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강림 후 제 1주)
불안한 시대에 붙드는 소망
The Anchor of Hope in Uncertain Times
로마서 5:1-5
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우리의 성품을 단련시켜 주며, 그러한 성품은 마침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5 우리가 품는 소망은 우리를 절대로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가득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쉬운말 성경)
1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faith, we have peace[a] with God because of what Jesus Christ our Lord has done for us. 2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3 We can rejoice, too, when we run into problems and trials, for we know that they help us develop endurance. 4 And endurance develops strength of character, and character strengthens our confident hope of salvation. 5 And this hope will not lead to disappointment. For we know how dearly God loves us, because he has given us the Holy Spirit to fill our hearts with his love.(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은총이 이곳에 모인 우리에게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19세기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1813-1855)는 『죽음에 이르는 병』(The Sickness Unto Death)이 ‘절망’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는 책에서 ‘절망’을 자기인식의 단계로 구분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무지(無知)로 인한 절망,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고 회피하려는 소극적인 절망, 하나님 없이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적극적인 절망입니다. 가령 살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낙심하는 마음이 들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 마음에 머물러 있으면, 낙심된 마음은 완전히 포기하는 상태인 절망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만일 소망이 없다면, 절망은 우리를 더 깊은 어둠속으로 끌고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번쯤 삶의 영역에서 기대하는 것으로 부터 무너졌던 경험이 있을 겁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다가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믿었던 관계속에서 상실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애쓰지만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마주하며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75세에 받았던 하나님의 약속을 25년 동안 기다렸는데 인간적으로 소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100세가 되었을때에 자신은 죽은 자처럼 연약해 졌고, 아내는 태의 기능이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지니고 약속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대로’ 말씀이 성취가 됩니다. 이 믿음은 ‘나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성도들을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된 약속입니다. 로마서 4장의 증언을 보시겠습니다.
4:18 모든 소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아브라함은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4:19 아브라함은 백 살이 거의 다 되어 자기 몸이 죽은 자처럼 연약해졌고, 아내 사라의 태 또한 기능이 다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조금도 연약해지지 않았습니다. 4:20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믿음이 날로 더욱 굳건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에서 ‘소망’이라는 단어 엘피스(ἐλπὶς)는 헛된 기대라든지 두려움의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고, 항상 좋은 것에 대한 기대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속에서 하게 되는 감정적인 기대감과 성경이 말하는 소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감정적 기대감이라는 것은 사람과의 인간관계의 거리, 주어진 환경에 따라 상대적이고, 쉽게 흔들립니다. 이에 반해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변하지 않는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본문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확신으로 소망(ἐλπὶς)이라는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고난과 죽음에 직면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좋은 것 만을 기대하는 엘피스(ἐλπὶς) 소망을 바라 볼 수 있었을까요? 로마서 5장 1절과 2절을 보시겠습니다.
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인정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후에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으며, 과거의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며 즐거워 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기 있는 식당을 가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고 줄을 섭니다. 단지 입소문만으로도 사람들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누군가의 만족과 기대를 이미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고 소유하는 것에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도 쉽게 신뢰하고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증명하기 원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찾기 원하지만 정작 분명하고 확실한 복음 앞에서는 수없이 고민하고 의심하며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듣고 싶은 말에만 귀를 기울이게 되고 편한 관계들로만 관계 형성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소망은 세상과 사람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의롭다 하시는 믿음이며, 그 사랑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혀진 담이 있고, 깨어져 있을 때 오는 절망은 인간의 노력으로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자리에 있는 성도들에게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관계에 틈이 생기면 점점 더 버거워집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속적으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령 죄를 반복적으로 짓다보면 마음이 굳어지지만,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나아가면 용서를 통하여 새마음을 주십니다. 은혜는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서로의 연약함에 집중하느라 이미 주신 화평의 자리를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휘장을 찢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주셨습니다. 은혜 밖에 있던 삶이 은혜 안에 초대 되었기에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성도들이 삶에서 만나는 어떤 풍랑속에서도 은혜의 자리에서 떠내려 가지 않도록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복음 안에서 살아가기로 결단하면 할수록 믿음의 길은 좁고 낮은 길이지만 우리가 지닌 소망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6장 19절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같은 소망은 안전하고 튼튼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휘장 안의 지성소에까지 곧장 들어가게 해줍니다.”
