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27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7주)

누가복음 11:1~13

이렇게 기도하라

Pray Like This

1 어느 날, 예수께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기도를 마치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와서 예수께 말했다. “주님,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2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소서. 3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오니,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소서.’” 5 ○ 예수께서 또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해보자. 한밤중에 그 친구에게 가서 ‘여보게, 빵 세 덩이만 꾸어 주게. 6 친구가 여행 중에 우리 집을 찾아왔는데, 내가 그 친구에게 내놓을 것이 없다네.’ 하고 말하면, 7 그 친구는 침실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친구여, 제발 나를 귀찮게 하지 말게. 문단속을 하고 식구들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네.’ 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아주 끈질기게 졸라대면 결국 그 친구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9 기도도 이와 같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어주실 것이다. 10 그렇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11 생각해 보아라. 너희 가운데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 12 아들이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
11:13 이와 같이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녀에게는 자녀가 원하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자기 자녀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쉬운말 성경)

기도(祈禱)는 한자어로 빌 ‘기'(祈), 빌 ‘도'(禱)인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로 인도하는 은혜의 도구인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성소 안에 있던 법궤를 함부로 만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야훼 (YHWH) 하나님의 이름도 경외하는 차원에서, 직접 발음하지 않고 ‘아도나이’ 즉 ‘주’라고 읽었습니다. 이러한 전통 가운데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기도를 마치자 예수의 제자 중에 한명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유형의 기도를 하셨는지는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실제로 기도하고 계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한밤중에도 새벽에도 습관처럼 기도하시며 제자들에게 기도의 본을 보이셨고, 기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도록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22:39 예수께서 밖으로 나가셔서, 평소처럼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셨다. 제자들도 예수의 뒤를 따랐다. 22:40 그곳에 이르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여라.” 22:41 제자들과 떨어져, 예수께서는 돌을 던져서 닿을 만한 곳으로 가시더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주님은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기도하시는 주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주님을 보면서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기도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해줍니다.

첫째, 기도의 핵심은 바른 관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유대 신학에서는 신성 모독이자 불경건한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는데 누가복음의 본문과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을 원어로 보면, ‘아버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Πάτερ:파테르 라는 단어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며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친밀한 관계를 누렸으며, 예수를 믿는 우리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마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삶의 자세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2가지 형태의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위선자들 같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께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순전한 마음과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또한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의미없는 말을 반복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 가운데 교회의 진짜 위기는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가 멀어지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갈등과 불안이 사라지지 않은채 교회는 세속의 물결에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의 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기도의 모델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하늘의 뜻이 이땅에 이뤄지는 기도, 만족함이 없는 시대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 용서와 회개의 기도, 유혹에 빠지지 않게 지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마틴 루터는 ‘시편을 통해 우리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 또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은혜에 대한 행복한 생각들로 이루어진 꽃들로 만발한 하늘의 정원을 들여다 본다.” 라고 말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기도의 자리에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오늘 하루 어떤 옷을 입을까 선택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말씀의 옷을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구원 서사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어둔 인생길을 비추는 빛이 되어 주고, 불확실한 삶속에 분명한 방향이 되어 줍니다.

엉킨 실타래 같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내어드려야 합니다. 어릴때 외웠던 주기도문은 어른이 된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기도의 방향을 모르던 어릴때 암송했던 주기도문이 기도의 첫 걸음이 되었고 믿음의 고백이 되어 주었습니다. 기도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불렀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화려한 기도의 기술이 쌓여 가지만 주기도문으로 살아낼 힘이 부족합니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 나의 고민과 염려를 안고 찾아가는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기도의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부름 받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사명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도록 해줄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는 7개의 청원들로 구성되어 있고, 오늘 본문 누가복음에는 좀더 간결하게 5개의 청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기도와 인간의 삶을 위한 기도입니다. 연약한 인간은 기도없이 내 힘으로 살다가 인생의 문제 앞에 좌절하고 실패할때 비로소 기도해야 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께 간절히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잘못이 아니라, 겸손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아버지와 자녀는 여러가지 수식어가 필요없는 관계이기에 기도의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둘째,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드리는 우리의 간구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유대교의 기도와 다른 것들이 많습니다. 당시 유대교 뿐 아니라 모든 종교는 제사 중심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귐 안에서 성품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과정입니다. 마음을 터놓은 관계에서는 내 마음을 채울 공간을 내어주게 됩니다. 받아 들일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깨우는 것입니다.

