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26 2025 주일설교

(당회 주일)

새해 말씀 시리즈 4

새해 어떻게 살 것인가?

How Should We Live in the New Year?

시편 111:1-10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지만 결국 그 새로운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와 반대되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영생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우리의 목마름이 아니라 영적 갈증에 대한 말씀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를 통해 알게 되는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 한구절을 더 보시겠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영생은 믿음과 순종을 통해 나타납니다. 순종하지 않는자는 영생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이 말씀의 구절들에서 영생이 예수님을 아는 것, 믿는 것, 순종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시편의 찬송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의로우심을 찬양하며, ‘영원’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3절에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도다. 5절에는 그들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두신다. 8절에서는 주께서 정하신 법도는 영원토록 흔들림이 없다. 9절에는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으니, 진실로 주님의 이름은 거룩하고 위대하도다. 10절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들은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리니, 영원토록 주를 찬양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영생을 믿고, 영원한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끝없는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것,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 주어진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인생의 풍랑을 만나서 힘들어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수 없는 불확실한 삶을 헤쳐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힘과 권세로 내몰고 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일으키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와 신실한 언약을 성취하신 사건입니다. 시편에서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도다’ 라고 찬양하는 선언은, 그 의로움이 영원히 변함없음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때에 하나님은 우리 수준 이상의 위대한 일을 이룰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결단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내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일까요? 고백만 하고 결단하지 않는다면, 정말 주님을 닮아가려는 길에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기 위한 선택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결정입니다.

세상은 죽음을 향해 가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토록 흔들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셔서 영원한 통치와 영원한 언약이 되셨습니다. 이 소망이 현실을 사는 성도들을 인내하게 합니다. 영생을 추구하는 삶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모호한 세상에서 겪게 되는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은 현재 우리가 겪는 고통과 대조가 되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영적인 체육관에서 믿음의 삶을 훈련받게 합니다. 바울은 고난 가운데서도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라고 선언했습니다. 고난속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길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고난도 믿음의 훈련의 길이었습니다. 영원한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그 고난의 아픔을 공동체에서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을 품고 찾아온 공동체에서도 많은 상처와 거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삶의 영성’이라는 책에서 서로의 약한 모습을 받아들이는 영성이 공동체의 제자도라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괴롭게 덧없이 끝날 때가 많다. 세월이 갈수록 오래오래 공고해지는 관계가 아니라 불화와 결별로 치닫는 것이다. 자신의 가장 깊은 갈망인 친밀함을 채워줄 사람을 찾다가 우리는 점차 절망에 빠진다. 내 외로움을 없애줄 사람을 찾다 보면반짝반짝하던’ 기대가 하루아침에먹구름으로 잔뜩 흐려진’ 탈진과 우울로 변할 수 있다. 어디를 보나 외로운 사람들 천지다. 현대 서구사회에서 고난의 주된 원인은 아마 외로움일 것이다. ……공동체란 외로움이 외로움에 매달리는 게 아니다. ……공동체란 고독이 고독을 반기는 것이다. “나도 사랑 받는 자이고, 너도 사랑 받는 자다. 우리는 함께 집을 지을 수 있다.” 서로 가까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참 좋다. 사랑이 별로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힘들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우리는 충실할 수 있다. 함께 집을 지어서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을 위한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 공동체의 훈련 속에 용서의 훈련과 기쁨의 훈련이 있다. 부부 사이, 친구 사이, 기타 모든 형태의 공동체는 용서와 기쁨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헨리 나우웬, 삶의 영성)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오직 서로에게 친절히 대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용서를 베푸십시오.”(엡 4:32)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며, 단순히 우리의 고독과 외로움을 해결 받는 것이 아니라 영생이 되시는 주님으로 부터 한줄기 빛을 찾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10 그러므로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누구든지 주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들은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리니, 영원토록 주를 찬양하리라.”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지혜를 얻기를 원합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원했고 노력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지혜를 말하지만, 실제로 명확한 해답을 찾지는 못합니다. 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인생의 목적은 단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1절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온 마음 다해 주님을 찬양하리라.”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가 교회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교회에 모여서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정직함은 모든 행실의 청렴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자세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 드리고, 일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끊임없이 점검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드러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만일 지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다시금 구해야 할 때입니다.

2절입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들이 참으로 크고 놀라우시니, 그 일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 모두가 두고두고 그 일을 깊이 생각하고 또 연구하는구나!” 주께서 행하신 일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맡겨진 소명을 깊이 생각하며,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그 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서 품고 추구하게 하십니다.

3절입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들은 진실로 영광스럽고 장엄하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도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냅니다. 이 의로우심이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씨앗의 비유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씨앗은 땅에 묻혀 썩어져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하고, 그것이 열매를 맺는 과정은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 안에 심겨지면, 우리의 삶의 목적과 가치가 변화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이나 가정, 사회에서 겪는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따라 정직하고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려 할 때, 우리는 그 의로우심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이 현실 속에서 우리의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4절 5절입니다. “주께서는 자신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사람들로 다 기억하게 하셨으니, 주님의 은혜와 자비가 가득 차고 넘치는구나. 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매일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며, 그들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두신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사건을 말하고 있고, 매일의 양식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주신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인듯 합니다. 6절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다수의 보고와 아브라함 자손들에게 주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믿음으로 보고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에 자기백성들에게 그 땅을 분배해 주셨습니다. 이 일은 인간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6 주께서는 뭇 민족들의 땅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심으로써, 그 백성들에게 자신의 크신 권능을 보여주셨도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고, 배고픔과 목마름의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은 매일 양식을 공급하시며 자기백성에게 인내와 순종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소망하며 광야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소망은 우리가 인내하고 견디는 힘이 됩니다. 믿음은 영생의 개념처럼 추상적이지만, 믿음 생활은 실제적입니다. 기도의 습관을 통해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매일 새벽마다 오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할때 광야에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양식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양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필요와 일상적인 삶의 어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와 자비는 영원한 약속입니다.

