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강림 후 제 3주)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I Will Follow the Lord
누가복음 9:51-62
9:51 ○ 예수께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실 때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에 굳게 결심하시고, 52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냈다. 그들은 사마리아 동네에 들어가서 방을 구하려다가 그냥 돌아왔다. 53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54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리게 해서 그들을 태워 버릴까요?” 55 그러자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다. 57 ○ 예수 일행이 길을 가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58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소. 하지만 인자는 머리 누일 곳조차 없소.” 59 또 한 번은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가서, 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60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를 지내게 하고, 당신은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상에 전파하시오.” 61 한번은 또 다른 사람이 예수께 말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집안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62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소.” (쉬운말 성경)
51 As the time drew near for him to ascend to heaven, Jesus resolutely set out for Jerusalem. 52 He sent messengers ahead to a Samaritan village to prepare for his arrival. 53 But the people of the village did not welcome Jesus because he was on his way to Jerusalem. 54 When James and John saw this, they said to Jesus, “Lord, should we call down fire from heaven to burn them up?” 55 But Jesus turned and rebuked them.[k] 56 So they went on to another village. 57 As they were walking along, someone said to Jesus, “I will follow you wherever you go.” 58 But Jesus replied, “Foxes have dens to live in, and birds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s no place even to lay his head.” 59 He said to another person, “Come, follow me.” The man agreed, but he said, “Lord, first let me return home and bury my father.” 60 But Jesus told him, “Let the spiritually dead bury their own dead![l] Your duty is to go and preach about the Kingdom of God.” 61 Another said, “Yes, Lord, I will follow you, but first let me say good-bye to my family.” 62 But Jesus told him, “Anyone who puts a hand to the plow and then looks back is not fit for the Kingdom of God.”(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절기 세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평안이 교우들 마음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The Purpose Driven Life’이라는 책을 아실겁니다. 이 책은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도 번역되었고, 성경적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데 도전을 주었습니다. 40일의 훈련을 통하여, 내면의 상처, 피해의식, 삶의 죄된 습관이 변화되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땅에 교회가 세워진 목적, 예배를 드리는 목적, 주안에서 교제하는 목적이 분명할때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때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에 ‘굳게 결심하시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굳게 결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예루살렘 길은 십자가로 향하는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뜻이었습니다. 그 길은 수난과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간절히 기도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가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 한 마을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숙소를 구하기 위해 일행중 몇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요단강 동편으로 우회해서 가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서 통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와 그 일행들을 배척합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이 분노해서 말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리게 해서 그들을 태워 버릴까요?” 이는 구약의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때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한 것을 떠올리며 사마리아 사람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심판하자고 요청한 것입니다.
54절을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시겠습니다. “이에 그분의 제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목격하자 그들이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께서는 우리가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도록 명령하여 바로 엘리야가 한 것처럼 저들을 소멸시키기를 원하시나이까?” 하였더라.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종교 혼합주의로 인해 경멸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할수 없었고, 대신 그리심 산에 독자적으로 성전을 세워놓고 예배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계속에서 사마리아 사람들 내면에는 피해의식과 분노가 깊이 뿌리 박혀 있어서 유대인들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일부 극단적인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유대인 순례자들을 위협하고 살해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적대적인 분위기속에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극단적인 요청을 들으셨지만, 동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55절 56절을 킹제임스 성경 버전으로 보시겠습니다. 55 그러나 그분께서 돌이키시어 그들을 꾸짖으셨고 이같이 말씀하셨더라. “너희는 어떤 부류의 영이 너희에게 있는지 모르는도다 56 이는 인자가 사람들의 생명들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라.” 그런즉 그들이 또 다른 촌락으로 갔더라. 요한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사랑과 인내의 길을 선택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목적을 잘 몰랐기에 감정에 휘둘려 심판하자는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목적지를 향해가는 여행과도 같습니다. 때로는 가는 길이 막히기도 하고 우회해야 하는 상황도 있지만 목적지만 분명하면 우리가 겪는 거절이 끝은 아닙니다.
