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6 2023 주일설교

(성령강림후 제 10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결코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수 없습니다.

The things made by human hands can never take the place of God.

사도행전 19: 23-28,32-41

유민용 목사

23  그 무렵, 에베소에서는 사도들이 전한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큰 소동이 일어났다. 24 아데미 여신의 모형 신전을 만드는 ‘데메드리오’라는 은세공업자는 직공들에게 적잖은 돈벌이를 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25 그가 직공들과 그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말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 사업으로 돈벌이가 꽤 괜찮았었습니다. 26 그런데 여러분이 듣고 또 보시는 바와 같이, 저 ‘바울’이라는 작자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결코 신일 수가 없다고 말하고 다니는 통에, 우리 장사가 아주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 에베소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방의 거의 대부분이 이런 실정입니다. 27 이 일을 이대로 방치해 두면, 우리 사업의 평판이 크게 나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위대한 아데미 여신의 신전이 그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아시아 지방은 물론, 전 세계에 걸쳐 숭배되었던 아데미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28 이 말을 듣고, 모인 사람들은 크게 화를 내면서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에베소 사람의 위대한 여신, 아데미 만세!”…32 에베소의 원형극장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마구 떠들어 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 34 그러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아챈 군중은, 한 목소리로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에베소 사람의 위대한 여신, 아데미 만세! 에베소 사람의 위대한 여신, 아데미 만세!” 하면서, 미친 듯이 외쳐 댔다. 35 결국 에베소 시청의 서기관이 나서서, 군중을 진정시킨 뒤 말했다. “에베소 시민 여러분, 에베소가 위대한 여신 아데미를 숭배하고, 또 하늘에서 내려온 그 신상을 수호하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36 이런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모두들 진정하시고 경솔한 행동을 삼가 하시기를 바랍니다. 37 여러분들이 이리로 끌고 온 이 두 사람은, 아데미 여신의 신전에서 무엇을 훔친 것도 아니고, 또 아데미 여신을 모독한 일도 없습니다. 38 그러므로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료 직공들은 불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정식으로 고소하도록 하십시오. 에베소의 법정은 항상 열려 있고, 거기에는 재판관들도 있습니다.39 그 밖에 여러분이 제기하고 싶은 사안들이 더 있거든, 그런 것들은 공적인 정식 집회에서 안건으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40 사실, 오늘의 이 사건은 소요죄로 고발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에게는 이런 소동을 벌일 만한 뚜렷한 이유와 정당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로마 정부로부터 문책을 당할 때 해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41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원형극장에 몰려든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쉬운말 성경)

팀켈러 목사는 ‘내가 만든 신’이라는 그의 책에서 앤드류 카네기의 자서전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그는 33세의 나이에 세계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자신을 성찰하며 “나에게 쓰는 글”을 작성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우상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부의 축척은 우상숭배 중에서도 최악에 속한다. 돈을 숭배하는 것보다 사람의 격을 떨어 뜨리는 우상은 없다. 그러므로 가장 고상한 성품을 길러 줄 삶을 신중히 선택하려면 나는 매사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나치게 긴 세월을 사업 걱정에 매달려 최단기간에 돈을 더 벌 생각밖에 모른다면, 영영 회복될 가망 조차 없이 삶이 저급해 질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서른다섯에 사업에서 손을 뗄것이며, 앞으로 2년 동안도 오후 시간은 꼭 공부하고 체계적으로 책을 읽으며 보내고 싶다” 카네기는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후 이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그의 자서전에 보면 깨닫고 난 후에도 여전히 사업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우려 했던 대로 삶의 격을 떨어뜨리는 삶의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마음 안에 우상이 있음을 깨달아도 그 우상을 밀어내는 구원의 힘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 구원자 되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죄성과 연약함을 온전히 바라보게 하시고 죄로 무뎌지는 마음을 날마다 회개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바르고 선하며 큰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점잖고 고상하고 선한 사람도 마음안에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안에서 내 마음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마주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고 거룩한 삶을 만나게 됩니다.

신상 앞에서 3천배를 하고, 평생을 수도사로 살며 마음 비워내도 또 생겨나는 것이 죄성입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선행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모든 종교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범신론적 세계관은 매우 관용적이고 포용적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는 배타적인 것처럼 보여지는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기독교가 종교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복음화율이 현격히 떨어지고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사회속에서 차별을 받는 시대입니다. 상황은 달라도 박해받던 초대 교회 시기와 비슷한 상황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유를 자신의 능력에 두지 않고,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 교리가 비관용적, 비포용적, 비평화적이라고 말하는 종교 다윈주의적 생각도 기독교 진리를 핍박하는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에베소 지역에 살던 주술사들이 회개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엄청난 양의 주술책들을 태워 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데미 여신을 통해 기념품 사업을 하며 살아오던 데메드리오에게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이 지역에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데미 신으로 만든 기념품을 파는 데메드리오는 세공업자들의 조합장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돈벌이를 제공해 준 듯 보입니다. 당연히 영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메드리오가 생계에 위협을 느끼자 모든 관계자들과 종사하던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전도를 그냥 방치하게 되면 아시아 지방까지 전세계 아데미 여신을 통해 하던 사업이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조합원들에게 불안감을 조장시킵니다. 그의 속마음은 실제로 어땠을까요? 아데미 신전이 위엄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것도 있겠지만 자신의 돈벌이에 대한 염려가 더 컸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류역사 이래 돈은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소유를 통해서 인생을 확인하는 삶에 있어서 돈의 힘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이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은으로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팔며 돈을 버는 일과 아데미 신을 믿는 종교성까지 더해지니 데메드리오 외에 그 일을 하던 사람들의 마음에는 분노가 차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28 이 말을 듣고, 모인 사람들은 크게 화를 내면서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에베소 사람의 위대한 여신, 아데미 만세!…32 에베소의 원형극장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마구 떠들어 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 라고 기록합니다.

데메드리오의 말에 그 자리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모인 사람들이 원형극장에서 아데미 만세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물질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이 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광장에 모여서 온 힘을 다해서 외치는 것입니다. 우상이 점령한 마음에는 스스로 신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중문화를 이끌어 가는 유명인들을 보면 끊임없는 자기 과시와 소유로 자신을 증명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질의 소유로 우리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흔히 갖게 되는 돈에 대한 첫번째 오해는 내가 번 것이니 내 소유라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가난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평생을 돈과 씨름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을 가난으로 부터 구원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 이면에는 인생의 주인이 돈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성경은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20:3-5a)

말씀 안에 3가지 동사를 보면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해석해 보면 돈을 섬기면 돈에게 절하게 되고 돈을 만드는 일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지를 점층적으로 전달해 줍니다. 이 유혹을 끊을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세상은 돈으로 인해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돈이 절대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돈 사이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은 임시적으로 우리에게 허락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돈을 소유한 사람은 없으며 죽을 때 돈을 가지고 가는 사람도 없습니다.(욥 1:21) 이 오해를 바로 잡게 되면 돈에 대한 시각과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각이 달라집니다.

