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22 주일설교

(창립 44주년 기념예배 메시지/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5)

팬데믹 이후의 우리 교회

Our Church for the Post-Pandemic Era

에베소서 3:7-10

김태환 목사

7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특별한 은혜로, 나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8 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그리스도인 중에 하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내게 능력과 재능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누리게 될 부요함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 복음의 부요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크고도 놀랍습니다. 9 이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만물을 창조하신 한 분, 곧 하나님 안에 숨겨진 진리에 관한 계획을 모든 사람에게 전할 임무도 맡기셨습니다. 10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쉬운성경)

7 By God’s grace and mighty power, I have been given the privilege of serving him by spreading this Good News. 8 Though I am the least deserving of all God’s people, he graciously gave me the privilege of telling the Gentiles about the endless treasures available to them in Christ. 9 I was chosen to explain to everyone this mysterious plan that God, the Creator of all things, had kept secret from the beginning. 10 God’s purpose in all this was to use the church to display his wisdom in its rich variety to all the unseen rulers and authorities in the heavenly places.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44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버드 스퀘어 근처 11 Garden Street에 있었던,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새벽 기도를 드리기 위해 교회 문을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교회 들어가는 입구의 있는 철책을 정성스럽게 쓰다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눈에 한국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인사를 하면서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김장호라는 사람인데, 이곳에 있는 케임브리지 한인교회를 세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아직도 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했습니다. 그 때가 2003년 6월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해 10월이 되어 창립 25주년 기념 예배를 준비하면서 그 분께 이번 창립기념주일에 초대하고 싶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분은 감사하지만 참석은 못할 것 같다고 하면서 대신 교인들에게 인사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25년 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케임브리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쓰신 여러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70년 전에 미국교회는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하였고 그 선교의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미국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미국 사회에 선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미국에 온 한인 학생, 직업인, 관리, 그리고 지역사회의 한인교포를 섬기며 서로 의지하고 돕고 살아가는 선교적인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5-6명의 신자가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최기일 교수, 하버드 대학 학생이었던 김용옥(도올) 박사, 강희천 박사(전 연세대학교 신학 대학장) 등의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여러분들이 오늘의 케임브리지한인교회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리를 좇는데 게으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따른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다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며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2003년 10월 13일, 그리스도의 종, 김요나단 (장호)

“교회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생각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그리고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안부를 전해주십시오(Greet also the church that meets at Priscilla and Aquila’s house).” (로마서 16:5, NIV)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the church that meets at their house)’라고 했잖아요? 이 말씀을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τὴν κατ’ οἶκον αὐτῶν ἐκκλησίαν’ 그들의 집(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이 예배하는 장소였고, ‘그 집에서 모이는 사람들’이 교회였음이 확실합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는 말은 ‘to call out, summon(불러내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교회입니다. 요즘에 자주 말하는 “교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우리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You are the Messiah, the Son of the living God).” (마태복음 16:16)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곧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름을 부으신 분(the anointed one)입니다.”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한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라는 곳이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약 50km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 분봉왕 빌립이 그 지역의 통치권을 준 로마 황제를 찬양하기 위해 세운 신전이 있었거든요?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다(You are Peter (which means `rock’),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마태복음 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위(rock)’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교회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셋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23). 이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몸은 ‘유기체(organism)’입니다. 몸의 각 부분들은 서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의존되어 있습니다. 한 부분이 기능을 상실하면 금방 몸에 이상이 생깁니다. 몸의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기관이 없습니다. 몸 속에 보이지 않는 많은 기관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만 기능을 잘못해도 건강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몸의 각 기관들은 서로 도와서 제 기능을 발휘해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팬데믹은 이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 서서히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 개인이나 한 국가가 아니라 세계를 한 공동체로 보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보는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의 결정 과정에 있어서 민주적인 의사 결정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행위는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으로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지금 러시아는 서방 세계로 가는 전기와 가스 공급을 끊어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적인 흐름을 거스르는 행위로 세계의 지탄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제는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 반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공동의 운명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무기 삼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구시대적인 발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팬데믹 이후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 교회는 더욱 더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로서 그 부르심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주님(the Lord)’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또 이 고백이 얼마나 위험한 고백이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지금 편안하게 ‘주님’이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주님’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퀴리오스(κυριος)’는, 교회가 박해받던 시대에 로마 황제 ‘네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네로는 자기가 ‘퀴리오스’로 불려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주님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그 시대를 향해 선언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한 사람들로 몰려 박해를 받은 이유입니다.

‘주님(Lord)’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권위(authority), ‘절제(control), ‘힘(power)’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합니까? 인정한다면 왜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의 삶을 절제하고 있습니까?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포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이름(a wonderful name)’이 되고 있고, ‘능력있는 이름(a powerful name)’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에서 크리스천의 냄새가 나야 비로소 우리의 정체성이 회복됩니다.

