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3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5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누가복음 10:25~37

10:25 ○ 하루는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를 떠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26 예수께서 그에게 되물으셨다. “모세의 율법에는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소?” 10:27 그 율법 교사가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10:2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옳소. 그렇게 행하시오. 그리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오.” 10:29 그러자 그 율법 교사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예수께 다시 물었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10:30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소.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몽땅 빼앗은 다음, 그를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놓고 달아났소. 10:31 그때 마침 한 유대인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게 되었소. 그 제사장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얼른 피해서 지나갔소. 10:32 이와 같이 한 레위 사람도 그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도 역시 그대로 지나가 버렸소. 10:33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소. 10:34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그를 태워, 근처 여관으로 데려가서 밤새워 보살펴 주었소. 10:35 다음날, 그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모두 갚아 드리겠소.’ 하고는, 길을 떠났소. 10:36 자, 그렇다면 당신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생각하시오?” 10:37 그 율법 교사가 대답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옳소. 당신도 가서, 그와 같이 행하시오.” (쉬운말 성경)

25 One day an expert in religious law stood up to test Jesus by asking him this question: “Teacher, what should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26 Jesus replied, “What does the law of Moses say? How do you read it?” 27 The man answered, “‘You mu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ll your soul, all your strength, and all your min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28 “Right!” Jesus told him. “Do this and you will live!” 29 The man wanted to justify his actions, so he asked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30 Jesus replied with a story: “A Jewish man was traveling from Jerusalem down to Jericho, and he was attacked by bandits. They stripped him of his clothes, beat him up, and left him half dead beside the road. 31 “By chance a priest came along. But when he saw the man lying there, he crossed to the other side of the road and passed him by. 32 A Temple assistant[d] walked over and looked at him lying there, but he also passed by on the other side. 33 “Then a despised Samaritan came along, and when he saw the man, he felt compassion for him. 34 Going over to him, the Samaritan soothed his wounds with olive oil and wine and bandaged them. Then he put the man on his own donkey and took him to an inn, where he took care of him. 35 The next day he handed the innkeeper two silver coins,[e] telling him, ‘Take care of this man. If his bill runs higher than this, I’ll pay you the next time I’m here.’ 36 “Now which of these three would you say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was attacked by bandits?” Jesus asked. 37 The man replied, “The one who showed him mercy.” Then Jesus said, “Yes, now go and do the same.”(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경강림절기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이번 텍사스 홍수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재지변 앞에 놓인 인간의 무력함을 느낍니다. 가족을 잃고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주의 손길이 실제적 소망으로 전달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고통받고 눈물 흘리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옳다는 것’의 헬라어 디카이오사이: δικαιῶσαι는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29절에 보면, ‘율법 교사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기 위해 질문한 것으로 보여지고, 예수님 앞에서도 율법의 계명을 충분히 지켰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죄된 본성은 우리 안에 잠재된 위험성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옳다고 여기는 의로움을 추구하다가도 자기만의 의에 빠지게 되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율법교사는 성경의 사람들, 율법을 꿰뚫고 있던 사람들이라 불렸으며, 성경을 연구하며 정확하게 해석하려고 애쓰며 생애를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삶의 원칙과 의무로 받아들였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든 율법교사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적대시 했다고 일반화 할수 없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은 주의 뜻을 진지하게 구하기 위해 한밤중에 주님을 찾아 와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다시 태어나는 것의 의미를 궁금해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예수를 환대하고 자신의 집에 초대했던 사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6절에 보면, “그때에 바리새인 중에서 한 사람이 자기와 함께 음식을 들자고 주께 청하니 주께서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하려고 앉으시더라.” 물론 이 바리새인은 주변의 예수를 적대시한 바리새인들로 인해서 예수를 초대하고 대화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언약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즉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우리의 믿음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며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주신 예수님의 시선에서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바라보는 예수님께서 주인공이시고, 그 시대에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구원)이 성취되는 사건을 기록한 증언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묵상할때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주님 앞에 우리가 일꾼으로 순종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마가복음을 읽으면서는 섬기는 종으로 오신 주님처럼 우리의 삶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섬김의 모습을 본 받고 있는지? 누가복음을 읽으면서는 이방인을 환대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묵상할때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 주시며, 주님께서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로 걸어 가도록 인도해 줍니다.

