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22 주일설교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Jesus Is The Living Stones

베드로전서 2:1~6

유민용 목사

2:1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과 거짓을 버리십시오. 위선자가 되지 말고, 시기하며 험담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이 모든 것을 없애십시오. 2 갓난 아기가 젖을 찾듯이 순결한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나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지 않습니까? 4 우리 주 예수님은 ‘산 돌’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돌을 버렸지만, 그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머릿돌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귀한 존재로 그분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로 오십시오. 5 여러분도 산 돌처럼 거룩한 성전을 짓는 데 사용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적인 희생 제사를 올려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희생제사를 받으실 것입니다. 6 성경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시온에 주춧돌을 놓고, 이 보배로운 돌 위에 모든 것을 세울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쉬운성경) 1So get rid of all evil behavior. Be done with all deceit, hypocrisy, jealousy, and all unkind speech. 2Like newborn babies, you must crave pure spiritual milk so that you will grow into a full experience of salvation. Cry out for this nourishment, 3now that you have had a taste of the Lord’s kindness. 4You are coming to Christ, who is the living cornerstone of God’s temple. He was rejected by people, but he was chosen by God for great honor. 5And you are living stones that God is building into his spiritual temple. What’s more, you are his holy priests. Through the mediation of Jesus Christ, you offer spiritual sacrifices that please God. 6As the Scriptures say,“I am placing a cornerstone in Jerusalem, chosen for great honor, and anyone who trusts in him will never be disgraced.” (New Living Translation)

한주간도 잘 지내셨지요?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밤낮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성령 강림절기를 보내고 있는 케임브리지 교우들 삶에 성령의 바람이 감싸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9월이면 새학기도 시작되고 새로운 낯선 환경을 마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반복되는 일들 속에 무심히 9월을 맞이하는 이들도 있겠지요. 이처럼 같은 시간을 살아도 서로의 마음의 온도는 저마다 다릅니다. 우리는 마음의 온도차에 주목하며 실망하기도 하고 답답해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접속되는 순간 마음의 밭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누군가의 마음 밭은 싹을 내지도 못하는 땅이 드러나고, 혹은 싹은 내는데 곧 말라죽는 땅이 드러나고, 어느 정도 자라지만 곧 결실을 맺지 못하는 땅도 드러납니다. 케임브리지 교우들은 말씀에 반응하여 100배의 결실을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우리가 떠난 자리에 주님만이 드러날 수 있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현실속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서 있던 자리에 주의 이름이 높여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난 가운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래 우리는 죄가 가득한 연약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악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악한 감정이 아니라 자연 상태의 악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순수해 보여도 죄를 지닌 채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0) 라고 하십니다. 본문에도 보면 죄를 먼저 열거 하는데 첫째는 악과 거짓이요, 둘째는 위선과 시기이며, 마지막으로는 험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서 없애라고 하십니다. 외식과 시기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죄이며, 험담하는 말은 언행에 관련된 것으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경계하고 있는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입니다.

왜 순전한 말씀을 사모하기 전에 이러한 내적인 죄를 자각하라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 어떤 불의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악과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한다’를 원어 성경에 보면 ‘아포떼메노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1.‘관계를 끊다’ 2. ‘벗어 버리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 위선과 시기, 험담하는 자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사랑의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시기와 험담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증폭이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하게 되면 우리는 자기확신에 열광하거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번째는 ‘벗어 버리다’ 입니다. 우리는 죄의 옷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옷은 단지 걸치고 있는 것일 뿐 몸의 일부는 아니지요. 악과 거짓, 위선과 시기, 험담하는 말은 옷일 뿐입니다. 이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거룩이 없는 사랑은 죄로 인해 반드시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과 거짓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도 없고 제한도 없는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바울이 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말하고 있지요. 우리는 순수한 사랑에 가까이 나아갈수록 마음이 거룩해지고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시니 죄의 옷은 자연스레 벗게 됩니다.

