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0)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라

Make A Good Influence On The World

마태복음 5:13-16

김태환 목사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15 등불을 됫박 안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놓는다. 그래야 등불이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쉬운성경)

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what good is salt if it has lost its flavor? Can you make it salty again? It will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foot as worthless. 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like a city on a hilltop that cannot be hidden. 15 No one lights a lamp and then puts it under a basket. Instead, a lamp is placed on a stand, where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16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so that everyone will praise your heavenly Father. (New Living Translation)

요즘에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중에도 ‘선한 영향력’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7절).” 그리고 이 말씀 앞에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예전에 최일도 목사님이 리뉴에 강사로 오셔서 이런 일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최 목사님이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을 듣던 중에 하용조 목사님이 자꾸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귀에 거슬려서 손을 들고 “목사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소금과 빛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크리스천 잡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일도 목사님의 지적 때문인지 잡지 이름이 1999년 4월 호부터 ‘소금과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이름을 바꿨는지, ‘빛과 소금’이든지 ‘소금과 빛’이든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Travis Scott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You will never influence the world by trying to be like it(세상을 좋아하고 따라가면서 결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에 인사이트를 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상의 유행과 트렌드를 좋아하고 따라가면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 로마서 12:2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을 아시지요?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더 이상 세상의 유행을 본받지 말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하나님이 여러분을 변화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맞습니까?