둘째,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삶의 일부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몽땅 빼앗은 다음, 그를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놓고 달아났습니다. 이후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해서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 안에는 강도만난 사람을 바라보는 측은한 마음이 보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마음입니다. 10:34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그를 태워, 근처 여관으로 데려가서 밤새워 보살펴 주었소. 10:35 다음날, 그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모두 갚아 드리겠소.’ 하고는, 길을 떠났소.

비유속의 세 사람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은 시체를 만져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되는 정결례 율법을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워낙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다 보니까 두려움으로 인해서 의도적으로 사고 현장을 피해서 지나갔을까요? 사마리아 사람은 분명히 강도 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꼈고, 강도가 또 다시 출몰할수 있을꺼란 두려움을 떨쳐내고 그를 도와줍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누가 참된 이웃이 되어 줄수 있는가?’의 비유로 뒤흔드셨습니다. 주체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중심적 관점이 아니라 어떻게 참된 이웃이 될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율법교사의 마음에 이웃에 대한 범위가 이미 유대인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이웃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셨습니다.

지난주 예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보내시며 돈이나 양식 자루나 여벌 신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사역을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전통에서 안부를 묻고 인사할 때 포옹하거나 입을 맞추는 관습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사명의 길에서 유대의 전통에 매여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 자비의 마음 그 어느것도 놓쳐서는 안됨을 말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길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고 참된 길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들입니다. 주어진 길을 가면서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시간은 저마다 다르고, 그 시간이 다 한정되어 있습니다. 비유속에 나오는 제사장, 레위사람, 사마리아 사람 모두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거룩함과 부정함을 구분하지 않고, 누가 참된 이웃이 되어 줄수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어떤 직업에 있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실천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임재를 갈망하는 이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속도가 달라도 서로를 성장하게 해주는 서로의 이웃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을 받은 성도는 매일이 새로운 날입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해주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에게 성찰하도록 하는 거울이 되고, 다른 이들을 향해서는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주님의 시야를 열어 줍니다.

2022년 한국일보에 소개된 특별한 생일파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볼티모어에 있는 한 이민자가 운영하는 옷 수선 가게 이야기였습니다. 그 가게의 주 고객들은 대부분 상류층 백인이었습니다. 그 중에 단골인 백인 노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혼자 가게를 찾아와 아내의 70세 생일파티 초대장을 전했다고 합니다. 아내에겐 비밀이니 꼭 와달라는 당부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 친구들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미국인 생일 파티에 몇 번 가본 경험은 있지만, 백인 노부부의 칠순 잔치가 혹여나 낯설면 어쩌나 마음이 쓰였답니다. 파티 날이 되어 갔는데, 그곳에는 평소 이 부부가 자주 이용하던 꽃집, 아이스크림 가게 등 동네 가게 주인들이 함께 초대되어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이름난 백화점이나 고급 상점이 아니라,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소박한 가게들을 삶의 일부로 여기며 이웃처럼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노부부의 남편은 초대 받아 온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내 아내의 삶의 일부입니다.’ 그날의 생일파티는 누군가의 삶을 귀하게 여긴 사랑의 실천이었고, 존중과 환대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이웃됨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사에 적힌 고백이 제 마음을 뭉클하게 해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이민자로 미국에 살면서 몇 번 겪었던 불쾌한 경험을 꺼내 길에다 털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받은 존귀한 경험을 가슴 구석구석에 채워 넣었다. 그것들을 근간으로 우리도 그들의 삶을 닮아가기를 소망했다. 그날의 교훈으로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내면의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또 그것은 우리보다 약한 자 앞에서 교만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었다.’