두번째 돈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나타난 생각은 돈이 큰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오해입니다. 사람은 한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돈으로 인한 근심과 걱정을 하면서 몸속에 작은 세포들이 안 좋은 세포로 변화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부모가 되어 보니 자녀에게 위험한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라도 금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방종으로 가는 마음을 돌이켜 마음이 지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바라보게 해 주십니다.

2천년 전에도 에베소 지역의 사람들은 매년 3–4월을 아데미의 달로 지정하여 각종 축제와 행사를 벌였고 은으로 만든 아데미 신상 모형을 집에 보관하면서 복을 빌었습니다. 아데미는 풍요의 여신으로 가슴에 풍요를 상징하는 24개의 유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이 신상의 높이가 대략 130미터, 폭이 75미터나 되는 거대한 신전입니다. 당시 이 여신은 ‘위대한 어머니’(the Great Mother)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축복과 풍요를 주는 신이라 여겼으니, 은세공업자들은 아데미 여신의 형상을 만들어 부적이나 작은 신상으로 돈을 번 것입니다. 에베소 소동 사건은 에베소 원형 극장에 분노한 수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아데미를 외친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70,80년대만 해도 한국교회에 나타난 현상은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이었습니다. 복음 안에 돈이 우상이 되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건강과 부를 얻고 출세하는 설교를 해야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믿음생활은 어느 편에 설것이가는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바울은 세상의 신을 모독하거나 훔친 일이 없습니다. 단지 아데미의 신성을 부인했을 뿐입니다. 37절을 보게 되면,

37 여러분들이 이리로 끌고 온 이 두 사람은, 아데미 여신의 신전에서 무엇을 훔친 것도 아니고, 또 아데미 여신을 모독한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적대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른 복음이 아닙니다. 가끔 뉴스에 보면 열정주의 신자들이 불교의 불상들을 가서 파괴하고 예불을 드리는 절에서 찬송을 부르며 방해는 하는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타종교의 불상보다 더 큰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세상의 방법과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치 않으면 선교하려는 것이 오히려 복음의 문을 막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복음을 아픈 마음으로 전하기 보다 우리 삶에 허락하신 GOOD NEWS 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할 행복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을 만나면 믿음으로 순종하는 은혜의 여정을 만나게 되는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은 이슬람 열성주의자들처럼 세상과 충돌하고 세상위에서 군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리차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을 보면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델이 오늘날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인간의 문화 속으로 들어오셔서 함께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역사회에 이루기 위해서 세상이 악하니까 그들의 문화와 충돌해서 대립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변혁해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인간이 무슨 일을 하는가 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계시는 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없이도 사역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주시며 그분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바울은 이 세대를 향해서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문화를 변화시키라는 사명을 강조합니다.( 12:1,2)  아무리 위대한 과학 기술도 절대적 가치의 자리에 오를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해 놓은 원리와 법칙을 발견해 낼 뿐입니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어떤 세상의 우상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수 없는 것입니다.이 시대에는 하나님을 아는 인재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좋은 기독교 사상가의 책이 출판 되면 그 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 뿐입니까? 정치, 문화, 사회, 경제, 의료 과학등 수많은 분야에 기독교 인재들을 길러내게 되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로 키워져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을 성경적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개인적 신앙의 바탕 위에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 문화 양상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고 흘러가고 있어서 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계속적으로 문화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의 문화가 지니는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구별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앤드류 월즈(Andrew Finlay Walls:1928~ 2021)라는 세계적인 선교 역사학자는 ‘어느 문화에도 속하지 않지만 철저하게 민족들에게 녹아 들어가시는 노예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그리스인들의 하나님 테오스, 독일인들의 하나님 갓트, 중국 사람들의 하나님 썅티, 일본인들의 하나님 가미, 이탈리아인들의 하나님 디오, 프랑스인들의 하나님 쥬(Dieu)라고 부르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심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신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을 전하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그들의 풍요의 신 아데미를 불러대며 외쳤습니다.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보화를 버려두고 세상에 잃어버린 흩어진 양들을 찾으러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길을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유한 사람에게도 열어 주셨습니다. 하늘의 평안은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한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 1:9)

37절로 4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데메드리오에 의해서 선동 당한 다음에 엄청난 힘을 보이는 듯 싶지만 아데미 신전에 모인 수만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데메드리오의 고발은 무고가 되었으며, 바울은 직접 논쟁에 나서지 않은 채 모든 사람들은 해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서기관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보호하십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소동이 잠잠해진것은 로마의 법과 질서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들도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바른 길을 걸어야합니다. 군중 심리에 끌려 마음과 생각을 빼앗기면 안됩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방향이 되어야합니다. 이러한 소동 앞에서도 분별하는 지혜와 믿음의 성숙이 논란과 혼란을 이겨낼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법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로마법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도리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이들의 의무입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바라바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함성도 데메드리오의 말에 분노하여 외치던 군중들의 외침도 오늘날 시대속에서 가려진 진리와 사랑안에서 몸부림 치는 우리들의 모습임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서 하나님의 길을 걷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결코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눈물과 사랑이 세상속에 속하여 갈길을 잃은 우리의 마음에 능력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도 섬김도 영혼을 향한 마음도 철저히 내안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상은 보이는 거대한 신전만이 아닙니다. 매일 머리속에 습관적으로 떠올리는 생각들, 나의 마음에 채워져있는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알아도 하나님 말씀이 마음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매일 다른 우상들로 채워질 것이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따라 매일 매일 걸으라고 하십니다. 그 매일의 은혜가 우리의 한주간의 삶에도 주님의 능력을 됨을 보게 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07.30 2023 주일 설교

(성령강림후 제 9주)

하나님 나라

The Kingdom of Heaven

사도행전 19: 8-20

유민용 목사

8 바울은 에베소의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강론하며 호소력 있는 설교를 했다.9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고, 공공연하게 복음의 도를 거역하는 말을 떠들어 댔다. 그래서 바울은 제자들을 데리고 회당을 떠나 두란노 학당으로 갔고, 거기서 날마다 강론하고 가르쳤다.
10 이렇게 두 해를 계속하는 동안, 아시아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인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11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을 통해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다.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그것을 병자들에게 갖다 대기만 해도 그들의 병이 낫고 악한 영들이 떠나갔다.13 그런데 악령을 쫓아낸다면서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유대인 몇 사람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을 향해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고 말하곤 했다.14 유대인 제사장인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고 있었다.15  어느 날, 악령이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16 그러면서 귀신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와락 덤벼들어 때리는 바람에,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 옷을 발가벗긴 채 줄행랑을 쳤다.17 이 소문이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 예수의 이름을 기리며 찬양했다.18 그리고 믿음을 갖게 된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솔직하게 고백했다.19 또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두루마리 책을 모두 가지고 와서,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불살랐다. 그렇게 불사른 책값을 계산해 보니, 5만 드라크마에 달했다.20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이 더욱 힘 있게 점점 널리 퍼져나갔다.(쉬운말 성경)

오늘날 초대교회의 관심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현존하는 교회의 어머니의 몸과 같은 교회입니다. 예수께 직접 교육을 받었던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던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모든 사람에 열려져 있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세속화에 적절하게 반응하며 변화되다 보니까 교회의 본질적 가치가 흐릿해 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속에 있는 보편적 가치만으로는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매우 쉽고 단순합니다. 예수님 곁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시는 것을 지속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정의합니다. 레슬리는 인도에서 1936년부터 1974년까지 선교사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는 영국출신인데 40년 가까운 사역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영국사회에 복음에 대한 차가운 멸시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하루는 인도에서 온 사람을 전도하려는 그에게 그들의 종교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회심 시키려 하지 말라는 경고성 전화를 받게 됩니다.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에게 이런 전화를 한 사람이 이민자가 아니라 영국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나라였던 영국이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사이에 다윈주의 사회가 되었음을 절감했던 것입니다. 레슬리가 영국 사람들에게 다시 복음을 설명해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만든 책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이라는 책입니다.