유진피터슨 목사(Eugene H. Peterson,1932-2018)는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의 책에서 충만한 삶이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삶이며, 모든 상황과 사람들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살균처리가 된 신학 연구실에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상황속에서 다루어져 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7절과 8절입니다. “7 주께서 손수 하시는 일마다 한결같이 참되고 의로우시니, 주의 법도는 진실로 믿음직스럽도다. 8 그러므로 주께서 정하신 법도는 영원토록 흔들림이 없으리니, 이는 그 법도가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제정되었기 때문이라.” 오늘날 사람들은 욕망을 따라 나를 위한 삶을 위해 법을 무시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법은 시대가 변하면 변할 수 있습니다. 만일 법이 수시로 바뀐다면 삶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나 주께서 정하신 법은 영원토록 흔들림이 없습니다. 말씀의 법도를 따르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보호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계명을 따르는 자는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며, 그들은 영원토록 나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깨달음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할 때, 그분의 지혜와 깨달음은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며, 결국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하는 빛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상황에 맞춰 찾아오시고, 그 안에서 부활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삶의 자리나 형편은 다를지라도, 우리가 걷는 믿음의 여정은 동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보여줄 사명을 받았습니다. 아픔과 상처. 외면 당하고 고통 가운데서도 교회의 공동체에서 사랑 받고 위로 받아 하나님을 다시 붙들수 있도록 서로가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시길 바랍니다. 주의 법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마음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영생은 단지 우리의 현실이 어떻게 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려는 헌신을 포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도 우리의 공동체도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변화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따라 우리가 사랑과 정의로 살아갈 때, 세상은 그 사랑과 정의를 통해 변화하게 됩니다. 이번 한 주도 삶의 자리에서 주님 안에 거하는 법을 배우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기를 축원합니다.

01. 19. 2025 주일설교

(주현 후 제 2주)

새해 말씀 시리즈 3

시편 36편의 희망

Hope in Psalm 36

시편 36:5-10

5 주여, 주의 인자하심은 하늘까지 닿았고, 주의 신실하심은 구름까지 닿았습니다. 6 주의 의로우심은 웅장한 산줄기 같고, 주의 공평하심은 깊은 바다와도 같습니다. 오 주여, 정녕 주께서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한결같이 잘 보살펴 주십니다. 7 오 주여, 한결같은 주의 사랑이 어찌 그리 소중한지요!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모두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8 그들은 주의 집에서 배불리 마음껏 먹고, 주께서 베푸시는 어진 은총의 시냇가에서 기쁨의 물을 한없이 마실 것입니다. 9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샘물이 주께 있으니, 우리가 주의 환한 빛 가운데서 광명을 봅니다. 10 오 주여, 주께서는 주를 섬기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소서. 마음이 올바른 이들에게 주의 변함없는 의를 베풀어 주소서. (쉬운말 성경)

이번 미서부 지역의 산불 피해는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이들이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산불이었다고 합니다. 마을 전체가 사라진 곳도 있고, 평소에 장을 보던 마트도,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도, 평생을 살아온 자택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지고 재만 남았습니다. 뉴스를 듣는데 66세 한 사람이 56년 동안 살던 집을 지키려고 하다가 생명을 잃게 된 것 같다고 추측합니다. 56년 동안 살았던 그 집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때로는 평안한 잠을 잘 수 있는 안식처였고, 고된 일을 마친 후 돌아오면 쉼을 주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어릴 때는 그 집에서 성장하며 꿈을 키웠을 것이고, 가족들과 함께하며 안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5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 집은 기쁨과 슬픔을 포함한 모든 감정이 켜켜이 쌓인 소중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산불로 그 집이 불타는 순간, 그가 느꼈을 감정은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이었겠지요.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상실감에 휩싸여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피해 입은 이들을 돕기 위한 특별 헌금을 하려고 합니다. 모아진 헌금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잘 쓰여질 수 있도록 전달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동참해 주시기를 권면합니다.

오늘 시편 36편은 다윗의 찬양시입니다. 다윗은 절망과 고통의 현장에 처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보면, 다윗은 “그들은 주의 집에서 배불리 마음껏 먹고, 주께서 베푸시는 어진 은총의 시냇가에서 기쁨의 물을 한없이 마실 것입니다.” 라고 찬송합니다.