참된 이웃의 사랑을 경험한 부부는 가슴 구석구석에 그 존귀한 경험을 채워 넣었습니다. 아주 작은 경계가 무너지고 환대와 사랑으로 채워진 특별한 생일 파티는 이민자로 살았던 설움과 불안함과 상처들을 털어 버리게 했습니다. 가볍게 지나간 말 한마디에도 잠 못 이루며 마음이 괴로웠던 시간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찾아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서로의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주셨던 것처럼 서로에게 든든한 이웃이 되어 서로의 삶속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는 불안했던 삶의 근본적인 문제도 사랑으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들이 실천했던 계명의 기준을 더 높이 상향 조정하셨고, 계명의 본질을 내면의 동기까지 확장하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생명의 시작과 마침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은 하루의 시작을 밤으로 보았습니다. 인생의 큰일은 예고없이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주어진 날은 날마다 새날이고, 주님께 보시기에 좋은날입니다. 때때로 현실적인 문제에 갇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잊고 살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소망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인생의 어둠의 터널에 들어서게 되면, 수많은 질문이 찾아 오지만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은 주님께서 인생의 길이 되심을 믿으며 은혜 안에서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빛도 없었고, 공허하며 어두움이었지만 하나님이 영이 머무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인생의 칠흑같은 밤의 시간에도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기반이 무너진 듯, 일어날 힘이 전혀 없을때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며 일어나 빛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걸어가야 합니다. 시편의 말씀을 보면, 139:12 주님 앞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도 전혀 어둡지 않으며, 깜깜한 밤도 대낮처럼 밝을 것입니다. 주님께는 어둠과 빛이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내 삶에 빛이 보이지 않아도 두려움과 낙심에 갇히면 안됩니다. 참된 믿음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도, 어둠속에서 빛이 보이지 않아도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낙심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믿음의 시선은 생명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주신 완전한 길, 그 은혜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 갈수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알려주는 알람과도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이 질문은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날마다 새롭게 부어주시는 주의 복이 시작이 됨을 말해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복음을 나누기 힘쓰는 것은 사명의 자리, 때로는 가난한 마음의 자리로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누며 오직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이웃이 되어 주십니다. 제자의 길은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욕됨과 모욕을 당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영광의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믿음과 삶을 살아내는 실력이 너무나 다른 내 모습을 볼때에 이 모습도 주가 사랑하실까 자신 없는 내 모습 그저 주님앞에 있네. 나같은 자도 사랑하여 주시고 한번도 나를 떠나지 않으셨네 아픔속에 주를 작게 여긴 날 꾸짖지 않으시고 내 손잡아주시네. ‘

믿음과 삶이라는 찬양의 가사입니다. 살아낼 실력이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 속에서도 주앞에 서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의 참된 이웃이 되어 주셨다면 이제 우리도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줄 차례입니다. 익숙한 안전지대를 벗어나 강도 만난 이웃의 곁으로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야 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믿음의 길이 됩니다. 내가 걷고 싶어 걷는 길이 아닌 하나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이고 지금도 여전히 함께 걸어가 주시는 길입니다.  지치고 포기하여 쓰러져 있던 그 자리에 찾아와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힘이 다 빠져버린 저희를 끌어 안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셔서 우리도 누군가의 이웃으로 다시 섭니다. 그 은혜의 회복이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0706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4주)