세상에 교회가 참 많아졌습니다. 다양한 교회들이 존재합니다. 수많은 종파의 교회들이 있는데 교회가 성장한다고 해서 건강한 교회라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N T 라이트는 “교회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리는 ‘사명’으로 부름을 받은 것 때문에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탈기독교 사회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델인 교회가 세상에 동화되어 질 때에 그 본질적 가치가  사라지게 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에 보냄 받는 사명자들을 훈련시키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심으로 복되게 해 주셨습니다. 유대민족에게만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3차 전도여행 가운데 에베소 지역 유대교 회당에 들어가3개월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강론을 합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교 회당 앞에서 먼저 전도를 했습니다. 동족 유대민족을 향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한평생 유대교인으로 모세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던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써 복음을 전하면서도 유대인들을 향한 고뇌와 탄식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유대교 회당 앞으로 먼저 가서 전도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번번히 거절 당하고 핍박을 당합니다. 전도여행은 핍박의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 사명은 동족 유대인들의 박해와 고난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더 깊은 위로와 사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고통과 박해가 올때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했던 것이지요. 말씀을 준비 하는데 바울 서신들 가운데 자신을 소개하는 인사말이 더 깊이 다가 왔습니다.

로마서 1:1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고전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고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골로새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딤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었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가 들어왔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모든 인간에게 죽음이 들어 온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인간의 본질인 영혼은 주와 함께 있게 됩니다. 바울은 고후 5:8절에서 “죽음 후에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4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데리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느냐’입니다. 만일 여러분은 살면서 한번도 앞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색을 설명해야 한다면, 어떻게 색의 개념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전도의 옷을 입으시겠습니까? 주어진 상황속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구원은 종착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 이후의 삶은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3개월 동안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는데 매일 말씀을 들으면서도 몇몇 사람은 마음이 완고해서 믿으려 하지 않았고, 복음의 길을 거역하는 말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호소력 있는 설교를 했습니다. 8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강론하며 권면하되”라고 번역했습니다. ‘권면하되’로 번역된 ‘페이돈: πείθων“은 ‘인내와 수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언제나 인내와 수고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개월을 전하다가 회당을 떠나서 두란노 학당을 세우고 거기서 날마다 강론하고 가르치는데 2년 동안을 계속합니다. 2년 동안 매일 매일 바울의 말씀을 들었던 이들이 변화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듣고나서 변화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습니다. 시간을 들여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수고와 인내를 매일 지속하다 보면 말씀의 깊이를 더 깊게 깨닫게 됩니다. 새벽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삶의 습관을 바꿔보십시요. 바울에게 ‘하나님 나라’를 2년간 배웠던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아시아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인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된 말씀을 배우던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독점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겨 드릴때 임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거하는 나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의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그들의 질문은 “언제” “어느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전도함’에 있어서 내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얽매이던 것으로 부터 자유해지는 경험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지요. 바울은 그가 만난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보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 안에 있던 차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모든 민족이 구원의 대상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고국을 떠나 미국이라는 나라에 정착하기까지 막연한 두려움, 삶의 아픔, 인간적인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으며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아 차리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누군가가 슬퍼한다고 하면 대부분은 깊은 관계를 통해 서로의 삶을 진실하게 나누며 교제했던 사람일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따뜻한 사람들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에 최초로 세워진 성령학교는 예루살렘 지역에 세워진 학교였습니다. 이 성령학교의 교사는 사도들이었고, 예수님은 훈련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모였습니다. (행2:46) 지속적으로 모여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변화를 받은 이들은 자신의 것을 연약한 교우들과 나눴습니다. 그때에 많은 성도들이 새사람이 되었고 믿는 사람들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바쁜 현실속에서도 서로가 시간을 내어 말씀을 지속적으로 나누며 교제 하시기 바랍니다. 서로의 삶을 나누며 교제할 때에 그리스도의 가족이 됩니다. 우리교회 안에는 가족모임, GT모임이 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그룹의 모임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며 분주하다고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직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색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색을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삶을 공유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전달자가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차별하게 되면 복음이 심겨 지는데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한번 초대되어 들어오면 서로의 격려와 위로를 통해서 말씀을 배우고 나누는 것이 즐겁고 또 참여하고 싶어져야 합니다. 서로에 대한 구별의 장벽이 무너지고 주의 사랑이 공동체 안에 점차적으로 스며들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구원의 신비입니다. 거주하도록 부름 받은 방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 안에는 개인의 신비와 성화적 삶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공기와 빛 그리고 물이 거저 주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그 은혜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2~3세기 박해가 심했던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초대교부의 글 중 하나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초대 기독교인들의 삶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반적인 생활에 있어서 자신들이 사는 곳의 양식을 따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놀랍도록 확연히 구분된 함께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땅에 속하지만,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들, 법을 초월하는 사람들, 가난하지만 부유한 사람들, 죽으면서까지도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했던 사람들이 바로 초대교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독특한 삶의 양식을 보며 붙여준 이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은 어떤 삶일까요?  

11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을 통해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다.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그것을 병자들에게 갖다 대기만 해도 그들의 병이 낫고 악한 영들이 떠나갔다.
13
그런데 악령을 쫓아낸다면서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유대인 몇 사람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을 향해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고 말하곤 했다. 14 유대인 제사장인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고 있었다. 15 어느 날, 악령이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16 그러면서 귀신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와락 덤벼들어 때리는 바람에,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 옷을 발가벗긴 채 줄행랑을 쳤다. 17 이 소문이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 예수의 이름을 기리며 찬양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흥미롭기도 하고 신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바울이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바울이 갖고 있던 손수건을 가져다가 사람들에 얹으면 낫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장막을 지으면서 일했던 바울의 앞치마를 가져다가 그 환자에게 덮으면 그 환자가 낫는 일을 소개합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과 능력은 믿는 자들에게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표적은 성령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적을 통해서 성경은 주의 말씀이 더욱 힘 있게 점점 널리 퍼져 나갔다고 기록합니다.(20절)

당시는 복음의 확산이 신속하게 요구되는 시대였기에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경의 진실성이 오랜 시간에 걸쳐 입증이 되었습니다. 성경속에서 기적들을 보면 시대마다 긴급하게 필요한 때에 행하셨습니다. 그 분량도 성경 전체로 보면 소수의 분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안에는 인간의 경험과 역사적 결과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신적 기원을 갖고 있기에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영감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과 죄가 많던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놀라운 기적입니다. 당시에 예수를 흉내내고 기적을 사모했던 마술사들은 놀라운 기적들을 보면서 자기 주술에 예수의 이름을 넣게 됩니다. 이런 일을 한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오히려 악령들한테 혼나는 모습이 나옵니다.