생명의 탄생은 참 신비롭습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랑과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충만은 컵에 물이 채워지듯이 일시적으로 채우고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의 성품과 인격, 삶의 모든 부분에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게 될때에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전인격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벧전 2:2) 그러니 성령의 충만함은 일시적인 감정의 확신이 아니며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일입니다. 갓난아이에게는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서 어미의 사랑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최고의 양식인 영적 예배는 필수적이어야 합니다. 영적예배를 통해 순전한 말씀을 사모하며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이 일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숙해집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교만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그리스도만이 가장 공평하시고, 가장 위대하시며, 모든 것에 으뜸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작은 그릇에, 자기애로 가득한 옹졸한 그릇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끊임없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벧전 2:3)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은 이전에 알지 못하던 것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그분의 성품으로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말하는 것으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은 그분의 성품과 행동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게 되고 주안에서 형제를 대하는 작은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AD 30년 경에 육신으로는 단 한번 활동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분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하여 그분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신 일을 지속하고 계시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있게됩니다. 그러니 거룩함은 외적인 분리됨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 내면의 변화, 마음의 변화인 것입니다. 식당에 가보아도 느낄 수 있습니다. 친절한 직원을 만나면 우리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피곤에 찌들고 일의 불평이 있는 직원은 당연히 불친절 할 수 밖에 없지요. 우리는 어떠한 얼굴과 모습으로 교회의 지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을 생각할 때에 죄로 물든 마음에 일평생 수만가지의 감사가 솟아 오르고, 세상의 근심과 복잡한 현실속에 있는 우리에게 성령께서는 하늘의 기쁨을 마음에 퍼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 가득 지속적으로 채워지도록 나의 손과 발이 나의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를 대하듯 형제를 사랑 하십시요.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사로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상속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 하시 않으시고 너희는 소금이라 빛이라 하셨습니다. 이미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돌을 버렸지만, 그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머릿돌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귀한 존재로 그분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로 오십시오. (벧전 2:4)

길가에 버려진 돌들은 참 투박하고 평범합니다. 그러나 수석가들은 돌에 담겨진 자연을 본다고 합니다. 돌 속에 담긴 자연의 생명을 보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산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 역사의 반석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아무리 투박한 돌이라 해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게 되면 그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면 보잘 것 없는 인생이 존귀한 인생이 되어지고, 욕망을 따라 살던 옷을 벗어 버리게 되니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욕심과 이기심으로 형을 속이고 나서 불안과 두려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집을 떠나 기나긴 나그네 길에 오릅니다. 도망치듯 빠져나온 고향집을 뒤로 하고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286마일의 머나먼 여정길에 오르게 되지요. 얼마간을 걸어서 칠흑 같은 밤이 되었을 때 한 장소에 도착합니다. 이때 야곱은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하지만 그곳은 야곱의 일생에 처음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였습니다. 아무도 반겨주는 이가 없고 노숙을 하며 인간의 불안감이 극에 달해 있을 때,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베고 자던 투박한 돌 베개에 하늘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기둥으로 세운 그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바로 벧엘이라는 장소입니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는 세계 최대의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제1호 보물은 그리스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는 “로제타 스톤”이라는 돌이라고 합니다. 로제타 스톤에는 세 종류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문자는 인류의 숙제인 고대 이집트 문자를 풀게 해 주었답니다. 그래서 세상에 가장 값진 보물이 되었습니다. 1799년 나폴레옹 군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발견하였을때는 누구도 그 돌이 큰 보물인 줄 몰랐다가 새겨진 문자에 의해서 값비싼 보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돌 같이 단단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은 마음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면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아도 그것은 구원을 이뤄가는 삶이 아닙니다. 굳은 마음, 미워하는 마음, 시기와 험담하고 싶은 마음을 제거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마음을 갖어 보십시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지요. 그래서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의 권위가 그분에게만 있으니, 우리는 포도나무요, 사랑이신 주께 붙어 있을때,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지닌 산돌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며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잘 보살피라고 권면하지 않습니까? (행 20장 17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부족해 지면 영적 빈혈이 생기고 본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의 집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 세상에 증언 되어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먼저 그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에 있지요. ‘결국엔 하나님의 사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에 우리는 모두 외로운 존재이며, 근원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사랑에 목말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즉 사랑과 사람이 삶의 본질임을 말해줍니다. 주님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인생의 중심에 사랑이 중요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참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낮아져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퍼 주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말씀이 되어 마음에 새겨지니 새 생명이 잉태되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되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말고 다른 기초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삶의 반석이 되지 않으면, 모든 삶은 결국 허물어집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와 명예를 얻을지라도 인생의 마지막은 허망함입니다. 예수님이 앞 서 가신 길을 알지 못하니 스스로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베드로도 처음에는 그 길을 알지도 못했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참 사랑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돌이 되시는 예수를 체험하고 만나고 나서는 고난 속에서도 낮아지신 길, 섬기신 길, 자기 희생의 길로 나가셔서 하늘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주님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며,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되시오니, 지도에 없는 길을 걷는다 해도 주께서 걸으신 발자욱만 보고 따라가다 보면 주의 은총이 우리를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벧전 2:6)