여러분,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하여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진들을 보십시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처에 많은 위험들이 있습니다. 거센 물살을 거스르면서 힘들게 뛰어오르는데, 곰들이 입을 벌리고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연어들이 자기들이 태어난 강 상류로 가서 알을 낳는 것은 타고난 본능(本能, instinct)이라고 합니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평균 1,000마일(1600km)을 여행한다. 온갖 상처를 입으며 강물을 역류해 올라가는 고난을 감수한다. 연어는 알을 낳기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그리고, 알을 낳으면 그 생을 마감한다.” 연어의 이런 본능이 마치 이 시대의 사상과 유행을 본받지 않고 거슬러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크리스천들의 운명과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둘째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지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좋은 ‘교제(fellowship)’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혼자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같이 드리는 예배가 필요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내 옆에 앉은 형제와 자매와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제의 필요성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제를 통하여 격려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연대의식(連帶意識, solidarity)’을 갖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에 대한 공동의 책임의식을 배우고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입니다. 교회를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다른 이유를 가지고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면 크리스천으로 가져야 할 바른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22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며, 믿음과 사랑과 평안을 추구하기 바랍니다(Instead, pursue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Enjoy the companionship of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 좋은 믿음의 친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5:3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쁜 친구를 사귀면 좋은 습관도 나쁘게 됩니다.” 두 말씀 모두 교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어떤 생각으로 그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선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세상의 소금(salt of the earth)’이라는 말씀입니다. 빛에 대해서도 똑 같이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of’라는 전치사에 ‘~에 속한’이라는 뜻이 있지만 이 경우는 ‘~에 속한’이라는 뜻보다는 ‘specific identity within a category’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세상에서 소금이라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소금은 ‘짠 맛’을 유지하고 있을 때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유지할 때 맛을 낼 수도 있고, 썩는 것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또 소금의 ‘짠 맛’을 섭취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소금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 땀을 많이 흘리면 우리 몸이 짠 음료수나 짠 음식을 원합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진을 한번 보세요. 이 산양들이 왜 이렇게 위험한 절벽에 붙어 있을까요? 놀라지 마세요. 바위에 붙어 있는 소금기를 빨아먹기 위해서 이 산양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소금의 ‘짠 맛’이 소금의 정체성이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Danie & Jessi 두 사람이 공동으로 “How to Be a Christian Influencer(크리스천으로 영향력을 갖는 비결)”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선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 먼저 “건전한 신학을 가져야 한다(Make sure you have good theology)”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완전히 공감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아무리 유능하고 인정받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 건전하지 않으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건전한 신학(good theology)’은 마치 인정받는 회사에서 나온 제품과 같습니다. 저는 신학서적이나 신앙 서적을 살 때 제일 먼저 이 책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는지 출판사를 봅니다.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면 믿을 수 있는 그런 출판사들이 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그럴듯해 보여도 사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온라인에서 아주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와, 이런 좋은 글이 있다니!” 하면서 저자가 누구인지 봤는데 누군지 이름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력을 봤더니 굉장한 이력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가는 교회를 봤더니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일명 몰몬교)’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 교단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이단 종교에 깊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의 글을 설교 시간에 인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믿음이 건전한 신학의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희생(sacrifice) 정신’입니다. ‘희생’에 대하여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ransom)’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생명을 내 준 대가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고린도전서 6:20, 7:23) 이 은혜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희생’이라는 말이 갖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희생’이라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는 ‘희생’이라는 말이 부담스럽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생’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희생은 다른 말로 하면, 이기적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Kenneth Blanchard라는 사람의 말인데요. “The key to successful leadership today is influ-ence. not authority(오늘날 성공적인 리더십을 위한 핵심 단어는 권위가 아니라 영향력이다).” 참 신기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한순간에 ‘권위주의’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어디에서도 ‘권위주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는 ‘권위주의 리더십’ 대신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말합니다. 구성원들을 내 몸같이 돌보고, 희생하고, 섬김으로써 공동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선한 행동(good deeds)’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16절)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선한 행동’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전통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더 이상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든지 심한 근시안입니다.” (베드로후서 1:9, 현대어 성경) ‘근시(近視, shortsighted)’는 가까운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먼 데 있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큰 그림으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베드로는 ‘근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선한 행동’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 구원의 큰 그림을 봐야 합니다.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셔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0)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모나리자’ ‘최후의 심판’ ‘메시야’ ‘천지창조’ 같은 작품들을 ‘걸작품(masterpiece)’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건전한 신학과 희생, 그리고 선한 행동, 이런 것들이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이 세상에서 나의 제자로서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 나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교회를 지을 때 예수님 말씀 대로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지었습니다. 교회에서 종을 치면 온 동네에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비 콕스(Harvey Cox)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1965년부터 2009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44년 간 하바드 신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세속도시(The Secular City, 1965)’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세속화되는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논의한 책입니다. 그가 예언자적인 안목으로 그 책에서 다루었던 교권 세습 문제, 성장제일주의, 교회의 대형화 경쟁 등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오늘날 교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Harvey Cox는 세속화된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로 ‘익명성(anonymity)’을 들었습니다. Harvey Cox 말이 맞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군중 속에, 대중 속에 숨어 정체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큰 대형 교회에 가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산 위의 동네처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익명성’이라는 시대 정신과 싸워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이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위기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7.24.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8)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If You Can’t Understand This Parable

마가복음 4:1-9

김태환 목사

1 <씨 뿌리는 비유>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로 모여들어서 예수님께서는 호수에서 배에 올라타 앉으셨습니다. 사람들은 호수 주변에 있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치는 중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 “들어라! 한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다. 그러자 새들이 와서 씨를 모두 먹어 버렸다. 5 어떤 씨는 흙이 거의 없는 돌 무더기에 떨어져 곧 자랐으나, 땅이 깊지 않았다. 6 해가 돋자 싹이 말랐고, 뿌리가 없어서 시들어 버렸다. 7 또 다른 씨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가 자라서 싹이 자라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싹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 8 또 다른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어 어떤 것은 삼십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여,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쉬운성경)

1 Again Jesus began to teach by the lake. The crowd that gathered around him was so large that he got into a boat and sat in it out on the lake, while all the people were along the shore at the water’s edge. 2 He taught them many things by parables, and in his teaching said: 3 “Listen! A farmer went out to sow his seed. 4 As he was scattering the seed, some fell along the 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it up. 5 Some fell on rocky places, where it did not have much soil. It sprang up quickly, because the soil was shallow. 6 But when the sun came up, the plants were scorched, and they withered because they had no root. 7 Other seed fell among thorns, which grew up and choked the plants, so that they did not bear grain. 8 Still other seed fell on good soil. It came up, grew and produced a crop, multiplying thirty, sixty, or even a hundred times.” 9 Then Jesus said, “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New International Version)