찬송가 490장은 제가 참 좋아하는 찬송시입니다. “마음 괴롭고 아파서 낙심 될 때 내게 소망을 주셨으며 내가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니 앞길 환하게 보이도다. 세상 풍조는 나날이 변하여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이 세상에서 이슬같은 삶을 살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찬양의 참된 의미를 알고 그 소망을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미 참된 삶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소망은 고난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어지게 합니다. 우리의 꿈은 주님의 얼굴 뵙기를 소망하는 것이고 그 소망은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바울은 소망의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5: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인내를 낳고, 5:4 인내는 우리의 성품을 단련시켜 주며, 그러한 성품은 마침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견디며 인내를 낳습니다. 그 인내는 우리의 성품을 단련시켜 주며, 그렇게 다듬어진 성품은 마침내 소망을 이루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에서는 소망(ἐλπὶς)의 인내를 말하며 소망을 인내의 원천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8절에서는 소망(ἐλπὶς)의 투구라고 표현하며, 사단으로 부터 믿음을 지키는 방어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찾아오는 고난은 두가지의 얼굴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끝이라 여기는 절망의 얼굴과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소망의 얼굴입니다. 소망 없는 마음은 영적으로 사단에게 우리의 마음을 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사단은 “너는 절대 회복할 수 없어”, “이겨내기엔 너무 늦었어” “하나님은 너와 함께 하지 않어”라고 속삭이며 우리 안에 소망이 사라지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 가운데에 있는 우리들을 끝까지 품고 새힘을 주십니다. 주님은 책망하시기 보다 따스한 손길로 우리를 먼저 감싸 안아 주십니다. 다윗은 세상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조롱하고, 마치 사막에 홀로 있는 것 같아서 밤낮으로 눈물을 흘릴때 중요한 선택을 합니다. 그가 선택한 소망의 기도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42:5 오 나의 영혼아, 어찌 그리 풀이 죽어 낙심하느냐? 어찌 그리 불안해하며 괴로워하느냐? 오직 너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살아라. 이제 나는 내 구원자이신 나의 하나님을 도리어 찬양하며 살리로다. 다윗의 이 고백은 우리를 믿음의 시선으로 전환시켜 줍니다.
다니엘은 소망의 근거를 말씀에서 깨닫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포로생활이 70년간 지속될 것을 깨닫고 상황을 탓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단 9:2 곧 다리오가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하던 첫 해에, 나 다니엘이 두루마리 책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다가, 주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황폐함에 관한 연수를 정해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70년 만에 끝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9:3 그러므로 나는 굵은 베옷을 걸치고 잿더미에 앉아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며 간구했다. 9:4 그때 나는 우리 동족이 지은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오, 크시고도 두려우신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진실로 주께서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고 또 주님의 크신 자비를 풍성히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니엘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민족을 향한 중보자로 서서 아픈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하란 땅으로 도망가는 신세였습니다. 가장 깊은 외로움의 자리에서 돌을 베고 잠이 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 말씀 하시는데 “내가 너희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창28:15) 야곱은 그 소망을 붙잡고 연단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며 과거에 아버지와 형을 속였던 자신의 죄성을 직면했을 것입니다. 무려 20년 동안 외삼촌의 집에 머물며 연단을 받는 동안 하나님은 그의 성품을 다듬어 가십니다. 야곱은 인내하며 마침내 형과도 극적인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야곱의 삶의 여정은 바울의 말씀처럼 어려움-인내-성품-소망의 열매를 맺어가는 복음의 예표를 보여줍니다.
