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9 2025 주일설교

(사순절 첫번째 주일)

놀라운 은혜

Amazing Grace

요한복음 5:2-9

유병용 감독

놀라운 은혜를 시작하면서 의문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왜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왜, 영어로 Why라고 하는 단어도 사용하지요. 무슨 까닭으로, 또 어째서 어떤 사실에 대해서 확인을 요구할 때, 왜, Why 그런 말을 씁니다. 이 의미를 표현하면서 주어진 글이 있다면, “인생의 짐”이라고 하는 글입니다. 짐이라고 하는 말은 맡겨진 책임과 의무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자기가 가지고 가야 할 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이라고 하는 글입니다.

“내 등에 내가 가지고 갈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겁니다. 그것은 내 등의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임을 알았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겁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도 알게 되어졌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라고 하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인생에 등의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 열매가 완전히 익지 못한 사람처럼 미숙하게 살고 있었을 겁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 중심이 되어 모든 일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진 귀한 선물임을 알게 됐습니다. 내 인생에 등의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겁니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인생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진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이 글은 자신의 인생에서 져야 되었던 짐에 소중함을 깨닫게 되어진 글입니다. 마치 물살이 거센 냇물을 건널 때면 등에 짐이 있어야만 그 무게 때문에 물살에 사람이 휩쓸려 내려가지 않습니다. 만약에 짐이 없다면 그 사람은 가벼워서 물살에 떠내려 갑니다. 화물차도 언덕을 오를 때면 화물칸에 짐이 잔뜩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바퀴가 헛돌지 않습니다. 그 짐 때문에 그 험난한 고개도 넘을 수가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내 인생의 짐은 그 짐 때문에 바르게 살게 했고, 안일에 빠지지 않게 했고, 불의라고 하는 물결에 휩쓸리지 아니하도록 나를 붙잡아 주었고, 내 인생의 짐은, 내 인생의 수많은 인생의 고개, 고개를 넘을 때마다 헛바퀴 돌지 아니하고,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짐이 되어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져야 할 짐은 무거운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준 유익이 되어졌다고 하는 거지요.