예루살렘행은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창조의 목적대로 다시 회복하는 것은 섬김과 낮아짐을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이나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은 우리 안에도 존재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숨막히는 광야, 답답하고 낙심되었던 삶의 순간들이 나를 고통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뤄지게 해달라고 진심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종종 부딪히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 영적 싸움에서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승리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도와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되게 하는 영이고, 성령이 임했을때 사람들은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salvation)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거룩함의 중요성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에 치중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거룩함이 없이 주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히12:14)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거룩함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 또한 가볍지 않습니다. 때때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위기의 순간도 마주합니다. 때로는 그 길에서 많은 눈물과 아픔, 갈등도 있지만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생명의 은혜가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우리는 고난의 시간 앞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주가 걸으신 길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주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현실이 믿음대로 펼쳐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헛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얽매이기 쉬운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한 짐은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어렵게 만듭니다. 때로는 고난이 두려워 등을 돌리기도 했고 성공이 아니면 실패인 것처럼 두려워 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 (James Packer, 1926-2020) 는 ‘거룩의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거룩함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추구하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사적인 면이나 대인관계에서 죄를 대적하며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 거룩한 삶이란 구별된 삶, 즉 하나님을 위해 성별되고 그분의 능력에 의해 내적으로 새롭게 된 삶의 향기이다.’《제임스 패커-거룩의 재발견》
본문에 보면 한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57 “선생님,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58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소. 하지만 인자는 머리 누일 곳조차 없소.”
주께서 머물 곳 없는 이 길을 걸어가신 것은 우리의 짐과 고통을 가볍게 해주시기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믿음의 수천 수만의 앞서간 증인들도 인내로 이 경주를 뛰었고, 지금은 둘러싸서 믿음의 길을 걷는 자들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습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응원하는 승리의 함성으로 주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에는 결심과 포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야 할 길이 결코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편안한 곳, 낙심이 없는 곳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머리 누일 곳 조차 없는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손해 보고 싶지 않고 많은 것을 보장 받고 싶은 삶에서 그것이 약속되지 않고 보장받지 못한다면 나의 기대와 다른 그 길이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는 참 소망을 이미 얻었습니다. 복음은 조율되거나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림 없이 우리에게 찾아온 구원의 삶이며 우리를 소망 가운데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또 다른 제자가 말합니다. “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를 지내게 하고, 당신은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상에 전파하시오.”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주님의 말씀 안에는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절박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이 땅에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땅의 일은 잠시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장례식을 치르며 세상의 아픔과 슬픔속에 멈춰 있을 수 밖에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은 변하지 않으시고 잠시 머무르는 이 땅보다 더 큰 기쁨과 소망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슬픔 앞에서도 하늘 소망을 구하는 것은 주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제자의 말을 들어보실까요?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집안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62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소.”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분명한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방해 요소가 참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메시아 였습니다. 그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이유가 있었겠지요. 표적을 보고 따라온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에만 주목했고, 예수의 제자들 마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정치적인 승리를 가져 오실 분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의 가르침도 자신들의 뜻으로 해석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를 따라가는 길에는 돌아보아야 할것도 많고 챙겨야 할것도 많고 안되는 이유가 가득합니다.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 모든 것을 드리지 못할 것을 알기에 여전히 손에 쥐고 그것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뒤를 돌아보는 내 삶의 안전지대 안에만 서 있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성공도 포기하고 명예도 구하지 말고 자녀를 잘 키워내고자 함도 다 내려놓고 현실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두는 선택을 하며 내 삶의 안전 지대를 벗어나야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내 안의 것을 내려 놓는다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약속과 소망을 붙들겠다는 결단입니다.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는 소망을 가진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상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 건강은 큰 축복이지만, 건강을 직접적이고 주된 목표로 삼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노상 어디가 병들지는 않았나 노심초사하며 까다롭게 살피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받은 교육은 전부 이 세상에 마음을 붙들어 놓는 것들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볼 줄만 안다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바란다는 사실, 그것도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C. S. Lewis 순전한 기독교》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결단은 실패와 낙심의 그림자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담대하게 걸어가는 삶입니다. 성공을 통해서만 인생의 길을 찾아가려고 한다면 실패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가 어렵겠지만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 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겪는 현실속에서 그 뜨거운 눈물과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닫고 그 사랑을 풍성히 누릴수록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능력과 은혜가 우리를 참된 제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 고백은 사람의 계산과 타협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길입니다. 불확실한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분명한 고백이고 결단입니다.