5:5 우리가 품는 소망은 우리를 절대로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가득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의료의 방향을 바꾼 감동적인 포옹 The hug that helped change medicine’이란 제목의 CNN 토픽 영상이 있습니다. 1995년 10월 17일 우스터의 매사추세츠 메디컬 센터에서 쌍둥이 여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좋은 진전을 보이고 있었지만 한 아이는 호흡과 심박수에 문제가 있었고, 산소 수준은 낮았습니다. 의사들은 이 아이의 병세를 지켜보았고 계속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얇은 팔과 다리는 푸르스름한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아이의 심박수가 천천히 뛰었고, 그의 부모는 어린 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며 지켜보았습니다. 절박한 순간에 간호사는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사용했던 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절차를 시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부모의 허락을 받고 그녀를 쌍둥이 언니의 같은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녀가 인큐베이터 문을 닫자마자, 건강한 언니가 작은 여동생을 왼팔을 뻗어서 감쌌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었습니다. 아팠던 아이의 심박수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더니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통의 자리에 있을 때 진짜 믿음이 드러납니다. 때로는 서로의 마음의 온기를 통해서도 회복되고 살게 되는것 처럼 고통과 절망 가운데에서도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실 소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더딘 길, 내 약점이 드러나는 자리,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자리에서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품은 소망은 영광의 소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삶 속에서 진정한 십자가를 만났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인생의 갈보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실패의 길이 아니라 구원의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과의 성공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찾아내려 애쓰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무너진 자리, 실패의 자리에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불 가운데서도 우리를 신실하게 지키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세상의 절망 앞에 지칠때마다 주님께서 소망이 되심을 기억하십시오. 고난이 깊어질수록 은혜도 커집니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안아 주시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로마서 5장 1-5절의 말씀은 불안한 시대에서도 소망을 품고 살아내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음의 메세지입니다. 공허한 세상의 말로 위로받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반드시 주님의 일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의 품으로 소망을 기대할 것입니다. 서로의 기도 제목을 품고 함께 성장하는 성도, 말씀을 통해 현실을 살아내며 복음의 기적을 경험하는 삶,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영원한 소망을 품고 하나님 안에서 다스림 받는 공동체가 되어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붙드시는 소망의 하나님과 함께 오늘을 살아내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령강림 주일)
‘그래도’
Do it anyway
요한복음 14:16-18
14:16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분’을 너희에게 보내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하게 하실 것이다. 14: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살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14:18 명심하여라. 나는 너희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꼭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쉬운말 성경)
16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who will never leave you. 17 He is the Holy Spirit, who leads into all truth. The world cannot receive him, because it isn’t looking for him and doesn’t recognize him. But you know him, because he lives with you now and later will be in you. 18 No,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I will come to you.(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당시 유대 전통에 따라 천하 각국에서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각국의 방언으로 말하자, 어떤 이들은 그들을 이상히 여기며 새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은 요엘 선지지를 통해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며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에 지친 마음 위에 주의 권능이 임하고, 낮아진 심령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고아의 아버지’로 알려진 조지 뮬러목사(George Müller, 1805 -1898)의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청소년때 부터 온갖 죄를 다 저지르며 집 보다 많은 시간을 감옥에 오가며 살았습니다. 그런데1825년 11월 뮬러가 스무살이 되던 해, 어느 기도 모임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후 뮬러는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던 하나님이란 도대체 어떤 분이실까? 고민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이후 그의 삶에 대한 태도와 관점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수년간 성경 말씀을 통해 속죄의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이후 뮬러 목사는 1898년 3월 10일 별세할 때까지 60년의 사역을 통해서 수천명의 고아들을 돌보고 한 끼도 굶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역의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뮬러는 “내가 완전히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인정이나 비난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는 다만 나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살아갔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은 그는 단지 고아들의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돌보며,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종종 자기가 죽은 후에도 고아원들이 진부한 인습들에 얽매이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는 고아들에게 남겨진 가장 귀한 유산일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기도해도 평안을 잃을때가 있고, 하나님을 붙들면서도 세상의 가치와 인정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본질이요, 대상입니다. 뮬러에게 하나님은 수천명, 수만명도 먹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내려놓으면 약해질까 두렵지만 하나님 앞에 삶을 맡길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심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안에 짓누르는 죄의 짐 앞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자아가 죽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럴때에 연약한 우리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주시고 시대적인 혼란과 불안을 넘어설 수 있게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믿음의 성도들이 붙들어야 할 신앙의 정체성입니다.
14:16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분’을 너희에게 보내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하게 하실 것이다. 14: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살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14:18 명심하여라. 나는 너희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꼭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하실 일에 대해서 알려 주셨는데 3가지로 정리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또 다른 돕는 분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곁에 와서 도와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둘째, 성령은 고아처럼 너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실 분이십니다. 오늘날처럼 변화가 빠른 시대에 ‘영원히’ 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 있습니다. 낯선 이민땅에서 문화적, 언어적, 환경적인 긴장감 속에 점점 작아지는 것만 같은 우리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셋째, 성령은 진리의 영(Spirit of the Truth)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하시며 영(spirit)과 진리(truth)로 예배할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어디서 드려지는 예배가 진짜 예배인지 묻는 여인의 질문에 주님은 장소의 차원이 아니라 성령 안에 거하는 예배(Worship in the Holy Spirit), 진리 안에 거하는 예배(Worship in the truth)를 드릴 때가 온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당시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마와 빌립의 질문만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준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시자, 그때 제자들 중 하나인 도마는 “주님, 우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요 14:5) 빌립도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대답하시며, (요 14:6)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너희가 믿지 못하느냐? 내가 하는 말은 나 자신의 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셨지만, 이제는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너희를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된 시대를 살아갑니다. 세상속에서 수없이 무너지고 낙심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분명해질때 세상의 기준과 판단, 그리고 정죄하며 불안해 하는 관계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비난과 정죄의 끝에는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구원자가 되신 사건입니다. 성육신과 부활은 우리의 지식과 논리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능력이 됩니다.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을 회복시킵니다.(엡 4:15)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떠나신다고 하시니 제자들은 두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가 함께 했던 것처럼 성령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며 도우실 것이다라고 약속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안에 내주(內住) 하고 계시는 성령은 때때로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적인 상실감과 거절감 속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핍박속에서도 제자들이 믿음을 지킬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어린아이로 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주를 믿는 이들 가운데 거하시는 진리의 영(Spirit of the Truth)입니다. 죽음의 권세도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고단한 삶의 현실 속에서도 기쁨의 근원이 외적 환경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의 샘처럼 솟아납니다.
