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4)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Jesus The Good Shepherd

요한복음 10:9-15

김태환 목사

9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10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11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품삯을 받고 양을 돌보는 사람은 사실 목자가 아니며, 양도 자기 양이 아니다. 그 사람은 늑대가 오는 것을 보면, 양만 남겨 두고 멀리 도망가 버린다. 그러면 늑대는 양을 공격하여 양들을 흩트린다. 13 그 사람은 단지 품삯을 받고 양을 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양을 돌보지 않는다. 14 나는 선한 목자다. 나도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알아본다.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안다. 그리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쉬운성경)

9 “Yes, I am the gate. Those who come in through me will be saved①. They will come and go freely and will find good pastures. / ①Or will find safety 10 The thief’s purpose is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My purpose is to give them a rich and satisfying life. 11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sacrifices his life for the sheep. 12 A hired hand will run when he sees a wolf coming. He will abandon the sheep because they don’t belong to him and he isn’t their shepherd. And so the wolf attacks them and scatters the flock. 13 The hired hand runs away because he’s working only for the money and doesn’t really care about the sheep. 14 I am the good shepherd; I know my own sheep, and they know me, 15 just as my Father knows me and I know the Father. So I sacrifice my life for the sheep.” (New Living Translation)

‘Seven I AM Statements in the Gospel of John(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I AM)’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I AM’이라는 말은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셨습니다. BC 3세가 중엽에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번역된 성경을 ‘셉투아진트(Septuagint, 70인 역)’라고 합니다. 이 때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는 말을 ‘εγώ εἰμί(ego eimi)’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I AM’이 됩니다.

‘I AM’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I AM’이라고 말씀하신 일곱 개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복음 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복음 8:12).” “나는 문이다(요한복음 10:9).” “나는 선한 목자다(요한복음 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 “나는 포도나무다(요한복음 15:1, 5) 요한복음에만 ‘I AM’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4:27에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Jesus spoke to them at once. “Don’t be afraid,” he said. “Take courage. I am here!①” / ①Or The `I AM’ is here; Greek reads I am. See Exod 3:14 “I am here”라는 말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주(note) ①에 있는 대로 “I AM is here(I Am이 여기 있다)” 이렇게 번역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I AM’이라는 말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낸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고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복음 13:33)”라고 고백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때 경험했던 예수님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만났던 ‘스스로 있는 자’ 그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제가 ‘I AM’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나는 선한 목자다(I am the good shepherd, 11절)” 이 말씀이 ‘I AM’ 구절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I AM is the good shepherd”라고 해야 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바로 ‘I AM’, ‘스스로 계시는 분’ 오늘 우리가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부르는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스스로 계시는 분’을 발음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네 개의 자음으로만 되어 있거든요. 나중에 모음을 붙여서 ‘여호와(Jehovah)’ 혹은 ‘야훼(Yahweh)’라고 발음을 했습니다. 발음을 할 수 없으니까 ‘주님’이라는 뜻을 가진 ‘아도나이(Adonai)’라는 말에서 모음 네 개를 빌려와 발음을 했습니다. 그렇게 발음한 것이 ‘여호와’ 혹은 ‘야훼’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이 말보다 더 잘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윗이 쓴 시편 23편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시편 23:1-2)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He makes me to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the still waters.” (NKJV) 위대한 시인이었던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만족(滿足, satisfaction)’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한자 ‘만족’이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만(滿)’자는 ‘가득차다’는 뜻인데, 왜 여기에 ‘발(足)’이라는 말을 붙였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아무튼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가득하다’는 말에 ‘발’이라는 말을 붙여 ‘만족’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도 그 설명을 들을 때는 왜 ‘발’을 뜻하는 ‘足’자를 썼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가 ‘발(足)’자를 붙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발은 우리 몸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만족하다’는 말은 위로 머리에서부터 우리 몸 맨 끝에 있는 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에도 부족한 것이 없는,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만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람들은 ‘만족’을 느끼는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만족’을 얻느냐 하는 것입니다. “Contentment should be the hallmark of my life, as I put me affairs in the hands of God(나의 일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반드시 만족이 주어진다).” 필립 켈러(W. Phillip Keller, 1920-1997, 케냐)의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선교사의 아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직접 8년 동안 목자의 삶을 경험하면서 발견한 것들을 책으로 썼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A Shepherd Looks at Psalm 23(한 목자가 본 시편 23편, 우리 말로 ‘양과 목자’로 번역됨)’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양들이 목자의 인도를 받음으로써 배불리 먹고, 물을 마시고, 만족을 얻는 것처럼, 우리도 목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Yahweh).” (시편 144:15) 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하는 사람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과 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참 복 있는 사람들인 것을 아시나요? 왜냐하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시편 95편에 있는 말씀인데요. “다 와서 엎드려 주를 경배합시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이며 그분이 기르는 양 떼들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6-7절)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장에서 사는 하나님의 양떼들이고, 하나님의 백성들(the people of His pasture)이기 때문입니다.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 미국)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best and most beautiful things in the world cannot be seen or even touched-they must be felt with the heart(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마음을 느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헬렌 켈러는 볼 수 없는 ‘시각장애자’였고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자’였습니다. 하지만 헬렌 켈러는 해가 넘어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느껴 알고 있었고,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장관을 눈으로 본 적은 없었지만 마음으로 느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95편 말씀도 마음으로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7절, 개역성경) 이 말씀이 가슴으로 느껴지시나요? “하나님이 기르시는 그 손의 양이라”는 말씀이 정말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갓난 아기들이 엄마의 손에서 무럭무럭 자라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자랍니다. 이 하나님이 누구인가요? 스스로 계시는 분, 모세가 호렙산에서 만났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제 그 야훼 하나님,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자신을 ‘삯꾼(a hired hand)’과 구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삯꾼’은 돈을 받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 주인은 양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마리 수를 세어서 모자라는 것은 목자가 물어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아 양이 잡혀 먹히거나 할 때는 목자가 그 양을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10절)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My purpose is to give them a rich and satisfying life(나의 목적은 양들에게 풍요롭고 만족한 삶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나와 있고, Amplified Bible에는 “I ca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in abundance [to the full, till it overflows]”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에게 차고 넘치도록 풍성한 생명을 주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풍성한 생명’은 삶의 의미와 목적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조금 전에 소개했던 필립 켈러의 말인데요. “No pastor, no spiritual leader, is ever able to take his people any further than he himself has gone with God(어떤 목사나 영적 지도자도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 이상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갈 수 없다).” 그의 말을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목사나 영적인 리더도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가 될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어떤 목사도, 영적인 리더도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온전하게 하나님께로 인도할 ‘선한 목자’는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로마서 5:8)”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다윗은 나이가 어리고 전투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골리앗과의 싸움이 허락되지 않자 사울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양 떼를 지키던 사람입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을 물어 가면, 저는 그 놈들을 공격하여 그 입에서 양을 구해 냈습니다.” (사무엘상 17:34-35) 다윗은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선한 목자(a good shepherd)’였습니다. 그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이신 예수님의 ‘모형(a copy)’ 혹은 ‘그림자(a shadow)’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잘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양들에 대한(about sheep)’ 정보를 안다는 말이 아니라, 양들의 특징을 알고, 그들의 버릇을 알고, 그들의 건강 상태를 알고, 심지어 양들의 이름까지 안다는 뜻입니다. 양들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It takes some of us a lifetime to learn that Christ, our Good Shepherd, knows exactly what He is doing with us. He understands us perfectly(우리 중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아신다는 것을 배우는데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계신다).”