우리를 부르신 곳에서

The Place Where God Has Called Us

누가복음 10:1-12

1 그 후, 주님은 일흔 제자들을 가려 뽑아 세우신 뒤, 자신이 장차 가시려고 계획한 동네와 마을로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2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너무도 적다. 그러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보다 많은 일꾼을 보내 달라고 하여라. 3 자, 가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구나. 4 너희는 갈 때, 돈이나 양식 자루나 여벌 신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하고 빌어라. 6 평화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평화가 임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면 너희에게로 그 평안이 되돌아올 것이다. 7 어느 마을에 들어가면, 오직 한 집에서만 계속 머물러라. 사양하지 말고, 주인이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제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8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거든, 너희에게 차려 주는 음식은 무엇이나 먹어라. 9 그리고 그 마을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여라. 10 그러나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곳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든, 그 마을의 큰길로 나와서 말하기를, 11 ‘우리는 우리 발에 묻은 너희 마을의 먼지조차도 붙이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하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장차 심판의 날에, 그 마을에 내릴 벌이 옛날 소돔이 받은 벌보다 더 가혹할 것이다.” (쉬운말 성경)

1 The Lord now chose seventy-two other disciples and sent them ahead in pairs to all the towns and places he planned to visit. 2 These were his instructions to them: “The harvest is great, but the workers are few. So pray to the Lord who is in charge of the harvest; ask him to send more workers into his fields. 3 Now go, and remember that I am sending you out as lambs among wolves. 4 Don’t take any money with you, nor a traveler’s bag, nor an extra pair of sandals. And don’t stop to greet anyone on the road. 5 “Whenever you enter someone’s home, first say, ‘May God’s peace be on this house.’ 6 If those who live there are peaceful, the blessing will stand; if they are not, the blessing will return to you. 7 Don’t move around from home to home. Stay in one place, eating and drinking what they provide. Don’t hesitate to accept hospitality, because those who work deserve their pay. 8 “If you enter a town and it welcomes you, eat whatever is set before you. 9 Heal the sick, and tell them, ‘The Kingdom of God is near you now.’ 10 But if a town refuses to welcome you, go out into its streets and say, 11 ‘We wipe even the dust of your town from our feet to show that we have abandoned you to your fate. And know this—the Kingdom of God is near!’ 12 I assure you, even wicked Sodom will be better off than such a town on judgment day.(New Living Translation)

성경강림절기 네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위로가 성도들 마음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에서 양은 인내와 순종, 온유한 성품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양은 사나운 동물로 부터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동물이라 목자를 따라 다닙니다. 반면에 이리와 같은 공격성이 강한 동물은 성질이 사납고 밤에 먹이를 찾아 다닙니다. 먹이사슬 관계로 보면 양은 이리에게 속수무책으로 잡혀 먹히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양이라는 단어로 양의 연약함을 더 부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서 장자의 죽음을 피할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흠 없는 어린양은 죽음의 심판으로 부터 구원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께서 이 땅에 흠이 없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치열한 세상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며 불편함도 겪게 되고, 손해도 보게 되지만 부르심의 자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장소입니다.

1. 우리는 부르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스스로 결정하거나 교회를 나가기로 선택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랍비들의 세계에서는 개인이 랍비를 선택하여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름에 믿음으로 응답한 사람들이 제자의 길을 따랐습니다. 이 부르심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라는 말씀을 믿을때, 우리는 나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신 구원의 감격에 붙들려 살아가게 됩니다. 아무 자격없는 우리를 예수께서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합니다. 만일 그 길을 떠나는 70인의 전도단이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전도를 할까 생각해야 한다면 양이 이리와 싸워서 이길 방법이 없으니 두렵고 걱정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어떤 일을 행하실까? 어떤 일들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생각한다면 주님께서 하실 일들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더 커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흔명의 제자들을 가려 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신중하게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열두제자를 세우실때에도 주님은 밤새 기도하시며 제자들을 신중하게 선택하셨습니다. 70명의 전도단을 보내실 때에도 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둘씩 짝이 되게 하셨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 4:9…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혼자서 애쓰는 것보다는 둘이서 함께 일하고 노력할 때 더욱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4:10 둘이면, 길을 가다가 그중에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얼른 자기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불쌍하게도 그를 일으켜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예수께 훈련받는 70명의 제자들이 서로 짝을 이루었다면, 35개의 팀입니다. 그 중심에 주님이 함께하실 때, 그 관계와 사역은 세 겹 줄처럼 견고해집니다. 주님의 능력이 주어진다면 사람이 흔들수도 없고, 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겹 밧줄은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 교회, 일터의 현장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죄로 인해 무질서 안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 이 땅을 회복시켜 가십니다. 사역의 현장에 일꾼이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으로 결단하면 됩니다. 그런데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기억해야 할 주님의 당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돈이나 양식 자루나 여벌 신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사명의 핵심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하고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당부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라는 의미 보다는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복음을 전하라는 권면입니다. 주님은 사역을 감당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7 어느 마을에 들어가면, 오직 한 집에서만 계속 머물러라. 사양하지 말고, 주인이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제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8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거든, 너희에게 차려 주는 음식은 무엇이나 먹어라.

