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 2024 주일 설교

(대강절 첫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9

일상의 믿음

Faith in Everyday Life

데살로니가 전서 3:9-13

9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든 기쁨, 곧 여러분이 우리에게 안겨 준 그 모든 기쁨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10 다만 우리는 여러분을 다시 만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기를, 또한 만나서 여러분의 믿음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드릴 수 있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셔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속히 열어 주시기를 빕니다. 12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 여러분 서로 간에 나누는 사랑과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13 그리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설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쉬운말 성경)

9 How we thank God for you! Because of you we have great joy as we enter God’s presence. 10 Night and day we pray earnestly for you, asking God to let us see you again to fill the gaps in your faith. 11 May God our Father and our Lord Jesus bring us to you very soon. 12 And may the Lord make your love for one another and for all people grow and overflow, just as our love for you overflows. 13 May he, as a result, make your hearts strong, blameless, and holy as you stand before God our Father when our Lord Jesus comes again with all his holy people. Amen.(New Living Translation)

교회력으로 대림절의 시작은 주님과 동행하며 주의 탄생과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이제 4주 동안 네개의 촛불이 차례대로 켜질텐데 첫번째 보라색의 촛불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촛불입니다. 설교자의 스톨도 보라색을 사용합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은 잃어 버렸던 희망, 평화, 기쁨,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촛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치열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의 빛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어둠을 통과하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고통으로 지친 이들의 마음에 찾아가 십자가 사랑으로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성도들 가운데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막연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밭을 갈며 한해의 열매를 기다리는 것처럼 믿음이 더 깊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군 생활을 해 보신 분들이라면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간다”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는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모든 과정이 다 지나가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할 당시에 마게도냐 지역에 빌립보 교회를 세운 이후 두번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도시는 로마의 행정 구역으로 부유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보통 항구 도시는 여러 도시에서 이방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음행과 우상들이 많이 유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데살로니가 지역도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이 만연했고, 여러 철학 사상들로 인해서 그릇된 사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도시에서 바울은 잠시 머무르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는데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데살로니가 지역의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을 합니다. 그 믿음의 현장에서 바울은 오래 머물지는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극심한 박해로 인해 생명의 위협 속에서 결국 베뢰아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그를 죽이려 하자 바울은 또 다시 아덴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바울의 형편은 누군가를 걱정할 상황이 못되었지만 그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복음사역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지역을 떠나 왔지만 갓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본인이 갈수 있는 상황은 안되고 교우들의 믿음을 파악하기 위해 자신이 아들처럼 여겼던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게 됩니다.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3장 6절을 보시면, “6 그런데 지금은 디모데가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아울러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 언제나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고, 또 우리가 여러분을 보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여러분 역시 우리를 무척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교회 안에 새가족들의 믿음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6절에서 “지금은”이라는 단어를 보면, 디모데가 갖고 온 좋은 소식을 듣자마자 기쁨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됩니다. 또한 믿음 안에서 형제가 된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들 사이에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위로와 격려입니다.(2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믿음을 지키는 일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겪게 될 것임을 미리 경고했습니다 (4절) 믿음의 고난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소명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믿음을 전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섬기는 자는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말할 수 없는 상처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믿음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5절) 바울 같은 경우에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이 믿음을 전파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9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든 기쁨, 곧 여러분이 우리에게 안겨 준 그 모든 기쁨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10 다만 우리는 여러분을 다시 만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기를, 또한 만나서 여러분의 믿음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드릴 수 있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굳건히 서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자신의 고통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굳건히 서 있다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훈련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믿음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기보다는, 아직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믿음이 확고히 서 있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믿음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기에 그들의 믿음을 위해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아무리 신앙을 오래 지켜온 사람이라도 믿음에서 완전한 성숙을 이루기까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도우심이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종종 믿음의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랜 신앙의 습관으로 자기 중심적인 믿음에 빠지거나, 신앙생활이 형식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방향은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삶 속에서 그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에 대해 1장 서두에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1:5 그러기에 우리가 전한 복음이 여러분에게 단지 말로써만 아니라, 능력으로, 성령으로,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깊숙이 가 닿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있었을 때, 여러분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1:6 그래서 여러분은 모진 고난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우리가 전한 말씀을 잘 받아들여, 우리를 본받고 또 주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1:7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믿는 자들의 모범이 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고난 중에도 삶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리적으로 아가야 지역은 데살로니가 지역의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아가야 지역에 있는 믿는 이들까지 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원동력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이 전한 말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에 그 말씀이 그들 가운데서 실질적으로 역사했다고 강조합니다.