당시 에베소 지역은 우상들로 가득했습니다. 달의 여신인 다이아나 신전이 있었고, 우상 장사들과 부적 장사들이 많았습니다. 신전 안에는 수천 명의 여사제들과 청소하는 노예들도 수 천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도 자신들의 우상 중에 하나로 생각했을 것이며 주술적 행위로 그것을 이용하게 됩니다. 지금도 온 세상 여러 나라에는 주술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술행위를 통해서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들로 사람을 유혹하지요.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주술적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18절로 20절은 주의 말씀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18 그리고 믿음을 갖게 된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솔직하게 고백했다.19 또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두루마리 책을 모두 가지고 와서,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불살랐다. 그렇게 불사른 책값을 계산해 보니, 5만 드라크마에 달했다. 20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이 더욱 힘 있게 점점 널리 퍼져나갔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주술사들은 자신들이 마술을 행하던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살랐는데, 그 책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19절).  “은”은 그리스의 드라크마 은화를 가리키는데, 당시에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평균 품삯입니다. 즉 “은 오만”은 50,000일(약 150년)의 품삯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당시에 에베소 지역에 마술적인 주문을 기록한 책이 많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엄청난 양의 책을 불사른 것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그들 안에 회개의 결단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악한 일을 버렸으며, 주님의 말씀은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20절) 에베소 지역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러 오는 우리도 매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욕구를 이루기 위한 이름이 아닙니다. 치열한 경쟁의 현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경쟁이 아닌 격려자로 위로하시고 세워 나가십니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가 고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은 환난이 와도 강하고 담대할수 있는 이름이구요. 자격이 없다고 느낄때에도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너의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내게 부요한 자란다. 너는 나의 존귀한 자녀라고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나라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해치러 가는 다메섹에서 주님은 바울의 이름을 불러주셨고, 예수의 이름이 모든 사람에게 기쁜소식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상투적으로 외우는 것에 익숙해져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 숨길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주의 말씀이 마음 안에 거하면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고 교회와 국가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죄 없이 사신 분이 예수 외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영적 권위이며 축복입니다. 한주를 보내시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불러주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주변에 고통과 눈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함께 하십시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7. 23. 2023 주일 설교

(성령강림후 제 8주)

예수의 세례

The Baptism of Jesus

사도행전 18: 24-28

유민용 목사

24 ○ 그 무렵, ‘아볼로’라는 한 유대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에베소에 왔다. 그는 학식이 풍부하고, 성경에 두루 능통한 사람이었다. 25 그는 일찍부터 주님의 말씀을 배운 사람으로, 열심히 전도할 뿐만 아니라 예수에 관해서도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26 아볼로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설교를 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27 그런 뒤, 아볼로가 아가야 지방으로 가고 싶어 하자, 신도들은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편지를 써 주어, 아가야 지방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따뜻하게 영접해 주도록 했다. 그리하여 아가야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뭇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28 그것은, 아볼로가 회중 앞에서 유대인들의 말을 조리 있게 열정적으로 논박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힘 있게 증거했기 때문이다.(쉬운말 성경)

24 Meanwhile, a Jew named Apollos, an eloquent speaker who knew the Scriptures well, had arrived in Ephesus from Alexandria in Egypt. 25 He had been taught the way of the Lord, and he taught others about Jesus with an enthusiastic spirit[h] and with accuracy. However, he knew only about John’s baptism. 26 When Priscilla and Aquila heard him preaching boldly in the synagogue, they took him aside and explained the way of God even more accurately. 27 Apollos had been thinking about going to Achaia, and the brothers and sisters in Ephesus encouraged him to go. They wrote to the believers in Achaia, asking them to welcome him. When he arrived there, he proved to be of great benefit to those who, by God’s grace, had believed. 28 He refuted the Jews with powerful arguments in public debate. Using the Scriptures, he explained to them that Jesus was the Messiah.(New Living Translation)

비혼시대, 혼밥(혼자 밥먹기), 혼여행(혼자 여행하기) 등의 신조어가 오늘날 시대를 말해줍니다. 상대방을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니 자신의 삶을 홀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싱글라이프에 젊은이들의 공감이 더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부대끼며 그 안에서 서로를 배우고 성숙해 졌다면 오늘날의 시대는 모두가 혼자를 적응하는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동굴 증후군’은 비대면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회적 고립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서 안정감을 느끼다 보니 다시 사람들을 만나려고 할때에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생각들은 세례의 의미도 희석시킵니다. 세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에 비유할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때 우리는 사랑을 확인하고 약속하고 싶어 합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세례는 회개의 표시이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습니다. 매년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믿느냐고 문답을 하는 것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의 세례가 무엇인지 자세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에는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있습니다. 19장에서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며 에베소로 갔을때에 그 곳에서 몆 명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도다” 그러자 바울은 그러면 “너희가 어떤 세례를 받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 선생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가르쳤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들은 바울의 설명을 듣고 즉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안수를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으며,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강론을 하게 됩니다. 물세례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차원이라면 성령의 세례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복음의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복음의 확신이 들때에 우리는 증거자로 살게 됩니다.

많은 성도들은 성령세례라고 하면, 현상적인 측면을 떠올립니다. 현상적인 것은 성령의 얼굴이지요. 성령충만한 기도를 할때에 방언과 예언 등을 경험합니다. 간절한 믿음으로 기도할때 주의 권능과 힘이 임하게 됩니다. 간절한 믿음이 없이는 이러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마치 풍선 안에 바람을 부는 것처럼 양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을 아시지요? 본질적인 부분이 비본질이 되고 비본질적인 부분이 본질로 둔갑될 때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성령충만을 말할때 흔히 일어나는 오해들입니다.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으면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슬픔이 변하고 기쁨이 충만한 현상이라고 믿습니다. 죄의 모든 유혹으로 부터 완전히 해방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를 받고도 내 뜻대로만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성령의 얼굴은 일그러집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성령의 본질을 깊이 알아가야 하지요. 성령은 사람의 종교적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훈련을 통해서 신앙의 깊은 단계로 들어가 주의 말씀이 전생애를 인도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성령의 본질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여전히 성령님과 비대면으로만 만나고 나눔이 없다면 성령의 충만함에 흠뻑 젖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공동체속에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도록 돕습니다. 이 자리에도 인생의 기로에 선 분들이 계시다면, 성령님의 부드러운 초대에 응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전생애를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18장 24절부터는 3차 전도여행의 시작인데, 누가는 2차와 3차 전도여행 사이에 아볼로라는 사람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볼때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을 하면 어떻습니까? 어떤 인물일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누가는 바울의 2차전도여행을 기록한 후에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아볼로라는 사람은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아볼로의 정보를 줍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어려서 부터 헬레니즘 문화에 익숙한 학문적 도시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또한 학식이 풍부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많이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열심히 전도하고 예수에 대해서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아볼로가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아직은 불완전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보게 됩니다.