바울이 선교사역을 끝까지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은 여러 동역자들의 후원과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역을 감당하게 하신 분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주님께 부름을 받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빛을 보고 눈이 멀어 사흘 동안 보지 못한 채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가 보낸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을때 눈에 비늘이 벗겨지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후 바울에게 삶의 우선순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보면, 성령께서 시작하셨습니다. 바울의 자기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장 1절입니다.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따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Ἀπόστολος라는 헬라어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기시고 세례를 주신 후에 ‘보냄을 받은 존재’로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사명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편한 길,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버티고 인내하며 끝까지 맡겨진 임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수많은 인생의 고비마다 무엇을 선택하고 따라가야 할지 매 순간을 고민합니다. 조금 더 잘 살아내고 싶고, 많은 것을 이루고 싶고 지금의 것을 지키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선택 속에서 살아갑니다.

TV 프로그램 ‘크레이지 리치 코리안’이라는 방송에 뉴욕 할렘가의 대모로 불리우는 베티박이라는 분이 소개되었습니다. 할렘가에서 40년째 식당을 하고 있는데, 자수성가해서 리치 코리안이 된 인물입니다. 그녀는 식당을 운영하며 여러 차례 권총 강도 피해도 입었는데, 그 할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믿었던 흑인 직원에게 큰돈을 횡령 당해 피해를 입었을때는 희망이 없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렘가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지역 사회를 돕고 베풀며 자신의 사업을 일궈냈습니다. 그러던 어떤 날 함께 일하던 둘째 아들이 갑작스런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가슴 아픈 사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둘째 아들의 이름으로 그 지역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들어 장학 사업을 하는 것이 소개되었습니다. 힘겨웠던 그 자리를 사랑과 헌신으로 품으며 포기하지 않았더니 그 땅에서 변화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두번째 주님의 당부는 가는 곳마다 평화를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평화입니다. 에이레네(εἰρήνη)라는 단어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는 기쁜 소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했던 사역의 현장은 늘 긴장과 갈등,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사람들에게서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과 치유도 이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세상에는 폭력과 비방, 죽음의 문화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저들과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됩니다. 다툼과 불화가 있는 곳에 주님의 평화를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죽음의 문화를 이길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갈때 죽음도 무력해 집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지만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그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12) 오늘날 분쟁의 시대에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단어를 적으시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세상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잃어가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0장은 ‘그 후’라고 시작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 길로 가는 중에 극단적인 요청을 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신 사건 이후입니다. 그리고 찾아와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제자도를 무장해야 한다고 역설적으로 대답하신 말씀 이후에 이어지는 본문입니다.