이 시간, 여러분의 관심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에게 돌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나를 알아본다(They know me).” (14절)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because they know his voice) 그의 뒤를 따른다.” (4절) 양들이 목자를 인격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도 우리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음성을 모르면 그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다가 정말 우연히 목자가 양떼를 인도하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했습니다. 나이가 젊은 목자인데, 양 5-60마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목자가 피곤했는지 잠깐 자리에 앉는 사이에 양들은 금방 여기 저기 흩어져 풀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양들이 멀리 가면 안 되니까 목자가 조약돌을 하나 집어 저만큼 던졌습니다. 그 이상은 가지 말라는 신호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목자가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니까 양들이 금방 목자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신기한 광경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선한 양’이 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선한 양’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다른 사람을 위한 ‘선한 목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목사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Life’s most persistent and urgent question is ‘What are you doing for others(삶의 가장 지속적이고 긴급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6.19.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3)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I Will Give You Rest

마태복음 11:28-30

김태환 목사

28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볍다.” (쉬운성경)

28 Then Jesus said, “Come to me, all of you who are weary and carry heavy burdens, and I will give you rest. 29 Take my yoke upon you. Let me teach you, because I am humble and gentle at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30 For my yoke is easy to bear, and the burden I give you is light.”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마태복음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구약성경 이사야 55장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사람아, 다 와서 마셔라.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마셔라. 포도주와 우유를 마시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마셔라. 어찌하여 너희는 진정한 음식이 못 되는 것을 위해 돈을 쓰느냐? 어찌하여 만족시켜 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내게 와서 귀를 기울여라.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 (이사야 55:1-3a)