1:13절 보시겠습니다. “1:13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실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그 말씀은 믿는 여러분 가운데서 지금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지역은 로마 황제를 ‘구원자와 주’로 칭하며, 황제가 군사적 평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오기 전에 성도들에게 고난과 핍박이 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니 고난 속에서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기를 권면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이 일터나 세상속에서도 이어져야 한다는 메세지는 2000년대 초, 한국 교회 내에서도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믿음 생활은 교회 안에서의 예배와 사역에 집중되었고, 직장이나 일상생활에서의 신앙적 실천은 상대적으로 적게 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일터에서의 신앙은 단순히 교회 밖의 삶만이 아닌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실천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삶으로 이어지는 실제적인 삶에 대해 2008년 국민일보 미션 라이프에 실린 기사를 스크랩하여 가지고 있는데, 한국 교회에 일터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진다는 글입니다. 기사의 글을 잠시 소개합니다.

“성도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일터에서 드려지는 삶의 예배도 교회의 한 형태라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일터에 임하고 일터속에 크리스천들로 인해 그 직장은 물론 사회가 변혁될 수 있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이뤄지는 교회다. 토드 홉틴스와 레이 힐버트는 “모든 크리스천들은 일터의 변혁을 위해서 부름받은 사역자들” 이라고 말했다. 크리스천들에게 주일의 교회보다 더 중요한 교회는 주중의 일터에서 이뤄지는 교회라고 강조했다.”

일터교회는  매일의 삶이 주일의 믿음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입니다. 일과 삶이 결국 사역이라는 것이지요.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삶으로 나아가는 풀타임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믿음 생활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확장됩니다.

11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셔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속히 열어 주시기를 빕니다. 12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 여러분 서로 간에 나누는 사랑과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13 그리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설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세상은 과거에 비해서 참 편리해 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좁은 길에 서야 하기도 하고, 불의에 맞서 저항하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려 할 때, 그 기준은 단순히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도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하여도, 때로는 세상의 영광과 자기 자랑을 추구할 유혹을 받습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의 사랑을 잃어 버리면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면서도 연약함으로 인해 세속적 욕망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의 악함을 왜 그냥 두시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땅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 둘을 갈라 놓으려고 하면 알곡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로마 황제는 더 이상 인생의 길을 열어 주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믿고 주님이라 따르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먼저 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제 서로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베풀라고 권면합니다. 그 사랑 안에는 자신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몰랐던 이방인들, 그리고  그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실 만큼 깊고 크며, 그 사랑에 의해 우리는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의 노력을 통해서 복된 관계를 지켜 나가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사랑의 수고라는 표현을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니까 수고로움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가 없다면 그 곳은 가정이든 교회이든 일터이든 사막과 같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므로 기꺼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섬김의 자리에서 묵묵히 수고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시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바라 볼 때마다 숨길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기쁨이 회복 되도록 애쓰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전도 사역의 피곤함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믿음의 소식을 듣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새 힘을 주었습니다. 참된 믿음의 공동체에는 이 소망이 있습니다. 서로가 세상속에서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 있는 것을 보며 용기를 얻고, 함께 모여 교제할 때는 세상에서 지친 마음을 주 안에서 위로 받으며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믿음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다 닦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그리고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 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선한 길로 인도받으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11. 24. 2024 주일설교

건강한 교회 시리즈 38

하나님 나라 감사의 길을 걷다

Walking the Path of Gratitude in God’s Kingdom

요한복음 18:33-37

33 총독 빌라도는 자신의 관저 안으로 돌아가, 예수를 자기 앞에 불러다 세워놓고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되물으셨다. “지금 그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두고 당신에게 한 말이오?” 35 빌라도가 말했다. “너는 내가 유대인인 줄 아느냐? 너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긴 것이다.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소. 만약 그랬다면, 내 종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지 않도록 능히 막았을 것이오. 하지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 있소.” 37 빌라도가 또 물었다. “그러면, 네가 왕이란 말이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소. 당신의 말대로, 나는 왕이오. 사실, 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태어났고, 그 일을 하려고 이 세상에 왔소.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리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말을 듣소.” (쉬운말 성경)

오늘 본문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께 세가지 질문을 합니다.

1.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2.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3. “그러면, 네가 왕이란 말이냐? 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의 답변은1.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소”, 2. “그렇소, 당신의 말대로 나는 왕이오” 3. “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태어났고, 그 일을 하려고, 이 세상에 왔소,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리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말을 듣소”

