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0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6주)

말씀이 삶을 붙들게 하라

Let the Word Uphold Your Life

누가복음 10:38~42

10:38 ○ 예수께서 제자들과 여행하던 중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 10:39 그 여자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10:40 그러나 마르다는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했다. “주님, 제가 바빠 죽을 지경인데도 제 동생은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10:41 그러자 주께서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여러 가지 일로 마음 쓰느라 너무 염려가 많구나. 10:42 하지만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그것을 찾았다. 마리아에게서 그것을 빼앗고 싶지 않구나.” (쉬운말 성경)  

38 As Jesus and the disciples continued on their way to Jerusalem, they came to a certain village where a woman named Martha welcomed him into her home. 39 Her sister, Mary, sat at the Lord’s feet, listening to what he taught. 40 But Martha was distracted by the big dinner she was preparing. She came to Jesus and said, “Lord, doesn’t it seem unfair to you that my sister just sits here while I do all the work? Tell her to come and help me.” 41 But the Lord said to her, “My dear Martha, you are worried and upset over all these details! 42 There is only one thing worth being concerned about. Mary has discovered it,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령강림절기 여섯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두었다면, 오늘 본문은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수직적 측면이 드러납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마르다는 주방일을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예수님께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주님, 제가 바빠 죽을 지경인데도 제 동생은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마르다야 네가 여러가지 일로 마음 쓰느라 너무 염려가 많구나. 많은 일로 분주한 것보다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에게서 그것을 빼앗고 싶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지금 우리의 신앙의 자리를 돌아보게 됩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분주함 속에서 불평과 분노의 마음을 마주합니다. 마음의 시작은 섬김이었고 감사였는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열심으로 섬기고 일하다가 마음 안에 있는 근심과 불평을 이겨내지 못하고 금새 지치며 포기하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방향이 주님께 향하지 않고 나의 열심 안에 멈추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으로 섬기는 자리에 서면 영혼이 살아나고 기쁨이 회복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여전히 불안하고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도 마르다와 같이 여러 가지 일로 마음 쓰느라 염려를 쌓아두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사역 후에 지치고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무엇이 더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해져 있던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우선순위를 따르지 않으면 은혜가 메마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가지 뿐이다’라고 하시며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말씀 없는 섬김은 쉽게 지치게 되고 말씀 없는 사랑은 감정에 따라 금새 식어지며 말씀 없는 관계는 쉽게 실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말씀을 굳게 붙들 때 힘들었던 섬김의 자리도 기쁨이 되고 문제가 기회가 되는 회복의 전환점이 됩니다. 그렇다면 삶에서 중요한 한가지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의 기질과 열심만으로 섬기려고 할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은 바른 관계에서 부터 흘러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놓칠때가 많습니다. 섬김의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일을 하다 가도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면서도 마르다 처럼 자기 의로 가득 차 처음 지녔던 주님의 마음을 잃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선택적 섬김’과 ‘적당한 섬김’ 을 정해 놓지만 진정한 섬김은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라고 권면하며, 장차 주께로부터 유업의 상을 받게 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골3:23)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분의 일에 함께하도록 도와주십니다.