예수님의 비유에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가 매우 짧습니다. ‘탕자의 비유’같은 것은 비교적 길지만, 대부분의 비유들은 길이가 매우 짧습니다. 둘째로, 대부분의 비유가 “천국은 마치……와 같다(The kingdom of heaven is like)”는 말로 시작합니다. 셋째로,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의 소재는 생활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비유에는 울림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비유들이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나라구나!” 하고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비유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클레멘트(Clement, 150-215, 그리스), 오리겐(Origen, 185-253, 이집트),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알제리) 등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비유에 대한 ‘풍유적인(allegorical) 해석을 했던 전통이 있습니다. 최근에 비유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비유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은 비유의 본래 뜻을 해치기 때문에 삼가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비유풀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단 ‘신천지(新天地)’에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어느 정도 경계심이 풀린 것을 알면 적극적으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면서 ‘비유풀이’를 가르칩니다. 이 ‘비유풀이’가 바로 예수님의 비유를 ‘풍유적으로’ 해석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자기들 유리한대로 해석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The Parable of The Sower)’입니다. 오늘 제가 예수님의 많은 비유 중에 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선택한 이유는 이 비유가 다른 비유들을 이해하는 입문(入門)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 비유를 거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모든 비유를 이해하겠느냐(If you can’t understand the meaning of this parable, how will you understand all the other parables)?” (마가복음 4:13) 이 비유를 잘 듣고 잘 깨달으면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비유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세요. 빈센트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그린 ‘The Sower(씨뿌리는 사람)’라는 그림입니다. 고흐는 같은 이름으로 30개 이상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Sunflowers, 1889)’ 그림이나,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1889)’이라는 그림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고흐가 왜 성경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을 그렸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흐는 한 때 목사가 되려는 생각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목사였고, 할아버지가 목사였습니다. 고흐는 전도사 시절에 탄광촌을 찾아가서 가난하고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지만 그의 열정과는 달리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흐의 아버지는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다가 결국 허락했는데, 신학교 입학 시험에 떨어지는 바람에 목사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워낙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아 떨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한 이후부터 고흐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고흐가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린 것은 1888년이라고 하는데요. 그 때 고흐는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과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갱의 말에 의하면, 고흐는 ‘씨 뿌리는 사람’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보다는 상상력(imagination)을 사용해서 그렸습니다. 그리고 감정과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고흐만의 독특한 색깔을 사용했습니다. 하늘을 녹황색으로, 들판을 자주색으로, 태양을 밝은 노란 색으로 그려서 마치 ‘씨 뿌리는 사람’ 뒤에서 빛나는 후광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씨 뿌리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이도록 처리했습니다. 고흐는 생명의 씨앗을 밭에 뿌리고 거두는 농부의 삶을 거룩한 성직(聖職)으로 본 것입니다. 화가로서 고흐는 밀레(1814-1875)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요.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역시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한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는데 어떤 씨앗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흙이 없는 돌짝 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가시 덤불 속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좋은 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길 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들이 날아와서 금방 먹어버렸고, 흙이 얕은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은 겨우 싹이 났지만 흙이 없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햇볕에 말라 죽었습니다. 가시 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 때문에 자라지 못해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은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마치면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9절)” 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적인 이야기 끝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평범한 이야기같이 들리겠지만, 잘 생각해 보라. 이 이야기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제자들과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 비유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게 하였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비유로 주어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용서받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11-12절, 이사야 6:9-10에서 인용함)

이 말씀은 성경 말씀 중에서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비유를 통해서 듣는 사람들이 쉽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아듣지 못하도록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시고,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감추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도록 해 주는 사람들은 ‘열 두 제자들과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the twelve disciples and the others, 11, 12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감추게 하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은 ‘밖에 있는 사람들(outsiders, 11절)’입니다.