A.W 토저는 ‘하나님’에 대한 책에서 밀턴의 기도를 인용합니다. “오 성령님!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갖 신전들이 아니라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입니다. 성령님이여 저를 가르치소서!’ 그는 깨끗한 마음과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아무도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설교할수 없고, 아무도 그런 설교를 올바로 들을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과 조명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관한 것을 이해할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오류가 있다면, 우리의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비유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해보자. 그 친구가 여행 중에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한밤중입니다. 밤중이라는 시간은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요구에 응하기 힘든 시간입니다. 하지만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 때문에 일반적으로 여행자들은 뜨거운 태양을 피해서 오후 늦게 여행을 시작했고 밤늦게 목적지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늦은 밤 찾아온 친구에게 줄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친구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떡 세 덩이만 꾸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웃집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끈질기게 졸라대면 결국 그 친구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라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도 이와 같다. 구하면 얻을 것이고, 찾으면 찾을 것이며 두드리면 열릴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유의 핵심은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끈질긴 간청이 응답을 얻는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보다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가 더 선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끈질기에 주님의 성품을 형성하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가 살아야 믿음이 메마르지 않고 깊은 골짜기에서도 생명의 꽃이 피어납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더욱 선명해 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끈질긴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수단이 아니라 끈질기게 기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에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간구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주를 찾는 기도시도 담겨 있고,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고 탄원하는 기도도 담겨져 있습니다. 때로는 인생을 살면서 뜻하지 않는 일을 겪을지라도 기도를 드리며 선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성령께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며 우리가 기도의 권리와 의무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같이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녀에게는 자녀가 원하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자기 자녀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 어거스틴은 참되고 완전한 기도는 사랑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참 사랑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친밀하도록 인도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주어진 상황속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허락하신 일이라 믿고 신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존 스트토 목사는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 숨이 떨어질 때까지 주님께 신실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수많은 기도 제목이 생깁니다. 그런데 임종을 앞둔 그 순간에는 그 동안의 기도 제목들이 아닌 본질적인 기도를 남겨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 앞에 신실한 기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간구해야 합니다.

얼마전에 전화 한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젊은 날, 꿈을 이루기 위해 보스턴에서 유학을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남편의 학회 참석차 다시 보스턴을 방문하게 되었고, 자녀와 함께 교회 앞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가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그때의 시간을 회상하며 전화를 주신것입니다. 모르는 분과의 전화 통화였지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 믿음의 자리를 걸어 가셨던 분의 삶의 고백이었기에 짧은 통화였지만 여운이 깊이 남습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찾던 그 시절의 간절함이 남아 있는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전화 통화였지만 그분과 그 자녀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드렸습니다. 삶이 불안하고 불안정 하던 그 시절의 간절한 기도는 세월이 지나도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막막하고 불확실한 지금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학업과 연구에 매여 치열하게 꿈을 향해 살아가지만 깊은 곳의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기도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단단해지기 위해 씨름하지만 영적 무기력함 앞에 서있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예수님이 무릎꿇고 기도하셨던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0720 2025 주일설교

(성령강림 후 제 6주)

말씀이 삶을 붙들게 하라

Let the Word Uphold Your Life

누가복음 10:38~42

10:38 ○ 예수께서 제자들과 여행하던 중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 10:39 그 여자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10:40 그러나 마르다는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했다. “주님, 제가 바빠 죽을 지경인데도 제 동생은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10:41 그러자 주께서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여러 가지 일로 마음 쓰느라 너무 염려가 많구나. 10:42 하지만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그것을 찾았다. 마리아에게서 그것을 빼앗고 싶지 않구나.” (쉬운말 성경)  