하지만 모든 일의 동기에서 나의 마음을 떼어 놓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섬기지만 분주함 속에서 불평이 쌓이게 되는 긴장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우리는 사람 앞이 아닌 하나님 앞에 서서 관계를 점검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초대했지만 주를 위해 일을 하다가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결국 기쁨을 잃어버린 헌신과 섬김은 염려와 근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돕지 않는 동생 마리아가 얄미웠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라는 구절에서는 자신의 열심을 인정받고자 하는 기대와 서운함이 담겨 있습니다. 마르다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마리아에 비해 열심으로 접대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주님께서 알아 주시기를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르다의 마음안에 얽혀 있는 우리의 본성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하기 전에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는지를 먼저 집중해야 합니다. 그 관계가 명확해지면 삶의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섬김의 능력은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부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지면 불평과 남을 향한 불편함만 남게 됩니다. 주님은 마르다의 마음에도 기쁨이 넘치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섬김의 자리에서 말씀이 바로 서지 않으면 우리 마음 안에 불평이 찾아오고 기쁨으로 섬긴 자리가 불평의 짐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을 하나님 앞에 먼저 서야 합니다. 섬김의 능력은 예배와 말씀을 통해서 흘러 나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했는데, 주께서는 좋은 편을 선택할때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쁘면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느리면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대 속에서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섬김과 헌신의 자리에서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의 마음을 품고 따를때 우리는 좋은 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동생 마리아를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던 동생의 절실한 마음,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동생의 모습을 은혜의 시선을 바라보았다면 동생의 몫까지 마르다가 감당할 순종의 힘이 더해졌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와 마르다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께서 죽은 오빠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에 등장하는 여인들입니다. 요한복음 11장 5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마리아와 마르다 모두에게 향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주님께서 유월절 엿새전에 베나디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초대받는 다른 사건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그 사건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아래 값비싼 향유를 다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으니 제자 중에 유다가 비싼 향유를 왜 낭비하느냐고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느냐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도 마리아의 행위는 나의 죽음을 예비하는 귀한 일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많은 업적,더 많은 성과를 내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르다가 차린 음식이 부족하다고 해서 책망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음의 동기와 마음 중심을 보시며 마르다가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조금 느린 아이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저도 추천을 받아 들어보게 된 노래입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듣고 여러번 들어보면서 노래의 가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간보다 더 빠른 세상에서 친구보다 앞서라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천천히 걸어가는 한걸음 느린 아이 꽃향기 맡아보고 밤하늘의 별 쳐다보고 친구 얘기 들어주고 가끔씩 뒤도 돌아보는  조금 느리게 가는 아이 마음은 커다란 아이 저 길 끝에 보이는 꿈 따라가면 느린 걸음 걸음마다 반짝반짝 환하게 빛이 난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만의 속도와 시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꼭 지키고 싶은 내 삶의 가치가 있고 이루고자 하는 목적과 목표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앞서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천천히 걸어 간다는 것은 마치 실패한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조금 느린 걸음으로 걷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분주함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예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분주하고 복잡한 세상 가운데에서도 주님 앞에 머무는 가장 좋은 편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수많은 소리에 마음을 빼앗길 때에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며 말씀 앞에 멈추어 서는 그 평안을 누리며 살아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분주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은혜가 사라질 때 사랑을 붙드는 힘도 약해집니다. 쉽게 상처 받고 말 한마디에 마음을 닫아버릴 때도 있습니다. 마르다도 그랬습니다. 자신의 열심 앞에서 서운한 마음을 마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 너머의 본질적인 것을 보셨습니다. 이 사랑은 마르다의 음식 준비보다 더 높은 차원의 완전하시고 공의로우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구원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사랑의 길, 고난과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세상의 일들과 낙심케 하는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마음에 생긴 틈은 염려와 불평으로 이어져 우리안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의 틈도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사랑으로 주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우리 내면의 영적 공간을 지키는 방법을 헨리 나우웬의 삶의 영성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우리 삶은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힘써야 할 활동도 많다. 우리는 빈틈없이 바쁜 삶을 원한다. 몸이 바쁘지 않으면 생각이라도 바쁘게 움직인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이나 아직 있지도 않은 일로 온갖 염려를 다한다. 혹시 벌어질지 모르는 일에 대한 근심과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내면의 공간을 잔뜩 채운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고 싶다면 훈련된 삶을 살아야 한다. 훈련이란 통제를 뜻하는 게 아니다. 영적 삶에서 훈련이란하나님이 활동하실 수 있는 공간을 내려는 노력”을 뜻한다. 훈련이란 자기 삶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지 못 하게 막는 일이다. 훈련된 삶에는 정신없이 바쁘지 않은 공간, 염려에 찌들지 않은 공간이 존재한다. 영적 삶에서 훈련이란, 내가 계획했거나 의지하고 있는 일이 아닌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공간을 내는 것이다.《헨리 나우웬 삶의 영성》

