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7.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7)

그의 말에 틀린 말이 없었다!

There Was Nothing Wrong With His Words!

누가복음 15:25-32

김태환 목사

25 그 때, 큰아들은 밭에 있었다. 그가 돌아와 집 가까이 다가왔을 때, 음악 소리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는 종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인지를 물어보았다. 27 종이 ‘아우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무사히 건강하게 아우님이 돌아왔기 때문에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밖으로 나와 큰아들을 달랬다. 29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저는 수 년 동안, 아버지를 섬겨 왔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저를 위해서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31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 ‘아들아,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 아니냐? 32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 (쉬운성경)

25 “Meanwhile, the older son was in the fields working. When he returned home, he heard music and dancing in the house, 26 and he asked one of the servants what was going on. 27 `Your brother is back,’ he was told, `and your father has killed the fattened calf. We are celebrating because of his safe return.’ 28 “The older brother was angry and wouldn’t go in. His father came out and begged him, 29 but he replied, `All these years I’ve slaved for you and never once refused to do a single thing you told me to. And in all that time you never gave me even one young goat for a feast with my friends. 30 Yet when this son of yours comes back after squandering your money on prostitutes, you celebrate by killing the fattened calf!’ 31 “His father said to him, `Look, dear son, you have always stayed by me, and everything I have is yours. 32 We had to celebrate this happy day. For your brother was dead and has come back to life! He was lost, but now he is found!'” (New Living Translation)

신약성경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 모두 몇 개나 될까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40개 정도됩니다. ‘비유’가 무엇인지, ‘비유’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a short story that teaches a moral or spiritual lesson, especially one of those told by Jesus as recorded in the Bible(윤리적인 혹은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짧은 이야기로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 중 하나를 비유라고 한다).” (Oxford Learner’s Dictionaries)

‘비유’는 그리스어로 ‘παραβολή(파라볼레, parabolē)’라고 합니다. ‘para-’라는 말은 ‘옆에, 나란히(alongside)’라는 뜻이고요. ‘bolē’라는 말은 ‘던지다(to throw, to cast)’라는 뜻이거든요? 두 말을 합치면 “옆에 나란히 놓다” “비교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어려운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나란히 놓고 그 영적인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통찰(insight)이 있습니다. 생활 주변에서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것들이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자들이 부엌에 두고 빵을 구울 때 쓰는 누룩(yeast)이 있습니다. 누룩을 넣으면 밀가루가 부풀어 오릅니다. 예수님은 이 누룩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자라는 것이 꼭 이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누룩처럼 작은 우리의 헌신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주변의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작은 일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 네델란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학자로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사람은 예일 신학교의 종신 교수였습니다. 그리고, 하바드 신학교의 초빙을 받아 실천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갑자기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 온타리오에 있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The L’Arche Daybreak Community)’에 채플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 공동체에서 지체 부자유자들을 섬기면서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많은 책들을 썼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책으로 초기에 나온 책이 ‘예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 1989)’라는 책입니다. 가장 나중에 나온 책 중의 하나가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992)’이라는 책입니다.

1983년, 프랑스를 여행하던 나우웬은 ‘라르쉬 공동체’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8, 네덜란드)의 그림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라는 그림을 보고 그 그림에 매료되고 맙니다. 그로부터 3년 후, 그는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원작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 그림 앞에 몇 시간이고 앉아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림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렘브란트와 자신의 삶에 투영시켜 정밀하게 해석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출판된 책이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입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인물은 중앙에 있는 아버지입니다. 고령의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는 넓은 어깨와 가슴을 가졌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깨에 두른 빨강 망또는 아버지의 고귀한 신분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눈에 초점이 없어 보입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의 눈이 눈물로 짓물러 거의 시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 보인다고 했습니다. 나우웬은 아들의 어깨 위에 놓여 있는 두 손이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그려진 것을 주목했습니다. 마치 아버지의 오른손은 어머니의 손처럼 고운 반면에 아버지의 왼손은 투박하고 굵직한 힘줄이 보입니다. 마치 힘센 아버지의 손과 아들을 사랑과 용서로 감싸는 어머니의 손이 모두 보입니다.

