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03.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8주

마태복음 18:1-6

어린아이는 누구인가?

Who Is the Little Child?

전국재 목사

18: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제일 큰 사람입니까?”
18:2 예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부르신 후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18:3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죄에서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반겨 맞아주면, 그것은 곧 나를 반겨 맞아준 것과 같다.”
18:6 ○ “그러나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달고서 깊은 바다 속으로 자기 몸을 던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쉬운말 성경)

07. 27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7주)

누가복음 11:1~13

이렇게 기도하라

Pray Like This

1 어느 날, 예수께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기도를 마치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와서 예수께 말했다. “주님,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2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소서. 3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오니,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소서.’” 5 ○ 예수께서 또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해보자. 한밤중에 그 친구에게 가서 ‘여보게, 빵 세 덩이만 꾸어 주게. 6 친구가 여행 중에 우리 집을 찾아왔는데, 내가 그 친구에게 내놓을 것이 없다네.’ 하고 말하면, 7 그 친구는 침실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친구여, 제발 나를 귀찮게 하지 말게. 문단속을 하고 식구들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네.’ 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아주 끈질기게 졸라대면 결국 그 친구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9 기도도 이와 같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어주실 것이다. 10 그렇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11 생각해 보아라. 너희 가운데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 12 아들이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
11:13 이와 같이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녀에게는 자녀가 원하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자기 자녀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쉬운말 성경)

기도(祈禱)는 한자어로 빌 ‘기'(祈), 빌 ‘도'(禱)인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로 인도하는 은혜의 도구인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성소 안에 있던 법궤를 함부로 만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야훼 (YHWH) 하나님의 이름도 경외하는 차원에서, 직접 발음하지 않고 ‘아도나이’ 즉 ‘주’라고 읽었습니다. 이러한 전통 가운데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기도를 마치자 예수의 제자 중에 한명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유형의 기도를 하셨는지는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실제로 기도하고 계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한밤중에도 새벽에도 습관처럼 기도하시며 제자들에게 기도의 본을 보이셨고, 기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도록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22:39 예수께서 밖으로 나가셔서, 평소처럼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셨다. 제자들도 예수의 뒤를 따랐다. 22:40 그곳에 이르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여라.” 22:41 제자들과 떨어져, 예수께서는 돌을 던져서 닿을 만한 곳으로 가시더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주님은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기도하시는 주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주님을 보면서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기도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해줍니다.

첫째, 기도의 핵심은 바른 관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유대 신학에서는 신성 모독이자 불경건한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는데 누가복음의 본문과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을 원어로 보면, ‘아버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Πάτερ:파테르 라는 단어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며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친밀한 관계를 누렸으며, 예수를 믿는 우리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마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삶의 자세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2가지 형태의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위선자들 같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께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순전한 마음과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또한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의미없는 말을 반복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 가운데 교회의 진짜 위기는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가 멀어지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갈등과 불안이 사라지지 않은채 교회는 세속의 물결에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의 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기도의 모델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하늘의 뜻이 이땅에 이뤄지는 기도, 만족함이 없는 시대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 용서와 회개의 기도, 유혹에 빠지지 않게 지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마틴 루터는 ‘시편을 통해 우리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 또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은혜에 대한 행복한 생각들로 이루어진 꽃들로 만발한 하늘의 정원을 들여다 본다.” 라고 말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기도의 자리에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오늘 하루 어떤 옷을 입을까 선택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말씀의 옷을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구원 서사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어둔 인생길을 비추는 빛이 되어 주고, 불확실한 삶속에 분명한 방향이 되어 줍니다.

엉킨 실타래 같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내어드려야 합니다. 어릴때 외웠던 주기도문은 어른이 된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기도의 방향을 모르던 어릴때 암송했던 주기도문이 기도의 첫 걸음이 되었고 믿음의 고백이 되어 주었습니다. 기도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불렀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화려한 기도의 기술이 쌓여 가지만 주기도문으로 살아낼 힘이 부족합니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 나의 고민과 염려를 안고 찾아가는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기도의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부름 받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사명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도록 해줄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는 7개의 청원들로 구성되어 있고, 오늘 본문 누가복음에는 좀더 간결하게 5개의 청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기도와 인간의 삶을 위한 기도입니다. 연약한 인간은 기도없이 내 힘으로 살다가 인생의 문제 앞에 좌절하고 실패할때 비로소 기도해야 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께 간절히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잘못이 아니라, 겸손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아버지와 자녀는 여러가지 수식어가 필요없는 관계이기에 기도의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둘째,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드리는 우리의 간구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유대교의 기도와 다른 것들이 많습니다. 당시 유대교 뿐 아니라 모든 종교는 제사 중심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귐 안에서 성품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과정입니다. 마음을 터놓은 관계에서는 내 마음을 채울 공간을 내어주게 됩니다. 받아 들일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깨우는 것입니다.

