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uthor: firsttae
9.18.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3)
주님이 내 삶에 들어오시면
If The Lord Comes Into My Life
요한복음 2:1-11
김태환 목사
1 삼 일째 되던 날에 갈릴리에 있는 가나라는 마을에서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결혼식에 참석하였고, 2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도 결혼식에 초대받았습니다. 3 포도주가 바닥났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이 집의 포도주가 다 떨어졌구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왜 저에게 이런 부탁을 하십니까? 저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5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그분이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여라” 하고 말해 두었습니다. 6 그 집에는 돌로 만든 물 항아리가 여섯 개 있었습니다. 이 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항아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각각 물 두세 동이를 담을 수 있는 항아리였습니다. 7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8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 이제 그것을 퍼다가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갖다 주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은 물을 떠서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9 하인이 떠다 준 물을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맛보았을 때, 그 물은 포도주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난 것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가져온 하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은 신랑을 불렀습니다. 10 그리고 그에게 “사람들은 항상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는 값싼 포도주를 내놓는 법인데, 당신은 지금까지 가장 좋은 포도주를 보관하고 계셨군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11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으며, 거기서 그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쉬운성경)
1 The next day there was a wedding celebration in the village of Cana in Galilee. Jesus’ mother was there, 2 and Jesus and his disciples were also invited to the celebration. 3 The wine supply ran out during the festivities, so Jesus’ mother told him, “They have no more wine.” 4 “Dear woman, that’s not our problem,” Jesus replied. “My time has not yet come.” 5 But his mother told the servants, “Do whatever he tells you.” 6 Standing nearby were six stone water jars, used for Jewish ceremonial washing. Each could hold twenty to thirty gallons. 7 Jesus told the servants, “Fill the jars with water.” When the jars had been filled, 8 he said, “Now dip some out, and take it to the master of ceremonies.” So the servants followed his instructions. 9 When the master of ceremonies tasted the water that was now wine, not knowing where it had come from (though, of course, the servants knew), he called the bridegroom over. 10 “A host always serves the best wine first,” he said. “Then, when everyone has had a lot to drink, he brings out the less expensive wine. But you have kept the best until now!” 11 This miraculous sign at Cana in Galilee was the first time Jesus revealed his glory. And his disciples believed in him. (New Living Translation)
여러분, ‘The Seven Signs in the Gospel of John(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사인들)’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지금이라도 여러분이 구글에서 ‘Seven Signs in the Gospel of John’을 찾아보면 이에 대한 많은 글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그만큼 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지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인’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σημείων(세메이온)’입니다. 이 말은 ‘a sign (typically miraculous), given especially to confirm, corroborate or authenticate(확인, 확증 혹은 인증을 위해 주어진 기적적인 사인)’라는 뜻입니다. 공관복음서를 읽어보면 ‘기적’ 혹은 ‘이적’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기적’이라는 말 대신 ‘세메이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이 말을 ‘표적’으로 번역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즉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인이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일곱개의 사인 중에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인’이 첫 번째 사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첫 번째 사인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 첫 번째 사인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사인(표적)이 나타난 것은 갈릴리 ‘가나(Cana)’에서 열렸던 한 결혼잔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가나까지 직선거리로는 약 8Km 떨어져 있지만 구불구불한 로컬 길로 가면 약 10Km 떨어져 있습니다. 걸어서 약 2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근동지방 사람들에게 결혼식은 특별한 것입니다. 그들은 잦은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결혼식만큼은 크고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성경에 결혼식에 대한 말씀이 여러 번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혼 잔치에는 지나가는 나그네도 갈 수 있습니다. 저도 그 지역에 단기선교를 갔다가 두 번 결혼식에 참석했던 기억이 납니다. 테이블 중앙으로 안내되어 귀빈 대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결혼잔치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남편 요셉은 일찍 죽은 것 같습니다. 마리아가 혼자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손님들의 상에 무슨 음식이 더 필요한 지 살피는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잔치 전체를 관장하는 ‘연회장(the master of the banquet)’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 잔치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난처한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단순히 곤란한 일이 아니라 때로 예상치 않았던 절망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존 플라벨(John Flavel)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인간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시아 지방에서 당한 환난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을 당해, 삶의 소망조차 없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서운 죽음의 위기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앞으로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8-10) 이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절망을 우리 삶에 불필요한 것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것들이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선명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얘야,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이 일을 어쩌면 좋겠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편 118:8-9이 오버랩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왕자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eople.