그 다음으로 눈길을 끄는 사람은 아버지 품에 무릎을 꿇고 안겨 있는 작은 아들입니다. 아들의 머리는 짧게 깎은 것이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 있는 태아(fetus)를 연상케 합니다. 타향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평안한 모습을 렘브란트는 그런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prodigal living)’을 하다가 가진 돈을 모두 날렸습니다. 이 아들의 남루한 모습이 그의 방탕했던 생활의 결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신발 한 짝은 벗겨져 맨발이었고, 다른 신발 한 짝도 뒤꿈치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 말했다. ‘내 아버지의 품꾼들에게는 양식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 말해야겠다. 아버지, 저는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꾼 가운데 하나로 여기십시오.’ 그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누가복음 15:17-20)

아버지에게 받아온 돈이 아직 남아 있었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돈이 떨어지고,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고 먹을 것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 탕자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A Long Way Off(아득히 먼 길, 2014)’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 제목에 이런 부제를 붙였습니다. ‘The Modern Day Story of The Prodigal Son(현대판 탕자의 이야기)’이라고요. 그리고, 포스터에 이런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We all know one, have been one, or are waiting for one to come home (우리 모두는 그 한 사람을 알고 있거나, 그 한 사람이었거나, 그 한 사람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탕자의 비유’를 조심해서 읽어보면 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작은 아들에게 돈이 떨어지자 때마침 그곳에 큰 흉년이 듭니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맞을 때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합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눈으로 지금 작은 아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작은 아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세요. “내 아버지의 품꾼들에게는 양식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7절) 아버지 집을 나간 그 작은 아들을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지금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 덴마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탁월한 신학자이고 철학자입니다. 인류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실존주의 철학을 주창하신 분입니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하이데커(Martin Heidegger, 1889-1976), 카뮈(Albert Camus, 1913-1960) 등이 모두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키에르케고르는 현대 신학의 기초를 세운 신학자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중에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 1843)’ ‘공포와 전율(Fear And Trembling, 1843)’ ‘죽음에 이르는 병(The Sickness Unto Death, 1849)’ 등이 유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most common form of despair is not being who you are(가장 흔한 절망의 형태는 당신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참해진 자신의 모습이 작은 아들을 절망하게 했습니다. 그가 절망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작은 아들이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한 그 용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신앙의 도약(leap of faith)’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 무엇이 작은 아들로 하여금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도약하게 했을까요?

아버지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있는 작은 아들의 뒷모습에서 뭔가 이상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오른쪽 허리춤에 단도(a short sword)를 차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왜 이 작은 아들은 단도를 차고 있을까요? 객지를 나돌다 보면 위험한 순간들이 많으니까 호신용으로 차고 있었을까요?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탕자의 귀향’에서 이 단도는 작은 아들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 아들로서의 ‘정체성과 지위’를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정말 탁월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작은 아들은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칼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존심이 그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19, 21절) 역설적으로, 이 말은 나를 아들로 받아 달라는 간청으로 들립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줍니다.

마지막으로 봐야 할 사람은 그림 오른쪽에 서 있는 큰 아들입니다. 큰 아들은 두 손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의 치켜 올라간 눈썹에서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질투와 분노, 상실감이 느껴집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수 년 동안, 아버지를 섬겨 왔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저를 위해서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9-30절)

큰 아들의 말에 하나도 틀린 말이 없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어긴 일이 없이 말 잘 듣는 아들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자기에게 해 준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와 춤추는 소리도 짜증이 났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그토록 감격스럽게 맞아주는 아버지의 처사도 못마땅했습니다. 그는 집을 나간 동생이 살아 돌아온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감정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살면서도 그는 종처럼, 아들로 산 것이 아니라 종처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버지의 말씀 한마디에 대반전(大反轉)이 일어납니다. “아들아,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 아니냐?” (31절)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고 있었고, 한 번도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습니다.