오늘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내가 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짐도 있고, 직장이라는 짐도 있습니다. 교회의 짐도 있습니다. 내 몸이 아픈 짐도 있습니다. 슬픔의 짐들도 있고, 내가 평생 져야 될 자녀의 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짐은 내가 삶을 살아가게 감당하게 된 짐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되어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되어진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온 위대한 사도 바울도 자신에게 짐이 있었습니다. 육체의 질병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기도해 주면 병이 났는데, 자기는 자기 자신의 질병에서 세 번씩 기도해도 하나님은 그 질병을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후에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이 짐은 오히려 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란 말을 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이르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합니다. 바울도 자신이 져야 되는 몸의 질병이 오히려 자신을 교만하지 않게 한 인생의 짐과 같았는데, 지나고 나니 은혜의 힘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인생의 짐이 있습니다. 짐으로 여기지 마시고 은혜의 힘으로 여기십시오.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도 인생에 큰 짐을 지고 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자비의 집 또는 긍휼의 집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베데스다 연못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여러 개 문이 있습니다. 주로 제사 드리기 위해 양이 들어가는 양의 문 옆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거기는 수많은 병자들이 행각 주변으로 사람이 다 몰려 있습니다. 이유는 천사들이 가끔 연못에 내려와서 물을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럼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려도 낫는다고 하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그 연못 속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연못 주변에, 행각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 4절은 기록하죠.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들이 지금 주변에 몰려온 겁니다. 여기에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38년 동안 환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사람은 이름도, 하던 일도, 병명도 모르지만 스스로 움직이지 못해서 오랫동안 고생하며 지내온 사람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왔습니다. 물이 움직이면 가장 먼저 뛰어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자기는 넣어 줄 사람이 없는 겁니다. 친구도 없습니다, 가족도 없습니다. 어쩌면 있더라도 38년 동안 병자의 삶을 살아서 다 떠났을 겁니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완전한 포기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가련한 인생이지요. 이런 38년 된 병자가 이 연못에 왔지만, 이 사람은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 연못을 떠나기에는 미련이 남아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누워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그 연못에 찾아오신 겁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이 38년 된 병자 앞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병자를 보시고 주님이 묻습니다. “네가 낫고 싶으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5절, 6절에 기록하죠. “거기 38에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내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연못에 찾아온 겁니다.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38년 된 이 병자에게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신 겁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질문에 이 사람이 대답을 합니다. “네, 저도 낫고 싶습니다. 그런데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나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을 수 없다.” 그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5장 7절에 기록하죠.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고는 쉽지만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예수님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환자에게 강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냐,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8절에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38년 동안 환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른 말하지 않습니다. “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정말 믿겨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다음 9절을 보면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시간도 오래 되지 않죠. “곧 나아서” 성경의 기록은 굉장히 단어로 짧습니다. 이 사람은 38년 동안 엄청난 인생의 짐을 가져 살아왔습니다. 38년의 고통, 절망, 좌절, 그런데 한마디 “내 자리 들고 걸어가라.” 이 한마디에 38년의 고통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저 분의 말대로 해보고 싶은 거예요. 38년 동안 누웠고 여기 와도 누구 하나 연 줄 사람이 절망이지만 지금 내게 말씀하는 이분이 정확히 누군지 모르지만 해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분 말대로 자리를 들고 일어섰는데 38년의 질병이 떠나간 줄로. 믿습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놀라운 은혜는 38년 된 이 사람에게만 나타났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많은 사람, 수많은 병자 있었지만, 유독 이 38년 된 이 병자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었을 거라 하는 겁니다. 이 환자는 어떤 모습이었기에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기적 같은 일을 예수님은 주었을까? 우리는 2025년을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배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기도합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인 사람으로 그치지 마시고, 38년 된 병자에 찾아오셔서 기적을 주신 놀라운 은혜가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이 안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면 38년 병자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는 왜 그 사람에게만 베푸셨습니까? 첫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란 말이 뭐예요? 하던 일을 도중에 자꾸 그만두어 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은 포기하는 순간 희망이 사라집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당시 많은 질병들을 소개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3절에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누워서 물에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다 치료 받으려고, 일반 병원에서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이제는 구전으로 내려온 베데스다 연못가에 와서 천사가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가려고 왔습니다. 다양한 환자들이 있었지만, 많은 병자가 있었지만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병명만 썼어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 사람은 병명은 없는데 38년이라는 기록을 씁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그 수많은 환자들 가운데 예수님 오셔 가지고 벌써 그 사람 모습만 딱 봐도, 아,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래됐다는 걸 주님이 벌써 알아볼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5장 5절에 기록하죠. “거기 38해 된 병자가 있더라.”고 말합니다.

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누운 곳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벌써 예수님 첫눈에도 이 사람은 너무너무 병이 오래됐다는 사실을, 38년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잠깐 눈으로 보아도 38년 동안 질병을 앓아왔다는 얘기는 당시 의학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뭔들 안 해봤겠어요. 결국 이 사람은 죽음이란 단어가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절망이란 단어가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포기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도 이 38년 된 병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넣어 줄 사람도 없지만 여기까지 온 거예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베데스다 연못까지 온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너무너무 질병으로 38년 된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이 사람 속에 포기하지 않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람의 마음을 체크한 겁니다. “네 병이 너무 오래된 건 내가 안다. 그러나 마음속에 아직도 내가 낫고 싶으냐?, 내 마음속에 아직도 희망 있느냐?, 내가 지금 포기하지 않고 있느냐?”, 왜 이 사람이 현실을 보면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왜, 누구 하나 자기를 도와서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시고 뭐라 말합니까? 네가 희망을 가지고 있느냐?, 네가 포기하지 않고 있느냐?, 네가 낫고 싶으냐?. 요한복음 5장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 벌써 오래된 줄 알았어요. 그런데도 말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때 환자의 대답은 포기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네, 주님, 정말 낫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38년 된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온 이 사람에게 가족도 친구도 다 떠났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5장 7절은 기록하죠,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포기된 대답이 아니에요. 그 마음속에 지금도 낫고 싶은 희망을 말하고 있어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마음 깊은 곳에 희망으로 대답하는 그 사람의 대답을 주님은 보셨단 사실입니다. 여러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붙잡아 줍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한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바디메오라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입니다. 앞을 못 봅니다. 스스로 노동을 할 수 없어요. 이 사람이 결국 생존을 위해서 선택한 거 뭐냐, 구걸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앉아 가지고 나를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앞은 보이지 않지만 시각 장애인이 발전되게 청각이 발달돼서 지나가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서, 이 사람은 특별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 귀에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왜 우리 마을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올까? 왜 그럴까?” 그런데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자기 앞으로 다가옵니다. 어느 순간에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자기 앞에 왔는데, 보니까 예수님이 자기 앞을 지나고 있는 거예요. 이때 당시 정통 유대인들은 구약의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를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이 메시아, 구원자라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디메오는 자기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라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당신이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심을 믿습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꾸짖습니다. “조용히 좀 해라, 네가 이 구걸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느냐?”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었습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8절에 이어서 기록하지요.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꾸짖지만 더 큰 소리로, 더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는 말은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분명한 확신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이 바디메오에게 다가왔습니다. “네가 나를 불렀느냐?” “예“ ”왜 불렀느냐?” “주님, 저는 보시다시피 시각 장애인입니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당신이 말씀만 하시면 나는 눈이 떠질 줄로 믿습니다.”