요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편한 길이 아닙니다. 세상이 얼마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지 우리는 매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당시 70명의 제자들이 파송받고 들어간 지역은 갈릴리 지방의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예수께서 많은 기적과 권능을 행하신 지역이지만 지역의 사람들이 복음 듣기를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장차 심판의 날에, 그 마을에 내릴 벌이 옛날 소돔이 받은 벌보다 더 가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복음에 응하지 않을 선택이 가능합니다. 회개의 기회를 져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진지하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거부당할 때도 낙심하지 마십시요. 정죄하는 마음보다, 간절히 기도하며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더 느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통당하고 매를 맞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며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가능할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의 마음에 영생에 대한 믿음을 간직했기 때문이고, 성령께서 이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손경민 목사님의 찬양인 가장 귀한 삶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삶이라 하여도 스치듯 지나는 삶이라 하여도 후회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것은 가장 귀한 삶을 앎이라 내가 꿈꾸는 일 이루지 못해도 내가 바라는 것 다 갖지 못해도  낙심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것은 가장 귀한 삶을 삶이라 내가 복음을 알고 복음을 믿고 내가 복음을 전하며 살아간다면 내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고 내가 예수를 전하며 살아간다면 나의 삶은 가장 귀한 삶이라” 때로는 아무도 모르는것 같은 삶, 실패에 주저앉아 포기하려고 했던 그 삶속에도 후회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것이 가장 귀한 삶입니다.

우리는 성경속에서 성공한 영웅들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연약함으로 쓰러지고 있지만 그 연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고 작은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이루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보내진 곳에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2. 부르심에는 헌신과 희생이 따릅니다.

2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너무도 적다. 그러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보다 많은 일꾼을 보내 달라고 하여라. 예수님은 우리를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일꾼은 추수할 일들을 하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실패처럼 보여도 그 자리에 복음이 뿌리 내려집니다.

래디컬의 작가 데이비드 플랫 목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예수를 따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왜 좋은것인지 수많은 질문에 한가지로 대답합니다. “Follow Jesus!”

예수를 믿으면 갑자기 완벽해져서 다시는 죄와 씨름할 일이 없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순간부터 지난날의 라이프 스타일을 단호하게 정리하고 과감히 새로운 생활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크리스천은 말 그대로 죄와 자신(자기중심, 자기소모, 독선과 방종, 자기노력, 자만)에 대해 죽은 존재다. 그리스도가 내면에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든 게 변하기 시작한다… … 마침내는 삶의 이유마저 변한다. 재물과 지위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안락하고 안정적인 생활환경 역시 관심사가 아니다. 자신을 우상으로 삼지 않으므로 안전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명보다 더 갈구하기에 이른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할수록 크리스천이 된다는 게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더 확고하게 깨닫는다. 속지 말라. 개인적으로 어떤 결단을 내렸고, 어떤 기도를 드렸으며, 무슨 카드에 서명을 했고, 몇 년 전 어느 집회에서 손을 들었었는지 등은 예수님과의 관계라든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영적인 지위의 토대가 될 수 없다. 초대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데이비드 플랫-FOLLOW ME 팔로우 미》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부르심의 자리는 내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 안에서 하나 될 때,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을 바로 잡아 주시고 참사랑과 기쁨의 나라를 이뤄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평화를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복음 앞에서 분명히 서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내 삶 안에만 머무르게 된다면 하나님의 일하심보다 사람의 열심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곳은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편하고 힘들고 이해 못하는 길 앞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갈등과 아픔 앞에서 내 상처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제자로서 함께 살아가다보면 서로의 삶을 통해 십자가를 살아내는 복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곳에서 복음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눈물과 기도의 흔적이 담겨 있는 자리에는 갈등과 아픔도 함께하지만 그 아픔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치열하게 부대끼는 삶의 현장에서 비로소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부르심 앞에서 무너졌던 순간, 모든 것을 다 내어 드려야 하는 온전한 순종 앞에서 느낀 불안, 내 안의 분노와 내 안의 상처와 마주하는 그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시작될 것입니다. 편안한 일상 속에 가려졌던 우리의 신앙생활은 위기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지 못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쌓아 둔 신앙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를 부르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신 일상의 자리에서 살아내야 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