문제는 과연 이 ‘밖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 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날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서 예수님은 호수에 배를 띄우고 배에 앉아서 해변에 앉은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 중에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고,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도록 감추셨을까요?

예수님께서 ‘outsiders(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셨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outsiders’가 누구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마가복음 3:22에 있는 말씀인데요.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은(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who had arrived from Jerusalem)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 예수는 귀신들의 우두머리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 예수님은 이 때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렀다는 이 소문에 얼마나 강력했든지 예수님의 가족들 조차도 예수님이 정신이 나갔다고 믿을 정도였습니다. 지도자들은 여론에 민감하고, 사람들의 인기에 민감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은 갈릴리 지방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모두 듣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마비가 되어 못쓰는 사람을 고쳐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며 주위를 둘러보시고 사람들의 마음이 굳은 것을 아시고, 슬퍼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거기를 떠나 헤롯 당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가복음 3:2, 5, 6)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을 시기하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가버나움까지 와서 예수님이 귀신이 들렸다고 소문을 낸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파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는 항상 이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예루살렘에서 파견한 사람들은 그 때도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좋은 일도 나쁜 일이라고 보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일도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어가서 그런 일을 한 것이라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보고했습니다. 어차피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하여 증거를 수집할 목적으로 파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outsiders’입니다. ‘deliberately(일부러,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하여 근거 없는 나쁜 소문을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씨앗은 좋은 땅에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도, 돌짝 밭에도, 가시덤불에도 떨어집니다. 우리의 마음 밭의 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떨어집니다. 당장에 우리가 기대한 대로 열매를 거둘 수 없는 마음 밭들이 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마음 밭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outsiders’가 아니라면,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거기서 싹이 나고 뿌리가 나서 열매를 거두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나 아볼로나 주님께서 할 일을 맡기셔서 일하는 일꾼에 불과합니다. 나는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인 하나님은 중요합니다(I planted the seed in your hearts, and Apollos watered it, but it was God who made it grow. It’s not important who does the planting, or who does the watering. What’s important is that God makes the seed grow.” (고린도전서 3:5-7) 자신의 사명을 ‘씨 뿌리는 사람(the sower)’으로 인식한 바울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거두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생각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땅에 대한 비유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땅에 뿌리는 ‘The Sower(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세우는 나라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중단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들에게 의해 성장하고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씨를 뿌리는 일은 고흐의 그림에서 보았듯이 ‘성직(聖職)’입니다.

이 대화를 한번 들어 보세요. 릴리어스 호튼(Lillias Horton, 1883-1921): “마마, 우리 미국은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황후: “우리나라도 그렇게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가 될 수 있지 않겠어요?” 릴리어스 호튼: “마마, 그러 하오나 그 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황후: “그런 나라가 있다면 상감과 우리 백성들이 모두 가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와 그녀의 주치의로 있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이 1894년 크리스마스 때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호튼은 당시 왕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상투장이들과 함께 한 15년)’이란 책에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이 책은 2008년에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이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황후는 매우 총명해서 선교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비록 복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의학, 과학, 수학, 철학, 신학 등 서구의 발달된 문명에 대하여 매우 호감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 1895년 10월 8일에 일본 자객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합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기대와 아쉬움이 남습니다.

n Underwood, 1883-1921): “마마, 우리 미국은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황후: “우리나라도 그렇게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가 될 수 있지 않겠어요?” 릴리어스 호튼: “마마, 그러 하오나 그 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황후: “그런 나라가 있다면 상감과 우리 백성들이 모두 가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화 내용이 굉장합니다.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와 그녀의 주치의로 있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이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선교사들은 황후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했고, 황후도 조금씩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황후는 매우 총명해서 선교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비록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의학, 과학, 수학, 철학, 신학 등 서구의 발달된 문명에 대하여 매우 호감을 보였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은 이렇게 낯선 이국 땅에 와서 조선 사람들의 마음 밭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려고 헌신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던 명성황후는 그로부터 1년 후, 1895년 10월 8일에 일본 자객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합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이런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