분주함 속의 염려가 가득 차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의 공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붙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르다가 적극적으로 예수와 제자들을 집에 환대한 것도 사랑받을 만한 일이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아래에서 말씀을 듣는 것도 사랑 받을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을때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따라가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고통을 겪으신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찾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듣는 세대 에서 말씀이 삶을 붙드는 세대 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알아도 말씀이 내 삶에 힘이 되지 않으면 영적 무감각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믿음 생활이 편안한 익숙함에 멈추어 버리면 말씀의 은혜가 더 이상 나를 깨우지 못합니다. 말씀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위기의 순간에 그 힘이 드러날 것입니다. 말씀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받은 은혜를 전하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분주함으로 지쳐 있는 마음의 방향을 재점검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2천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아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는 살아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있는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내 마음의 집에 초대된 주님의 말씀이 삶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의지할 분이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삶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 앞에 다시 서서 말씀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7.13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5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누가복음 10:25~37

10:25 ○ 하루는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를 떠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26 예수께서 그에게 되물으셨다. “모세의 율법에는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소?” 10:27 그 율법 교사가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10:2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옳소. 그렇게 행하시오. 그리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오.” 10:29 그러자 그 율법 교사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예수께 다시 물었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10:30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소.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몽땅 빼앗은 다음, 그를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놓고 달아났소. 10:31 그때 마침 한 유대인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게 되었소. 그 제사장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얼른 피해서 지나갔소. 10:32 이와 같이 한 레위 사람도 그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도 역시 그대로 지나가 버렸소. 10:33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소. 10:34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그를 태워, 근처 여관으로 데려가서 밤새워 보살펴 주었소. 10:35 다음날, 그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모두 갚아 드리겠소.’ 하고는, 길을 떠났소. 10:36 자, 그렇다면 당신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생각하시오?” 10:37 그 율법 교사가 대답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옳소. 당신도 가서, 그와 같이 행하시오.” (쉬운말 성경)

25 One day an expert in religious law stood up to test Jesus by asking him this question: “Teacher, what should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26 Jesus replied, “What does the law of Moses say? How do you read it?” 27 The man answered, “‘You mu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ll your soul, all your strength, and all your min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28 “Right!” Jesus told him. “Do this and you will live!” 29 The man wanted to justify his actions, so he asked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30 Jesus replied with a story: “A Jewish man was traveling from Jerusalem down to Jericho, and he was attacked by bandits. They stripped him of his clothes, beat him up, and left him half dead beside the road. 31 “By chance a priest came along. But when he saw the man lying there, he crossed to the other side of the road and passed him by. 32 A Temple assistant[d] walked over and looked at him lying there, but he also passed by on the other side. 33 “Then a despised Samaritan came along, and when he saw the man, he felt compassion for him. 34 Going over to him, the Samaritan soothed his wounds with olive oil and wine and bandaged them. Then he put the man on his own donkey and took him to an inn, where he took care of him. 35 The next day he handed the innkeeper two silver coins,[e] telling him, ‘Take care of this man. If his bill runs higher than this, I’ll pay you the next time I’m here.’ 36 “Now which of these three would you say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was attacked by bandits?” Jesus asked. 37 The man replied, “The one who showed him mercy.” Then Jesus said, “Yes, now go and do the same.”(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경강림절기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이번 텍사스 홍수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재지변 앞에 놓인 인간의 무력함을 느낍니다. 가족을 잃고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주의 손길이 실제적 소망으로 전달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고통받고 눈물 흘리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옳다는 것’의 헬라어 디카이오사이: δικαιῶσαι는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29절에 보면, ‘율법 교사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기 위해 질문한 것으로 보여지고, 예수님 앞에서도 율법의 계명을 충분히 지켰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죄된 본성은 우리 안에 잠재된 위험성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옳다고 여기는 의로움을 추구하다가도 자기만의 의에 빠지게 되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율법교사는 성경의 사람들, 율법을 꿰뚫고 있던 사람들이라 불렸으며, 성경을 연구하며 정확하게 해석하려고 애쓰며 생애를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삶의 원칙과 의무로 받아들였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든 율법교사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적대시 했다고 일반화 할수 없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은 주의 뜻을 진지하게 구하기 위해 한밤중에 주님을 찾아 와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다시 태어나는 것의 의미를 궁금해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예수를 환대하고 자신의 집에 초대했던 사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6절에 보면, “그때에 바리새인 중에서 한 사람이 자기와 함께 음식을 들자고 주께 청하니 주께서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하려고 앉으시더라.” 물론 이 바리새인은 주변의 예수를 적대시한 바리새인들로 인해서 예수를 초대하고 대화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언약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즉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우리의 믿음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며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주신 예수님의 시선에서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바라보는 예수님께서 주인공이시고, 그 시대에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구원)이 성취되는 사건을 기록한 증언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묵상할때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주님 앞에 우리가 일꾼으로 순종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마가복음을 읽으면서는 섬기는 종으로 오신 주님처럼 우리의 삶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섬김의 모습을 본 받고 있는지? 누가복음을 읽으면서는 이방인을 환대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묵상할때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 주시며, 주님께서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로 걸어 가도록 인도해 줍니다.