A.W 토저는 ‘하나님’에 대한 책에서 밀턴의 기도를 인용합니다. “오 성령님!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갖 신전들이 아니라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입니다. 성령님이여 저를 가르치소서!’ 그는 깨끗한 마음과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아무도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설교할수 없고, 아무도 그런 설교를 올바로 들을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과 조명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관한 것을 이해할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오류가 있다면, 우리의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비유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해보자. 그 친구가 여행 중에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한밤중입니다. 밤중이라는 시간은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요구에 응하기 힘든 시간입니다. 하지만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 때문에 일반적으로 여행자들은 뜨거운 태양을 피해서 오후 늦게 여행을 시작했고 밤늦게 목적지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늦은 밤 찾아온 친구에게 줄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친구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떡 세 덩이만 꾸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웃집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끈질기게 졸라대면 결국 그 친구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라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도 이와 같다. 구하면 얻을 것이고, 찾으면 찾을 것이며 두드리면 열릴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유의 핵심은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끈질긴 간청이 응답을 얻는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보다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가 더 선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끈질기에 주님의 성품을 형성하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가 살아야 믿음이 메마르지 않고 깊은 골짜기에서도 생명의 꽃이 피어납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더욱 선명해 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끈질긴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수단이 아니라 끈질기게 기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에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간구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주를 찾는 기도시도 담겨 있고,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고 탄원하는 기도도 담겨져 있습니다. 때로는 인생을 살면서 뜻하지 않는 일을 겪을지라도 기도를 드리며 선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성령께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며 우리가 기도의 권리와 의무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같이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녀에게는 자녀가 원하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자기 자녀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 어거스틴은 참되고 완전한 기도는 사랑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참 사랑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친밀하도록 인도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주어진 상황속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허락하신 일이라 믿고 신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존 스트토 목사는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 숨이 떨어질 때까지 주님께 신실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수많은 기도 제목이 생깁니다. 그런데 임종을 앞둔 그 순간에는 그 동안의 기도 제목들이 아닌 본질적인 기도를 남겨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 앞에 신실한 기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간구해야 합니다.

얼마전에 전화 한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젊은 날, 꿈을 이루기 위해 보스턴에서 유학을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남편의 학회 참석차 다시 보스턴을 방문하게 되었고, 자녀와 함께 교회 앞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가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그때의 시간을 회상하며 전화를 주신것입니다. 모르는 분과의 전화 통화였지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 믿음의 자리를 걸어 가셨던 분의 삶의 고백이었기에 짧은 통화였지만 여운이 깊이 남습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찾던 그 시절의 간절함이 남아 있는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전화 통화였지만 그분과 그 자녀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드렸습니다. 삶이 불안하고 불안정 하던 그 시절의 간절한 기도는 세월이 지나도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막막하고 불확실한 지금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학업과 연구에 매여 치열하게 꿈을 향해 살아가지만 깊은 곳의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기도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단단해지기 위해 씨름하지만 영적 무기력함 앞에 서있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예수님이 무릎꿇고 기도하셨던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0720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6주)

말씀이 삶을 붙들게 하라

Let the Word Uphold Your Life

누가복음 10:38~42

10:38 ○ 예수께서 제자들과 여행하던 중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 10:39 그 여자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10:40 그러나 마르다는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했다. “주님, 제가 바빠 죽을 지경인데도 제 동생은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10:41 그러자 주께서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여러 가지 일로 마음 쓰느라 너무 염려가 많구나. 10:42 하지만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그것을 찾았다. 마리아에게서 그것을 빼앗고 싶지 않구나.” (쉬운말 성경)  

38 As Jesus and the disciples continued on their way to Jerusalem, they came to a certain village where a woman named Martha welcomed him into her home. 39 Her sister, Mary, sat at the Lord’s feet, listening to what he taught. 40 But Martha was distracted by the big dinner she was preparing. She came to Jesus and said, “Lord, doesn’t it seem unfair to you that my sister just sits here while I do all the work? Tell her to come and help me.” 41 But the Lord said to her, “My dear Martha, you are worried and upset over all these details! 42 There is only one thing worth being concerned about. Mary has discovered it,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령강림절기 여섯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두었다면, 오늘 본문은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수직적 측면이 드러납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마르다는 주방일을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예수님께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주님, 제가 바빠 죽을 지경인데도 제 동생은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마르다야 네가 여러가지 일로 마음 쓰느라 너무 염려가 많구나. 많은 일로 분주한 것보다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에게서 그것을 빼앗고 싶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지금 우리의 신앙의 자리를 돌아보게 됩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분주함 속에서 불평과 분노의 마음을 마주합니다. 마음의 시작은 섬김이었고 감사였는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열심으로 섬기고 일하다가 마음 안에 있는 근심과 불평을 이겨내지 못하고 금새 지치며 포기하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방향이 주님께 향하지 않고 나의 열심 안에 멈추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으로 섬기는 자리에 서면 영혼이 살아나고 기쁨이 회복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여전히 불안하고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도 마르다와 같이 여러 가지 일로 마음 쓰느라 염려를 쌓아두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사역 후에 지치고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무엇이 더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해져 있던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우선순위를 따르지 않으면 은혜가 메마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가지 뿐이다’라고 하시며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말씀 없는 섬김은 쉽게 지치게 되고 말씀 없는 사랑은 감정에 따라 금새 식어지며 말씀 없는 관계는 쉽게 실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말씀을 굳게 붙들 때 힘들었던 섬김의 자리도 기쁨이 되고 문제가 기회가 되는 회복의 전환점이 됩니다. 그렇다면 삶에서 중요한 한가지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의 기질과 열심만으로 섬기려고 할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은 바른 관계에서 부터 흘러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놓칠때가 많습니다. 섬김의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일을 하다 가도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면서도 마르다 처럼 자기 의로 가득 차 처음 지녔던 주님의 마음을 잃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선택적 섬김’과 ‘적당한 섬김’ 을 정해 놓지만 진정한 섬김은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라고 권면하며, 장차 주께로부터 유업의 상을 받게 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골3:23)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분의 일에 함께하도록 도와주십니다.