1세기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베드로나 바울과 대등한 위치에 아볼로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아볼로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 영향력이 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교회 안에 세례로 인해서 파가 갈라졌는지, 인물의 영향력에 의해서 나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교회 안에 여러파가 있었습니다. 1세기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는 성서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가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바울의 복음적 견해는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교우들에게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했습니다(고전 3:6) 그러나 여전히 나는 바울의 사람이다. 나는 아볼로의 사람이다 하는 사람은 육의 사람이라고 편지합니다.(고전 3:4)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한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몸됨’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당시 학식에 있어서 능통하고 성경을 많이 알았지만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몰랐던 것이지요. 오늘날처럼 인터넷이 없었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점차적으로 전파되기는 했지만 듣지 못한 지역도 있고, 시기적으로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때였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은 예부터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화가 뿌리 깊이 있기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은 제사 문화를 우상숭배로 규정했어야 했습니다. 한편에서는 한국의 풍습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 바꾸는 것에 대해서 한국 교인들이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신중론을 제시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전통을 완전히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예수를 가르치면서도 예수의 부활, 그리고 40일 동안의 현현, 이어서 승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자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대법관이지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예수님께 찾아 온 것을 보면 신경 쓸 일도 있고, 주변에 눈치 볼일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 마음 안에 진리의 대한 갈망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만 가지면 큰 폐해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도 예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선물 받은 책중에 미치 글레이저 (Mitch Glazer)박사가 쓴 ‘이사야 53장 해설서’ 라는 책이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한 랍비가 쓴 책입니다. 1894년 헝가리계 랍비였던 레오폴드 콘(Leopld Cohn 1862-1937)이 미국에 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게 된 후 유대인들에 대해 목자의 심정을 갖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회를 만들게 됩니다. 이후에 미치 글레이저 박사가 이 선교회를 이어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어머니에게 이사야 53장을 읽어드렸답니다. 유대교인이었던 어머니는 나한테 신약 성경은 읽지 말라고 했는데, 글레이저 박사는 이사야서를 읽어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이사야 53장을 읽어드렸습니다. 어머니는 화를 내며 신약성경을 읽지 말라고 하는데 왜 자꾸 신약성경을 읽느냐고 했답니다. 글레이저 박사는 제가 방금 읽은 것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것이라고 어머니께 말했다고 합니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아가 오기 7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인데 여러분은 묵상하게 될때 누가 생각이 나십니까?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1-6)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티오피아 내시가 성경을 읽으며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그가 이사야서 말씀을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묻는 것을 시작으로 성경을 풀어줌으로써 예수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모세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는 사람만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면 내시는 부적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내시와 같은 자들에게도 닫혀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사람, 모든 나라에게 열려진 것을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의 만남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세례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 시킬 수 없는 연약한 자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매일 매일 예수님 안에서 생겨나는 믿음의 의를 통한 거룩성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모든 일이 잘될꺼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달라지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집니다. 나에게 필요한 말씀의 구절만 적용하며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믿음의 지체들과 분쟁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여러 문제들로 분쟁할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약한 자들과 형제들을 배려하라는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왜냐하면 분쟁은 서로가 높아지려는 마음을 갖고 있을 때 발생합니다.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영광을 비우시고 십자가에서 수치와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하향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를 포기하고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나를 증명하는 방법을 배워나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지구상의 수십억명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여겨 주십니다. 그래서 한번 구원한 존귀한 자녀는 하나님의 손으로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맛을 보면 볼수록 삶속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시대나 오늘날이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교리는 신론과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핵심인데 우리는 논리적으로 성육신의 교리를 다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조건 믿으라고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수천년 동안 기독교 교리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의 길을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었다면 이미 기독교 교리는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깨달음으로 믿어진 것입니다. 이것의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임이 확실합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증거자들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성경의 66권을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높은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육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낮은 자리를 향해 있나요? 아니면 높은 자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나요? 믿음의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영역일뿐입니다.

아볼로는 이 온전한 복음을 듣고 성령의 감동이 임하니까 자신이 전했던 이들에게 다시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로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7 그런 뒤, 아볼로가 아가야 지방으로 가고 싶어 하자, 신도들은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편지를 써 주어, 아가야 지방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따뜻하게 영접해 주도록 했다. 그리하여 아가야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뭇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28 그것은, 아볼로가 회중 앞에서 유대인들의 말을 조리 있게 열정적으로 논박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힘 있게 증거했기 때문이다.

27절에는 그리스도를 만난 성도들의 믿음의 태도가 보여집니다. 예수의 세례를 먼저 받은 평신도 브리스길라 부부는 어떻게 보면 목회자인 아볼로의 증거를 듣자 그의 부족함을 알아차렸지만 핀잔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친절하게 온전한 복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한 아볼로도 그 가르침을 겸손하게 배우며,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는 무능함을 깨닫게 됩니다. 전에는 자신을 증명해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증명해 내기 위해서 아가야 지방으로 갑니다. 기독교 변증은 내 마음을 전하는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입니다. 전에는 가르침을 통해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제는 예수만을 높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는이가 위대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물을 주는 이가 위대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심는 일이 힘드냐, 물을 주는 일이 힘드냐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기의 주관대로 개인적인 성향대로 누가 위대한가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심는이도 필요하고 물을 주는이도 필요합니다. 수많은 교회의 일꾼들이 그렇게 걸어왔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 했을때 우리의 모든 행위는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내가 가진 것을 기준 삼게 될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소유이든, 지식이든, 믿음 생활에 있어서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우리 안에 교만은 자취를 감추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리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때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의 증인입니다. 심는 일도 물을 주는 일도 즐거운 일입니다. 즐겁게 성실하게 지속하다 보면 아름다운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라가게 하십니다. 삶이 분주하고 마음이 불편하면 심는일도 물을 주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증거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몇년전 제가 살고 있던 도시에 전기와 물이 끊겨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자고 있는 두 아이를 안고 16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처음 3층까지는 아빠의 사랑으로 가능했는데 층이 오를수록 땀도 나고 아이들을 깨워서 걸으라고 할까, 쉬다 갈까, 수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따뜻한 팔이 저를 감싸고 곤히 잠든 아이들을 보니 저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작은 아이들의 존재가 감사하고 뭉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세상에서 수많은 일을 만나겠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랑하는 자녀들을 안고 묵직한 한발을 떼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먼저 걷고 있는 걸음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힘이 될수만 있다면 더 잘 걸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사랑에 집중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집중하며 16층까지 천천히 찬양을 부르며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냥 올라가도 숨이 차는데 두 아이를 안고 올라가니 점점 속도가 느려졌겠지요. 그러나 내가 안고 있는 두 아이의 무게가 짐이 아니라 사랑임을 느끼며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그런 걸음 아니겠습니다. 무거워도 힘들어도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에도, 어느 곳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작은일이든 큰일이든 일상속에서 복음의 확신으로 담대함으로 살아가십시요.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연합하여 선을 이룰수 있는 귀한 과정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의 성숙, 공동체의 성숙, 가정의 성숙의 과정 가운데에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아름답게 살아내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7.16.2023 주일 설교

(성령강림후 제 7주)

아름다운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 지지 않는다.