바울은 몇 사람에게라도 이 복음이 전해 질수 있다면, 자신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에게는 연약한 자처럼 살았습니다. 우상에 바쳐진 고기도 먹을 수 있었지만 믿음 없는 이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평생 제사 음식을 먹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고 이해받으려 하기보다 이해하는 존재로 살기 위해 성령을 따라 살아간 것입니다.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결박과 핍박이 기다리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성령의 힘으로 주의 길을 따라 갑니다. 성령께서 하늘의 상급을 보게 하셨을 것이고, 바울은 영원한 소망을 지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롬8:15 여러분 꼭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을 또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닙니다. 삶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무감에 따라 행동하는 종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육신대로 살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몸의 행실을 죽여서 우리를 살리는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육신의 감정과 욕망따라 행하다가 오랜 세월 쌓아 둔 믿음의 탑을 허물어 뜨리는 일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믿음의 겉모습은 경건해 보이나 성령의 도우심 없는 삶의 속사람은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고, 결국 기쁨을 잃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거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을 몸을 살리신 하나님께 기뻐하며, 또한 성령으로 인해 죽을 몸 또한 살리실 것을 소망하며 참된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로마서 8:9 ○ 그러나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면, 여러분은 육신에 따르지 않고 성령에 따라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므로 그리스도께 속할 수 없습니다. 8:10 하지만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이지만, 여러분의 영은 의로 인해 살아 있게 됩니다. 8:11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자신의 영 곧 성령으로 인해 여러분의 죽을 몸 또한 살리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고문과 박해를 견딘 힘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함께한 성령님의 권능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성령님은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여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고난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얻게 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앞서지 않으며 내 힘으로 길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 고백은 주 안에 거하는 은혜의 삶을 만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무너지고 실패하는 것 같은 두려움을 숨겨야만 할것 같은 염려에 묶이지 마시고 우리 영혼을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기쁨만이 아니라 실패 안에서의 기쁨을 찾아 가시는 성령강림절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Do it anyway) / 마더 테레사의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래도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래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도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래도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래도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캘커타 어린이 집 ‘쉬슈 브라반’ 벽에 있는 표지판–
우리 삶에 ‘그래도’ (Do it anyway)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결심이나 사람의 마음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중심이 되어 진리와 사랑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지만 성령님의 능력은 우리 마음의 굳어 있던 돌이 은혜 앞에서 부서지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고백이 없습니다. 주를 아는 기쁨으로 감사하며 내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인해 절망 중에도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빚을 안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은 다시 일으켜 세우며 ‘그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막막하지만 이 세상이 감당 못할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기쁨으로 이 길을 함께 걸으시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열번을 깨어지고 무너졌다면 말씀 앞에서는 수 백번을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더 이상 내 힘으로 서려고 하지 않는 철저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굳어진 마음의 돌이 깨어지고 형식적인 신앙과 무관심, 사람들과의 갈등, 세상을 향한 불신, 그리고 우리 안에 숨겨진 상처가 성령님과 함께 울고 또 울며 진리로 이끄시는 회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도’의 믿음은 단순한 결단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붙드는 몸부림입니다. 이 믿음은 어렵고 힘들어서 답을 찾지 못해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도 주님을 붙들겠다는 결단입니다. 비록 어제의 기쁨이 오늘의 근심이 될 지라도 우리는 이 땅의 소망이 아닌, 영원한 소망이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습니다. 성령강림절, 사람들의 비난이 무서웠고 박해가 두려워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했습니다. 불신과 의심, 두려움에 머물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강한 역사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이 능력은 삶 속에서 나 혼자만의 믿음에 갇혀 고립되어 살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떡을 나누며 서로의 연약함을 감추지 않고 아픔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품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