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rinces).”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유사시에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더 낫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힘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더 낫다고 믿고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 아닙니까? 침착하게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해결책을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마리아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어머니,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저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Dear woman, that’s not our problem. My time has not yet come, 4절)” 이렇게 말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여자’에 해당하는 그리어는 ‘γύναι(gynai)’입니다. 성경 번역 전문가인 빌 마운스(Bill Mounce)는 ‘γύναι’라는 말은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 불가능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나마, 이 말을 ‘dear woman’이라고 번역한 New Living Translation이 제일 낫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여자(woman)’라는 말로 번역해서 마치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경멸하는 것 같은(pejorative)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많은 번역성경 중에 Weymouth New Testament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는데, 제일 잘 된 번역 같습니다. “(Dear Woman) Leave the matter in my hands, the time for me to act has not yet come(어머니, 이 문제는 저에게 맡겨 주세요. 제가 행동할 때가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결혼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이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자신이 행동할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 해석이 맞다는 것은 마리아의 다음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그분이 무슨 일을 시키든지 그대로 하여라’ 하고 말해 두었습니다.” (5절)
우리는 여기서 요한이 매우 의도적으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말씀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훈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문제입니다. 보세요. “그 집에는 돌로 만든 물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이 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항아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각각 물 두세 동이를 담을 수 있는 항아리였습니다.” (6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정결예식(Jewish ceremonial washing)’에 대한 말씀입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는 반드시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식사 전에 손도 반드시 씻어야 했습니다. 이런 용도로 물 항아리가 집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위생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몸을 정결하게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밖에서 ‘부정한(unclean)’것과 접촉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물로 씻어서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먹는 ‘코셔(kosher)’ 음식도 자신을 ‘부정한’ 음식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이 ‘정결한(clean)’ 것이고 무엇이 ‘부정한(unclean)’ 것인지 모두 율법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 잔칫집에 정결예식에 쓸 물 항아리가 모두 여섯 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숫자를 사용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섯’이라는 수는 불완전한 수입니다. ‘셋’ ‘일곱’ ‘아홉’ ‘열 둘’은 완전한 숫자입니다. 유대인의 정결예식에 따라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몸을 씻어서 깨끗하게 하고, ‘정결한 음식’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애쓰는 율법적인 노력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문제를 좀더 확장해서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절망할 일도 많고, 실망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법으로 정해 놓고 그 법을 지키려는 율법적인 노력을 해도, 우리가 그 법을 모두 지킬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법을 지켰다고 해서 우리의 속 사람(양심)까지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Don’t misunderstand why I have come. I did not come to abolish the law of Moses or the writings of the prophets. No, I came to accomplish their purpose, 마태복음 5:17)”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완전하게 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꿔 주셨습니다. 그것도 연회장이 이 포도주 맛을 보고 칭찬할 정도로 최상급의 포도주로 바꿔 주셨습니다. 물이 최상급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면 평범하고, 가치 없는 것이 변하여 특별한 것이 되고, 무의미한 것이 의미있는 것으로, 무익한 것이 유익한 것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 오스트리아)이라는 사람이 ‘죽음의 수용소에서(1946)’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Man’s Search for Meaning(의미를 찾는 인간)’입니다. 빅터 플랭클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 겪었던 경험을 가지고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주어진 상황 속에서 끝까지 삶의 의미를 붙들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Life is never made unbearable by circumstances, but only by lack of meaning and purpose(삶은 상황에 의해서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미와 목적의 결여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지난 설교에서 저는 보스턴에 꿈을 안고 찾아온 청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의 보스턴 생활이 순탄하기를 바라지만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빅터 프랭클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한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요.