하지만 모든 일의 동기에서 나의 마음을 떼어 놓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섬기지만 분주함 속에서 불평이 쌓이게 되는 긴장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우리는 사람 앞이 아닌 하나님 앞에 서서 관계를 점검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초대했지만 주를 위해 일을 하다가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결국 기쁨을 잃어버린 헌신과 섬김은 염려와 근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돕지 않는 동생 마리아가 얄미웠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라는 구절에서는 자신의 열심을 인정받고자 하는 기대와 서운함이 담겨 있습니다. 마르다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마리아에 비해 열심으로 접대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주님께서 알아 주시기를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르다의 마음안에 얽혀 있는 우리의 본성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하기 전에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는지를 먼저 집중해야 합니다. 그 관계가 명확해지면 삶의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섬김의 능력은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부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지면 불평과 남을 향한 불편함만 남게 됩니다. 주님은 마르다의 마음에도 기쁨이 넘치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섬김의 자리에서 말씀이 바로 서지 않으면 우리 마음 안에 불평이 찾아오고 기쁨으로 섬긴 자리가 불평의 짐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을 하나님 앞에 먼저 서야 합니다. 섬김의 능력은 예배와 말씀을 통해서 흘러 나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했는데, 주께서는 좋은 편을 선택할때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쁘면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느리면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대 속에서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섬김과 헌신의 자리에서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의 마음을 품고 따를때 우리는 좋은 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동생 마리아를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던 동생의 절실한 마음,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동생의 모습을 은혜의 시선을 바라보았다면 동생의 몫까지 마르다가 감당할 순종의 힘이 더해졌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와 마르다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께서 죽은 오빠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에 등장하는 여인들입니다. 요한복음 11장 5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마리아와 마르다 모두에게 향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주님께서 유월절 엿새전에 베나디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초대받는 다른 사건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그 사건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아래 값비싼 향유를 다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으니 제자 중에 유다가 비싼 향유를 왜 낭비하느냐고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느냐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도 마리아의 행위는 나의 죽음을 예비하는 귀한 일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많은 업적,더 많은 성과를 내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르다가 차린 음식이 부족하다고 해서 책망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음의 동기와 마음 중심을 보시며 마르다가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조금 느린 아이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저도 추천을 받아 들어보게 된 노래입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듣고 여러번 들어보면서 노래의 가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간보다 더 빠른 세상에서 친구보다 앞서라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천천히 걸어가는 한걸음 느린 아이 꽃향기 맡아보고 밤하늘의 별 쳐다보고 친구 얘기 들어주고 가끔씩 뒤도 돌아보는  조금 느리게 가는 아이 마음은 커다란 아이 저 길 끝에 보이는 꿈 따라가면 느린 걸음 걸음마다 반짝반짝 환하게 빛이 난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만의 속도와 시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꼭 지키고 싶은 내 삶의 가치가 있고 이루고자 하는 목적과 목표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앞서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천천히 걸어 간다는 것은 마치 실패한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조금 느린 걸음으로 걷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분주함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예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분주하고 복잡한 세상 가운데에서도 주님 앞에 머무는 가장 좋은 편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수많은 소리에 마음을 빼앗길 때에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며 말씀 앞에 멈추어 서는 그 평안을 누리며 살아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분주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은혜가 사라질 때 사랑을 붙드는 힘도 약해집니다. 쉽게 상처 받고 말 한마디에 마음을 닫아버릴 때도 있습니다. 마르다도 그랬습니다. 자신의 열심 앞에서 서운한 마음을 마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 너머의 본질적인 것을 보셨습니다. 이 사랑은 마르다의 음식 준비보다 더 높은 차원의 완전하시고 공의로우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구원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사랑의 길, 고난과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세상의 일들과 낙심케 하는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마음에 생긴 틈은 염려와 불평으로 이어져 우리안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의 틈도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사랑으로 주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우리 내면의 영적 공간을 지키는 방법을 헨리 나우웬의 삶의 영성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우리 삶은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힘써야 할 활동도 많다. 우리는 빈틈없이 바쁜 삶을 원한다. 몸이 바쁘지 않으면 생각이라도 바쁘게 움직인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이나 아직 있지도 않은 일로 온갖 염려를 다한다. 혹시 벌어질지 모르는 일에 대한 근심과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내면의 공간을 잔뜩 채운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고 싶다면 훈련된 삶을 살아야 한다. 훈련이란 통제를 뜻하는 게 아니다. 영적 삶에서 훈련이란하나님이 활동하실 수 있는 공간을 내려는 노력”을 뜻한다. 훈련이란 자기 삶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지 못 하게 막는 일이다. 훈련된 삶에는 정신없이 바쁘지 않은 공간, 염려에 찌들지 않은 공간이 존재한다. 영적 삶에서 훈련이란, 내가 계획했거나 의지하고 있는 일이 아닌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공간을 내는 것이다.《헨리 나우웬 삶의 영성》