둘째로, 우리 교회는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예언자적 공동체(prophetic community)’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서 본문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9-10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만물을 창조하신 한 분, 곧 하나님 안에 숨겨진 진리에 관한 계획을 모든 사람에게 전할 임무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I was chosen to explain to everyone this mysterious plan that God, the Creator of all things, had kept secret from the beginning. God’s purpose in all this was to use the church to display his wisdom in its rich variety to all the unseen rulers and authorities in the heavenly places).”

엄청난 말씀 아닌가요? 교회가 ‘예언자적 공동체’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는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이 있듯이 교회에도 내려 놓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고 합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겨 놓아 삶을 단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예민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지극히 본질적인 것들만 남기고, 그 나머지 것들은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설교자는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처럼 소명의식을 가지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 정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설교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공동체’에 대하여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요한복음 13:34-35). 중요한 것은 교회는 우리끼리 모였다가 흩어지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메시지는 우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팬데믹 이후에 우리가 기대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넷째로,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서로 ‘연대감(solidarity)’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듯이, 교회는 정보를 독점하지 말고 다른 교회와 공유해야 합니다. 팬데믹 이후의 교회는 각자 알아서 생존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얻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교회 간에 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교파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함께 팬데믹 이후의 교회의 사명과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 연구 전문가인 해롤드 퍼시(Harold Perc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People who move toward the church do so for two major reasons: to learn about God and to find some guidance and direction for living(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두 가지 주요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삶의 지침과 방향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다른 교회들과 연대하여 팬데믹 이후 교회의 길을 찾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는 세상에 대한 ‘선한 영향력(good influence)’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 ‘influencer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교회는 세상에서 ‘good influencer’ 역할을 감당했었습니다. 저는 이 ‘good influencer’라는 말을 교회들이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 이 말을 유튜버들이나 연예인들, 정치인들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튜버 팔로우어가 100만이 되면 그 유튜버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집니다. BTS의 팬 클럽인 ‘아미(the A.R.M.Y)’도 사회적인 ‘influencer’들입니다. 도대체 ARMY가 전 세계에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의 팔로우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순히 BTS의 팬이 아니라 ‘fandom’ 현상을 일으키는 influencer들입니다. ARMY가 몇 명이냐 하는 질문에 “The ARMY is everywhere(이 세상 어디나 아미들이 있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good influencer’들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Facebook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1984-)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People influence people. Nothing influ-ences people more than a recommendation from a trusted friend. A trusted referral influences people more than the best broadcast message. (사람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믿을 수 있는 친구의 추천만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추천은 최고의 방송 메시지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저커버그는 비즈니스 영역에서의 영향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의 말이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회복하는 일들을 시작해야 합니다. 한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걸려도 이 방법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10.2.22 주일설교

(세계 성만찬 주일/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A New Commandments I Give to You

요한복음 13:34-35

김태환 목사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 (쉬운성경)

34 “A new commandment I give to you, that you love one another, even as I have loved you, that you also love one another. 35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love one another.”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Woman is weak, but mother is strong)”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세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햄릿(Hamlet)’에 나오는 “Frailty, thy name is woman(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이 말에서 연유된 말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두로(Tyre)’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지중해를 끼고 있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페니시아(Phoenicia)’지역에 있는 도시 국가입니다. ‘두로’는 그 위에 있는 ‘시돈(Sidon)’과 함께 페니시아의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였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무슨 이유로 그곳까지 가셨는지 그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로’에 가신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어느 집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지역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제 딸 아이에게 ‘더러운 나쁜 영(an unclean evil spirit)’이 들어갔습니다. 제발 불쌍한 제 어린 딸아이를 고쳐주십시오.” 그 여자는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그리스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자녀들을 먼저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여자는 이런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주여! 하지만 개들도 식탁 밑에 떨어진 부스러기는 주워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7:28)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떠났다(Good answer! Now go home, for the demon has left your daughter)”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이 여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여자다!” “이 여자는 어떤 창피와 굴욕을 당해도 자기 딸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서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두로’에 가셨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수없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중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희생된 어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집과 건물이 무너진 현장에서 구조대가 한 여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여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여자가 마치 절을 하듯 굽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장을 지휘하던 구조대장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 여자가 몸을 굽혀서 만든 공간에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그 순간 그 안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다! 아이가 있다!” 모든 구조대원들이 달려들어 무너진 집의 잔해를 치우고 아이를 구조했습니다. 아이는 담요에 싸여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구조대가 아이를 덮고 있던 담요를 벗기자 그 안에서 어머니의 휴대폰이 나왔습니다. 휴대폰을 켜자 화면에 다음과 같은 문자 메시지가 찍혀 있었습니다. “만약 살아 남는다면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렴!” 그 메시지를 본 구조대원들은 모두 흐느껴 울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2004년에 영국 문화협회가 세계 102개 비영어권 국가를 상대로 4만 명에게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 70개를 묻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가장 아름다운 단어 1위에 선정된 단어가 Mother(어머니)였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단어가 선정되었는지 궁금하시지요? 2위는 Passion(정열), 3위는 Smile(웃음), 4위는 Love(사랑), 5위는 Eternity (영원)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Father(아버지)라는 단어는 선정되지 않았습니다. 69위가 Gum (껌)이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라는 단어는 70위 안에 선정되지 않았습니다. 레바논이 낳은 위대한 시인이자 작가인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 1883-1931)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Mother is the most beautiful word on the lips of mankind(어머니라는 말은 인간이 입술로 말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어머니에게 돌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Never! Can a mother forget her nursing child? Can she feel no love for the child she has borne? But even if that were possible, I would not forget you(절대로 내가 너희를 잊는 일은 없다!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잊을 수 있겠느냐? 어머니가 자신의 몸으로 난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비록 그런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49:15) 여러분, 이 말씀이 이사야 49장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 힘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이 포로생활의 의미를 잘 알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포로생활이 하나님이 너희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너희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너희를 회복시켜 다시 고국 땅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사랑이 위대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생활은 참 험하고 고된 생활이었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광야 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모두는 내가 이집트 백성에게 한 일을 다 보았다. 그리고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어떻게 나에게 데리고 왔는지도 보았다(You have seen what I did to the Egyptians. You know how I carried you on eagles’ wings and brought you to myself).” (출애굽기 19:4)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한 말씀 더 볼까요? “야곱 백성아, 내가 너희를 창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너희를 만들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이름을 불렀으니 너희는 내 것이다. 너희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 너희가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며, 불 사이로 지날 때에도 타지 않을 것이고, 불꽃이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며 너희를 구원할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43:1-3)