38 As Jesus and the disciples continued on their way to Jerusalem, they came to a certain village where a woman named Martha welcomed him into her home. 39 Her sister, Mary, sat at the Lord’s feet, listening to what he taught. 40 But Martha was distracted by the big dinner she was preparing. She came to Jesus and said, “Lord, doesn’t it seem unfair to you that my sister just sits here while I do all the work? Tell her to come and help me.” 41 But the Lord said to her, “My dear Martha, you are worried and upset over all these details! 42 There is only one thing worth being concerned about. Mary has discovered it,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령강림절기 여섯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두었다면, 오늘 본문은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수직적 측면이 드러납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마르다는 주방일을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예수님께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주님, 제가 바빠 죽을 지경인데도 제 동생은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마르다야 네가 여러가지 일로 마음 쓰느라 너무 염려가 많구나. 많은 일로 분주한 것보다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에게서 그것을 빼앗고 싶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지금 우리의 신앙의 자리를 돌아보게 됩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분주함 속에서 불평과 분노의 마음을 마주합니다. 마음의 시작은 섬김이었고 감사였는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열심으로 섬기고 일하다가 마음 안에 있는 근심과 불평을 이겨내지 못하고 금새 지치며 포기하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방향이 주님께 향하지 않고 나의 열심 안에 멈추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으로 섬기는 자리에 서면 영혼이 살아나고 기쁨이 회복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여전히 불안하고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도 마르다와 같이 여러 가지 일로 마음 쓰느라 염려를 쌓아두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사역 후에 지치고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무엇이 더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해져 있던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우선순위를 따르지 않으면 은혜가 메마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가지 뿐이다’라고 하시며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말씀 없는 섬김은 쉽게 지치게 되고 말씀 없는 사랑은 감정에 따라 금새 식어지며 말씀 없는 관계는 쉽게 실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말씀을 굳게 붙들 때 힘들었던 섬김의 자리도 기쁨이 되고 문제가 기회가 되는 회복의 전환점이 됩니다. 그렇다면 삶에서 중요한 한가지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의 기질과 열심만으로 섬기려고 할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은 바른 관계에서 부터 흘러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놓칠때가 많습니다. 섬김의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일을 하다 가도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면서도 마르다 처럼 자기 의로 가득 차 처음 지녔던 주님의 마음을 잃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선택적 섬김’과 ‘적당한 섬김’ 을 정해 놓지만 진정한 섬김은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라고 권면하며, 장차 주께로부터 유업의 상을 받게 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골3:23)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분의 일에 함께하도록 도와주십니다.