분주함 속의 염려가 가득 차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의 공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붙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르다가 적극적으로 예수와 제자들을 집에 환대한 것도 사랑받을 만한 일이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아래에서 말씀을 듣는 것도 사랑 받을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을때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따라가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고통을 겪으신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찾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듣는 세대 에서 말씀이 삶을 붙드는 세대 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알아도 말씀이 내 삶에 힘이 되지 않으면 영적 무감각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믿음 생활이 편안한 익숙함에 멈추어 버리면 말씀의 은혜가 더 이상 나를 깨우지 못합니다. 말씀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위기의 순간에 그 힘이 드러날 것입니다. 말씀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받은 은혜를 전하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분주함으로 지쳐 있는 마음의 방향을 재점검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2천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아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는 살아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있는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내 마음의 집에 초대된 주님의 말씀이 삶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의지할 분이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삶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 앞에 다시 서서 말씀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7.13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5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누가복음 10:25~37

10:25 ○ 하루는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를 떠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26 예수께서 그에게 되물으셨다. “모세의 율법에는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소?” 10:27 그 율법 교사가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10:2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옳소. 그렇게 행하시오. 그리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오.” 10:29 그러자 그 율법 교사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예수께 다시 물었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10:30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소.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몽땅 빼앗은 다음, 그를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놓고 달아났소. 10:31 그때 마침 한 유대인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게 되었소. 그 제사장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얼른 피해서 지나갔소. 10:32 이와 같이 한 레위 사람도 그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도 역시 그대로 지나가 버렸소. 10:33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소. 10:34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그를 태워, 근처 여관으로 데려가서 밤새워 보살펴 주었소. 10:35 다음날, 그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모두 갚아 드리겠소.’ 하고는, 길을 떠났소. 10:36 자, 그렇다면 당신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생각하시오?” 10:37 그 율법 교사가 대답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옳소. 당신도 가서, 그와 같이 행하시오.” (쉬운말 성경)

25 One day an expert in religious law stood up to test Jesus by asking him this question: “Teacher, what should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26 Jesus replied, “What does the law of Moses say? How do you read it?” 27 The man answered, “‘You mu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ll your soul, all your strength, and all your min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28 “Right!” Jesus told him. “Do this and you will live!” 29 The man wanted to justify his actions, so he asked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30 Jesus replied with a story: “A Jewish man was traveling from Jerusalem down to Jericho, and he was attacked by bandits. They stripped him of his clothes, beat him up, and left him half dead beside the road. 31 “By chance a priest came along. But when he saw the man lying there, he crossed to the other side of the road and passed him by. 32 A Temple assistant[d] walked over and looked at him lying there, but he also passed by on the other side. 33 “Then a despised Samaritan came along, and when he saw the man, he felt compassion for him. 34 Going over to him, the Samaritan soothed his wounds with olive oil and wine and bandaged them. Then he put the man on his own donkey and took him to an inn, where he took care of him. 35 The next day he handed the innkeeper two silver coins,[e] telling him, ‘Take care of this man. If his bill runs higher than this, I’ll pay you the next time I’m here.’ 36 “Now which of these three would you say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was attacked by bandits?” Jesus asked. 37 The man replied, “The one who showed him mercy.” Then Jesus said, “Yes, now go and do the same.”(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경강림절기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이번 텍사스 홍수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재지변 앞에 놓인 인간의 무력함을 느낍니다. 가족을 잃고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주의 손길이 실제적 소망으로 전달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고통받고 눈물 흘리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옳다는 것’의 헬라어 디카이오사이: δικαιῶσαι는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29절에 보면, ‘율법 교사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기 위해 질문한 것으로 보여지고, 예수님 앞에서도 율법의 계명을 충분히 지켰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죄된 본성은 우리 안에 잠재된 위험성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옳다고 여기는 의로움을 추구하다가도 자기만의 의에 빠지게 되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율법교사는 성경의 사람들, 율법을 꿰뚫고 있던 사람들이라 불렸으며, 성경을 연구하며 정확하게 해석하려고 애쓰며 생애를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삶의 원칙과 의무로 받아들였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든 율법교사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적대시 했다고 일반화 할수 없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은 주의 뜻을 진지하게 구하기 위해 한밤중에 주님을 찾아 와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다시 태어나는 것의 의미를 궁금해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예수를 환대하고 자신의 집에 초대했던 사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6절에 보면, “그때에 바리새인 중에서 한 사람이 자기와 함께 음식을 들자고 주께 청하니 주께서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하려고 앉으시더라.” 물론 이 바리새인은 주변의 예수를 적대시한 바리새인들로 인해서 예수를 초대하고 대화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언약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즉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우리의 믿음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며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주신 예수님의 시선에서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바라보는 예수님께서 주인공이시고, 그 시대에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구원)이 성취되는 사건을 기록한 증언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묵상할때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주님 앞에 우리가 일꾼으로 순종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마가복음을 읽으면서는 섬기는 종으로 오신 주님처럼 우리의 삶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섬김의 모습을 본 받고 있는지? 누가복음을 읽으면서는 이방인을 환대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묵상할때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 주시며, 주님께서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로 걸어 가도록 인도해 줍니다.