이 질문과 답변에 대해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답변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본문과 이어지는 38절에서 빌라도는 “그러면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을 하는데 빌라도는 주님께서 자신 앞에 계셨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온전하게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답변을 보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LT 성경은 이를 “I am not an earthly king”이라고 번역했는데, “나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나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말대로 왕이다.”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 예수님의 답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가 칼과 창으로 싸워서 이기는 세속적인 왕권과 권세를 추구하지 않는 다른 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감사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다른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통제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발한 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누가복음 23장 2절에 다음과 같은 고발 내용이 나옵니다.  “2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우리 백성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로마 정부에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하고, 또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를 고발한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 사람은 우리 백성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로마 정부에 세금을 바치지 않는다”라는 로마법을 위반한 죄명입니다. 셋째는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다”는 죄명입니다. 이는 당시 로마 황제를 섬기는 유대 사회에서 정치적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가 로마 제국을 칼과 방패로 위협할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고발한 죄목으로 정치적 반란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후 죄가 없다고 선언하지만 산헤드린과 군중들의 압박을 고려하여 유대 사람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후 빌라도는 예수가 로마법을 위반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심문 후 유대 군중들에게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유월절에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관례를 이용해 예수를 석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를 석방하는 대신 바라바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고, 결국 로마 체제에 저항했던 바라바가 석방되었으며,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세상의 역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영원한 생명과 진리임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첫째, 누가 당신의 왕입니까?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인간의 마음 속에 누가 왕이 되는지, 그리고 주님의 참된 권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 총독은 권세와 총독의 자리, 그리고 유대인들의 민심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잘못된 판결을 내린 사람이 되었고, 2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우리는 매주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신앙의 고백을 통해 빌라도의 선택과 그 결과를 깊이 되새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의미심장한 답변을 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소. 만약 그랬다면, 내 종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지 않도록 능히 막았을 것이오.” 예수님의 이 대답은 빌라도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종교 권력자들에게는 그토록 위협적인 존재였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을 종이라 부르며,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명예를 탐하는 이들에게는 섬김과 겸손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력을 유지하려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고, 결국 그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갈망하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통치가 드러납니다. 그 나라는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평안과 절대 감사로 채워 주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하여, 청교도들이 종교적 탄압과 억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여정을 돌아봅니다. 이는 복음이 증거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신실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길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좁은 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새로운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청교도들을 통해 이땅에 복음을 전파하시고, 미국의 법과 정치에 기독교 정신의 기초를 세우셨습니다. 그들의 신앙과 정신은 여전히 오늘날 신앙의 세대들에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각계 분야에서 기독교 신앙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더불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돌봄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불평은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잊는데서 시작됩니다.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가 발표한 My way라는 노래를 잘 아실 겁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르기도 했는데요. 이 노래는 1969년, 프랭크가 54세였을 때 사업 실패와 이혼으로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던 그의 인생에 전성기를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이 곡은 “내가 나의 길을 가겠다”는 인생관이 담겨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노래입니다.

가사의 일부분을 보면 “자, 이제 끝이 가까워졌어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지/ 친구여, 분명히 말할게 내가 확신하는 나의 이야기를 말이야…. / 모든 시련에 맞서서  당당하게 섰어 / 내 방식대로 사랑을 했고, 웃고 울기도 했지 실패도 실컷 해봤어” (And now end is near So I face final curtain / My friend, I’ll say it clear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I faced it all And I stood tall And did it my way)

그런데 그의 딸이 한 인터뷰에서 정작 자신의 아빠는 이 곡이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노래라고 생각해서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내 뜻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는 참된 삶의 길을 찾을수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각자의 길을 살아가며 겪는 모든 일들이 삶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죽음 이후에도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발견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형편에도 만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길은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현대 사회는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에 너무도 바쁜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누구입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왕으로 믿고 따르는 삶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주님은 성도의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고 계십니다. “나에게 주님은 누구인가?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평생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어야 할 중요한 물음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일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할 때마다 다시 일으켜 주시고, 그 과정속에서 더 깊은 깨달음과 성장을 경험하게 하시며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그분을 믿는 사람들 삶 속에 존재합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위기에 처하자 예수님을 부인하며 자신을 보호하려 했지만, 결국 연약한 자신을 깨닫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다시 찾아가셔서 그를 회복의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 보면 “또한 ‘보라. 여기에 있다’, ‘보라.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 나라는 믿는 자들의 마음과 삶속에서 이뤄지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천성의 나라가 지금 여기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칼로 세우는 나라와 하나님 나라가 다르듯이 세상의 감사와 진리 안에서의 감사는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감사보다 불평과 원망을 선택 했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조건으로 감사의 이유를 찾을때가 있습니다.

어느날 장미꽃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원망했다고 합니다. “신이시여, 왜 가시를 주셔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가시를 준 적이 없다. 오히려 가시나무였던 너에게 장미를 주었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하게 하시려는 사랑의 계획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려면,  세상의 사람들과 같은 기쁨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세상과 다른 이유는, 세상의 나라는 때로 잘 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압제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며, 절망 가운데에서도 감사와 소망으로 인도하는 나라입니다.  영적 고단함 속에서도 우리가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다스리십니다.

만약 우리의 생각이 주님과 막히게 되면 우리 안에 기쁨과 감사는 사라질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바울은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였으니 흔들림 없이 계속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골 2:6) 라고 권면합니다.