하지만 모든 일의 동기에서 나의 마음을 떼어 놓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섬기지만 분주함 속에서 불평이 쌓이게 되는 긴장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우리는 사람 앞이 아닌 하나님 앞에 서서 관계를 점검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초대했지만 주를 위해 일을 하다가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결국 기쁨을 잃어버린 헌신과 섬김은 염려와 근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돕지 않는 동생 마리아가 얄미웠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라는 구절에서는 자신의 열심을 인정받고자 하는 기대와 서운함이 담겨 있습니다. 마르다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마리아에 비해 열심으로 접대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주님께서 알아 주시기를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르다의 마음안에 얽혀 있는 우리의 본성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하기 전에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는지를 먼저 집중해야 합니다. 그 관계가 명확해지면 삶의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섬김의 능력은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부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지면 불평과 남을 향한 불편함만 남게 됩니다. 주님은 마르다의 마음에도 기쁨이 넘치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섬김의 자리에서 말씀이 바로 서지 않으면 우리 마음 안에 불평이 찾아오고 기쁨으로 섬긴 자리가 불평의 짐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을 하나님 앞에 먼저 서야 합니다. 섬김의 능력은 예배와 말씀을 통해서 흘러 나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했는데, 주께서는 좋은 편을 선택할때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쁘면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느리면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대 속에서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섬김과 헌신의 자리에서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의 마음을 품고 따를때 우리는 좋은 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동생 마리아를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던 동생의 절실한 마음,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동생의 모습을 은혜의 시선을 바라보았다면 동생의 몫까지 마르다가 감당할 순종의 힘이 더해졌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와 마르다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께서 죽은 오빠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에 등장하는 여인들입니다. 요한복음 11장 5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마리아와 마르다 모두에게 향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주님께서 유월절 엿새전에 베나디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초대받는 다른 사건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그 사건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아래 값비싼 향유를 다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으니 제자 중에 유다가 비싼 향유를 왜 낭비하느냐고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느냐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도 마리아의 행위는 나의 죽음을 예비하는 귀한 일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많은 업적,더 많은 성과를 내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르다가 차린 음식이 부족하다고 해서 책망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음의 동기와 마음 중심을 보시며 마르다가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조금 느린 아이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저도 추천을 받아 들어보게 된 노래입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듣고 여러번 들어보면서 노래의 가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간보다 더 빠른 세상에서 친구보다 앞서라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천천히 걸어가는 한걸음 느린 아이 꽃향기 맡아보고 밤하늘의 별 쳐다보고 친구 얘기 들어주고 가끔씩 뒤도 돌아보는  조금 느리게 가는 아이 마음은 커다란 아이 저 길 끝에 보이는 꿈 따라가면 느린 걸음 걸음마다 반짝반짝 환하게 빛이 난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만의 속도와 시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꼭 지키고 싶은 내 삶의 가치가 있고 이루고자 하는 목적과 목표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앞서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천천히 걸어 간다는 것은 마치 실패한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조금 느린 걸음으로 걷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분주함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예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분주하고 복잡한 세상 가운데에서도 주님 앞에 머무는 가장 좋은 편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수많은 소리에 마음을 빼앗길 때에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며 말씀 앞에 멈추어 서는 그 평안을 누리며 살아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분주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은혜가 사라질 때 사랑을 붙드는 힘도 약해집니다. 쉽게 상처 받고 말 한마디에 마음을 닫아버릴 때도 있습니다. 마르다도 그랬습니다. 자신의 열심 앞에서 서운한 마음을 마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 너머의 본질적인 것을 보셨습니다. 이 사랑은 마르다의 음식 준비보다 더 높은 차원의 완전하시고 공의로우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구원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사랑의 길, 고난과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세상의 일들과 낙심케 하는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마음에 생긴 틈은 염려와 불평으로 이어져 우리안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의 틈도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사랑으로 주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우리 내면의 영적 공간을 지키는 방법을 헨리 나우웬의 삶의 영성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우리 삶은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힘써야 할 활동도 많다. 우리는 빈틈없이 바쁜 삶을 원한다. 몸이 바쁘지 않으면 생각이라도 바쁘게 움직인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이나 아직 있지도 않은 일로 온갖 염려를 다한다. 혹시 벌어질지 모르는 일에 대한 근심과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내면의 공간을 잔뜩 채운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고 싶다면 훈련된 삶을 살아야 한다. 훈련이란 통제를 뜻하는 게 아니다. 영적 삶에서 훈련이란하나님이 활동하실 수 있는 공간을 내려는 노력”을 뜻한다. 훈련이란 자기 삶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지 못 하게 막는 일이다. 훈련된 삶에는 정신없이 바쁘지 않은 공간, 염려에 찌들지 않은 공간이 존재한다. 영적 삶에서 훈련이란, 내가 계획했거나 의지하고 있는 일이 아닌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공간을 내는 것이다.《헨리 나우웬 삶의 영성》

분주함 속의 염려가 가득 차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의 공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붙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르다가 적극적으로 예수와 제자들을 집에 환대한 것도 사랑받을 만한 일이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아래에서 말씀을 듣는 것도 사랑 받을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을때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따라가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고통을 겪으신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찾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듣는 세대 에서 말씀이 삶을 붙드는 세대 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알아도 말씀이 내 삶에 힘이 되지 않으면 영적 무감각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믿음 생활이 편안한 익숙함에 멈추어 버리면 말씀의 은혜가 더 이상 나를 깨우지 못합니다. 말씀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위기의 순간에 그 힘이 드러날 것입니다. 말씀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받은 은혜를 전하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분주함으로 지쳐 있는 마음의 방향을 재점검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2천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아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는 살아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있는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내 마음의 집에 초대된 주님의 말씀이 삶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의지할 분이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삶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 앞에 다시 서서 말씀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