여기서 ‘주의 집’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의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켰고, 성전이 건축되기 전에는 언약궤를 안치한 성막이었습니다. 성막 안에 있던 언약궤는 하나님의 은혜와 속죄를 상징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신앙에서 언약궤는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뜻을 깨닫게 되는 계시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약궤를 전쟁을 이기기 위한  마법상자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죄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할 것들인 돈이나 사람들, 우상들을 섬기고, 섬겨야 할 하나님을 우리의 수단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종종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정확히 드러내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이기심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죄가 감추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약궤 안에 담긴 세가지 성물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돌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드러냅니다.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시며 주신 율법을 나타내지만 또한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죄를 지적합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면서도, 당시 고라 자손의 반역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 아론을 선택하신 표적이기도 합니다.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기가 없음을 불평할 때 그들에게 베푸신 하늘의 양식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처럼 언약궤 안에 담긴 성물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의 집은 오늘날 교회이기도 합니다. 교회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며, 동시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 구속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로 이어집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4:16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또 때를 따라 도우시는 그분의 은혜를 받도록 합시다.”

구약시대의 ‘속죄소’가 신약에서는 ‘은혜의 보좌’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보좌는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여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총은 모든 믿는 자에게 열려 있으며, 우리는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됩니다. 7절을 보시겠습니다.

 “7 오 주여, 한결같은 주의 사랑이 어찌 그리 소중한지요!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모두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학자들은 7절의 주의 날개를 언약궤의 속죄소를 덮은 그룹의 날개에 비유한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언약궤의 뚜껑에는 양 옆에 서로 마주보고 날개를 펼치고 있는 그룹이라고 불리는 두 천사가 마주보고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호하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우리는 보호받고 안전하게 숨을 수 있으며 그 은혜는 성도들의 삶을 온전히 감싸고 있습니다.

다윗의 바라본 주님의 은혜는 시편 36편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절에서 4절에서는 악한 자들의 마음이 드러나고,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5절에서 8절에 이르러,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어떻게 감싸고 보호하는지 고백합니다. 이 두 대조적인 부분을 교차하여 살펴보면, 다윗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악한 자의 마음속에는 온통 죄의 속삭임뿐이어서, 그의 눈에는 하나님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구나. 5 주여, 주의 인자하심은 하늘까지 닿았고, 주의 신실하심은 구름까지 닿았습니다.

2 저들은 자만심에 가득 차서, 자기 죄를 찾아내어 버릴 생각일랑 전혀 하지 못하는구나.
3 저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모조리 사기와 속임수뿐이니, 지혜롭고 선하게 행동하기는 애당초 틀려버렸구나.

6 주의 의로우심은 웅장한 산줄기 같고, 주의 공평하심은 깊은 바다와도 같습니다. 오 주여, 정녕 주께서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한결같이 잘 보살펴 주십니다.

4 저들은 잠자리에 누워서까지도 악한 궁리를 꾸며내고, 스스로 죄의 길에 들어서며, 악한 짓 행하기를 마다하지 않는구나.

7 오 주여, 한결같은 주의 사랑이 어찌 그리 소중한지요!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모두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8 그들은 주의 집에서 배불리 마음껏 먹고, 주께서 베푸시는 어진 은총의 시냇가에서 기쁨의 물을 한없이 마실 것입니다.

찬송가 ‘예수님은 누구신가’는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고백하는 찬송입니다. “1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3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  

이 찬송가의 유래를 살펴보니까, 프레드릭 밀러(Miller, Frederick S.:1886-1937) 선교사가 찬송가를 작사하고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한국이름은 민노아 선교사입니다. 그가 지은 5곡의 찬송시가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1892년 조선에 도착합니다. 1898년 11월 첫 아들을 낳았으나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났고, 1902년 3월 태어난 둘째 아들도 하루만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년 뒤에는 사랑하는 아내도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이기에 가족마저 잃으며 힘들게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자 민노아 선교사는 응답 대신 찬송가를 지었는데, 그 찬양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입니다. 충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인생의 아픔속에서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노래했던 것입니다. 양화진에 안장된 그의 아내 안나 밀러의 묘지에는 ‘In Jesus’라고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이토록 절망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평안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복음의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삶과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두려움과 절망이 힘을 잃고, 오히려 그 흔적을 지닌채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77세의 일기로 고인이 된 영성학자 달라스 윌라드(Dallas Albert Willard, 1935 – 2013)는 “잊혀진 제자도: The Great Omission”라는 그의 책에서 천국 열쇠가 있다는 것은 천국 접근을 통제하는 의미가 아니라 천국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이며 즐거이 드나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천국 열쇠를 두고 교회는 오랜 논쟁을 벌여 왔으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믿는다면 천국의 부를 실제로 가져다 쓸수 있기에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원자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믿음으로 천국의 소망을 가진 자가 되며, 하나님 나라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교회는 이 믿음 위에서 희망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신 선한 일을 주목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인생을 살면서 예상치 못한 길에서도 꽃을 피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인자와 성실, 즉 자비로우심과 공의는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거짓됨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의는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다른 이들을 살리고,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기를 원하십니다.