주님은 인생의 광야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필요한 은혜와 힘을 주십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그들은 만나를 먹기 시작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돌보심과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헌금을 통해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며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감사의 폭을 넓혀서 더 많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의 가치는 크기나 분량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감사의 뿌리를 주께 두며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절반이 감사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감사는 단순히 외적인 조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믿음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대강절을 준비하며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보시며 언제나 다함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주도 우리를 굳게 세워 주시는 주안에서 감사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11.17. 2024 주일설교

(성령강림후 제 26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7

주님이 찾으시는 거룩한 성전

The Holy Temple That the Lord Seeks

마가복음 13:1-8

1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려 하시는데,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 성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십시오, 선생님, 얼마나 굉장한 돌들입니까! 참으로 멋진 건물이지 않습니까!” 2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이 건물들이 그렇게도 멋져 보이느냐? 그러나 장차 이 건물의 돌 하나도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3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 맞은편의 올리브 산에 앉아계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따로 예수께 와서 물었다. 4 “선생님,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언제 그런 일이 닥치겠습니까? 그런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미혹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6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7 또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너희는 놀라지 말라.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지만, 그것이 아직 마지막 때는 아니다. 8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서로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고, 온 땅의 도처에서 지진이 일어나며, 곳곳의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아직 시작일 뿐이다. (쉬운말 성경)

한 방송인이 유럽을 방문 중, 중세 시대의 화려한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정교한 조각들과 천장의 그림들에 압도되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를 본 적이 있습니다. 눈물의 의미를 묻는 PD의 질문에 그녀는 자리에 앉아 기도하며 당시 성전을 건축하던 이들의 신앙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고 답했습니다. 시대마다 지어진 건축물은 종교와 문화, 사회적 가치를 담고 있는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나오실 때 한 제자가 성전을 보며 감탄합니다. ‘선생님, 얼마나 굉장한 돌들입니까! 참으로 멋진 건물이지 않습니까!’ 당시 성전의 주춧돌 크기가 가로가 7.3m, 세로가 1.2m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크기만으로도 성전의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성전의 정교함과 화려함에 압도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전 건축이 50여 년 동안 계속되어 왔으니, 제자가 헤롯 성전을 보고 감탄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제자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시골 출신이었기에, 그  웅장함에 감탄한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이 조금 이상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제자에게 “이 건물들이 그렇게도 멋져 보이느냐? 그러나 장차 이 건물의 돌 하나도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 구원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성전이 무너진다는 예언은 매우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성전이 보이면 화가 나도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성전을 향해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성전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예언은 성전에 흠을 내는 것조차 불경스럽다고 여겼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의 말씀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실제로 A.D. 70년에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헤롯 성전이 파괴되어 잿더미로 변했으며, 예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이 헤롯성전의 파괴만 두고 하신 교훈일까요?

성전을 우상시 하고 진정한 신앙을 잃버버린 것에 대한 유대인들을 향한 경고라고 여겨집니다. 학자들은 제자들의 이 질문과 예수의 대답에서 성전 파괴와 세상 끝이라는 두 사건이 신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예수의 사역을 완성하는 측면들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심판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시사합니다.

첫째,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전의 파괴는 외식과 화려함을 간직한 유대교의 심판적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값을 치르시고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 되었고,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성도들 안에는 성령께서 함께 거하십니다.

다니엘서 7장 14절에서 인자의 오심은 예수의 권위와 왕권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4 그러자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께서는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들을 주시고, 또한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과 각기 언어가 다른 온 땅의 뭇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경배하게 하셨으므로, 진실로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의 나라 역시 영원한 나라여서 결코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쉬운말 성경) 주의 다스림과 권위의 회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로버트 멍어(Robert Munger, 1911-2001) 목사의 책인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은 우리의 마음을 집에 비유하여 , 어떻게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어 변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마음의 공간들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보게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곳은 누구에게나 보여줄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은 나만이 아는 공간이 됩니다. 누구나 내면의 깊은 곳과 죄성을 가진 연약함은 들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리되지 않은 지저분한 서재, 인간적인 욕구로 가득차 있는 주방, 오랜 시간 동안 주님만 홀로 기다리게 했던 거실, 세상의 기쁨으로 가득했던 오락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해드릴 수 없다고 낙심하던 그래서 자기의 노력만이 남아있는 작업실, 이러한 마음의 공간을 주님과 함께 둘러보고 난 후에 그는 자기의 힘를 의지하며 살아 온 인생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비밀 공간인 벽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들키고 맙니다. 자신의 비밀스러운 모습들과 감추고 싶던 모든 것들을 주님께 드리며 항복했습니다. “주님 당신께 이 열쇠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벽장을 여셔야 합니다. 주님이 그것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십시오. 제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재산과 가옥과 부지의 집문서를 꺼냅니다. 내 삶이라 여겼던 그곳 그 자리에서 삶의 주권을 주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날 그의 마음은 주님을 모신 깊은 평화가 영혼에 자리한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잠시 우리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 마음이 반복적으로 무너지고 넘어지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왜어려울까요? 내가 쌓아둔 것을 조금이라도 잃어 버릴까 두렵습니까? 버리고 싶지 않은 옛자아가 원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숨기고 싶었던 비밀스러운 마음의 공간까지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1장에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너희가 이를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적 연약함과 죄성으로 인해, 마음 속에 끊임없는 이기심과, 분노, 시기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위선적 신앙에 대한 질책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고, 종교적 열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린 마음은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인간이 죄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음을 아시고, 율법으로 죄를 드러내셨지만, 온전한 순종을 이룰 수 없었기에 우리 대신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잃어버린 고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을 보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짐을 가능하면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셨고, 이어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시기 위한 절규가 느껴집니다. 그럼으로 기도의 집은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시선이 머무르도록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교제하며 지나간 이 자리에는 미움과 원망, 거짓과 분쟁이 사라지고 ‘하나되게 힘쓰라고’ 하신 주의 말씀만이 남게 됩니다. 삶의 변화는 하나님의 고통이 담긴 사랑을 이해하게 될때에  마음 안에 찾아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결국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트집을 잡고 잘못을 들추어 내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예수께서 헤롯성전을 나가시게끔 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성전 앞에 놓여진 촛불을 밝히며 “성령이여 이곳에 오소서, 이곳을 성별하소서”라는 고백을 드렸습니다. 켜져 있는 촛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공간을 만드시는 성령께서 지금도 이 자리에 운행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거룩함이 상실되어 진다면 인간의 마음은 언제든지 부패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불의한 세상에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연한 순은 약하고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줄기 빛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셨습니다. 그 빛이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비추고 계십니다.