베드로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는 불안정한 로마시대에 고난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반석이 되시며 산돌이 되셨음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있는 사람들, 선한 목자가 내 이름을 알고 계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포도나무에 끝까지 붙어 있는 가지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교회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보이는 교회를 남기지 않고 떠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건물을 더 중요시 하는 어리석음을 보였기에 예수는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세울 것이라 하시고, 당신의 몸이 성전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주님은 목마른 자들의 생수가 되어 주시고, 낮은 곳 모퉁이에 세워진 사방을 연결하는 머릿돌이 되십니다.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산돌들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로 함께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은 개인적이지만, 구원받는 사람은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들 속에서 부르신 사명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아는 태도로 공동체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길이 닦여지고 많은 이들의 살아나면 좋겠습니다. 소금은 맛을 잃어 버리면 한낱 모래알에 불과해 길가에 버려 집니다. 내 손에 쥔 말씀의 등이 빛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집니다. 빛이 드러날때에 마음의 불편함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것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욕망은 모래 위에 성과 같아서 결국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사람의 감정은 어디로 불지 모르는 바람과 같습니다. 무엇을 기초로 하여 인생의 돌을 쌓아 올리시겠습니까? 산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기본과 기초로 삼고,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함께 지어져 갈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나는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이들에게, 애썼다고, 고맙다고 토닥여 주며 격려해 주십시요. 그리고 스스로 격려하시고 서로를 격려해 주십시요. 나의 말투, 작은 습관, 행동과 눈빛, 태도 아주 작은것까지도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하여 주시는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선한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도 이 확신을 붙들고 나아가려합니다. 이 여정속에 함께 하는 여러분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줄 이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하고 걷는 길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배어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에 기쁨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8.21.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1)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

Go Into All The World

마가복음 16:15-16, 19

김태환 목사

1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세상으로 가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19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마치시고, 하늘로 들려 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쉬운성경)

15 He said to them,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16 Whoever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will be condemned……..19 After the Lord Jesus had spoken to them, he was taken up into heaven and he sat at the right hand of God. (New International Version)