주의 집에서 배불리 마음껏 먹고, 주께서 베푸시는 어진 은총의 시냇가에서 기쁨의 물을 한없이 마시는 것은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9절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9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샘물이 주께 있으니, 우리가 주의 환한 빛 가운데서 광명을 봅니다. 10 오 주여, 주께서는 주를 섬기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소서. 마음이 올바른 이들에게 주의 변함없는 의를 베풀어 주소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빌립보 교우들의 사랑과 헌금으로 한 개인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는 사랑과 복을 다시 빌립보 교우들에게 흘려 보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 4: 19)

하나님의 구원의 빛 가운데서만 성도는 참된 삶 ,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 냅니다. 주께 속죄함을 받는 빛의 자녀들은 어둠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 빛은 우리가 먼저 받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직접 이 땅에 와서 행하신 일들을 보면, 하나님은 참사랑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는 실패가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바라 보며 우리를 희망찬 빛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주여, 주의 인자하심은 하늘까지 닿았고, 주의 신실하심은 구름까지 닿았습니다. 주의 의로우심은 웅장한 산줄기 같고, 주의 공평하심은 깊은 바다와도 같습니다. 오 주여, 정녕 주께서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한결같이 잘 보살펴 주십니다.”

인생은 아픔과 기쁨이 고스란히 쌓여가는 과정입니다. 나무의 나이테는 나무가 자라온 환경과 시간을 보여줍니다. 비가 많이 오고 햇빛이 잘 드는 때에는 나무가 빠르게 성장하여 나이테 간격이 넓어지고, 가뭄이나 햇빛 부족으로 성장이 느려지면 나이테 간격이 좁아집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도 어려운 시간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도, 그 시간들이 쌓여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고, 뿌리가 깊은 나무가 됩니다. 빛의 자녀는 절망하는 이들에게 새 힘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의 삶을 나누며 그 은혜가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이어질때에 성도의 삶속에 귀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01. 12. 2025 주일설교

(주현 후 제 2주)

새해 말씀 시리즈 2

“있는 모습 그대로”

“Just As You Are”

시편 8:3-6

8:3 주께서 주의 손가락으로 친히 만드신 저 하늘과 또 창공에 매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우러러 바라봅니다. 4 참으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듯 생각해 주시며, 과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토록 보살펴 주시는지요! 5 주께서는 사람을 신적인 존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지만, 그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6 또 주께서는 손수 지으신 것들을 사람이 일일이 다스리게 하시고, 온갖 피조물들을 사람의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쉬운말 성경)

3 When I look at the night sky and see the work of your fingers the moon and the stars you set in place
4 what are mere mortals that you should think about them, human beings that you should care for them?
5 Yet you made them only a little lower than God and crowned them[e] with glory and honor.
6 You gave them charge of everything you made, putting all things under their authority(New Living Translation)

이 사진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입니다. 미켈란 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 벽화는 그가 33세에 그리기 시작해서 4년의 시간 동안 목과 머리를 뒤로 젖힌채 작업을 마친 작품입니다. 벽화의 그림을 요청을 받고 미켈란젤로는 자기의  온 열과 성의를 다하여 작품에 임하게 되었는데 벽화 그리기에 몰두했던 그가 마침내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흡족한 마음으로 서명을 한 뒤 성당 문을 나서던 순간 그는 눈부신 햇살과 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어떤 화가도 그려내지 못할 대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작품임을 깨닫게 되자, 그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그 어디에 서명 같은 것을 남기시지 않았는데 기껏 작은 벽화를 그려 놓고는 나를 자랑하려 했다니” 그는 즉시 되돌아가 천정 벽화에서 자신의 서명을 지워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속에서 그의 믿음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서 시편의 기자는 하늘, 땅, 자연만물, 하늘의 달과 별들, 무한한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찬양하고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와 비교할 때, 인간은 너무나 작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특별히 생각하시고 보살펴 주시며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8:3 주께서 주의 손가락으로 친히 만드신 저 하늘과 또 창공에 매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우러러 바라봅니다. 4 참으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듯 생각해 주시며, 과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토록 보살펴 주시는지요!

수천 년 전 다윗의 눈에 비친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해를 보고, 공기와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내가 특별히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의 손가락’으로 창조하신 하늘과 달, 별들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크리스천의 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히브리서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과 함께 히브리서의 구절도 함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8:5 주께서는 사람을 신적인 존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지만, 그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2:9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낮아지셨지만, 마침내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이기고, 지금은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신 채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예수를 우러러 봅니다. 정녕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구약 성경에 매우 해박한 인물로 추정됩니다. 그가 기록한 하나님이 행하신 비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잠깐 동안 낮아지셨다’는 구절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낮아지셨지만”이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지만 그가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신” 상태로 아버지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그가 얻은 궁극적인 승리를 나타냅니다.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에 대한 찬양의 시인데, 히브리서의 구절은 시편 8편에서 말하는 인간의 ‘영광과 존귀’를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실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약함을 경험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분의 영광을 다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잠깐 동안 낮아지신 이유를 첫째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주기 위함이며, 둘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귀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 보시겠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평생 마귀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히 2:15)

하나님은 온 우주와 인간 안에 자신의 형상을 새기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억눌린 인간을 찾아오셨고, 그분의 오심으로 인간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1982년 12월 4일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받는 간호사들은 울었고, 태어난 아이를 안아 주라는 의사의 권면에 엄마의 반응은 이 아이를 보고 싶지 않다고 데리고 나가 달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설계된 세상에서 이 아이를 받아 들이기 까지는 목사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에게도 수개월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의 부모는 절망과 충격속에서 틈만 나면 눈물을 쏟았습니다. 또한 이 아이가 살아가야 할 인생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원망과 고통속에서 몸부림칩니다. 8살이 되었을때에 이 소년은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자 마음 안에 절망과 파괴적인 충동들로 인해 3번이나 자살 시도를 합니다. 그는 어릴때 부터 팔과 다리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이 소년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15살 때에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주셨고, 그의 입술을 통하여 절망과 불행속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주님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바로 호주의 복음 전도자 닉 부이치치(Nick Vujicic, 1982-현재)입니다.