둘째,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삶의 일부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몽땅 빼앗은 다음, 그를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놓고 달아났습니다. 이후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해서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 안에는 강도만난 사람을 바라보는 측은한 마음이 보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마음입니다. 10:34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그를 태워, 근처 여관으로 데려가서 밤새워 보살펴 주었소. 10:35 다음날, 그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모두 갚아 드리겠소.’ 하고는, 길을 떠났소.

비유속의 세 사람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은 시체를 만져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되는 정결례 율법을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워낙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다 보니까 두려움으로 인해서 의도적으로 사고 현장을 피해서 지나갔을까요? 사마리아 사람은 분명히 강도 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꼈고, 강도가 또 다시 출몰할수 있을꺼란 두려움을 떨쳐내고 그를 도와줍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누가 참된 이웃이 되어 줄수 있는가?’의 비유로 뒤흔드셨습니다. 주체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중심적 관점이 아니라 어떻게 참된 이웃이 될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율법교사의 마음에 이웃에 대한 범위가 이미 유대인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이웃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셨습니다.

지난주 예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보내시며 돈이나 양식 자루나 여벌 신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사역을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전통에서 안부를 묻고 인사할 때 포옹하거나 입을 맞추는 관습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사명의 길에서 유대의 전통에 매여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 자비의 마음 그 어느것도 놓쳐서는 안됨을 말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길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고 참된 길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들입니다. 주어진 길을 가면서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시간은 저마다 다르고, 그 시간이 다 한정되어 있습니다. 비유속에 나오는 제사장, 레위사람, 사마리아 사람 모두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거룩함과 부정함을 구분하지 않고, 누가 참된 이웃이 되어 줄수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어떤 직업에 있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실천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임재를 갈망하는 이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속도가 달라도 서로를 성장하게 해주는 서로의 이웃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을 받은 성도는 매일이 새로운 날입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해주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에게 성찰하도록 하는 거울이 되고, 다른 이들을 향해서는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주님의 시야를 열어 줍니다.

2022년 한국일보에 소개된 특별한 생일파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볼티모어에 있는 한 이민자가 운영하는 옷 수선 가게 이야기였습니다. 그 가게의 주 고객들은 대부분 상류층 백인이었습니다. 그 중에 단골인 백인 노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혼자 가게를 찾아와 아내의 70세 생일파티 초대장을 전했다고 합니다. 아내에겐 비밀이니 꼭 와달라는 당부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 친구들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미국인 생일 파티에 몇 번 가본 경험은 있지만, 백인 노부부의 칠순 잔치가 혹여나 낯설면 어쩌나 마음이 쓰였답니다. 파티 날이 되어 갔는데, 그곳에는 평소 이 부부가 자주 이용하던 꽃집, 아이스크림 가게 등 동네 가게 주인들이 함께 초대되어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이름난 백화점이나 고급 상점이 아니라,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소박한 가게들을 삶의 일부로 여기며 이웃처럼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노부부의 남편은 초대 받아 온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내 아내의 삶의 일부입니다.’ 그날의 생일파티는 누군가의 삶을 귀하게 여긴 사랑의 실천이었고, 존중과 환대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이웃됨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사에 적힌 고백이 제 마음을 뭉클하게 해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이민자로 미국에 살면서 몇 번 겪었던 불쾌한 경험을 꺼내 길에다 털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받은 존귀한 경험을 가슴 구석구석에 채워 넣었다. 그것들을 근간으로 우리도 그들의 삶을 닮아가기를 소망했다. 그날의 교훈으로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내면의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또 그것은 우리보다 약한 자 앞에서 교만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었다.’