한자 사자성어에 ‘신신당부(申申當付)’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듭하여 간곡히 당부하다”라는 뜻입니다. 영어에 ‘entreat’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구약성경 신명기를 영어로 ‘Deuteronomy’라고 합니다. ‘deutero-‘라는 말은 ‘두 번째(second)’라는 뜻입니다. ‘-nomy’라는 말은 ‘법(law)’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출애굽 1세대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고 그들의 자녀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출애굽 2세대들에게 그들의 부모들에게 했던 출애굽기와 민수기 말씀을 다시 한번 가르친 것이 ‘신명기’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명기’를 한자로 쓸 때 ‘申命記’라고 쓰거든요? ‘申’자는 ‘신신당부’할 때의 ‘신’자와 같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제발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가나안 땅의 풍요로운 삶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꼭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책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All authority has been given to me in Heaven and in the earth; in the manner in which my Father has sent me, I am sending you(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마태복음 28:18, Aramaic Bible in Plain English)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말씀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all authority(모든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도 출애굽 2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농경문화의 풍요로움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신신당부’해도 부모님의 당부를 깜빡 잊어버리고 지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말을 꼭 지켜 달라고 ‘신신당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권위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을 우리는 ‘The Great Commission(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우리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어떤 상황에 있든지, 반드시 수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의 의미를 잘 알았기에 제자 디모데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 4:2) 이 말씀을 Amplified Bible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Preach the word [as an official messenger]; be ready when the time is right and even when it is not [keep your sense of urgency, whether the opportunity seems favorable or unfavorable, whether convenient or inconvenient, whether welcome or unwelcome] 말씀을 전하기에 좋은 때든지 아니든지, 항상 말씀을 전해야 하는 긴급함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우리에 좋게 돌아갈 때가 있고, 좋지 않게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편리한 상황이 있고 불편한 상황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영받을 때가 있고 환영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핑계대지 말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전파의 긴급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히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상명령’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내가 감옥에 있으나, 오히려 사람들은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고, 나를 돕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전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전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것 때문에 기뻐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1:14-15, 18)

여러분,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라는 탐 크루즈(Tom Cruise)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셨지요? 지금 6편까지 나왔고요. 8편까지 이미 예고가 된 영화입니다. 1편은 1996년 5월에 상영되었습니다. 탐 크루즈가 CIA 본부에 들어가서 컴퓨터를 해킹해서 동유럽에서 활동하는 첩보원들(NOC)의 명단을 빼낸다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이단 헌트(Ethan Hunt)는 이 명단을 가지고 무기 밀매상 맥스(Max)와 연계되어 있는 CIA 내의 내부 첩자 코드명 ‘욥’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주인공 이단은 그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CIA 비밀 정보를 다루는 방으로 침투해 들어갑니다. CIA에 들어가서 정보를 빼낸다는 것은 말 그대로 ‘Mission impossible(불가능한 임무)’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이단 헌트는 이 불가능한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1편의 드라마틱한 장면을 몇 개 보여 드리겠습니다.

철통 같은 보안시설이 되어 있는 CIA 본부에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불가능한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러다가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지상명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지상명령’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정보 하나를 빼내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수행해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Go and make disciples of all the nations①/①Or all peoples (마태복음 28:19)”고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라는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πάντα τα ἔθνη’라고 되어 있습니다. ‘ἔθνη’라는 말은 영어의 ‘ethnicity’입니다. ‘ethnic group’이라고 하면 같은 문화와 언어, 역사, 종교를 공유하는 그룹을 말합니다. 2022년 현재 세계에는 193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 안에 수천개의 ‘ethnic group’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나의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교회를 세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서 이 사람들은 나의 제자로 만들라고, 나의 말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의 기독교 선교 단체들이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수행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타문화권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17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까지 수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나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미국 장로교 선교사)나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1902, 미국 감리교 선교사) 같은 선교사들이 들어온 덕분에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기 위해 노방 전도를 하고,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짓고, 병원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다가 1900년대 후반에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라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라틴어로 ‘미시오 데이(Missio Dei)’라고 합니다.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낼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개념이 나오면서부터 선교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선교는 단순히 타문화권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우리를 내보내시는 모든 삶의 현장이 선교의 현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삶의 전 영역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렇게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면서부터 ‘섬김(service)’이라는 개념이 선교의 핵심 개념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선교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신 것처럼, 선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섬김’의 삶을 통하여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마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너희는 세상으로 들어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5) 마가복음에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대신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Go into all the world)”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제가 10여년 전에 이 말씀을 보스턴 다운 타운에 있는 구세군 본부에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보스턴에 한국 구세군 사관이 한 분 발령을 받아서 오셨습니다. 그 분을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1층 로비에서 그분을 기다리면서 여기 저기를 둘러보다가 한 쪽 벽에 영어로 쓰여 있는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지상명령’이라고 하면 주로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생각하게 되는데, 마가복음으로 읽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대한 말씀은 저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go into’라는 말이 마음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안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간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단순히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학교 강의실이 될 수도 있고, 그곳이 일터가 될 수도 있고, 손님을 맞이하고, 손님과 인사하고 대화하는 비즈니스 현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그 자리가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서로 대화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자리가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서 만나 수다를 떠는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목적을 가지고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상명령’ 속에 나오는 “Go into all the world(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갈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목적을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크리스천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선한 영향력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하듯이 열심히 일하십시오(Work willingly at whatever you do, as though you were working for the Lord rather than for people).” (골로새서 3:23) 얼핏 보면 이 말씀이 소극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이 말씀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최근 들어 크리스천의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누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참 시대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우리 시대에 가장 적절한 선교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영향력’이라는 말을 직접 쓰시지는 않았지만, 이미 제자들의 ‘선한 영향력’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3-14, 16)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들어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씀 아닙니까?