이 사건이 2025년 전입니다. 현대 의학이 발달된 지금도 시각 장애, 이 선천적 시각 장애, 눈이 떠진다, 불가능합니다. 2천 년 전에 이 사람은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께서 말합니다. “네 입술로 고백한 대로 되리라.”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52절에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바로 그 시간이 사람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일생 동안 어둠을 가지고 살았어요. 포기할 수밖에 없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진 이 사람에게 주님은 기적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2025년을 살아가는 여러분, 우리 모두 다 인생의 짐이 있습니다. 그 짐이 힘들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그 짐을 힘이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은 너무 힘들다 보면, 짐이 무겁다 보면 자꾸 내려놓고 싶잖아요. 끝까지 붙드십시오.

2) 열정이 있었다.

두 번째는 열정이 있음을 봅니다. 이 38년 된 병자, 포기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있는 열정을 봅니다.

사람이 그 속에 희망 있으면 그 사람은 열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합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그래서 요한복음 5장 8절에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베데스다 연못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아니하고 마지막까지 희망을 붙들던 자에게 말합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주님의 기적은 열정을 가진 이 사람에게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는 누가 도와주어야만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은 “네가 스스로 일어나라.”라는 겁니다.

예수님 말이 이해가 안 돼요. “어떻게 내가 일어나요?” 그런데 그 속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희망을 가지고 열정 있는 자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아멘, 그래서 9절에 “곧 그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38년 된 병자가 깨끗하게 고쳐진 사건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논리력으로 분석도 하지 않았습니다. 계산하지도 않았습니다.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나를 향하여서 말씀하는 이분이 보통 분이 아니구나, 열정을 품고 그분의 말에 일어나 봤어요. 놀랍게도 38년의 질병이 떠나가고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기적을 보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9절은 말합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오늘도 하나님은 열정을 가진 자와 일하실 줄 믿습니다.