둘째,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삶의 일부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몽땅 빼앗은 다음, 그를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놓고 달아났습니다. 이후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해서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 안에는 강도만난 사람을 바라보는 측은한 마음이 보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마음입니다. 10:34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그를 태워, 근처 여관으로 데려가서 밤새워 보살펴 주었소. 10:35 다음날, 그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모두 갚아 드리겠소.’ 하고는, 길을 떠났소.

비유속의 세 사람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은 시체를 만져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되는 정결례 율법을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워낙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다 보니까 두려움으로 인해서 의도적으로 사고 현장을 피해서 지나갔을까요? 사마리아 사람은 분명히 강도 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꼈고, 강도가 또 다시 출몰할수 있을꺼란 두려움을 떨쳐내고 그를 도와줍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누가 참된 이웃이 되어 줄수 있는가?’의 비유로 뒤흔드셨습니다. 주체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중심적 관점이 아니라 어떻게 참된 이웃이 될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율법교사의 마음에 이웃에 대한 범위가 이미 유대인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이웃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셨습니다.

지난주 예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보내시며 돈이나 양식 자루나 여벌 신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사역을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전통에서 안부를 묻고 인사할 때 포옹하거나 입을 맞추는 관습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사명의 길에서 유대의 전통에 매여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 자비의 마음 그 어느것도 놓쳐서는 안됨을 말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길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고 참된 길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들입니다. 주어진 길을 가면서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시간은 저마다 다르고, 그 시간이 다 한정되어 있습니다. 비유속에 나오는 제사장, 레위사람, 사마리아 사람 모두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거룩함과 부정함을 구분하지 않고, 누가 참된 이웃이 되어 줄수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어떤 직업에 있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실천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임재를 갈망하는 이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속도가 달라도 서로를 성장하게 해주는 서로의 이웃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을 받은 성도는 매일이 새로운 날입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해주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에게 성찰하도록 하는 거울이 되고, 다른 이들을 향해서는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주님의 시야를 열어 줍니다.

2022년 한국일보에 소개된 특별한 생일파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볼티모어에 있는 한 이민자가 운영하는 옷 수선 가게 이야기였습니다. 그 가게의 주 고객들은 대부분 상류층 백인이었습니다. 그 중에 단골인 백인 노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혼자 가게를 찾아와 아내의 70세 생일파티 초대장을 전했다고 합니다. 아내에겐 비밀이니 꼭 와달라는 당부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 친구들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미국인 생일 파티에 몇 번 가본 경험은 있지만, 백인 노부부의 칠순 잔치가 혹여나 낯설면 어쩌나 마음이 쓰였답니다. 파티 날이 되어 갔는데, 그곳에는 평소 이 부부가 자주 이용하던 꽃집, 아이스크림 가게 등 동네 가게 주인들이 함께 초대되어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이름난 백화점이나 고급 상점이 아니라,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소박한 가게들을 삶의 일부로 여기며 이웃처럼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노부부의 남편은 초대 받아 온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내 아내의 삶의 일부입니다.’ 그날의 생일파티는 누군가의 삶을 귀하게 여긴 사랑의 실천이었고, 존중과 환대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이웃됨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사에 적힌 고백이 제 마음을 뭉클하게 해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이민자로 미국에 살면서 몇 번 겪었던 불쾌한 경험을 꺼내 길에다 털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받은 존귀한 경험을 가슴 구석구석에 채워 넣었다. 그것들을 근간으로 우리도 그들의 삶을 닮아가기를 소망했다. 그날의 교훈으로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내면의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또 그것은 우리보다 약한 자 앞에서 교만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었다.’