닉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발견할 때, 자신의 인생이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신체적 약함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약함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잠깐 동안’의 세상에서 하나님은 닉을 구속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팔과 다리가 없는 몸으로 태어났고, 하나님은 그의 몸을 고쳐주지 않으셨지만, 닉은 자신의 약함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도 사용하십니다. 당신이 느끼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부족함과 상처도 하나님 앞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길이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는 죽음이 죽어버린 사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땅에서 영원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한줌의 흙만 남게 되기에 사람들은 인생의 허무함으로 인해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삶을 영위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한순간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잊으시지 않지만 우리는 세상속에서 하나님을 잊곤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누가 크냐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세상을 바꾸는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께서 형제라고 부르신다고 말씀합니다. 2장 11절 보시겠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또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가 한 분이신 하나님께 속한 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구절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형제가 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한 피로 형제 삼아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각자가 믿음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약함을 가진 바울은 오히려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통해 드러날 수 있음을 깨닫고, 그 약함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의 삶에 머물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고백합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기꺼이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2:9, 개역개정)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도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약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고 하나님의 형상을 점점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단순히 죽음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혹시 예수님을 잘 믿는데 억울한 일을 겪고 계십니까? 그럴 때일수록 영광의 면류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의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셨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져 갈 것입니다.

6절을 보시겠습니다.  6 또 주께서는 손수 지으신 것들을 사람이 일일이 다스리게 하시고, 온갖 피조물들을 사람의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릴 권세와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단순히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내면을 채우지 못하여 점점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영적 공허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과 능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주님의 거대한 하늘, 캄캄하고 광대한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손수 만드신 하늘 보석, 제자리에 박아 넣으신 달과 별들을, 그리고 한없이 작은 내 모습에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걱정하시고 우리 인생길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살뜰히 살피십니까? 하지만 우리는 신들보다 조금 못한 자들, 주님은 에덴의 새벽빛으로 빛나는 우리에게 손수 지으신 세상을 맡기시고 창조의 임무를 되새기게 하셨습니다.”(메세지 성경)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면 그저 감사와 은혜 밖에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은 인간을 회복시키고,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유명한 사람도, 무명한 사람도 모두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또 다른 귀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새해에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삶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문제와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채우고, 하나님이 주신 뜻을 따라 맡겨진 책임을 적극적으로 다하며,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믿음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강렬한 빛과 같습니다. 그 빛이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세상을 비추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의 말 한마디가 어둠을 밝히고,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하며, 새로운 생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01. 05. 2025 주일설교

(성탄 후 제2주)

새해 말씀 시리즈 1

“우리는 어디서 출발 했는가?”

“Where did we start from?”

시편 139: 13-16

139:13 진실로 주께서는 내 몸 깊은 곳의 모든 장기를 다 만드셨고,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 몸을 온전히 빚어 주셨습니다. 139:14 이 몸이 이토록 신기하고 오묘하게 빚어졌으므로, 주께서 하신 일이 하도 경이롭고 놀라워, 내가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솜씨가 얼마나 멋지고 훌륭하신지, 내 영혼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139:15 내가 은밀한 어머니 뱃속에서 빚어지고 있을 그때에, 곧 내가 땅 밑 깊은 곳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짜 맞추어지고 있을 그때에도, 주께서는 이 몸의 형체를 이미 다 알고 계셨으니, 내 몸의 뼈마디 하나하나인들 어찌 주님 앞에 숨겨질 수 있겠습니까! 139:16 내 몸의 형체가 아직 갖추어지기도 전에, 주님의 눈은 나의 온전한 모습을 다 보셨습니다. 나를 위해 정해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내 인생의 모든 날들이 주님의 책에는 이미 다 기록되었습니다. (쉬운말 성경)

13 You made all the delicate, inner parts of my body and knit me together in my mother’s womb. 14 Thank you for making me so wonderfully complex! Your workmanship is marvelous—how well I know it. 15 You watched me as I was being formed in utter seclusion, as I was woven together in the dark of the womb. 16 You saw me before I was born. Every day of my life was recorded in your book. Every moment was laid out before a single day had passed.(New Living Translation)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시작이자 기회입니다. 서로의 속도가 다를지라도, 주님께 드리는 모든 섬김과 예배 가운데 진심을 담아 한해를 시작하길 소망합니다.