열정은 “어떤 일에 대해서 열렬한 애정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한결같은 마음을 갖는 거를 열정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어요. 그 사람들은 전해 듣고 왔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한번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가 들어가면서 낫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 온 사람들, 어떤 사람이에요? 포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음 기회에 들어가면 되겠지,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냥 남들 따라서 따라온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주님은 그런 자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그의 눈빛 속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속에 열정 있는 자, 주님은 기적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2025년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의 기도를 드립니다. 왜 기도를 드려도, 왜 예배를 드려도 변화가 없을까요?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기록된 성경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려도 그 말씀을 들을 때 역사가 나타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희망을 품고 열정을 가진 자입니다.  열정을 가진 자는 말씀을 붙들 수가 있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해가 안 돼요. 계산상으로 안 맞아요. 그래도 할 수 있었던 게 뭐예요?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계산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머리로 되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의 역사, 다른 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기대하십시오. 이 사람은 38년 동안 뭘 안 해봤겠어요?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 봤을 거예요. 그런데 내게 주신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열정이 있고 나니까, 포기하지 않고 나니까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거예요. 하나님의 방법은요, 사람의 계산을 뛰어넘습니다. 사람의 방법을 뛰어넘습니다. 여러분이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38년의 질병이 바로 그때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2025년 하나님의 방법을 기대해 봅시다. 포기하지 마세요. 누구나. 인생의 짐은 다 갖고 있어요.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함께하는 열정을 품으십시오. 놀라운 기적은 여러분에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글은 바다에서 풍랑이 와 가지고 표류하는 배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작은 어선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 풍랑에 휩쓸리다가 겨우 풍랑이 멈춰지지만, 엔진도 다 고장나고, 나침판도 다 고장나고, 통신 시설도 다 고장나고, 이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표류할 수밖에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식량도 다 떨어졌어요. 배고픔도 왔어요. 더 중요한 건 배고픔보다 더 무서운 게 타는 목마름이 있어요. 그래서 너무 목마르니까 바닷물을 떠 가지고 마셔 보지만, 혓바닥은 갈라지면 더 탑니다. 이들은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게 목마름이었어요. “내게 물을 주세요. 물을 주세요. 물 마시고 싶다. 물 마시고 싶다.” 그러나 물은 없습니다. 그 망망대해 뜨거운 해는 내려칩니다. 혀가 갈라집니다. 모두가 목말라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배 한 척이 오는 겁니다. 사람들이 소리칩니다. 혀가 갈라지면서, “물 좀 주세요. 물 좀 주세요.” 목마름으로 물을 달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물동이를 아래로 내리세요.” 그러는 거예요. 물을 달라고 하는데 저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물동이를 아래로 내리라”는 거에요. 이해가 안 돼요. 양쪽에서 말합니다. “물 주세요.”, “물동이를 아래로 내리세요.” 어느덧 이 배가 표류되고 바다를 벗어나서 강까지 온 겁니다. 이제 물 바가지만 내리면 물을 마실 수 있어요. 그들은 그걸 모르고 “참, 목마르다. 물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도 우리 목마름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우리 곁에 어떻게 계십니까? 은혜의 물을 떠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멀리 있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 생에 수많은 내가 져야 될 짐이 있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열정을 품으십시오. 주님은 “네가 낫고자 싶으냐?” 우리의 믿음을 점검한 다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025년을 살아가시면서 가정의 짐, 자녀들의 짐, 경제적인 짐, 질병의 짐, 짐 없는 사람 없어요. 다 있어요. 그 짐을 무겁다고 하지 마시고 포기하지 않고 가지고 지면서 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함을 믿으시면서 가십시오.

기적은 하나님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생의 목마름, 내가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내게도 찾아오신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수를 마시고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시면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38년의 절망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처럼 2025년 하나님의 방법 앞에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의 고백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다시금 주님 붙들고 열정으로 나가겠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도우셔서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03 02 2025 주일설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A Life of Reverence for God

시편 99:1-9

1 주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니, 뭇 나라 백성들이 두려워 벌벌 떠는구나. 주께서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니, 땅이 흔들거리는구나. 2 시온에 계신 주님은 참으로 위대하시고, 온 나라 백성들 위에 우뚝 드높으시도다. 3 온 나라 백성들아, 크고 두려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진실로 주님은 거룩하시도다4 주님은 강한 분이시요, 공의를 사랑하는 분이시다. 주께서는 공평을 견고히 세우셨고, 정의와 올곧음을 야곱 안에 두셨도다. 5 우리 하나님 주를 높이 기리고, 그분의 발판 앞에 엎드려 경배하여라. 진실로 주님은 거룩하시도다. 6 그분을 섬기는 제사장들 가운데는 모세와 아론이 있었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사무엘이 있었으니, 그들이 우리 주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어 주셨도다. 7 주께서는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은 주께서 이르신 훈계와 명령을 그대로 따랐도다. 8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행한 대로 벌을 내리시기도 하셨지만, 결국 주께서는 그들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우리 주 하나님을 드높이 기리고, 그 거룩한 산에서 경배하여라. 진실로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도다. (쉬운말 성경)

1 The Lord is king!
    Let the nations tremble!
He sits on his throne between the cherubim.
    Let the whole earth quake!
2 The Lord sits in majesty in Jerusalem,[a]
    exalted above all the nations.
3 Let them praise your great and awesome name.
    Your name is holy!
4 Mighty King, lover of justice,
    you have established fairness.
You have acted with justice
    and righteousness throughout Israel.[b]
5 Exalt the Lord our God!
    Bow low before his feet, for he is holy!