둘째, 거룩한 성전을 지키는 성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가리키며 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종말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난 제자들은4 “선생님,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언제 그런 일이 닥치겠습니까? 그런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종말의 때와 시기에 관심을 두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종말의 징조를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모두가 이 종말의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종말이 끝이 아닙니다. 이미 죽음 권세를 이기고 마음의 성전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겪게 되는 슬픔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신 주안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려움과 절망이 희망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이미 이전의 삶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시선은 종말의 시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누구에게나 종말은 예기치 않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안에 있는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인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라 보아야 하는 성전은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마음 안에 찾아오는 수많은 아픔들 그런데 그 아픔을 씻겨 내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여러분을 압도하고 있으신가요? 헤롯 성전이 주는 장엄함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으신가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방식은 마음에 맞지 않으면 미워하고, 맞서 싸우고, 맞받아 치고, 이기는 자와 지는 자를 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은 오히려 불편하고 아프고 힘든 순간에 더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허용하시는 고난이라면 모든 것은 주안에서 유익한 일이 됩니다. 예수께서 오시고 난 뒤에 이천년 동안 교회는 끊임없는 저항과 핍박속에 있었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보여지고 들려지는 일들로 미혹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을 사는 성도는 거룩한 마음의 성전을 잘 지키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세의 때에 주어진 임무는 기도의 등불을 켜고, 매일 주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정작 이러한 때에 교회는 예수님으로 인해 모이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거룩해진 백성으로 삶을 살 각오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끝이라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의 완성으로 이해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론적 의식은 현실을 극단적으로 벗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미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게 될 때에도 ‘너희는 놀라지 말라.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지만, 그것이 아직 마지막 때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나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고 하셨고,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때와 기한은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세의 징조만을 언급하신 것은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의 자세로 살아가라는 교훈을 줍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1899-1981)의 책 ‘영적 침체‘를 보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영적인 건강에 미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균형 잡힌 신앙과 영적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현재의 신앙생활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과업과 소명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지만, 진리에 대한 지나치게 높은 기준은 그리스도인들을 쉽게 침체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도 교훈합니다.

끝이 없는 듯한 문명의 발전에 우리는 길을 잃어 버릴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화려한 현대 문명의 그늘 뒤에 가려진 채 더해 가는 세상의 방법들을 멈추고 그날을 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길은 많아 보이지만 출구가 없는 이 시대속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며 우리 삶을 통해 거룩한 성전을 세우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1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미혹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13:6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13:7 또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게 되어도, 너희는 놀라지 말라.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지만, 그것이 아직 마지막 때는 아니다. 13:8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서로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고, 온 땅의 도처에서 지진이 일어나며, 곳곳의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아직 시작일 뿐이다.

미혹은 억지로 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동조하거나 추종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직전에는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내가 그리스도라고 자신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 미혹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러한 일들이 만연하게 되면 폭력과 전쟁, 무질서와 불법은 사회 안에서 횡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종말의식은 내 마음의 거짓과 부패함, 타락해져 가는 것을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일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믿고 주어진 사명을 다해 살아가면 됩니다. 한주도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하늘의 교회를 향하여 지속적으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땅에서 우리의 삶이,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성전이 되도록 살아가며 매일의 삶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1. 10. 2024 주일설교

(성령강림후 제 25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6

작지만 가장 큰 마음

A small but the greatest heart

막 12:38-44

38 ○ 예수께서 또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율법 교사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긴 예복은 입고,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인사 받기를 좋아합니다. 39 또한 그들은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만 찾고, 잔칫집에서도 윗자리에만 앉습니다. 40 뿐만 아니라, 과부들의 재산을 가로채 빼앗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장차 더 엄중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 41 ○ 한번은 예수께서 성전 뜰에 있는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 넣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많은 돈을 넣는 부자들이 적지 않았다. 42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헌금함에 넣었다. 43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넣었다. 44 다른 사람들은 넉넉한 가운데서 조금 떼어내어 넣었지만, 저 과부는 극히 가난한 중에서도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바친 것이다.” (쉬운말 성경)