2,000년 전에, 지금의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에서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기들끼리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신자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좀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1세기에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은 ‘pestilent fellows (사도행전 24:5, KJV)’라고 욕을 먹었습니다. 전도자들을 무서운 전염병인 ‘페스트를 퍼뜨리는 놈들’이라고 욕을 한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새들백교회의 담임 목사인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가 쓴 ‘Becoming a Contagious Christian(1996, Mark Mittelberg와 공저)’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1세기의 전도자들은 ‘Contagious Christians’였습니다. 이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은 전염병에 감염되듯이 모두 복음의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 1세기의 전도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가리켜 ‘예수님의 향기(the aroma of Christ, 고린도후서 2:15)’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에 여러분에게 소개했던 Travis Scott의 말이 생각납니다. “You will never influence the world by trying to be like it(세상을 닮으려고 함으로써 결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하는 사람은 크리스천으로서 자기 정체성(identity)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침투해 들어가서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섬김의 삶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서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Contagious Christian’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크리스천다운(Christian-like)’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시대에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8.7.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0)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If You Believe, You Will See God’s Glory

요한복음 11:33-43

김태환 목사

38 예수님께서는 몹시 아픈 마음으로 무덤에 가셨습니다. 그 무덤은 입구를 커다란 돌로 막은 굴이었습니다. 39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가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오빠가 죽어 무덤에 있은 지, 이미 사 일이나 되어 냄새가 심하게 납니다.” 40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41 그래서 사람들이 입구에서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제 말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42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제 말을 들으시는 줄을 제가 압니다. 그러나 저는 주위에 있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음을 믿게 하기 위하여 이 말을 한 것입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후,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쉬운성경)

38 Jesus was still angry as he arrived at the tomb, a cave with a stone rolled across its entrance. 39 “Roll the stone aside,” Jesus told them. But Martha, the dead man’s sister, protested, “Lord, he has been dead for four days. The smell will be terrible.” 40 Jesus responded, “Didn’t I tell you that you would see God’s glory if you believe?” 41 So they rolled the stone aside. Then Jesus looked up to heaven and said, “Father, thank you for hearing me. 42 You always hear me, but I said it out loud for the sake of all these people standing here, so that they will believe you sent me.” 43 Then Jesus shouted, “Lazarus, come out!” (New Living Translation)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날은 시원한 환경 속에서 예배를 드리면 좋은데, 지난 주에 에어컨 작동 안 하는 것이 있어서 고쳤습니다. 오늘은 본당이 비교적 시원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오늘은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 열 번째 시간으로 ‘믿음’에 대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많이 들어서 잘 아는 말 같은데, 무엇을 믿는 것인지,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지, 믿음의 결과는 무엇인지, 믿음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히브리서 11:6 말씀인데요.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without faith. Anyone who wants to come to him must believe that God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sincerely seek him.” 이 말씀 속에 믿음에 대하여 꼭 알아야 할 것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감정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할 수 있으면,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제가 믿습니다! 제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마가복음 9:22-24) 이 아버지에게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악한 영이 들어가서 시도 때도 없이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저러다가 내 아들이 물 속에 빠지고 불 속에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한 나머지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을 보세요.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Anything is possible if a person believes).” 여기서 ‘믿는 사람’이란 무엇을 믿는 사람을 말할까요? 한번 답을 찾아보세요. ①자기 아들의 병이 나을 줄로 믿는 사람 ②무엇을 믿는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다. ③이 아버지에게 아들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부족한 것을 지적한 말이다. ④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을 말한다.