Beautiful People Do Not Just Happen

사도행전 18:18-23

유민용 목사

18 ○ 이런 일이 있은 뒤, 바울은 얼마 동안 더 고린도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신도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배편으로 수리아를 향해 떠났다.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과 동행했다. 그리고 항해를 하기 전에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것은 예전에 하나님께 서원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둔 채 혼자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토론을 벌였다. 20 그들은 바울에게 며칠만 더 있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바울은 거절했다. 21 그러면서 바울은 그들과 작별인사를 하며 약속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내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22 에베소를 떠난 바울은 가이사랴로 내려갔고, 거기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서 형제들에게 인사한 후,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23 바울은 안디옥에서 얼마 동안 지낸 다음, 다시 안디옥을 떠나 갈라디아 지방과 브루기아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모든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쉬운말 성경)

18 Paul stayed in Corinth for some time after that, then said good-bye to the brothers and sisters and went to nearby Cenchrea. There he shaved his head according to Jewish custom, marking the end of a vow. Then he set sail for Syria, taking Priscilla and Aquila with him. 19 They stopped first at the port of Ephesus, where Paul left the others behind. While he was there, he went to the synagogue to reason with the Jews. 20 They asked him to stay longer, but he declined. 21 As he left, however, he said, “I will come back later, God willing.” Then he set sail from Ephesus. 22 The next stop was at the port of Caesarea. From there he went up and visited the church at Jerusalem[f] and then went back to Antioch. 23 After spending some time in Antioch, Paul went back through Galatia and Phrygia, visiting and strengthening all the believers.(New Living Translation)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독교라는 큰 이야기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법을 배우는 여정입니다. 성경을 믿고 날마다 묵상하는 일은 숨을 쉬듯이 지속하는 것입니다. 정말 말씀을 믿고 살아 간다면 변화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변화시키십니다. 왜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가? 인간의 욕망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정욕은 그대로 내버려 두면 점점 더 욕망의 손과 발이 향하는 곳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지켜가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이가 어릴 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빠를 믿고 계속 페달을 밟다 보면 균형을 잡게 되고 잡았던 손을 놓아도 혼자서 자전거를 타게 됩니다. 아이는 아빠가 잡아 주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서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죠. 주님이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고 계십니다. 성화의 삶은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믿음생활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아서 페달을 밟는 수고를 지속하지 않으면 거룩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주위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의 마무리 단계에 있는데, 짧은 본문 안에 작별이라는 단어가 2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평생 길 위에서 작별과 떠남의 여정을 살았던 바울의 걸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만남과 작별 그리고 떠나는 발걸음 안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18 ○ 이런 일이 있은 뒤, 바울은 얼마 동안 더 고린도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신도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배편으로 수리아를 향해 떠났다.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과 동행했다. 그리고 항해를 하기 전에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것은 예전에 하나님께 서원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1년 6개월 머물면서 함께 했던 교우들과 작별하고 떠납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극심한 박해나 소동을 피워서 어쩔 수 없는 작별이었지만 고린도에서의 작별은 다릅니다. 고린도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난 뒤에 아쉬운 작별이었습니다. 긴 선교 여행 중에 찾아온 여유와 평온을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적인 감정과 서운함은 뒤로합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영원한 이별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헤어짐의 현재가 아니라 다시 만남의 미래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매일의 삶과 작별하고 새 옷을 입게 됩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옷을 입는다고 해서 완전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존재 자체가 변화된 것이지 새옷을 입는 행위는 결과일 뿐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한 인격, 온전한 지성을 갖추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존재의 변화를 통해서 매일 새롭게 입혀 주시는 옷을 경험할 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항해를 하기 전에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습니다. 서원을 하는 것이죠. 나실인의 서원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하늘 나그네로 사는 것에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그리스도교가 종교로 인정받지도 못하던 시대에 유대인들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1세기 기독교의 상황은 그리스도교 종교가 정식으로 출발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이 법정에 가서 바울을 고소를 하는 것도 다 이런 상황이었음을 대변해 줍니다. 18절에 ‘이런 일이 있은 뒤’ 라는 말은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는 로마제국이 허용한 종교만 전할 수가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유대교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바울의 말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식으로 고소했던 사건을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한지 몇개월 후에 아가야 지역에 갈리오라는 신임총독이 부임하게 됩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2절) 일반적으로 이렇게 총독이 교체되어 부임하면 민심을 얻기 위해 처음에는 민원을 많이 들어줍니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노리고 신임 아가야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자기들의 율법을 어겼다고 하면  로마 총독에게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로마제국의 국법을 어겼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나 당시 아가야 지역 로마 총독이던 갈리오의 법정에서 바울은 죄가 없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불법이 아니니 복음을 계속 전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나중에 이 갈리오의 무죄 판례는 바울이3차 전도여행 중에 로마로 향하는 길을 열게 하는 놀라운 준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가야 총독으로 갈리오를 준비해 두신 것은 우연한 사건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이 로마에까지 전파되도록 하려는 예비하심이었습니다.

2차 대전 때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이라는 심리학자이면서 의사였던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옥중생활을 하면서 수험번호 외에 자신을 증명해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첫날 앞서 죽었던 포로가 입었던 옷을 받았는데 그 옷 주머니에서 나온 히브리어 성경 구절이 적힌 종이 조각이 나왔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전심으로 사랑하라.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영혼을 사랑하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죽어야만 나갈 수 있는 고통의 현장에서 말씀을 통해서 마음의 새 옷을 입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삶의 의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위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갈망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일제 식민주의 시대에 나라를 뺏앗겼을 때에도 군사독재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더 강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참 신비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말에 너무 친숙해 있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제자들은 자신의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합당한 자로 살아낸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멀리서 바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들린 쟁기를 들고 밭을 일궈야 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고난이 예견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막8:34) 때때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평안한 길을 뒤로하고 혼자 걸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며 하나님 앞에 홀로 설 때가 있었습니다.