오늘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율법교사와 가난한 과부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 상반된 신분을 가진 인물들이었습니다. 율법교사는 부와 존경을 받으며 높은 지위와 명예를 누렸던 사람들이었고, 반면에 과부는 가난과 멸시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는데, 이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경건한 모습을 과시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린 것은 주님께서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부유한 율법교사들이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착취하는 탐욕적인 마음과,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모든 것을 드린 과부의 마음은 분명하게 대비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섬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는  이 말씀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마음의 자세를 재조명하게 합니다. 물질의 소유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와 가난한 과부를 대조하면서 참된 경건의 본질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율법교사들은 외적인 모습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한 반면, 가난한 과부는 모든 것을 드리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첫째, 참된 경건을 어떻게 채워가야 하는가?

하나님은 다윗의 연약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르켜 ‘내 마음에 합한 자’ 라고 칭찬 하셨는데, 다윗의 마음을 볼수 있는 기도문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역대상 29장 12절에서 14절입니다.

12 이 세상의 온갖 부요와 영광이 모두 주께로부터 말미암으니, 진실로 주께서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강하고 위대하게 되는 것도 모두 주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13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높이 찬양합니다. 14 주여, 우리가 이토록 즐겁게 예물을 바칠 힘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저나 제 백성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오직 주께로부터 나온 것이며, 우리는 주의 손에서 나온 것을 다만 주께 바쳤을 뿐입니다.(역대상 29: 12-14)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또한 다윗은 사람이 강하고 위대하게 되는 것도 결국 주의 손에 달려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주님을 향한 찬양의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찬양과 감사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헌금은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의 진실함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것을 넣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 벽을 따라 일렬로 놋쇠로 만든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13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성전 뜰에 있는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 넣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당시 모든 화폐는 금속을 주조하여 만든 동전이었기 때문에 헌금의 많고 적음을 소리로 쉽게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여러 부자들이 와서 많은 돈을 헌금하는 것은 인간적인 과시로 헌금을 했다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의 헌금과 과부의 헌금을 주목하셨습니다.

“많은 돈을 넣은 부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라는 구절에서 “넣다”, “던지다”라는 단어는  ἔβαλλον (에발론)으로 미완료형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는 부자들이 반복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이 부유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동전을 집어 넣은 모습을 묘사합니다. 아마도 놋쇠로 된 헌금함에 동전이 들어가는 소리가 길고도 크게 들렸을 겁니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은 ἔβαλεν (에발렌)으로 부정과거형으로 쓰여있습니다, 이는 과부가 동전 하나를 조용히 넣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때 과부가 헌금을 하며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유추해 볼수 있는 것은 동전 한개의 소리가 작고도 초라했을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진심으로 드린 과부의 헌금을 더 많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차이는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돈과 성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다르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물질과 명예가 성공의 척도로 여겨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내면의 진실된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외식하는 자가 되기 쉽도록 모든 것이 세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쩔수 없이 세상속에서 높아지기 위해, 소유하며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고 살아가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과 가정과 일터 그리고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펴 보시고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의 걸음입니다. 내가 가진 마음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 아픈 마음도 먹먹한 마음도 주님 앞에 온전히 내어드리며 나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회복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 참된 경건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세상의 섬김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성도의 섬김은 하나님을 위한 섬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서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의 죄와 내면의 연약함을 깨닫고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랑할 때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때, 그 사람의 내면의 동기가 변화하게 됩니다. 부족한 것이라도 채워주려는 마음,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는 자들이 되십시오.”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의 삶을 살아가십시오.(쉬운말 성경)

많은 사람들이 ‘경건’을 겉으로 드러나는, 눈에 띄는 말이나 행동으로 오해합니다. 경건의 삶은 먼저 마음의 동기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회개한 후에 그 동안 토색하던 물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절반이나 돌려 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물질관이 변화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경건의 삶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경건해질수록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들은 자신을 더 낮추며, 주님처럼 내어주는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율법교사들은 회당이나 잔칫집에서 항상 윗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를 길게 하는 등 외적인 경건을 중시했습니다. 물론 기도를 길게 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성전에서 일어난 마지막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앞장인 마가복음 11장에서 주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시며,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강력히 질책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성전이 그저 상업적 이익을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으며, 이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거룩한 공간으로 회복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성전의 개념을 외형적인 건축물에서 신앙의 내적인 차원으로 확장하여 “마음의 성전”이라는 개념을 강조합니다.