언젠가 제가 ‘believe in’이라는 말의 의미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영어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I believe in God”이라고 하거든요? Merriam-Webster 사전에 보면 ‘believe in’에 세가지 의미가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1) To have faith or confidence in the existence of God (하나님이 계시다고 확신하는 것) (2) To have trust in the goodness or value of God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것) (3) To have trust in the ability of God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어떻습니까? 히브리서 11:6에 나오는 말씀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미국 화폐에 “In God we trust”라고 작은 글씨로 씌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24)”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재물’이라는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μαμμωνας (맘모나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맘몬’입니다. 영어는 ‘mammon(매먼)’이고요. 예수님은 이 ‘맘모나스’를 의인화시켜서(to personalize) 돈이 사람을 지배하면 그 사람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미국을 세운 믿음의 선조들은 돈에 경고문을 써넣은 것입니다. 돈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요.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돈에 그런 경고문을 써넣은 것이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둘째로, 히브리서 11:6 말씀은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He rewards those who sincerely seek hi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진실하게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자기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그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personal relationship)’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서부터 하나님께서 해 오신 약속입니다. 보세요.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And you will seek Me and find Me, when you search for Me with all your heart).” (예레미야 29:13)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But from there you will seek the LORD your God, and you will find [Him] if you search for Him with all your heart and all your soul).” (신명기 4:29) 두 말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든지 상관없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속한 모든 교우들이, 그리고 특별히 청년들이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youthful lusts)’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디모데후서 2:22). 여러분, 다윗이 쓴 시편 말씀을 한번 들어 보세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the LORD).” (시편 144:15)

이런 믿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에 대해서는 특별한 소개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어주었던 사람이라는 바로 마리아였다고 합니다. 마르다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던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에 모셔 대접을 했습니다(누가복음 10:38-42). 그리고, 나사로에 대해서는 ‘주께서 사랑하는 사람(Lord’s dear friend, 요한복음 11:3)’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은 이 세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매우 위독하다는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만사를 제쳐 두고 베다니로 달려가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오빠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지금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지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1:5-6) 요한이 이렇게 기록한 것을 보면 그 때 제자들도 왜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달려가지 않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지난 후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베다니에 가 보니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된 때였습니다. 오빠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슬픔에 싸여 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격한 감정이 들어 몹시 마음 아파하셨고(요한복음 11:33)”,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Jesus wept)(요한복음 11:35)”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Amplified Bible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was deeply moved in spirit [to the point of anger at the sorrow caused by death] and was troubled(그는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 대해 분노할 만큼] 심령이 깊이 감동되어 근심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예수님께서 왜 슬퍼하셨고, 왜 분노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슬퍼하셨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 중에서 가장 큰 연약함은 죽음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인용합니다. 인용할 때는 꼭 그 사람이 언제 나서 언제 죽었는지 년도를 찾아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몇 주 전에 소개했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같은 천재 화가는 1853에 나서 1890년 죽었습니다. 37살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가 그림을 그렸던 기간은 10년에 불과합니다. 참 아깝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연약함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시면서 슬퍼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인간의 무지(無知)를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요한복음 11:25)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Any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after dying(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죽은 후에도 살 것이다).” 셋째로, 예수님은 말씀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Didn’t I tell you that you would see God’s glory if you believe)?” (요한복음 11:40)

마르다는 예수님이 언젠가 말씀해 주신 이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퀴즈를 해 볼까요? 예수님께서 “If you believe(네가 믿으면)”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믿으라는 말인가요? ①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로 믿으라는 말이다. ②무엇을 믿으라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③하나님의 영광을 불신하지 말라는 말이다. ④ “나를 믿으면(if you believe in me)”이라는 말이다. 이 중 몇 번이 정답인가요?