34: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홀로 지어야 할 몫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홀로 있는 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주어진 그 몫을 주님과 함께 감당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친밀함으로 동행해 주십니다.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잠시 머물고 사람들과 작별하며 의미심장한 말씀을 건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내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기 싫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을 환영하는 지역에서 더 오래동안 머물며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다 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2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반드시 돌아 올 것이라 말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의 3차 전도여행때에 3년 동안 에베소 지역에 머물며 사역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지금 주어진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돌보심과 은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내면의 나침반이 있어서 내가 머물고 싶은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향하신 방향으로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기도 하지만 배척을 당하기도 합니다. 바울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뜻을 이루는 것이 존재 이유이자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환란을 당하게 될 때에는 찬양하고 기도했으며 속히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자신을 환영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돌아올 것이라 말하고 가던 길을 갈수 있었습니다. 가끔은 신앙의 길에서 그 목표가 사라진 것처럼 보일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희미해 보이고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 같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 마음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상대주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을 절대화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감정을 믿다가 우울감에 깊이 빠지고 절망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세상은 저마다 자기의 상처를 싸매기에 급급한 시대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바쁩니다. 그러나 나의 스토리를 써내려 가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의 스토리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십시요. 아름다운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실패도 해보고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자의 마음도 느껴보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찾아보고 십자가의 복음이 내 삶의 전부라고 고백도 해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삶에서 십자가를 붙드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바빠졌습니다. 먹고 사는 것도 어느 정도는 편안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최고가 되고 싶어합니다. 모든 것이 풍성한 때를 지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이유들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실 때에는 빈손으로 나아오십시오. 삶의 문제, 한숨, 풀리지 않는 어려움, 소유해야 하는 높은 목표, 불안한 삶의 이유들을 다 내려놓고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것을 온전히 내려놓지 않고는 바쁜 세상에서 십자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녁에 기도하러 이 자리에 나오면 작은 불빛이 비춰주고 있는 본당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이지요. 이 십자가로 많은 말을 하고 싶던 마음을 멈추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살아내고자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우리의 삶의 소유가 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천년전 예수님은 고난을 한몸에 지니고 비틀거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예수를 죽이려 할 때 고난의 종으로 인류 역사에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해도 십자가에 또 다시 달리셔야만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예수가 구원자 되심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은 강박적 불안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기쁨이 내면에 솟아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도 자꾸 불안하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해 보십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갈망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이라는 세상속에서 건져 내시고 출애굽 공동체를 인도해 가셨습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일 때에만 행군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처럼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주어진 하루 하루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가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건 사람들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기 전에 잠잠히 기도하고 걷다 보면 가장 아름다운 삶을 하나님은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가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 드라마라고 하는데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 였을 그대들에게…”

여러분, 지금의 시간이 그 어느때 보다 눈이 부시게 밝은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걷는 우리의 이 길을 통해 서로의 빛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안에서 살아내는 것. 삶으로 함께 한다는 것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여정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산다는 것이 그저 감사한 오늘입니다. 한주도 우리를 부르시는 그곳으로 우리의 마음이 향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07.09. 2023 주일설교

(성령강림후 제 6주)

꼭 한번은 걸어야 할 길

A path you must take…at least once

사도행전 18:1-11

유민용 목사

18:1 그 후에,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갔다. 2 거기서 본도 출신의 ‘아굴라’라는 유대인을 알게 되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리자, 그는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얼마 전 이탈리아를 떠나 그곳 고린도에 와 있던 참이었다. 3 아굴라도 바울처럼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그의 집에 묵으면서 함께 일했다. 4 바울은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설득시키려고 애썼다. 5 그러던 중,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는, 바울은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여,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심을 힘차게 증거했다. 6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심하게 대들면서 욕설을 퍼부었고, 심지어 예수를 모독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바울은 항의의 표시로 자기 옷의 먼지를 털면서 말했다. “여러분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지라도 그것은 당신들의 책임이지,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소. 이제부터 나는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소.7 그 후 바울은 회당을 떠나, 회당 바로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서 지냈다. 그는 이방인이면서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8 한편,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는 자기 집안 식구들과 함께 주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9 어느 날 밤,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침묵하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여라.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 될 사람이 많다.”11 그래서 바울은 일 년 육 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다.(쉬운말 성경)

1 Then Paul left Athens and went to Corinth. 2 There he became acquainted with a Jew named Aquila, born in Pontus, who had recently arrived from Italy with his wife, Priscilla. They had left Italy when Claudius Caesar deported all Jews from Rome. 3 Paul lived and worked with them, for they were tentmakers just as he was. 4 Each Sabbath found Paul at the synagogue, trying to convince the Jews and Greeks alike. 5 And after Silas and Timothy came down from Macedonia, Paul spent all his time preaching the word. He testified to the Jews that Jesus was the Messiah. 6 But when they opposed and insulted him, Paul shook the dust from his clothes and said, “Your blood is upon your own heads—I am innocent. From now on I will go preach to the Gentiles.” 7 Then he left and went to the home of Titius Justus, a Gentile who worshiped God and lived next door to the synagogue. 8 Crispus, the leader of the synagogue, and everyone in his household believed in the Lord. Many others in Corinth also heard Paul, became believers, and were baptized 9 One night the Lord spoke to Paul in a vision and told him, “Don’t be afraid! Speak out! Don’t be silent! 10 For I am with you, and no one will attack and harm you, for many people in this city belong to me.” 11 So Paul stayed there for the next year and a half, teaching the word of God. (New Living Translation)

2000년 일본 혼다사에서는 인간처럼 걷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 약 2000억원을 투입해서 인간형 로봇인 ‘아시모‘를 만들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두발로 걷는 로봇이었습니다. 그런데 움직임이 인간에 비하면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이후 2017년도에 보스턴 다이내믹스에서 ‘아틀라스’라는 이족보행 로봇을 만들었는데, 두발로 걷는 움직임이 세계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구현한 평을 받고 있습니다. 2023년 개발된 ‘아틀라스’를 영상으로 보니까 그 움직임이 정말 인간과 흡사해 보입니다. 인간안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성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일생은 참 신비롭습니다. 인생을 걸어가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신성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생의 길을 잘 걷도록 놀라운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나사렛에서 부터 갈릴리 바다 부근 팔레스타인 지역을 수차례 오고 가시며 보여 주셨고, 마지막 여정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그 길은 생명의 길, 치유의 길, 낮아지심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며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리는 약 11만 마일입니다. 당시 교통수단도 없던 때였는데 바울을 이토록 걷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보이지 않는 힘이 어디서 부터 왔을까요? 그리스도에게서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을 따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며 주어진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믿음의 길을 생각해 보시며 오늘 말씀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의 경로들을 보면 그 안에 신약성경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가 걸은 길은 우리로 하여금 훨씬 더 근원적인 세계를 향해 자유롭게 나가도록 도와줍니다. 마가 다락방에 사람들은 한곳에 모였지만 성령강림 이후에 성령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넓게 넓게 퍼져 나갔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그대로 퍼져 나갔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1 그 후에,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갔다.”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라는 지역은 당시 상업과 무역의 요충지로 물질적으로는 번영 했지만 도덕적 타락이 심각하여 음란한 도시로 유명하였습니다. 실제로 이곳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천여명의 여사제들이 있었고 종교적으로 매춘을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고린도인이 되다’라는 헬라어 ‘코린티아조마이 (κορίντιαζομαι)라는 동사는 ‘성적으로 부도덕하게 되다’라는 의미를 가질 정도였으며, ‘코린티아스테스 ‘(κορίντιαςτες)는 ‘매춘부와 어울리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그 후에라는 단어 안에는 바울이 걸어온 길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길은 걸어야 할 길 그리고 걸어 온 길입니다. 고린도 지역에 오기 전까지 바울의 길을 역으로 따라 가보면 빌립보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많은 매질을 당하고 깊은 옥에 갇혔었습니다. 한밤 중에 기도하는데 옥문이 열렸고, 간수의 가정을 구원하여 주시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 바울과 실라는 지친 몸을 이끌고 100마일이 넘은 지역인 암비볼리, 아볼로니가를 지나서 데살로니가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서 몇 주간에 걸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했는데 지역의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소동을 피웠습니다. 바울이 잠시 머물던 야손의 집까지 침입하여 소란을 피웠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은 그들을 피해서 한밤 중에 베뢰아로 피신하게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이 너그러워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가 했는데, 데살로니가 지역에 있던 불량배들이 다시 와서 무리를 선동하여 소동을 벌였습니다. 결국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머물고 바울만 배를 타고 4일 거리인 아테네로 홀로 가게 됩니다.