고린도 전서 6:19-20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KRV 고린도 전서 6:19-20)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 안에 충만히 임재하시면, 점차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외적인 모습에 치중하며 살아갑니다. 겉모습은 깨끗하고 화려해 보여도, 내면의 상태가 부패하면 결국 그 모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만일 겉은 깨끗한 컵이지만 안에 담긴 내용물이 오래되어 신선하지 않다면 결국 그 컵의 내용물은 썩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지도자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1615 – 1691)는 ‘참목자상’이라는 책에서 ‘자아성찰’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첫째, 은혜의 역사가 자신의 영혼안에서 온전히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보라 둘째,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에 만족하지 말고, 그 은혜가 활기차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보라 셋째, 행동이 자신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지 살펴 보라 넷째, 다른 사람의 죄는 지적하면서 자신은 혹시 그런 죄에 빠져 있지 않는지 살펴보라 다섯째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자격 요건을 갖추기 꺼려하지는 않는지 살펴보라

경건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점차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도움을 줄 때에는 드러나지 않게 도우라고 하십니다. 드러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낮아져야 하는 것이 성경의 지혜입니다.

마태복음 6:3-4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3 그러므로 당신이 친절을 베풀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십시오. 심지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조차도 모르게끔 하십시오. 4 그렇게 해서, 당신의 자선 행위를 아무도 모르게 고이 숨겨 두십시오.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는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쉬운말 성경 마 6:3-4)

교회의 주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시선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형식과 겉모습만 남고 그 본질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Oswald Chambers, 1874-1917) 는 ‘제자도’라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실 때, 아무도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영광을 구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자리가 신앙인들에게 위험한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유혹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과 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교사들의 경건이 형식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사회적 존경을 받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종 자신의 위엄과 지위를 과시하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 했습니다. 물론 모든 율법교사들이 다 경건의 형식만 추구한 것은 아닐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교훈해주셨습니다.

믿음의 시선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진정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려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입니다. 믿음의 본이 되신 주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실한 믿음의 길 앞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걸어 가다보면 고난 앞에서 울 수 밖에 없고, 매일의 마음의 넘어짐 앞에서 주저 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까지도 내어 드리며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작은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큰 믿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그 진실한 마음 붙들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순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교우들의 삶에 이번 한주도 주님의 평안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2024 11. 03 주일 설교

(성령강림후 제 24주 예배)

건강한 교회 시리즈 35

듣고, 깨닫고, 사랑하라

Listen, Understand, and Love

마가복음 12:28~31

28 ○ 율법 교사들 가운데 한 명이 거기에서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답변을 아주 잘 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께 또 물었다. “모든 계명들 중에서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오. 곧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주께서는 유일한 분이시다. 30 그러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31 그리고,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는 것이오. 이 두 계명보다 더 크고 중요한 계명은 없소.” (쉬운말 성경)

28 One of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was standing there listening to the debate. He realized that Jesus had answered well, so he asked, “Of all the commandments, which is the most important?” 29 Jesus replied, “The most important commandment is this: ‘Listen,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the one and only Lord. 30 And you mu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ll your soul, all your mind, and all your strength.’[g] 31 The second is equally importan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h] No other commandment is greater than these.” (New Living Translation)

종교개혁자 루터는 양심에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쉴새 없이 안간힘을 쓰며 고해성사를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죄까지 어떤 때는 여섯 시간씩 고해성사를 했어요. 고해를 할 때에 십계명을 훑어 내려가며 자신의 일생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고해성사를 받아주던 스승 슈타우피츠 신부가 ‘이봐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화를 내시고 있는게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군요. 소망을 지니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잊었냐고 소리치며 그리스도께 용서를 받고 싶거든 자질구레한 죄가 아니라 다음에는 큰 죄를 짓고 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루터는 그렇게 죄를 고백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의 검열을 피해 빠져나간 죄로 인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인간의 성품 자체가 타락해 있다는 사실과 씨름하며 깊은 괴로움을 경험했습니다. 믿음으로 고뇌하던 그 자리에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참된 믿음을 발견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발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 이후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 예수를 책잡으려고 하는 이들과 논쟁이 벌어집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과도 논쟁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지켜본 한 율법 교사가 예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듣고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가를 질문합니다.

12:28 ○ 율법 교사들 가운데 한 명이 거기에서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답변을 아주 잘 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께 또 물었다. “모든 계명들 중에서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질문을 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오. 곧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주께서는 유일한 분이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한 율법 교사도 처음에는 듣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하나님은 시대마다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비유로 전하셨습니다.

첫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한 것인데, 유대인들은 아이가 자라면서 말을 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쉐마’의 첫 절인 이 말씀을 가르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쉐마’라는 것은 ‘듣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입니다.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소식도 어디서나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가 만들어 지기 전에 듣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아이들도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시간을 통해서 언어를 배우게 되잖아요. 하나님의 말씀도 먼저는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롬10:17)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 죽었던 믿음이 살아납니다. 신앙의 영적 상태를 평가하는 척도는 우리가 말씀을 듣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듣는 이들의 마음에 생명의 말씀을 주십니다.