(성령강림 후 제 2주)
누가복음 8:26-39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Where Are We Now?
26예수 일행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 호수 맞은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 닿았다. 27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실 때, 그곳에 사는 귀신 들린 사람과 마주쳤다. 이 사람은 오랫동안 귀신에게 사로잡혀, 옷도 입지 않고 집도 없이,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28 그는 예수를 보자 비명을 지르며 예수 앞에 엎드리더니 크게 외쳤다. “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저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29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그를 단단히 묶어 놓아도, 그 사람은 수시로 귀신에게 강하게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끊어 버리고 광야로 뛰쳐나가곤 했다.) 30 예수께서 그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들이 대답했다. “군대입니다.” 마치 군대처럼, 수많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31 귀신들은 지금 당장은 자기들을 지옥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께 계속 빌었다. 32 ○ 마침, 그곳과 가까운 산기슭에 놓아기르는 돼지 떼가 있었다. 귀신들이 그 돼지 떼를 보고,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33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우르르 몰려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들이 갑자기 산비탈을 내리달리더니, 몽땅 호수에 빠져죽고 말았다. 34 이 광경을 보고, 돼지 치던 사람들이 가까운 읍내와 마을을 다니면서 그 사실을 알리고 다녔다. 35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나왔다가, 귀신 들렸던 그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하게 예수의 발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모두 크게 겁에 질렸다. 36 그동안의 일을 처음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들이 나서서, 그 귀신 들린 자가 어떻게 치유를 받게 되었는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37 그러자 거라사 인근의 모든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예수께 그곳을 떠나 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떠나시려고 배에 오르셨다. 38 귀신 들렸던 사람이 자신도 함께 따라가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셨다. 39 “당신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베푸셨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주시오.” 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 뒤,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예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크고 놀라운 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낱낱이 알렸다. (쉬운말 성경)
26 So they arrived in the region of the Gerasenes,[c] across the lake from Galilee. 27 As Jesus was climbing out of the boat, a man who was possessed by demons came out to meet him. For a long time he had been homeless and naked, living in the tombs outside the town.28 As soon as he saw Jesus, he shrieked and fell down in front of him. Then he screamed, “Why are you interfering with me, Jesus, Son of the Most High God? Please, I beg you, don’t torture me!” 29 For Jesus had already commanded the evil[d] spirit to come out of him. This spirit had often taken control of the man. Even when he was placed under guard and put in chains and shackles, he simply broke them and rushed out into the wilderness, completely under the demon’s power.30 Jesus demanded, “What is your name?”“Legion,” he replied, for he was filled with many demons. 31 The demons kept begging Jesus not to send them into the bottomless pit.32 There happened to be a large herd of pigs feeding on the hillside nearby, and the demons begged him to let them enter into the pigs.So Jesus gave them permission. 33 Then the demons came out of the man and entered the pigs, and the entire herd plunged down the steep hillside into the lake and drowned.34 When the herdsmen saw it, they fled to the nearby town and the surrounding countryside, spreading the news as they ran. 35 People rushed out to see what had happened. A crowd soon gathered around Jesus, and they saw the man who had been freed from the demons. He was sitting at Jesus’ feet, fully clothed and perfectly sane, and they were all afraid. 36 Then those who had seen what happened told the others how the demon-possessed man had been healed. 37 And all the people in the region of the Gerasenes begged Jesus to go away and leave them alone, for a great wave of fear swept over them.So Jesus returned to the boat and left, crossing back to the other side of the lake. 38 The man who had been freed from the demons begged to go with him. But Jesus sent him home, saying, 39 “No, go back to your family, and tell them everything God has done for you.” So he went all through the town proclaiming the great things Jesus had done for him.(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절기 두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평안이 교우들 마음에 가득하길 바랍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삶과 성령 없이 사는 삶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삶의 자리를 말씀에 맡깁니다. 