작년에 52개의 주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2024년 성탄주일에 주보를 준비하면서 순번이 한주씩 밀리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다시 지난 주보들을 살펴보니, 종려주일 12번 주보 이후 13번을 건너 뛰고 부활주일 주보를 14번으로 기록하는 실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주보 번호가 하나씩 밀린 상태였고 성탄 주일날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2024년을 53번의 번호로 마무리해야 할지, 아니면 51번을 두 번 기록하고 52번 주보로 마쳐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온전하게 주보를 마치기 위해서는 51번의 주보를 2개로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1는 2라는 분명한 명제를 믿고, 살아가는 이 시대에 사랑의 개념 안에서는 우리의 자아가 죽고 주님만 드러낸다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이러한 생각끝에 결국 2024년도 주보는 52번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출발점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한 창조의 계획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성도들의 삶에도 사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실수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출발점이 어디인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작은 단지 태어난 날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창조하신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음을 믿고, 그 뜻을 따라 겸손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새해 말씀 시리즈는 ‘왜 우리는 예수를 믿는가’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이 한 문장을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는 그분과 동행하는 방법을 배워 나가게 됩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선택하게 될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심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록 13번 주보의 실수를 인지하지 못하다가 연말에야 알게 된 것처럼, 결국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완성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출생과 죽음에 대해 정직하게 대면해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것을 목격한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에 담긴 성경의 권위를 믿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집니다.

어린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궁금증을 품습니다. “왜 그런지?”, “이게 무엇인지?” 등 수많은 질문을 부모에게 던집니다. 진리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로부터 왔는가?”,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는가?”와 같은 궁극적인 물음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성경은 간단히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길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예수님의 선언 가운데 여섯번째 진술은 ‘내가 곧 길이요’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길이 되신 주님, 그 길을 우리는 기웃거리기 보다 용기 내어 따라가야 합니다. 홀로 걷는 길 같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당시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이 길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알려 주자 수제자 베드로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주님께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결코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단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런 다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졸지에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사단이라 불렸습니다.

최초의 인류의 죄는 무엇입니까?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한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려는 교만의 표출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인 관점으로 판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단이 선악과 나무 앞에서 했던 질문은 죄를 지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유롭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참된 기쁨과 자유를 주셨는데 사단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형상을 주입시켜서 에덴의 언약을 깨뜨리게 했습니다. 오늘날 시대에도 사단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우리의 관점으로 판단하게 하고, 의심하게 만들고, 부당하게 느껴지도록 유혹합니다. 오늘날 시대정신은 자신을 중심으로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으로 살아가라고 주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에 동의는 하지만 삶에서는 정작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곧 길이니,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는 청지기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 가는데 우리가 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강하신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의 기자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시작되는 인간의 생명 여정을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로 찬양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을 시편의 인간 창조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인간의 출생 과정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몸속의 모든 장기는 단순히 오장육부를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면의 정서, 의지, 개성까지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139:13 진실로 주께서는 내 몸 깊은 곳의 모든 장기를 다 만드셨고,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 몸을 온전히 빚어 주셨습니다. 139:14 이 몸이 이토록 신기하고 오묘하게 빚어졌으므로, 주께서 하신 일이 하도 경이롭고 놀라워, 내가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솜씨가 얼마나 멋지고 훌륭하신지, 내 영혼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솜씨에 감탄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위대하고 놀랍다고 표현합니다. 그 결과 모든 장기와 심장을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안에서만 터져 나오는 감탄입니다.

139:15 내가 은밀한 어머니 뱃속에서 빚어지고 있을 그때에, 곧 내가 땅 밑 깊은 곳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짜 맞추어지고 있을 그때에도, 주께서는 이 몸의 형체를 이미 다 알고 계셨으니, 내 몸의 뼈마디 하나하나인들 어찌 주님 앞에 숨겨질 수 있겠습니까! 139:16 내 몸의 형체가 아직 갖추어지기도 전에, 주님의 눈은 나의 온전한 모습을 다 보셨습니다. 나를 위해 정해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내 인생의 모든 날들이 주님의 책에는 이미 다 기록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은 생명을 품어내는 사랑의 장소입니다. 엄마의 뱃속에서 모든 생명은 탯줄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숨을 쉬며 10개월 동안 성장합니다. 그러다가 세상에 나올 때에는 탯줄을 끊고 새로운 방식으로 숨을 쉬게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세상에 태어납니다. 시편 51편 5절은 “보라,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임신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태어난 이후,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마주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 안에서만 아니라, 구속의 계획 안에서도 온전하게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질문에서 감탄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감탄이 없는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강점이 교만을 부추기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약점은 자신감을 잃게 하고 자격지심에 빠지게 합니다. 수천 년 전, 이 시를 썼던 시인의 믿음과 통찰력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디서 부터 우리가 왔는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9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참된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벨론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이 유년기든, 청소년기든, 청년기든, 혹은 청장년기든 그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주 앞에서 세상의 ‘바벨론’이라는 영적 탯줄을 끊고 살아가라고 2025년의 새로운 시간을 부여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또 다시 참된 인생을 부여 받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시작된 시간도 점차 지나가고 소멸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발견된 구원은 궁극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세상의 눈물과 고통, 절망과 죽음을 거두어 가신 주님은 우리가 한해 동안 겪는 모든 일들 속에서 새로운 출구가 되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는 삶은 기적과도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다고 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이들은 비웃고 어리석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믿음이라는 기적을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변화는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큰 축복은 바로 이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믿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깊이 아시기에, 그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누구나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사계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생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이 있듯,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도 다양한 시기와 변곡점이 있습니다. 2025년이 어떤 이에게는 봄날일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겨울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삶 속에서, 각자의 계절에 맞게 하나님은 때를 따라 은혜와 도우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고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어린이에게 노년기의 성숙함을 요구한다면, 그들은 온전한 삶의 배움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과 상황에 맞춰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우리가 겪는 모든 계절 속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게 하십니다.