그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We can discover this meaning in life in three different ways: (1) by creating a work or doing a deed; (2) by experiencing something or encountering someone; and (3) by the attitude we take toward unavoidable suffering (우리는 이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무엇을 창조하거나 행동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고난에 대처하는 태도를 결정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물로 최상급 포도주를 만드신 분, 평범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무의미한 것을 의미있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는 사인을 보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너희가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I have come in order that you might have life—life in all its fullness).” (요한복음 10:10, Good News Translation) 여기 사용된 ‘생명’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ζωὴ(zōē)’라는 말인데요. ‘both physical and spiritual life’를 모두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온전한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할까요? 저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실 때, 나의 삶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온전해지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가 일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혁진이라는 분이 가사를 썼는데, 참 가사를 잘 썼습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 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내. 힘으로 안될 때, 빈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 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이 찬양 가사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 여러분의 인생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9.4.22 교회소식




9.4.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2)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We Are Not Alone
요한복음 16:28-33
김태환 목사
28 내가 아버지를 떠나 세상에 왔으니,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29 그 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비유적인 말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30 우리가 이제서야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주님께 묻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습니다.” 31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제 너희가 믿느냐? 32 그러나 잘 들어라. 너희가 뿔뿔이 흩어질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이미 그 때가 되었다. 너희는 저마다 자기 집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버려 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33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쉬운성경)
28 Yes, I came from the Father into the world, and now I will leave the world and return to the Father.” 29 Then his disciples said, “At last you are speaking plainly and not figuratively. 30 Now we understand that you know everything, and there’s no need to question you. From this we believe that you came from God.” 31 Jesus asked, “Do you finally believe? 32 But the time is coming—indeed it’s here now—when you will be scattered, each one going his own way, leaving me alone. Yet I am not alone because the Father is with me. 33 I have told you all this so that you may have peace in me.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New Living Translation)
여러분,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 말은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 1909-2002)이 쓴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1950)’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책의 부제(subtitle)가 ‘A Study of the Changing American Character(변화하는 미국인의 성격에 대한 연구)’입니다. 리스먼은 이 책에서 미국인의 성격이 ‘전통지향형(tradition directed type)’에서 ‘내부지향형(inner directed type)’으로, 그리고 ‘외부지향형(other directed type)’으로 발전되어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외부지향적 성격은 또래집단이나 친구집단의 영향에 따라 행동하는 성격입니다. 이런 성격이 형성되는데 매스 미디어가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내면적인 고립감 때문에 힘들어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는 ‘외부지향형’ 성격 유형을 ‘고독한 군중’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이 1950년입니다. 그 때는 미국인의 성격이 ‘전통지향적’인 성격에서 ‘내부지향적’인 성격으로 옮겨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예언자적인 안목으로 장차 미국인들의 성격이 ‘외부지향적’인 성격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한 것입니다.
리스먼의 이 책이 얼마나 유명한지, 뉴욕 타임즈에서 문학,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분야를 총망라해서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 100권’을 선정했는데, 이 100권 중에 ‘고독한 군중’이 선정되었습니다. 정말 시대를 초월한 명저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회퍼의 ‘The Cost of Discipleship(제자직의 대가, 1937), 또 몇 주 전에 소개한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The Secular City, 1965)’ 같은 책들은 시대를 앞서 발간된 명저들입니다. 리스먼의 책도 그렇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은 리스먼의 책이 나온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인들의 삶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말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보스턴에 새로운 학생들이 모여오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전만은 못하지만, 보스턴 시내에 나가보면 거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모두들 꿈을 가지고 보스턴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저는 1986년에 캘리포니아 클레아몬트에서 석사를 마치고 보스턴 대학 박사과정에 들어왔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차를 가지고 가족들과 함께 대륙횡단을 해서 왔습니다. 오면서 그랜드 캐년도 구경하고, 나이아가라 폭포도 구경을 했지만, 보스턴 생활에 대한 불안감 때문인지 재미가 없었습니다. 95번에서 90번 매스 파이크를 타고 보스턴으로 들어오는데, 어찌나 마음이 불안했던지요. 보스턴에 거의 다와 갈 무렵에 맥도날드 휴게소에 들러 보스턴 쪽을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저의 경우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어서 그나마 보스턴 생활을 잘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보스턴에 공부하기 위해서 혼자 오는 학생들을 보면 한편으로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하기도 합니다. 기숙사에 가도 반겨주는 가족이 없으니 얼마나 허전하겠습니까? 그러다가 학교 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몸이 아프거나 하면 얼마나 집 생각이 많이 나고, 부모님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러니, 혼자 지내는 보스턴 생활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이 외로움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 눈에 띄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I am not alone)!”