우리는 아무리 이런 말씀을 성경에서 읽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그렇게 깊이 와 닿지 않습니다. 맞습니까? 네가 힘들어할 때 하나님께서 너를 업어서 날랐다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네가 깊은 물속을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별로 마음에 큰 감동이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이처럼 관심을 갖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마음에 큰 감동이 없습니다. 맞습니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새 계명’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as I have loved you)’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보다 이 질문을 먼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제자들 중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이 말은 요한이 제자들 중에 가장 많은 사랑의 감화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요한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좁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보아너게(son of thunder, 마가복음 3:17)’였을까요? 우리 말로 하면 ‘천둥의 아들’이 잖아요? 목소리를 컸고, 성격은 급했으며, 편협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옆에서 보고, 직접 경험함으로써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요한일서 1:1에 아주 감동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We saw him with our own eyes and touched him with our own hands(우리는 그를 우리 눈으로 보았고, 우리 손으로 직접 만져보았습니다).”

그 요한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See how very much our Father loves us, for he calls us his children, and that is what we are! But the people who belong to this world don’t recognize that we are God’s children because they don’t know him(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보십시오. 그는 우리를 그의 자녀라고 부르셨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1)

여러분, 이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삼아여러분, 이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신 데에는 요한이 미처 다 얘기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읽었던 풀턴 아워슬러(Fulton Oursler, 1893-1952, 미국)가 쓴 ‘The Greatest Story Ever Told(가장 위대한 이야기, 1948)’라는 소설 제목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데에는 한 위대한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화목제물(an atoning sacrifice, 요한일서 4:10)’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보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the propitiation for our sins’라고 합니다. 죄 때문에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드리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예수님의 사랑을 머리로 이해해야 하고, 가슴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크리스천의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들 아시지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랑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이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Dear friends, since God loved us this much, we must love each other).” (요한일서 4:11,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만큼(this much)’ 사랑하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가슴에 사랑이 식고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생길 때, 우리는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가서 사랑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새 계명(A New Commandment)’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구약 레위기 말씀을 보세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레위기 19:18) “외국인들을 너희 동포처럼 여기고, 너희 몸을 사랑하듯 그들을 사랑하여라.” (레위기 19:34)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새삼스럽게 ‘새 계명’이라고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는 법이기 때문에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했습니다. 속으로 내키지 않지만 법이니까 사랑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For Christ’s love compels us, 고린도후서 5:1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자기 속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새 계명’인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용하신 말은 ‘ἐντολὴν καινὴν (entolén kainēn)’이라는 말입니다. ‘ἐντολὴ’이라는 말은 율법, 계명 혹은 명령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ἐντολὴ(계명, 율법)’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모든 사람들이 다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제 설교를 듣고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말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는지 깨닫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든, 깨달아지지 않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해야 합니다.

제 페이스북(Facebook)에 올라온 말씀 카드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Love is not an option for a church(사랑은 교회에게 선택 사항(옵션)이 아닙니다.” 교회는 무조건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by this)’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나, 성경공부하는 것이나, 전도하는 것이나, 봉사하는 것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세계 성만찬 주일을 지키는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