6 Moses and Aaron were among his priests;
    Samuel also called on his name.
They cried to the Lord for help,
    and he answered them.
7 He spoke to Israel from the pillar of cloud,
    and they followed the laws and decrees he gave them.
8 O Lord our God, you answered them.
    You were a forgiving God to them,
    but you punished them when they went wrong.

9 Exalt the Lord our God,
    and worship at his holy mountain in Jerusalem,
    for the Lord our God is holy!(New Living Translation)

종교개혁자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인식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책을 통하여 학습되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연악함을 철저하게 깨닫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 가운데 구원을 향한 갈망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본 시편 3절 5절 9절에서 3번에 걸쳐 ‘진실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카도쉬: קָדוֹשׁ’는 ‘구별되다, 깨끗하게 되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으로 부터 구별되시고, 깨끗하셔서 우리가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르십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일평생을 살아도 하나님을 완전하게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부를 경험해도 그 거룩함에 압도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면서 입술이 부정하여 내가 하는 말이 다 더럽고 불결하구나, 하나님께 속할 수 없고 스스로 무가치하다는 생각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제는 네 부정함이 씻어졌고, 네 죄가 덮어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후 이사야에게 사명감이 임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옵소서”라고 결단합니다. 이사야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6:5 그때 내가 소리쳤다. “아, 나에게 재앙이 닥쳤구나! 이제 나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이렇게 전능하신 만군의 왕이신 주님을 나의 두 눈으로 직접 뵙다니! 6:6 ○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한 천사가 제단에서 활활 타고 있는 숯불 한 덩이를 부집게로 집어, 그것을 손에 들고 내게로 날아와, 6:7 그 제단의 활활 핀 숯덩이를 내 입술에 갖다 대면서 말하기를 “보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이제는 네 부정함이 씻어졌고, 네 죄가 덮어졌다!” 하였다. 6:8 ○ 바로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내야 할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갈 것인가?” 그래서 내가 주께 대답하였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소서!”

인간의 죄된 마음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르기 보다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예수께서는 돈과 하나님 가운데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만큼 돈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만큼 강력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의 죄를 자각하고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에 우리가 살 길은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거룩이란 매일같이 일정시간에 예배 드리며 기도하는 외적인 행위 차원이 아닙니다. 거룩은 거룩하신 하나님 안에 들어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거룩 안에 명령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2절로 18절에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몇가지 실천사항을 말씀하시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이 거룩은 하나님이 하시고 있는 것이지만 이 일에 너희도 동참하라는 명령입니다.