아테네는 헬라 철학의 본상지로 모든 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제단이 가득했던 지역입니다. 우상이 가득했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어려서 부터 헬라 철학으로 정통한 유명한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최고였던 학자의 제자로 훈련도 받았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학문과 지성인들의 고장 아테네에 도착해서 보니 옛날에 꾸웠던 꿈이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올라 왔을까요? 자신이 이제껏 배웠던 헬라 철학으로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을 꺼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열매도 몇사람 외에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보고 말쟁이라고 조롱을 하였습니다.(17:18) 철학적 논쟁만 하다가 복음사역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바울이 십자가 신학을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묻은 사랑으로 전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바울이 아테네에서는 세례를 주거나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성과 쾌락을 중시하던 철학에 빠져 있었던 이들은 바울이 전한 진리를 받아 들이지 않았고 배척했음을 볼수 있습니다. 아테네는 신들의 고향이라 알려져 있어서 그곳 사람들이 종교성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에’ 아테네에서 고린도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그 거리는 대략 50마일 정도였습니다. 자신이 꿈꿨던 철학의 도시에서 복음 사역이 실패하고 난 후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좁고 협착한 땅을 밟으며 고린도까지 오는 그 걸음이 무겁지 않않겠습니까? 홀로 쓸쓸하게 고린도로 들어가는 바울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당시 고린도에 들어 갔을때 바울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인데요. “3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실로 연약하고 두려웠으며 몹시 떨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들어갔을때 느꼈던 마음의 상태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강팍한 마음 밭의 사람들과 논쟁하다가 지쳤습니다. 지성에 갇힌 이들과 논쟁하며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물을 준비해 두셨는데 바로 아굴라과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귀한 만남이 성사(成事)됩니다.

2 거기서 본도 출신의 ‘아굴라’라는 유대인을 알게 되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리자, 그는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얼마 전 이탈리아를 떠나 그곳 고린도에 와 있던 참이었다.

아굴라의 고향은 본도 (Puntus)입니다. 본도는 비두니아 지역의 북동쪽에 있는 도시로 아굴라가 본토 유대인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학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목격한 유대인들이 본도에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이때 아굴라가 복음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을거라 추측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부부는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아굴라는 로마에서 상당히 큰 사업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천막을 만드는 사업을 했는데 제국의 수도 로마에 천막제조업자로 잘 정착했던 아굴라가 로마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대략 2만명 가량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을 일삼게 됩니다. 지역에서 발생하는 폭동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니까 로마 황제였던 글라우디오가 로마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로마에서 나가라는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내외도 고린도 지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로마 황제의 추방령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면 바울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기 위한 위대한 섭리였습니다.

황제의 추방령으로 인해 고린도 지역에 바울 보다 먼저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은 먼저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사업장에서 천막 노동자로 일하게 됩니다. 그들을 찾아 간 것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취직한 곳에서 일을 하다가 바울은 어떻게 예수를 만나게 되었는지 간증을 나누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의 이야기는 복음의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듣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비춰 보았을 것이고, 내외의 마음이 풍요로워졌을 것입니다. 훗날 바울은 이들 부부를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자기를 위해 생명의 위험도 무릅썼다고 말합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이 에베소로 갈때에도 함께 갑니다. 3차 전도여행중에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 보면 ,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사역의 결실이 사람이라면 사람은 지나가도 함께했던 사랑은 남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길에서 예기치 않게 찾아 온 부부를 통해서 새힘을 얻었고, 만남은 그에게 행복한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꼭 필요한 사람을 곁에 두심을 알아야 합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의 글을 소개합니다. “성실(誠實)에는 마침표가 없다. 나이도, 황혼기도 없다. 매사 성실히 임하되 즐길 줄도 아는 사람, 자기 일에 몰두하되 옆과 뒤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그가 곧 이 시대 최고의 멋쟁이이며,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소중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머물러 살면서 힘을 내어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핍박은 그곳에서도 있었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심하게 대들면서 욕설을 퍼부었고, 심지어 예수를 모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항의의 표시로 자기 옷의 먼지를 털면서 “여러분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지라도 그것은 당신들의 책임이지,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떠나고자 합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매우 큰 곤경에 처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 이제 자신은 고린도를 떠나서 이방인에게 복음 증거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들 내외는 박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울 옆에서 도와 주었습니다.

사람이 감정이 상하면 아무리 선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감정에 휘둘려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힘들다, 더 이상 소망이 없다’라는 생각을 부추깁니다. 받은 은혜가 줄어들게 되니 은근히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고 믿음 생활해도 의미가 없다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끝이 아닙니다. 그 길 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생각이 바뀝니다. 믿음의 길에서 좋은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십시요. 믿음의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위에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두셨습니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될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9 어느 날 밤,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침묵하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여라.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 될 사람이 많다.11 그래서 바울은 일 년 육 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다.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러 있던 ‘어느 날’ 밤에 신비로운 환상을 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침묵하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 될 사람이 많다.”

여러분 보스턴은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도시입니다. 보스턴 지역에도 주님은 ‘나의 백성이 될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참된 진리는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두려워 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다시 붙들었습니다. 겉으로 볼때는 보이지 않아도 사실 모든 사람은 복음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고린도 성안에 구원 할 영혼들이 많다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후에’ 바울은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 동안 머물렀다고 진술합니다. 이때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 삶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사랑할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땅끝에 머물고 있는 사람에게는 복음을 지닌 사람만이 갈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땅끝은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치유가 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당장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은 먼저 기도하며 한곳에 머무르십시요. 여러분의 교회가 기도의 등불을 켜고 준비된 동역자로 서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스스로 홀로 설수 없는 교회들이 함께 모여 있으면, 가야할 방향이 보이고 함께 걷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길에 왜 고난을 만나게 될까 질문하게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걷는 길에는 꼭 평탄한 길만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걷다 보면 믿음의 근육이 붙고 가야할길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찾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만남은 서로의 믿음의 이야기가 만나게 되는 놀라운 복음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은 것 같아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꼭 한 번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설교를 마치며 이사야 43장 말씀이 생각나서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1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의 것이다. 2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에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때로 두려운 길 일지라도 우리가 꼭 한번은 걸어야 할 소망을 향한 길이며, 때로는 외로운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함께 걷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