 무너진 것 같은 좌절감은 우리의 마음을 더 강팍해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꼭 붙잡고, 주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인간이 만든 엄청난 문명들로 인해 수많은 것들이 하나님처럼 여겨집니다. 눈 앞에 보이는 첨단 문명들, 소유하고 또 소유해도 여전히 공허한 마음들, 치열한 현실에 압도 되어지면, 하나님의 나라는 숨겨진 듯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임했고 성령의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주님께 영광 돌리는 참된 예배를 통하여,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를 섬기는 자들로 살아갈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납니다.

악한 영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마치 주님이 승천하실때 함께 사려져 버린 것처럼 여겨지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세상권세로 부터 이미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성도는 세상을 뒤덮고 있고 어둠을 깨뜨리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싸움은 시작이 되었고, 우리의 운명은 이미 승리하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속에 속했지만 믿음을 붙잡고 승리와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내 뜻과 내 의지를 따르는 삶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우리를 또 다시 얽매게 하는 짐일 뿐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싸움이 아니라 세상 권세 잡고 있는 악한 영과의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권세와의 싸움이지 권세 편에 선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불행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재정 문제, 자녀 문제, 인간관계, 건강 문제 등 삶의 어려움들을 솔직하게 주님 앞에 내어 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위로와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도 하나님 앞에서 고백될 때, 그의 나라는 영원하며 참된 평안과 자유를 주시는 나라임을 알게 됩니다.

안식일날 주님께 행하신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누구에게 나타나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인생의 문이 닫혀서 막막한 시기를 걷고 계신다면 주님께서 새 일을 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릴 구원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진정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믿음의 깊은 터널을 지나고, 삶의 허무함에 빠진 이들을 자유케 해 주십니다. 낮은 자를 높여 주시고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며 소외된 자들을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본문속에 고통을 받던 여인이 고침 받은 후 그녀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도 증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잠을 자도 마음이 쉬지 못하고, 불안과 염려에 매여 있는 분들 계십니까? 예배로 나오는 발걸음이 여전히 무겁고 감격없는 습관에 매여 나온 분들이 계십니까? 그저 잘 살아내고 싶었을 뿐인데 다시 일어날 힘이 없어 주저 앉아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참된 예배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내 결단과 마음으로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 앞에 나의 마음을 올려 드릴 때 굽어진 삶과 눌려진 마음에 찾아와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 위하여 살아가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