Amplified Bible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id I not say to you that if you believe [in Me], you will see the glory of God [the expression of His excellence]?” ‘glory of God’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탁월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시는 최선의 것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Faith is to believe what you do not see; The reward of this faith is to see what you believe(믿음은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에 주어지는 보상은 당신이 믿는 것을 보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해 주신 일 중에 가장 탁월하신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But to all who did receive him,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요한복음 1:12, English Standard Version)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신 것입니다. ‘right’라는 말 대신 ‘privilege(특권)’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일이 얼마나 놀랍고 흥분된 일이길래 요한은 이런 ‘특권’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했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바울은 로마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의 상속자들(co-heirs with Christ)’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8:17) 예수님을 믿기 전 ‘죄인’이었던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상속자’로 신분이 격상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로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즘에 ‘최애(最愛, bias)’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최애 영화’ ‘최애 책’ ‘최애 노래’ ‘최애 음식’ ‘최애 친구’라는 말을 씁니다. 요한복음 11:40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 말씀을 여러분의 ‘최애 말씀’으로 한번 삼아 보시겠습니까? 생각했던 대로 일이 잘 안될 때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힘을 내시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금방 베다니로 달려가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수님의 기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믿게 하기 위하여(so that they will believe you sent me)” (요한복음 11:42) 그래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씀을 증명하시려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때도 우리가 완전히 절망하도록, 우리가 죽기를 기다리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은 그냥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탁월하심이 드러나는 자리가 됩니다.

7.31.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0)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라

Make A Good Influence On The World

마태복음 5:13-16

김태환 목사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15 등불을 됫박 안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놓는다. 그래야 등불이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쉬운성경)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what good is salt if it has lost its flavor? Can you make it salty again? It will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foot as worthless. 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like a city on a hilltop that cannot be hidden. 15 No one lights a lamp and then puts it under a basket. Instead, a lamp is placed on a stand, where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16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so that everyone will praise your heavenly Father. (New Living Translation)

요즘에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중에도 ‘선한 영향력’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7절).” 그리고 이 말씀 앞에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예전에 최일도 목사님이 리뉴에 강사로 오셔서 이런 일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최 목사님이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을 듣던 중에 하용조 목사님이 자꾸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귀에 거슬려서 손을 들고 “목사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소금과 빛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크리스천 잡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일도 목사님의 지적 때문인지 잡지 이름이 1999년 4월 호부터 ‘소금과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이름을 바꿨는지, ‘빛과 소금’이든지 ‘소금과 빛’이든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Travis Scott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You will never influence the world by trying to be like it(세상을 좋아하고 따라가면서 결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에 인사이트를 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상의 유행과 트렌드를 좋아하고 따라가면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 로마서 12:2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을 아시지요?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더 이상 세상의 유행을 본받지 말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하나님이 여러분을 변화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맞습니까?