문제는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큰 아들과 같이 종의 마음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re are many elder sons and elder daughters who are lost while still at home(집에 머물러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잃어버린 사람으로 살고 있는 수많은 큰 아들들과 큰 딸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해 주는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은혜를 모르고 불평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짜증을 냅니다. 스스로가 아들이 아니라 종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 제3의 인물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큰 아들 사이에 있는 모자를 쓴 사람인데,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무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 사람은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렘브란트는 자기가 그 상황 속에 들어가 객관적으로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렘브란트의 생애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가 그린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처럼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그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위로와 평안을 맛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끝으로, 헨리 나우웬이 한 말을 소개함으로써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But what makes us human is not our mind but our heart, not our ability to think but our ability to love(하지만 우리를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의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우웬은 ‘탕자의 귀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 작은 아들이 되려고 해서도 안 되고, 큰 아들이 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우리 모두는 탕자를 용서해주고 받아주는 아버지들이 되도록 해야 한다.”

7.10.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6)

다른 복음은 없다!

There is No Another Gospel!

요한복음 3:14-17

김태환 목사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16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쉬운성경)

14 Just as Moses lifted up the snake in the desert,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15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ay have eternal life. 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17 For God did not send his Son into the world to condemn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through him. (New International Version)

요한복음 3:16을 가리켜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보다 더 간단하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보다 더 분명하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보다 더 알기 쉽게 복음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의 중심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獨生子, God’s only begotten son)’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말문이 막힙니다. 세상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코스모스(κόσμος)’입니다. 우주(universe)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코스모스’는 ‘whole creation(모든 피조물)’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길래 자기 아들을 세상을 보내셨을까? 아니,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셨길래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할 정도로 사랑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다가 100살이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90세였습니다. 이미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나이가 훨씬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기 22:2-3)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가지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으로 갔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행동이 이해가 되시나요? 다른 것이면 몰라도 어떻게 100살이 되어서 낳은 그의 ‘독생자(his only begotten son)’를 바칠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아들인데, 다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일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for us)’ 희생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설령 우리가 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가 우리 대신 죽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Very rarely will anyone die for a righteous man, though for a good man someone might possibly dare to die.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로마서 5:7-8)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너무 다릅니다. 우리는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다분히 ‘조건적인 사랑(conditional love)’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God’s love is unconditional). 죄인들을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조건을 따져서 사랑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입니다(God’s love is concrete). 하나님은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보내 주심으로써 그 사랑을 친히 증명하셨습니다. 위에서 말한 로마서 5장 말씀에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8절)”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Christian Standard Bible에는 “But God proves his own love for us(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입니다(God’s love is personal).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whoever believes in Him)’ 구원을 얻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아시나요? 하나님께서 민족 단위로 심판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나라 전체를 심판하셨습니다. BC 720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BC 586년에는 남왕국 유다가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새로운 언약(The New Covenant)’을 선포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예화를 들어 쉽게 ‘새로운 언약’을 설명했습니다.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는데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아들의 입에서도 신물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예레미야는 (예수님 이전의) ‘옛 언약(The Old Covenant)’이 바로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이후의) ‘새 언약(The New Covenant)’에서는 신 포도를 먹은 사람의 이만 시게 된다는 것입니다(예레미야 31:29-30).