성령은 굳어진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영적인 생각을 하고,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양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비한 체험을 하고, 은사를 받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될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성도들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면, 여러분은 육신에 따르지 않고 성령에 따라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므로 그리스도께 속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살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도 그리스도께 속하면 다른 차원에서 바로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믿음이 자라가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주의 말씀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인생을 설계하는 수많은 세상의 이론 가운데에서 가장 확실한 이론은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이론일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을 거룩한 삶의 자리로 이끕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때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인 거라사 지역은 팔레스타인 땅 경계에 가까웠던 이방인들이 살던 지역입니다. 그 마을에 악한 영에 불들린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집도 없이 배회하며 무덤에서 머물러 살았고, 공동체 안에서도 난폭하고 통제가 어려운 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이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단단히 묶어 봤지만 워낙 힘이 강해서 다 끊어버리고 광야로 뛰쳐 나가곤 했습니다. 무덤 곁에 머물렀다는 것은 그가 온전한 삶보다는 죽음의 자리에 더 가까이 있던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 사람 곁에 가까이 다가가자, 악한 영에 붙들린 사람은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애원합니다. 예수가 그의 이름을 묻자 자신의 정체성을 군대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속에서 군대는 중무장한 6천여명의 보병, 120명 가량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강한 영이 이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마귀의 활동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며 사역을 시작하셨고, 팔레스타인에서 펼친 그의 모든 사역들은 인류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시니 ‘귀신들은 지금 당장은 자기들을 지옥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께 계속 빌었습니다. 마침, 그곳과 가까운 산기슭에 놓아기르는 돼지 떼가 있었고. 귀신들이 그 돼지 떼를 보고,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우르르 몰려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갑자기 산비탈을 내리달리더니, 몽땅 호수에 빠져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돼지는 유대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악한 영이 돼지떼에 들어가자 돼지들이 미친 듯이 물속으로 달려가 몰살당합니다. 이 장면은 죽음을 불러오는 마귀의 정체성을 보여 줍니다. 악한 영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여 절망에 빠뜨리고 결국 죽음으로 이끄는 영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다릅니다. 성령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사람을 살리며 마음에 참 평안을 주십니다.
악한 영에 붙들린 한 사람은 가정과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 오지도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본문 27절과 39절을 보면 ‘이 사람은 오랫동안 귀신에게 사로잡혀, 옷도 입지 않고 집도 없이,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간 뒤,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예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크고 놀라운 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낱낱이 알렸다.”
두 구절 속에 ‘집’과 ‘무덤’이라는 단어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덤에 살고 있던 그가 무슨 행복이 있었을 것이며,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무슨 기쁨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치유받고 난 후에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베푸신 크고 놀라운 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낱낱히 알렸다고 기록합니다. 악한 영이 나갔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회복되고,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주님께 속하기 전에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본성과 충돌하게 되어서 말씀 앞에 자기 본성을 죽이는 삶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성경 말씀의 요구가 상당히 부담스럽고 어리석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관점입니다.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전서 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게 들리겠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이방인의 땅 거라사로 발걸음을 옮기신 이유는 억눌려 있던 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시선은, 성령의 사역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지키고 싶어하는 경계가 있는데 그것을 침해 당하면 성령의 다가오시것 조차도 불편하게 여기며 방어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인간의 교만과 아집을 다듬어 가시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십니다. 신앙은 이 거룩한 힘을 길러가는 과정입니다. 회복은 무너진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고 새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저절로 쉽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삶속에서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지만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를 의지하면 반복되는 실패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말씀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주께서 이끄시는 거룩한 삶으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과 바울이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바울은 사역을 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을 크게 느꼈고,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를 배척한 동족들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안에는 영원한 소망과 충만한 기쁨이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는 탄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묵상하면서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이라는 찬양의 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 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로마서 9장 2-3절입니다. “9:2 나는 지금 마음 깊은곳에서 큰 슬픔을 느끼고 있고,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9:3 내 형제요 내 동족인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비록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는 저주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차라리 그 편을 택할 것입니다.”