여러분,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하여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진들을 보십시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처에 많은 위험들이 있습니다. 거센 물살을 거스르면서 힘들게 뛰어오르는데, 곰들이 입을 벌리고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연어들이 자기들이 태어난 강 상류로 가서 알을 낳는 것은 타고난 본능(本能, instinct)이라고 합니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평균 1,000마일(1600km)을 여행한다. 온갖 상처를 입으며 강물을 역류해 올라가는 고난을 감수한다. 연어는 알을 낳기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그리고, 알을 낳으면 그 생을 마감한다.” 연어의 이런 본능이 마치 이 시대의 사상과 유행을 본받지 않고 거슬러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크리스천들의 운명과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둘째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지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좋은 ‘교제(fellowship)’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혼자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같이 드리는 예배가 필요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내 옆에 앉은 형제와 자매와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제의 필요성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제를 통하여 격려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연대의식(連帶意識, solidarity)’을 갖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에 대한 공동의 책임의식을 배우고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입니다. 교회를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다른 이유를 가지고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면 크리스천으로 가져야 할 바른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22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며, 믿음과 사랑과 평안을 추구하기 바랍니다(Instead, pursue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Enjoy the companionship of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 좋은 믿음의 친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5:3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쁜 친구를 사귀면 좋은 습관도 나쁘게 됩니다.” 두 말씀 모두 교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어떤 생각으로 그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선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세상의 소금(salt of the earth)’이라는 말씀입니다. 빛에 대해서도 똑 같이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of’라는 전치사에 ‘~에 속한’이라는 뜻이 있지만 이 경우는 ‘~에 속한’이라는 뜻보다는 ‘specific identity within a category’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세상에서 소금이라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소금은 ‘짠 맛’을 유지하고 있을 때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유지할 때 맛을 낼 수도 있고, 썩는 것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또 소금의 ‘짠 맛’을 섭취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소금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 땀을 많이 흘리면 우리 몸이 짠 음료수나 짠 음식을 원합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진을 한번 보세요. 이 산양들이 왜 이렇게 위험한 절벽에 붙어 있을까요? 놀라지 마세요. 바위에 붙어 있는 소금기를 빨아먹기 위해서 이 산양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소금의 ‘짠 맛’이 소금의 정체성이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Danie & Jessi 두 사람이 공동으로 “How to Be a Christian Influencer(크리스천으로 영향력을 갖는 비결)”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선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 먼저 “건전한 신학을 가져야 한다(Make sure you have good theology)”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완전히 공감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아무리 유능하고 인정받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 건전하지 않으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건전한 신학(good theology)’은 마치 인정받는 회사에서 나온 제품과 같습니다. 저는 신학서적이나 신앙 서적을 살 때 제일 먼저 이 책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는지 출판사를 봅니다.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면 믿을 수 있는 그런 출판사들이 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그럴듯해 보여도 사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온라인에서 아주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와, 이런 좋은 글이 있다니!” 하면서 저자가 누구인지 봤는데 누군지 이름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력을 봤더니 굉장한 이력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가는 교회를 봤더니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일명 몰몬교)’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 교단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이단 종교에 깊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의 글을 설교 시간에 인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믿음이 건전한 신학의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희생(sacrifice) 정신’입니다. ‘희생’에 대하여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ransom)’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생명을 내 준 대가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고린도전서 6:20, 7:23) 이 은혜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희생’이라는 말이 갖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희생’이라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는 ‘희생’이라는 말이 부담스럽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생’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희생은 다른 말로 하면, 이기적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Kenneth Blanchard라는 사람의 말인데요. “The key to successful leadership today is influ-ence. not authority(오늘날 성공적인 리더십을 위한 핵심 단어는 권위가 아니라 영향력이다).” 참 신기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한순간에 ‘권위주의’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어디에서도 ‘권위주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는 ‘권위주의 리더십’ 대신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말합니다. 구성원들을 내 몸같이 돌보고, 희생하고, 섬김으로써 공동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선한 행동(good deeds)’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16절)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선한 행동’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전통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더 이상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든지 심한 근시안입니다.” (베드로후서 1:9, 현대어 성경) ‘근시(近視, shortsighted)’는 가까운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먼 데 있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큰 그림으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베드로는 ‘근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선한 행동’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 구원의 큰 그림을 봐야 합니다.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셔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0)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모나리자’ ‘최후의 심판’ ‘메시야’ ‘천지창조’ 같은 작품들을 ‘걸작품(masterpiece)’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건전한 신학과 희생, 그리고 선한 행동, 이런 것들이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이 세상에서 나의 제자로서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 나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교회를 지을 때 예수님 말씀 대로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지었습니다. 교회에서 종을 치면 온 동네에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비 콕스(Harvey Cox)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1965년부터 2009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44년 간 하바드 신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세속도시(The Secular City, 1965)’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세속화되는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논의한 책입니다. 그가 예언자적인 안목으로 그 책에서 다루었던 교권 세습 문제, 성장제일주의, 교회의 대형화 경쟁 등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오늘날 교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Harvey Cox는 세속화된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로 ‘익명성(anonymity)’을 들었습니다. Harvey Cox 말이 맞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군중 속에, 대중 속에 숨어 정체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큰 대형 교회에 가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산 위의 동네처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익명성’이라는 시대 정신과 싸워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이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위기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