새해가 시작되며 새로운 결단을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우리에게 믿음의 도전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이들은 점점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계절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적과 삶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고, 새해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2.29. 2024 주일설교

(성탄 후 제 1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43

순종의 여정, 하나님의 뜻을 따라

“Journey of Obedience, Following God’s Will”

누가복음 2:41-52

41 ○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예수의 부모는 관례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43 명절이 끝나고, 예수의 부모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어린 예수는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예수의 부모는 그것도 모른 채 길을 계속 갔다. 44 그들은 예수가 일행 중에 끼여 있으려니 생각하고는, 하룻길을 갔다. 그러다가 문득 예수가 생각나서, 친척들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찾기 시작했다. 45 그러나 아무 데서도 예수를 찾지 못하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46 사흘 후에야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예수를 발견했다. 때에 예수는 선생들 사이에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있었고,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런데 예수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슬기와 지혜에 크게 경탄했다. 48 예수의 부모 역시 그 일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했다. “얘야, 왜 이렇게 우리 속을 태우느냐? 나와 네 아버지는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49 그러자 예수가 대답하였다. “왜 그렇게 저를 찾으셨나요? 제가 당연히 제 아버지의 집에 있으리라는 것을 왜 모르셨죠?” 50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신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 51 소년 예수는 부모를 따라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순종하며 지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소중히 담아 두었다. 52 예수는 날로 키와 지혜가 자라났고,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더욱 사랑을 받았다. (쉬운말 성경)

41 Every year Jesus’ parents went to Jerusalem for the Passover festival. 42 When Jesus was twelve years old, they attended the festival as usual. 43 After the celebration was over, they started home to Nazareth, but Jesus stayed behind in Jerusalem. His parents didn’t miss him at first, 44 because they assumed he was among the other travelers. But when he didn’t show up that evening, they started looking for him among their relatives and friends. 45 When they couldn’t find him, they went back to Jerusalem to search for him there. 46 Three days later they finally discovered him in the Temple, sitting among the religious teachers, listening to them and asking questions. 47 All who heard him were amazed at his understanding and his answers. 48 His parents didn’t know what to think. “Son,” his mother said to him, “why have you done this to us? Your father and I have been frantic, searching for you everywhere.” 49 “But why did you need to search?” he asked. “Didn’t you know that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d] 50 But they didn’t understand what he meant. 51 Then he returned to Nazareth with them and was obedient to them. And his mother stored all these things in her heart. 52 Jesus grew in wisdom and in stature and in favor with God and all the people.(New Living Translation)

한해의 마지막 주일예배입니다. 올 한해도 하나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분주한 세상에서 때때로 그 은혜를 잊고 살때도 있었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새 마음으로 한해를 잘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의 소년시절 에피소드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12살 때 성전에서 학자들과 대화하시는 이야기입니다. 41절과 42절 보시겠습니다. 41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예수의 부모는 관례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누가는 사복음서 중에 유일하게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성장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모가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이와 같은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매년마다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예수께서 열두살 되던 해에 일어난 특별한 이야기는 일상적인 순례의 여정 속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자란 나사렛 동네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대략 146km 정도 됩니다. 이 정도의 거리는 케임브리지에서 로드 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 (Providence, Rhode Island)나 뉴햄프셔주 맨체스터 (Manchester, New Hampshire)정도가 됩니다. 교통편이 편리하지 않던 시대에 꽤 긴 거리였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13세가 되면, 책임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의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소년은 회당의 회원이 될 수 있던 것이지요. 탈무드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 소년들은 13세가 되기 1, 2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미리 올라가 율법의 아들이 되기 위한 행동을 배웠다고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가 성전에 올라간 것은 이러한 교육을 미리 준비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절기를 마친 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떠났습니다. 많은 순례자들과 함께 걷다 보니 하룻길쯤 가서 예수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당연히 예수가 자신들을 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 생활에는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우리는 쉽게 예수님의 마음을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친척들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자, 그들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갑니다. 만약 주님의 마음을 잃었다면, 우리는 다시 주님이 계신 그곳으로 돌아가 회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사렛으로 가는 길에는 여리고 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도중 강도들에게 한 사람이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약 27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하룻길”이라는 표현은 하루 정도의 거리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나 그 근처까지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리고 길은 좁고 험하며 외딴 곳이 많아 밤에는 강도나 도적들이 활동하기 적합한 곳이었으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돌아가는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를 샅샅이 찾아 보았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면, 사흘이 지난 후에야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소년 예수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 그들의 가르침을 듣고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마리아와 요셉은 안도감을 느꼈겠지만,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답답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48절을 보시겠습니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했다. ‘얘야, 왜 이렇게 우리 속을 태우느냐? 나와 네 아버지는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던지는 질문과 답변에 놀라며 그의 지혜와 슬기에 크게 경탄했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장 과정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균형을 이루며 자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 점차 드러나는 과정 속에서, 지혜와 슬기가 나타났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성장 과정 속에서 예루살렘의 율법 선생들과 서기관들은 예수 위에 하나님의 지혜와 슬기가 있음을 분명히 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이야기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도전을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소년 예수가 메시야로서의 신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훈련을 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일상 속에서 주어진 사명을 지속적으로 인지하며 성장했을 것입니다. 열두살부터는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오가며 절기를 지켰고,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경건한 삶을 실천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통해, 그가 앞으로 펼칠 사역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워스(Stanley Hauerwas, 1940-현재)가 쓴 ‘한나의 아이’는 한 사람의 진솔한 회고록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경 쓰는 것은 인간으로서 하워스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겪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 그리스도인 하워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어려움 가운데 기도 생활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믿음이 자신의 삶의 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었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회고록은 나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준 친구들의 이야기이자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본질은 세상 속에서 성도가 외적인 ‘다름’을 강조하기보다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성숙한 삶을 살아가고, 그 삶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서로가 옳다고 외치는 세상 속에서 경건한 삶을 통해 평화에 이르는 길이 참 멀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스탠리 하워스(Stanley Hauerwas, 1940-현재)의 고백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나아가 하나님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지니셨다는 것입니다. 이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 속에서 더욱 깊은 도전이 됩니다.