“부모를 경외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 회개하는 예배를 드리라. 곡식을 거둘 때에 밭 모퉁이를 다 거두지 말라.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위한 배려입니다. 도둑질과 거짓말을 하지 말고, 서로를 속이지 말아라, 함부로 거짓 맹세하여 너희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라.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 이웃의 피를 흘려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이라고 두둔하거나 권세 있는 자라고 편들지 말고 공정하게 대하라.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러한 사항들이 거룩함에 대한 규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매일 아침과 일상을 보내고 잠자기 전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말씀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마음과 행동이  닿는 곳을 보면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임명예배를 드립니다. 집사와 권사로 임명 되는 분들은 개인생활, 사회생활, 교회와 가정에서 모범이 되고 헌신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품는 일은 우리에게 그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 아프고 힘들더라도 사랑해야만 하는 삶을 마주하게 됩니다. 교사들은 매주일 아이들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가르칩니다. 이 수고함을 통해 아이들은 이 시절에 배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예배하는 기쁨을 배워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처럼 시대적 책임을 감당하는 주의 자녀들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사명은 참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사명은 주어진 자리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어도 맡겨진 임무를 해 나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편하고 익숙한 것을 더 찾게 되지만 사명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믿음의 길로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며 감당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인본주의적 방식이 강해지는 시대가 되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견고한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음세대가 하나님 중심으로 견고해 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인도했습니다. 애굽은 세상의 우상이고, 어둠과 죄악 백성을 상징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아론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여 지은 죄를 씻게 하였지요. 사무엘은 이스라엘 350여년간 지속된 영적 암흑기의 시대에 다시금 거룩한 역사를 위한 그 사역을 감당했던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금요예배 결단 찬양으로 불렀던 <주의 인자하신> 이란 찬양의 가사가 계속 마음에 머물러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의 인자하신 그 사랑이 내 생명보다 나으며 위로하시는 주 손길이 내 눈물보다 귀하다. 변함이 없는 주 임재가 내 근심보다 가깝고 주님 흘리신 그 보혈은 내 상처보다 진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삶으로 이어진다면 주의 사랑이 내 생명보다 낫고 주의 흘리신 보혈이 내 상처보다 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나게 되고 우리의 예배를 살아나게 할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니, 뭇 나라 백성들이 두려워 벌벌 떠는구나. 주께서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니, 땅이 흔들거리는구나”

만일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로 인해 땅이 흔들리게 되는 것을 영적으로 깨닫게 된다면 이는 너무도 두려운 일입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나라 백성들이 두려워 벌벌 떠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지각변동으로 쓰나미 징조만 보여도 사람들은 두려워 합니다. 그런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이든 악인이든 다 두려워 떨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1절과 7절에서 ‘주께서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니’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이스라엘과 함께 계심을 나타냅니다. ‘주께서는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라는 표현에서 구름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 나온 직후부터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임재 가운데 영적인 눈이 열린 사건이 소개됩니다.

아람왕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예루살렘 성을 겹겹히 에워 쌓았을때 엘리사의 종은 새벽에 일어나 성밖을 내다 보다가 너무 놀라서 그 상황을 엘리사에게 보고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두려워 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간구합니다. 그리고 종의 눈이 밝아지자 그는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엘리사의 종은 절망과 두려움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며 우리의 욕망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조율 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생의 주인과 삶의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3절 5절 9절에서 진실로 주님은 거룩하시도다 후렴구를 통하여 시편의 기자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첫번째 어구에서는 찬양의 대상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크고 두려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손에 의해 지음 받는 피조물이라면 찬양의 대상이 될수 없고, 합당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두번째 어구와 세번째 어구에서는 ‘우리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참 친근감으로 느껴집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자신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주를 높이 기리고, 그분의 발판 앞에 엎드려 경배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속에 처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십니다. 상황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맡겨 주신 이웃을 사랑으로 보듬어 그분의 뜻에 따르는 삶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불에 비유합니다. “참으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다 태워 없애는 불이십니다. 교회의 탄생은 오순절 날이 이르매 하늘로 부터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위에 임했다고 증거합니다. 초대교회의 설립도 불같은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8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행한 대로 벌을 내리시기도 하셨지만, 결국 주께서는 그들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AW 토저의 ‘GOD’이라는 책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도덕적 상황을 바꾸기 위해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공의가 아무 보호책이 없는 죄인들에게 떨어질 때 그 공의는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속성은 이 선고에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무한한 고통 중에 돌아가셨을 때 이 크신 하나님도 무한한 고통을 당하셨다.” 이것은 공의와 긍휼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의 거룩 앞에 서면 두려워 떨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능자의 그늘 아래로 들어갈때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있습니다. 시편 99편은 우리가 이제껏 누구를 위하여 살아 왔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 온 삶은 헛된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이 누구를 드러내고 계신가요? 사명자들은 이 땅의 거룩한 그루터기입니다. 사명자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도시에 나무가 베어지고 그 숲이 황량하게 되어도 하나님은 남아 있는 자들을 통하여 새 일을 행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선지자들이 설교했지만 최종적 결과는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나라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인류의 희망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뤄 나가는 거룩한 그루터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 주시고 허락하신 사명에 응답하는 삶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주도 시편 99편을 살아내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며 기쁨을 회복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