참된 이웃의 사랑을 경험한 부부는 가슴 구석구석에 그 존귀한 경험을 채워 넣었습니다. 아주 작은 경계가 무너지고 환대와 사랑으로 채워진 특별한 생일 파티는 이민자로 살았던 설움과 불안함과 상처들을 털어 버리게 했습니다. 가볍게 지나간 말 한마디에도 잠 못 이루며 마음이 괴로웠던 시간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찾아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서로의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주셨던 것처럼 서로에게 든든한 이웃이 되어 서로의 삶속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는 불안했던 삶의 근본적인 문제도 사랑으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들이 실천했던 계명의 기준을 더 높이 상향 조정하셨고, 계명의 본질을 내면의 동기까지 확장하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생명의 시작과 마침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은 하루의 시작을 밤으로 보았습니다. 인생의 큰일은 예고없이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주어진 날은 날마다 새날이고, 주님께 보시기에 좋은날입니다. 때때로 현실적인 문제에 갇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잊고 살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소망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인생의 어둠의 터널에 들어서게 되면, 수많은 질문이 찾아 오지만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은 주님께서 인생의 길이 되심을 믿으며 은혜 안에서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빛도 없었고, 공허하며 어두움이었지만 하나님이 영이 머무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인생의 칠흑같은 밤의 시간에도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기반이 무너진 듯, 일어날 힘이 전혀 없을때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며 일어나 빛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걸어가야 합니다. 시편의 말씀을 보면, 139:12 주님 앞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도 전혀 어둡지 않으며, 깜깜한 밤도 대낮처럼 밝을 것입니다. 주님께는 어둠과 빛이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내 삶에 빛이 보이지 않아도 두려움과 낙심에 갇히면 안됩니다. 참된 믿음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도, 어둠속에서 빛이 보이지 않아도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낙심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믿음의 시선은 생명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주신 완전한 길, 그 은혜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 갈수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알려주는 알람과도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이 질문은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날마다 새롭게 부어주시는 주의 복이 시작이 됨을 말해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복음을 나누기 힘쓰는 것은 사명의 자리, 때로는 가난한 마음의 자리로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누며 오직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이웃이 되어 주십니다. 제자의 길은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욕됨과 모욕을 당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영광의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믿음과 삶을 살아내는 실력이 너무나 다른 내 모습을 볼때에 이 모습도 주가 사랑하실까 자신 없는 내 모습 그저 주님앞에 있네. 나같은 자도 사랑하여 주시고 한번도 나를 떠나지 않으셨네 아픔속에 주를 작게 여긴 날 꾸짖지 않으시고 내 손잡아주시네. ‘

믿음과 삶이라는 찬양의 가사입니다. 살아낼 실력이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 속에서도 주앞에 서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의 참된 이웃이 되어 주셨다면 이제 우리도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줄 차례입니다. 익숙한 안전지대를 벗어나 강도 만난 이웃의 곁으로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야 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믿음의 길이 됩니다. 내가 걷고 싶어 걷는 길이 아닌 하나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이고 지금도 여전히 함께 걸어가 주시는 길입니다.  지치고 포기하여 쓰러져 있던 그 자리에 찾아와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힘이 다 빠져버린 저희를 끌어 안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셔서 우리도 누군가의 이웃으로 다시 섭니다. 그 은혜의 회복이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0706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4주)

우리를 부르신 곳에서

The Place Where God Has Called Us

누가복음 10:1-12

1 그 후, 주님은 일흔 제자들을 가려 뽑아 세우신 뒤, 자신이 장차 가시려고 계획한 동네와 마을로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2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너무도 적다. 그러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보다 많은 일꾼을 보내 달라고 하여라. 3 자, 가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구나. 4 너희는 갈 때, 돈이나 양식 자루나 여벌 신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하고 빌어라. 6 평화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평화가 임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면 너희에게로 그 평안이 되돌아올 것이다. 7 어느 마을에 들어가면, 오직 한 집에서만 계속 머물러라. 사양하지 말고, 주인이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제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8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거든, 너희에게 차려 주는 음식은 무엇이나 먹어라. 9 그리고 그 마을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여라. 10 그러나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곳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든, 그 마을의 큰길로 나와서 말하기를, 11 ‘우리는 우리 발에 묻은 너희 마을의 먼지조차도 붙이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하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장차 심판의 날에, 그 마을에 내릴 벌이 옛날 소돔이 받은 벌보다 더 가혹할 것이다.” (쉬운말 성경)

1 The Lord now chose seventy-two other disciples and sent them ahead in pairs to all the towns and places he planned to visit. 2 These were his instructions to them: “The harvest is great, but the workers are few. So pray to the Lord who is in charge of the harvest; ask him to send more workers into his fields. 3 Now go, and remember that I am sending you out as lambs among wolves. 4 Don’t take any money with you, nor a traveler’s bag, nor an extra pair of sandals. And don’t stop to greet anyone on the road. 5 “Whenever you enter someone’s home, first say, ‘May God’s peace be on this house.’ 6 If those who live there are peaceful, the blessing will stand; if they are not, the blessing will return to you. 7 Don’t move around from home to home. Stay in one place, eating and drinking what they provide. Don’t hesitate to accept hospitality, because those who work deserve their pay. 8 “If you enter a town and it welcomes you, eat whatever is set before you. 9 Heal the sick, and tell them, ‘The Kingdom of God is near you now.’ 10 But if a town refuses to welcome you, go out into its streets and say, 11 ‘We wipe even the dust of your town from our feet to show that we have abandoned you to your fate. And know this—the Kingdom of God is near!’ 12 I assure you, even wicked Sodom will be better off than such a town on judgment day.(New Living Translation)