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때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곧 위험한 상황이 닥쳐오고 자기 제자들이 자기를 혼자 남겨 놓고 모두 떠날 것을 알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도)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Because my Father is with me).” (32절)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다윗이 쓴 시편 23편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때 그는 최악의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었습니다. ‘나의 원수들(my enemies)’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는 적으로부터 둘러싸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이런 상황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for you are with me)(시편 23:4)”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가 (나를) 믿느냐(Do you believe in Me, 31절)?”라고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떠나고, 그의 생명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그 때에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시는 분,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그 상황을 견뎌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한복음 14:16), 그 약속이 대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그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독특한 존재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한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과 나누는 ‘교제의 삶(the life of fellowship)’을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과 충분한 교제를 나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풍성한 열매(the abundant fruits)’를 맺습니다. 이 말은 삶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통하여 제자들이 그의 곁을 떠나고 홀로 남게 되는 극한의 외로움과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예수님과의 교제의 삶을 통하여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리스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외부(타인) 지향적인 사람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또 그들 자신의 생각이나 생활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삶만큼이나 흥미롭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바닷물을 마심으로써 목마름을 해소하려는 것보다 더 심한 동료 집단 속에서의 고독을 해소하려고 애쓰지 않게 되고, 그들 자신의 감정이나 열망에 집중하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If the other–directed people should discover how much needless work they do, discover that their own thoughts, and their own lives are quite as interesting as other people’s, that, indeed, they no more assuage their loneliness in a crowd of peers than one can assuage one’s thirst by drinking sea water, then we might expect them to become more attentive to their own feelings and aspirations).” 리스먼은 대중의 언어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면 ‘군중 속의 고독’을 극복할 수 있다고, 고독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은, 다시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세상’은 그리스어로 ‘κόσμος(kosmos)’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세상’도 ‘κόσμος’입니다. ‘κόσμος’라는 말은 ‘order(질서)’ ‘an orderly harmonious systematic universe’를 의미합니다. 우주나 자연이나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조화로운 질서’를 말합니다. 이 조화로운 세상에서 왜 우리는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질서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깨진 세상을 회복하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21:4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더 이상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1980년 1월 22일 아침, 저는 제 아내와 함께 결혼 앨범을 꺼내 사진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제가 졸업한 감리교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계시는 윤성범 학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였습니다. 제 결혼 주례를 서 주신 분이어서 방금 전에 결혼 사진을 보면서 그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저희 부부는 한참 동안 멍하게 있었습니다. 며칠 후에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분의 제자이신 교수님 한 분이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51-52, 55-58)
겨울이어서 강당 안이 싸늘했습니다. 그 때 저는 강당에 울려 퍼지는 성경 말씀이 생생하게 귀에 들어오는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제 가슴에 들어와서 콕콕 박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조롱하고, 죽음을 이기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그 말씀이, 그렇게 잘 이해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O death, where is your victory? O death, where is your sting? For sin is the sting that results in death, and the law gives sin its power. But thank God! He gives us victory over sin and death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New Living Translation)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밖의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이기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죽음을 해결하신 분이 더 이상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그를 믿는 사람들도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말은 ‘victory’가 아니라 ‘overcome’입니다. ‘극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세상에서 너희가 많은 환난을 당할 것이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33절)
예수님을 믿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아무 문제가 없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들을 ‘극복하도록(to overcome)’ 도와주십니다. 로버트 로저스(Robert Rogers)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My faith didn’t remove the pain, but it got me through the pain. Trusting God did not diminish the anguish, but it enabled me to endure and overcome it(나의 믿음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겪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게 하고 극복하도록 도와준다).”
보스턴에 꿈을 가지고 찾아오신 분들, 순탄하게 보스턴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 앞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학교 교수님과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공부하는 과정을 따라가기가 힘에 버거울 수도 있고, 때로는 경제적인 문제나 건강상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때로는 혼자 지내는 생활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이겨내겠습니까?
다윗은 우리 모두가 모델로 삼을 만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문제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에게도 우리처럼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니, 그는 우리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을 겪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 문제들을 해결했을까요? 그가 쓴 시편 16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않으리로다(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will not be shaken).” (8절) 여러분, 다윗이 항상 그의 앞에 모셨던 분! 다윗이 그가 내 오른쪽에 계신다고 했던 분, 그래서 내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고백했던 그분이 누구일까요?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