51절을 보면, 소년 예수는 부모를 따라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순종하며 지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가 부모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일상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하지만 당시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예수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질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12년 전 천사가 전해 준 기쁨의 소식만큼은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받았던 기쁨의 소식을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31-35에서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1:31 너는 이제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1:32 그는 위대한 분이 될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잇게 하실 것이다. 1:33 그는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나라 역시 영원무궁토록 이어질 것이다.”….1:35 천사가 대답했다. “성령께서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이 너를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누가복음 1:31-33,35)

예수가 성전에서 지혜를 드러내고, 구원의 길을 준비하는 모습을 통해 마리아는 구속의 신비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천사의 말씀을 마음에 더 깊이 새겼을 것이고 마음의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본문 51절에도 보면, 소년 예수의 어머니가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마음 속에 소중히 담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국 US 산타크루즈 연구팀이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은 그룹과 사진을 찍지 않고 눈으로만 본 그룹을 두고 몇주뒤 본 풍경을 묘사하게 했는데, 사진을 찍지 않은 그룹이 훨씬 더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합니다. 우리 뇌는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 보다는 자신을 위해 기억할때 기억을 더 잘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삶의 양식입니다. 만약 매일 매일 인생을 변화시킬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그 일상의 신비를 거룩하게 여길 때, 경건의 능력을 더욱 깊이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탠리 하워스(Stanley Hauerwas, 1940-현재)는 인생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는 표현을 합니다. 인생을 ‘여러 시작과 하나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충실히 사는 법을 배우며, 그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도 소년 시절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30년 동안 성급하지 않게 사명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람은 일생동안 여러가지 도전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여정 중에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우리를 준비시키고 빚어가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49절입니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하였다. “왜 그렇게 저를 찾으셨나요? 제가 당연히 제 아버지의 집에 있으리라는 것을 왜 모르셨죠?” 한글성경에서 집으로 번역한 ‘토이스’는 헬라어 관사인데, 여격 복수로서 ‘것들’ 로 번역이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번역하면 ‘내 아버지의 것들에’ 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킹제임스 성경은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로 번역했고, 한글 성경을 비롯해서 다른 버전의 영어 성경은 ‘내 아버지의 집’(in my Father’s house)로 번역했습니다. 종합해 보면, 내 아버지의 일에 순종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일을 이뤄할 장소가 나사렛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뜻일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는 예수께서 앞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뤄가야 할 구원의 일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자신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50절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신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 예수께서 성취해야 하는 사명은 마리아에게는 고통을 겪는 일이 될 것이고, 예수가 이루게 될 뜻은 배로 낳은 아이를 향한 인간의 감정을 끊어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마리아에게 어려운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길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맡겨진 일을 순종하며 감당하는 가운데,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여정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그 출생을 축하받고 기쁨을 나누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을 마칠 때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태어난 날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을 기억하고, 고인이 되면 태어난 날이 아니라 마지막 날을 더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단순히 태어난 날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며 살아낸 삶의 끝자락에서 그 의미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순종이 바로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께서 거하실 성전이 됩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예배하는 삶은 주 안에서 거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육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많고, 감정이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하며, 이는 인간의 욕구를 거스르는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흔적에 사로 잡히지 않고, 순종의 여정에서 주님의 마음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생전에 그 복을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52절입니다. 예수는 날로 키와 지혜가 자라났고,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더욱 사랑을 받았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상황에서도, 믿음의 성도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함께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도리와 사람에 대한 도리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배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경험하고, 이웃 사랑과 도덕적 책임을 자각하며 성도의 삶이 깊어지게 됩니다. 이 둘 모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소년 예수는 그렇게 순종의 삶을 연습하며 공적 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는 날로 키와 지혜가 자라났고,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더욱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탄생 이전에 마리아의 용기 있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의 탄생을 위해 기꺼이 믿음으로 순종했고, 성육신 하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선물처럼 임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선물인 아기 예수는 마리아에게는 유대 관습에서 오는 차별과 멸시를 감당해야 하는 용기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 두려움을 덮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인생에도 저마다 각자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갈등을 마주할 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훈련과 기도의 자리에 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 주 되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믿음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기쁨을 경험하게 되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영혼의 기쁨을 누리게 될것입니다. 우리의 교회, 가정, 일터, 학업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순종하는 삶은 개인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 순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우리의 능력 밖의 일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한해도 잘 살아 내셨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사랑하는 교우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믿음의 성도들로 성장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