이 말씀은 당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메시지를 그의 신실한 종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이사야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 없었거든요? “값없이 와서 마시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 “너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할 음식을 위해서 애쓰느냐?”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이 말씀을 다시 듣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예수님을 입을 통하여 다시 들음으로써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오늘날까지도 옛 언약을 읽을 때 수건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이 수건이 아직까지 벗겨지지 않고 있는 것은,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14) 이 말씀이 NKJV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Until this day the same veil remains unlifted in the reading of the Old Testament, because the veil is taken away in Christ.” 여러분, 얼굴에 베일을 쓰고 사물을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물을 분명하게 볼 수 없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바로 구약성경을 읽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치 얼굴에 베일을 쓰고 사물을 보는 것처럼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어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베일을 벗겨 주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구약성경을 읽을 때 답답하던 것이 분명하게 이해가 된다는 것 아닙니까? 구약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읽어야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내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수고하고’라는 말과 ‘무거운 짐을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한번 이른 아침에 센트럴 스퀘어에 나가 보시지요. 무표정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탑니다. 그리고 오후 늦게까지 일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내일 또 그런 일을 반복합니다. 내일만이 아니고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피곤하고, 지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이사야서에 있는 “너희 목마른 사람아, 다 와서 마셔라.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마셔라.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마셔라” 이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과 겹쳐 들리지(overlap) 않습니까?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When He saw the multitudes, He was moved with compassion for them, because they were weary and scattered, like sheep having no shepherd, NKJV).” (마태복음 9:36) 예수님의 눈에 비친 당시의 사람들은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목자가 없는 양같이 보였습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들의 길을 인도하는 목자가 없으니까 그들은 흩어져 제 각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줄 목자가 없어서 사람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보시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마가복음 6:34)”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쳐 줄 지도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맞습니까?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휴가나 여행이 아닙니다. 잠시 일을 쉬는 것이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지치고 피곤한 삶이 반복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삶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사는 사람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난과 배고픔을 이길 수 있고, 고난(고생)도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이라는 오스트리아의 신경 심리학자가 주창한 치료법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그는 그 때의 생존 경험을 살려 ‘Man’s Search For Meaning(1946, 한국어 번역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주장한 것이 ‘로고테라피’입니다. ‘로고데라피’는 ‘logos’라는 말과 ‘therapy(치료법)’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logos’는 말, 의미 등으로 번역되는 말이지만, 신학(theology)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로고테라피’를 ‘의미요법”이라고 번역합니다.

빅터 프랭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Life is never made unbearable by circumstances, but only by lack of meaning and purpose(인간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은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미와 목적을 상실했을 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말을 더 들어볼까요? “The meaning of life is to give life meaning(삶의 의미란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다).” “For the meaning of life differs from man to man, from day to day, and from hour to hour. What matters, therefore, is not the meaning of life in general but rather the specific meaning of a person’s life at a given moment(삶의 의미란 사람마다,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에 한 개인이 느끼는 삶의 특별한 의미이다).”

우리의 삶의 무게가 힘에 버겁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I will give you rest)”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휴가를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29절에 다시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refreshment(원기 회복)’를 주고, ‘renewal(새로워짐)’ 시켜주고, ‘blessed quiet(복된 평온함)’을 주고, ‘tranquility(평온함)’를 주고, 삶의 ‘satisfaction(만족)’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쉼’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2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멍에(yoke)’는 예수님의 ‘교훈(teachings)’을 의미합니다. 예전에 소에게 일을 시킬 때 소의 어깨에 ‘멍에’를 메웠습니다. 멍에를 메울 때 두 마리 소에게 같이 멍에를 메웠습니다. 멍에를 메면 두 마리 소는 어쩔 수 없이 서로 보조(步調)를 맞춰서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라”고 하신 것은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지내면서 나에게 보조를 맞추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시지요? “예수께서는 열 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습니다(Then he appointed twelve of them and called them his apostles. They were to accompany him).” (마가복음 3:14, 공동번역) ‘accompany’라는 말이 ‘go along with~(누구와 함께 가다)’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므로, ‘나의 멍에를 메고’라는 말씀은 “나와 함께 지내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과 나란히 걸으면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인격을 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에게 배웁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과 다른 랍비들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번 이 말씀을 보세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따라하지는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올리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짐을 지기 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23:2-4)

이것이 예수님의 눈에 비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영어 표현에 ‘take advantage of~’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해서 이익을 취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지도자들이 다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랍비들의 교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것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authority)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1-22)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것은 처음 듣는 새 교훈이다(What is this? A new teaching with authority, 마가복음 1:27)” 하면서 깜짝 놀랐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이용해서 ‘take advantage’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서 뭔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예수님은 그에게 온 사람들에게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참 인간’이 되도록 도우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을 아시지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나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For I came to seek and save those who are lost).” (누가복음 19:9-10) 예수님 안에서 삭개오는 그의 잃어버린 삶을 되찾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예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는 증거는 이후 그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재산을 모으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안에서 재산을 축적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의 조건이나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우리의 삶의 환경은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Logotherapy(의미요법)’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우리를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우리를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서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돈을 쓰고 애를 쓰느냐?”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고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찬양 가사가 생각납니다. ‘O Come, All You Unfaithful(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오세요)’라는 찬양입니다. “오세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요. 연약하고 불안한 사람들도 오세요. 와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세요. 오세요. 열매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은요. 기도에 지친 사람들도 오세요. 와서 당신의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세요. 그리스도가 나셨어요. 그리스도가 나셨어요. 그리스도가 나셨어요. 당신을 위해.” 이런 가사의 찬양입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O Come, All You Unfaithful(Korean subtitle)’ Link https://bit.ly/3QsSn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