포로 귀환 후 돌아온 백성들은 성벽을 재건한 뒤, 율법책을 읽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에스라가 큰소리로 말씀을 낭독할 때, 온 회중은 그 말씀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숨죽여 낭독하는 소리에 집중하며 듣다가, 읽기 시작하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마음이 벅차올랐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기록된 말씀(the written Word)”, “계시된 말씀(the revealed Word)” “선포된 말씀(the preached Word)”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나셨고, 성경은 그 말씀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 설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보여야 믿겠다는 태도보다는, 기록되고 계시된 말씀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록된 것은 주님께서 역사의 일부가 된 것이고, 성도에게는 영생의 시간을 살아가는 세계가 펼쳐 졌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율법교사의 질문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영생은 보이지 않는 개념이며, 그 단어는 지극히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영생을 실제로 갈망하고 그로 인해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이는 계명의 본질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라는 법관원은 “귀 있는 자들아 들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율법을 읽었고, 높은 직책에 있었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하냐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데 있습니다. 모든 나라에 교회가 세워지고 매주일 말씀은 선포되고 있지만,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온 그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 가야 합니다.

둘째,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루터는 깨달음을 통해 관점이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씨름하던 문제는 바로 회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영국에서 태어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Martin Lloyd-Jones, 1899-1981)은 촉망받는 젊은 의사였는데, 28세에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의사의 직업을 내려놓고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는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저는 살인이나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시편 51편의 다윗의 회개가 제게는 와닿지가 않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간음과 살인죄를 연속적으로 범한 사건(B.C. 991년경)에 대하여 나단 선지자 로부터 책망을 듣고 자기 죄를 참회하며 지은시입니다. 이때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Martin Lloyd-Jones, 1899-1981)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회개는 죄의 종류나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데 있습니다. 마음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고,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의지에서 비롯되는 행동이 곧 기독교 신앙입니다.

어느 날 요나에게 이방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전에는 이방인들에게 가도록 보냄 받은 예언자는 없었습니다. 요나는 말씀을 듣고도 니느웨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느끼며, 그들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화를 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용기가 없었던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로 도망가고 싶어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키셨고, 배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의 신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선장은 요나에게도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풍랑이 일기 전 잠들어 있던 요나는 이제 위기 속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배에 있던 사람들에게 “나는 히브리 사람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풍랑이 일어 난 것이라 자백합니다. 사람들은 요나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며 노를 저어 보았으나, 풍랑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요나의 마음속에 얼마나 괴로운 씨름이 일어났겠습니까? 요나에게는 죽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구원의 물고기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요나는 깊은 바다, 물고기 뱃속에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러 비로소 구원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마틴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 1899-1981)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옥에 보내시더라도 나는 변명할 입장이 없습니다. 그럴 만한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이것이 진정한 회개라고 설명했습니다. 크리스챤에게는 주어진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이 궁극적인 부르심은 우리가 일상속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점검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첫째 계명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라고 하셨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가치입니다. 그러나 사랑만으로 갈등을 다 해결할 수 없고 사랑으로만 섬기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 18절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 쪽에서 먼저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십시오.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등 앞에 어려운 문제 앞에 사랑보다 더 큰 힘은 없을 것입니다.  갈등을 넘어서는 사랑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두개의 계명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팀 켈러는 그의 책과 설교에서 율법주의와 상대주의를 인간이 진정한 복음을 대체하는 두 가지 잘못된 방식으로 자주 설명합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행위와 규칙 준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율법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집중합니다. 율법주의는 사람을 자만에 빠지게 하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반면에 상대주의자는 절대적 권위의 명령을 무시하고,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기준에 따라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하나님 없이 인간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여기게 되어 잘못된 믿음을 형성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받은 선물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삶을 통해 열매 맺는 참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회의 관습을 뛰어넘는 진정한 이웃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의 대상은 유대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강도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 설명하셨습니다. 유대인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음을 비유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가장 큰 계명안에 담긴 핵심이 무엇이냐는 것은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낌없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613개의 규정이 있었고, 유대 랍비들은 어느 규정이 더 크고 무겁고, 어떤 것이 더 작고 가벼운지에 대해 끝없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율법의 완성이 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쏜 죄악의 화살이 예수의 심장을 관통했을 때, 그 화살을 빼내어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내시고, 그 사람에게 사랑으로 돌려주시며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 십자가 안에 정의와 사랑이 조화롭게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과 용서의 개념을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믿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시각으로만 상대를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내 편’과 ‘너의 편’이 나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나의 편’이 아닌 대상을 부정하거나 배척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러한 시대에 참된 성도에게 필요한 믿음의 자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자신의 아들을 적극적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성도의 존재가 변화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예수께 표적을 요구했지만, 주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다른 표적을 보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바꾸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사랑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작은 노력일지라도 우리가 받은 사랑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지체들에게 손 내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놀라운 일들을 이뤄가실 것입니다. 한주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듣고 깨닫고 사랑한 삶의 노력과 흔적을 지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