성경강림절기 네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위로가 성도들 마음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에서 양은 인내와 순종, 온유한 성품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양은 사나운 동물로 부터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동물이라 목자를 따라 다닙니다. 반면에 이리와 같은 공격성이 강한 동물은 성질이 사납고 밤에 먹이를 찾아 다닙니다. 먹이사슬 관계로 보면 양은 이리에게 속수무책으로 잡혀 먹히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양이라는 단어로 양의 연약함을 더 부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서 장자의 죽음을 피할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흠 없는 어린양은 죽음의 심판으로 부터 구원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께서 이 땅에 흠이 없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치열한 세상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며 불편함도 겪게 되고, 손해도 보게 되지만 부르심의 자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장소입니다.

1. 우리는 부르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스스로 결정하거나 교회를 나가기로 선택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랍비들의 세계에서는 개인이 랍비를 선택하여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름에 믿음으로 응답한 사람들이 제자의 길을 따랐습니다. 이 부르심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라는 말씀을 믿을때, 우리는 나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신 구원의 감격에 붙들려 살아가게 됩니다. 아무 자격없는 우리를 예수께서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합니다. 만일 그 길을 떠나는 70인의 전도단이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전도를 할까 생각해야 한다면 양이 이리와 싸워서 이길 방법이 없으니 두렵고 걱정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어떤 일을 행하실까? 어떤 일들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생각한다면 주님께서 하실 일들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더 커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흔명의 제자들을 가려 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신중하게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열두제자를 세우실때에도 주님은 밤새 기도하시며 제자들을 신중하게 선택하셨습니다. 70명의 전도단을 보내실 때에도 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둘씩 짝이 되게 하셨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 4:9…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혼자서 애쓰는 것보다는 둘이서 함께 일하고 노력할 때 더욱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4:10 둘이면, 길을 가다가 그중에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얼른 자기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불쌍하게도 그를 일으켜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예수께 훈련받는 70명의 제자들이 서로 짝을 이루었다면, 35개의 팀입니다. 그 중심에 주님이 함께하실 때, 그 관계와 사역은 세 겹 줄처럼 견고해집니다. 주님의 능력이 주어진다면 사람이 흔들수도 없고, 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겹 밧줄은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 교회, 일터의 현장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죄로 인해 무질서 안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 이 땅을 회복시켜 가십니다. 사역의 현장에 일꾼이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으로 결단하면 됩니다. 그런데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기억해야 할 주님의 당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돈이나 양식 자루나 여벌 신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사명의 핵심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하고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당부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라는 의미 보다는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복음을 전하라는 권면입니다. 주님은 사역을 감당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7 어느 마을에 들어가면, 오직 한 집에서만 계속 머물러라. 사양하지 말고, 주인이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제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8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거든, 너희에게 차려 주는 음식은 무엇이나 먹어라.

바울이 선교사역을 끝까지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은 여러 동역자들의 후원과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역을 감당하게 하신 분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주님께 부름을 받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빛을 보고 눈이 멀어 사흘 동안 보지 못한 채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가 보낸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을때 눈에 비늘이 벗겨지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후 바울에게 삶의 우선순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보면, 성령께서 시작하셨습니다. 바울의 자기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장 1절입니다.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따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Ἀπόστολος라는 헬라어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기시고 세례를 주신 후에 ‘보냄을 받은 존재’로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사명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편한 길,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버티고 인내하며 끝까지 맡겨진 임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수많은 인생의 고비마다 무엇을 선택하고 따라가야 할지 매 순간을 고민합니다. 조금 더 잘 살아내고 싶고, 많은 것을 이루고 싶고 지금의 것을 지키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선택 속에서 살아갑니다.

TV 프로그램 ‘크레이지 리치 코리안’이라는 방송에 뉴욕 할렘가의 대모로 불리우는 베티박이라는 분이 소개되었습니다. 할렘가에서 40년째 식당을 하고 있는데, 자수성가해서 리치 코리안이 된 인물입니다. 그녀는 식당을 운영하며 여러 차례 권총 강도 피해도 입었는데, 그 할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믿었던 흑인 직원에게 큰돈을 횡령 당해 피해를 입었을때는 희망이 없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렘가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지역 사회를 돕고 베풀며 자신의 사업을 일궈냈습니다. 그러던 어떤 날 함께 일하던 둘째 아들이 갑작스런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가슴 아픈 사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둘째 아들의 이름으로 그 지역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들어 장학 사업을 하는 것이 소개되었습니다. 힘겨웠던 그 자리를 사랑과 헌신으로 품으며 포기하지 않았더니 그 땅에서 변화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두번째 주님의 당부는 가는 곳마다 평화를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평화입니다. 에이레네(εἰρήνη)라는 단어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는 기쁜 소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했던 사역의 현장은 늘 긴장과 갈등,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사람들에게서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과 치유도 이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세상에는 폭력과 비방, 죽음의 문화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저들과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됩니다. 다툼과 불화가 있는 곳에 주님의 평화를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죽음의 문화를 이길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갈때 죽음도 무력해 집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지만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그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12) 오늘날 분쟁의 시대에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단어를 적으시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세상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잃어가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0장은 ‘그 후’라고 시작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 길로 가는 중에 극단적인 요청을 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신 사건 이후입니다. 그리고 찾아와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제자도를 무장해야 한다고 역설적으로 대답하신 말씀 이후에 이어지는 본문입니다.