참된 이웃의 사랑을 경험한 부부는 가슴 구석구석에 그 존귀한 경험을 채워 넣었습니다. 아주 작은 경계가 무너지고 환대와 사랑으로 채워진 특별한 생일 파티는 이민자로 살았던 설움과 불안함과 상처들을 털어 버리게 했습니다. 가볍게 지나간 말 한마디에도 잠 못 이루며 마음이 괴로웠던 시간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찾아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서로의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주셨던 것처럼 서로에게 든든한 이웃이 되어 서로의 삶속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는 불안했던 삶의 근본적인 문제도 사랑으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들이 실천했던 계명의 기준을 더 높이 상향 조정하셨고, 계명의 본질을 내면의 동기까지 확장하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생명의 시작과 마침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은 하루의 시작을 밤으로 보았습니다. 인생의 큰일은 예고없이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주어진 날은 날마다 새날이고, 주님께 보시기에 좋은날입니다. 때때로 현실적인 문제에 갇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잊고 살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소망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인생의 어둠의 터널에 들어서게 되면, 수많은 질문이 찾아 오지만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은 주님께서 인생의 길이 되심을 믿으며 은혜 안에서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빛도 없었고, 공허하며 어두움이었지만 하나님이 영이 머무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인생의 칠흑같은 밤의 시간에도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기반이 무너진 듯, 일어날 힘이 전혀 없을때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며 일어나 빛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걸어가야 합니다. 시편의 말씀을 보면, 139:12 주님 앞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도 전혀 어둡지 않으며, 깜깜한 밤도 대낮처럼 밝을 것입니다. 주님께는 어둠과 빛이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내 삶에 빛이 보이지 않아도 두려움과 낙심에 갇히면 안됩니다. 참된 믿음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도, 어둠속에서 빛이 보이지 않아도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낙심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믿음의 시선은 생명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주신 완전한 길, 그 은혜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 갈수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알려주는 알람과도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이 질문은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날마다 새롭게 부어주시는 주의 복이 시작이 됨을 말해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복음을 나누기 힘쓰는 것은 사명의 자리, 때로는 가난한 마음의 자리로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누며 오직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이웃이 되어 주십니다. 제자의 길은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욕됨과 모욕을 당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영광의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믿음과 삶을 살아내는 실력이 너무나 다른 내 모습을 볼때에 이 모습도 주가 사랑하실까 자신 없는 내 모습 그저 주님앞에 있네. 나같은 자도 사랑하여 주시고 한번도 나를 떠나지 않으셨네 아픔속에 주를 작게 여긴 날 꾸짖지 않으시고 내 손잡아주시네. ‘

믿음과 삶이라는 찬양의 가사입니다. 살아낼 실력이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 속에서도 주앞에 서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의 참된 이웃이 되어 주셨다면 이제 우리도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줄 차례입니다. 익숙한 안전지대를 벗어나 강도 만난 이웃의 곁으로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야 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믿음의 길이 됩니다. 내가 걷고 싶어 걷는 길이 아닌 하나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이고 지금도 여전히 함께 걸어가 주시는 길입니다.  지치고 포기하여 쓰러져 있던 그 자리에 찾아와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힘이 다 빠져버린 저희를 끌어 안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셔서 우리도 누군가의 이웃으로 다시 섭니다. 그 은혜의 회복이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