이에 반해 당시 거라사 마을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이 회복 되었는데 기뻐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마음과 대조적입니다.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인데,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 하여 예수님께 마을을 떠나달라고 요구합니다. 거라사 사람들을 사로잡은 두려움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돼지떼의 몰락으로 갑작스럽게 닥친 경제적 손실이었을까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 앞에 서면 마음의 죄성이 드러나기에 두렵고, 삶의 주도권을 내어 드리는 것은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삶에 언제든지 일어 날수 있습니다.
사람이 회복된 일 보다, 경제적인 이익이 삶의 우선순위가 된다면, 말씀을 따르는 삶에는 끊임없은 현실의 염려와 두려움이 찾아 올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삶의 목적이 사역의 성공과 결과에 치중하게 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떠나 달라고 요청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된 사람만이 주님을 따라 가겠다고 요청합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겉으로 온전해 보이지만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며 비판하고 추궁하기 보다 영적인 회복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인간적 본성을 따르는 일들은 주님 보시기에는 무덤에서 배회하는 인생과도 같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목격한 후에도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은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무덤 사이에 머물고 계십니까? 본향집을 향하여 걸어 가고 계십니까? 주님은 죽음의 무덤에 있던 사람을 살리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기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39 “당신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베푸셨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주시오. 온 마을 사람들을 위해 증인이 되라는 사명입니다. 자신의 과거 허물을 알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와 어둠에 붙들렸던 그를 통해 주가 행하신 일이 전해졌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 깊이 확신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뒤에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새옷을 입어야 합니다. 만일 새옷을 입지 않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옛모습이 부끄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암을 판정받고100차례 이상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불린 천정은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안티 기독교인이었던 천정은 집사는 다큐멘터리 영화 <부활: 그 증거>의 주인공입니다. 사업가로, 피아니스트로 살면서 ‘노력해서 안 되는건 없다’고 믿어왔던 집사님은 암이라는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집사님의 고백의 글입니다.
“아마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멈추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인생의 목적도 모른 채 그저 살기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어요. 예수님 안에서는 무조건 안전하다. 이것이 제 담대함의 근원이에요. 사람들이 두려움에 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주님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내 구속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너는 내 것이니까 내가 보호할 거야, 안전하게 보호할 거야, 라고 하셨는데, 지금 난 아프고 무서우니까 당장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해요. 두려움과 불평을 끊을 수 있는 길은 사람이 위로해 줘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해해 줘서 되는 것도 아니에요. 정확하게 복음 앞에 이 사람이 굴복했을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러 가는 발걸음을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생애 마지막은 소망을 주신 주님의 증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불평과 두려움, 부활의 소망과 평안 어디쯤에 머물러 있습니까? 우리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고통을 참아내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12:2 우리는 오직 믿음의 창시자이시요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영광스런 기쁨을 위해 모든 부끄러움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 내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에게 고통과 영광스런 기쁨이 공존하는 자리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통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기억하셨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 외로운 길을 걸어가신 주님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누구보다 억울했던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다시 살아난 성도는 죽음의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서 소망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는자로 멈추지 말고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복음을 믿는다면 살아냄의 자리에서 우리가 두려워 하는 거라사 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그곳으로 들어 가라는 사명을 담대하게 붙잡고 돌아갑니다. 우리에게도 주시는 사명입니다.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거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은 단지 머리 속으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다거나 그를 본받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그들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픔을 마주하며 괴로움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우리의 ’거라사’ 땅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곳에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복음을 품고 살아가는 삶은 반복되는 일상과 치열한 현실에서도 주의 말씀을 마음에 심는 삶입니다. 그 생명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의 사명은 쉽게 지치게 됩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믿음의 여정은 불편하고 힘들어도 반드시 우리가 살아내야 할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피할수 만은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낼때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새힘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