‘새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맺은 ‘새로운 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핵심은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처럼 아버지가 믿으니까 아들은 믿지 않아도 구원을 얻는 일이 ‘새 언약’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파스 호 피스테우온 에이스 아우톤(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Everyone who believes in Him”입니다. “I believe in Jesus”라고 하면 예수님의 존재를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교훈과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끼치는 선한 영향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나의 삶이 변화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I believe in Jesus”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기독교 변증가였던 C.S. Lewis가 한 말인데요. “I believe in Christianity as I believe that the Sun has risen, not only because I see it but because by it, I see everything else (나는 해가 뜬 것을 믿는다. 꼭 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해가 뜬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해의 밝은 빛을 통해 다른 것들 것 볼 수 있기 때문에 해가 뜬 것을 믿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기독교를 믿는다).” —“Is Theology Poetry?” The Weight of Glory 정말 명언 아닙니까? C.S. Lewis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기독교 변증론자(apologist)였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꼭 해를 눈으로 보기 때문에 해가 뜬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해를 눈으로 보지 않아도) 해에서 나오는 빛을 통하여 다른 모든 사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해가 뜬 것을 믿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우리의 가치관이 변화되어서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위의 글에서 루이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는다면 반드시 변화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반드시 그 믿음이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 아닐까요? 우리의 믿음이 행동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맞습니까? 삶이 변하지 않는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쓴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But That was no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에베소서 4:20, Good News Translation) 예수님을 올바로 배우고 믿는다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그런 식으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하나 더 볼까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당신에게 보이겠습니다(I will show you my faith by my good deeds).” (야고보서 2:18)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Faith by itself isn’t enough. Unless it produces good deeds, it is dead and useless,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믿음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에 선한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을 죽은 믿음이고 아무 소용없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17, 26)

복음은 쉽고 간단합니다. 많이 배운 지식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듣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의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아들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놓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전파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불러 절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사도행전 4:18)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말씀이 그 당시의 분위기를 잘 말해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공의회(the Sanhedrin)에 출석했던 제자들은 공회원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There is salvation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by which we must be saved).” (사도행전 4:12, Christian Standard Bible)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른 복음’을 전파하려는 시도가 있어왔습니다. 번역 성경들을 보면 ‘다른 복음’을 ‘a different gospel’ 혹은 ‘another gospel(KJB)’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복음과 다른 변질된 복음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1:4, 갈라디아서 1:6에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a different gospel that pretends to be the Good News(복음인 것처럼 보이는 다른 복음, New Living Translation)’이라고 설명을 붙인 성경도 있습니다.

왜 이런 ‘다른 복음’이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복음이 너무 간단하고 쉽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난 ‘다른 복음’은 그런 이유로 생긴 일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구원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줄 아세요?”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주장을 가르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구원의 교리가 쉬우면 우리가 얻는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구원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교리가 어려우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나의 힘으로 얻는 구원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본성 속에 구원은 어렵게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과정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구원의 문이 좁아 극소수의 사람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라는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The Postmodernism)’에서 나타나는 경향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상대적인 가치만을 인정하는 시대적인 경향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시대적인 경향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과거와 달리 영웅이 나오지 않습니다. 목사님들도 그렇습니다. 과거와 달리 성인으로 추앙받는 목사님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교리를 시대 착오적이라고 비판합니다. 기독교만 절대적이라는 주장은 독선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종교 간의 대화가 가능하고, 서로 공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원주의자들(pluralists)’의 주장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복음’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폴 니터(Paul Knitter)가 쓴 책 중에 “No Other Name(다른 이름은 없다고)?” 이런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1985년에 출판된 책인데요. 이 책에 ‘A Critical Survey of Christian Attitudes Toward The World Religion(세계 종교에 대한 크리스천의 태도에 대한 비판적인 조사)’ 이런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책 한 권만 읽으면 쉽게 다원주의자들이 되고 맙니다. 그만큼 설득력 있게 잘 쓴 책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올바로 알고 있습니까? 복음은 쉽고 간단합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14-15절) 예수님께서 구태여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광야시대에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장대에 매단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다(민수기 21:4-9).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자신도 십자가에 매달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십자가에 매달리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쉽고 간단합니까? 복음에는 인간의 노력이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다른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노력으로 대치시키려는 인간적인 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