요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편한 길이 아닙니다. 세상이 얼마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지 우리는 매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당시 70명의 제자들이 파송받고 들어간 지역은 갈릴리 지방의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예수께서 많은 기적과 권능을 행하신 지역이지만 지역의 사람들이 복음 듣기를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장차 심판의 날에, 그 마을에 내릴 벌이 옛날 소돔이 받은 벌보다 더 가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복음에 응하지 않을 선택이 가능합니다. 회개의 기회를 져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진지하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거부당할 때도 낙심하지 마십시요. 정죄하는 마음보다, 간절히 기도하며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더 느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통당하고 매를 맞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며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가능할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의 마음에 영생에 대한 믿음을 간직했기 때문이고, 성령께서 이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손경민 목사님의 찬양인 가장 귀한 삶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삶이라 하여도 스치듯 지나는 삶이라 하여도 후회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것은 가장 귀한 삶을 앎이라 내가 꿈꾸는 일 이루지 못해도 내가 바라는 것 다 갖지 못해도  낙심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것은 가장 귀한 삶을 삶이라 내가 복음을 알고 복음을 믿고 내가 복음을 전하며 살아간다면 내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고 내가 예수를 전하며 살아간다면 나의 삶은 가장 귀한 삶이라” 때로는 아무도 모르는것 같은 삶, 실패에 주저앉아 포기하려고 했던 그 삶속에도 후회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것이 가장 귀한 삶입니다.

우리는 성경속에서 성공한 영웅들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연약함으로 쓰러지고 있지만 그 연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고 작은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이루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보내진 곳에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2. 부르심에는 헌신과 희생이 따릅니다.

2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너무도 적다. 그러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보다 많은 일꾼을 보내 달라고 하여라. 예수님은 우리를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일꾼은 추수할 일들을 하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실패처럼 보여도 그 자리에 복음이 뿌리 내려집니다.

래디컬의 작가 데이비드 플랫 목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예수를 따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왜 좋은것인지 수많은 질문에 한가지로 대답합니다. “Follow Jesus!”

예수를 믿으면 갑자기 완벽해져서 다시는 죄와 씨름할 일이 없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순간부터 지난날의 라이프 스타일을 단호하게 정리하고 과감히 새로운 생활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크리스천은 말 그대로 죄와 자신(자기중심, 자기소모, 독선과 방종, 자기노력, 자만)에 대해 죽은 존재다. 그리스도가 내면에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든 게 변하기 시작한다… … 마침내는 삶의 이유마저 변한다. 재물과 지위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안락하고 안정적인 생활환경 역시 관심사가 아니다. 자신을 우상으로 삼지 않으므로 안전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명보다 더 갈구하기에 이른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할수록 크리스천이 된다는 게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더 확고하게 깨닫는다. 속지 말라. 개인적으로 어떤 결단을 내렸고, 어떤 기도를 드렸으며, 무슨 카드에 서명을 했고, 몇 년 전 어느 집회에서 손을 들었었는지 등은 예수님과의 관계라든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영적인 지위의 토대가 될 수 없다. 초대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데이비드 플랫-FOLLOW ME 팔로우 미》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부르심의 자리는 내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 안에서 하나 될 때,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을 바로 잡아 주시고 참사랑과 기쁨의 나라를 이뤄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평화를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복음 앞에서 분명히 서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내 삶 안에만 머무르게 된다면 하나님의 일하심보다 사람의 열심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곳은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편하고 힘들고 이해 못하는 길 앞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갈등과 아픔 앞에서 내 상처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제자로서 함께 살아가다보면 서로의 삶을 통해 십자가를 살아내는 복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곳에서 복음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눈물과 기도의 흔적이 담겨 있는 자리에는 갈등과 아픔도 함께하지만 그 아픔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치열하게 부대끼는 삶의 현장에서 비로소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부르심 앞에서 무너졌던 순간, 모든 것을 다 내어 드려야 하는 온전한 순종 앞에서 느낀 불안, 내 안의 분노와 내 안의 상처와 마주하는 그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시작될 것입니다. 편안한 일상 속에 가려졌던 우리의 신앙생활은 위기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지 못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쌓아 둔 신앙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를 부르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신 일상의 자리에서 살아내야 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