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uthor: firsttae
11.20.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7)
감사를 아는 사람들
Those Who Know Being Grateful
누가복음 17:11-19
김태환 목사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12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열 사람의 문둥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멀리 서서 13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15 그들 가운데 하나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돌아와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16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17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냐?” 19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쉬운성경)
11 As Jesus continued on toward Jerusalem, he reached the border between Galilee and Samaria. 12 As he entered a village there, ten lepers stood at a distance, 13 crying out, “Jesus, Master, have mercy on us!” 14 He looked at them and said, “Go show yourselves to the priests.” And as they went, they were cleansed of their leprosy. 15 One of them, when he saw that he was healed, came back to Jesus, shouting, “Praise God!” 16 He fell to the ground at Jesus’ feet, thanking him for what he had done. This man was a Samaritan. 17 Jesus asked, “Didn’t I heal ten men? Where are the other nine? 18 Has no one returned to give glory to God except this foreigner?” 19 And Jesus said to the man, “Stand up and go. Your faith has healed you①.” / ①Or Your faith has saved you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감사의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보스턴에서 남쪽으로 약 40분 내려가면 ‘플리머스(Plimoth)’라는 도시에 도착하게 됩니다. 바로 그곳이 ‘추수감사절’이 시작된 ‘감사의 도시’입니다.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들(Puritans)’이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타고 왔던 배 ‘Mayflower’는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한 후 그들을 낯선 땅에 남겨 둔 채 떠났습니다.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절반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Wampanoag(왐파노액)’이라는 착한 인디언 부족을 만나 이들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플리머스’에 가면 이들이 도착했을 때 ‘1620’이라고 새겨 놓은 ‘플리머스 락(Plimoth Rock)’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필그림들의 은인 ‘왐파노액’ 추장 ‘마사소이트(Massasoit)’가 이들이 건너온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는 동상이 서 있습니다. 동상 밑에는 ‘Massasoit, Great Sachem of the Wampanoags Protector and Preserver of the Pilgrims(위대한 왐파노액 추장 마사소이트, 필그림들의 보호자이며 보존자)’라고 새긴 동판이 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착한 인디언들을 만난 덕분에 필그림들은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에게 옥수수 재배법을 배우고, 낯선 기후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해 농사가 잘 되어 그들을 맞이해 준 왐파노액 인디언들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들에 나간 사람들은 야생 칠면조를 잡아오고, 크랜베리 열매를 따와 소스를 만들고, 바다에 나간 사람들은 대구(cods)를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옥수수 빵을 구워 식탁을 차렸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영국 국교로부터 탄압을 받던 ‘청교도들(Puritans)’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낯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습니다. 이들의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고, 이들을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디언들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청교도들의 삶의 모토는 예배(worship)와 규율(discipline), 그리고, 근면(diligence)과 청빈(frugality)입니다. 청교도들의 예배는 보통 5시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찬송이나 다른 것으로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5시간 동안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은 은혜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목사의 설교가 2시간 정도 되었고, 설교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3시간 정도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5시간 후에도 그들은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사회적인 이슈들을 가지고 토의했다고 합니다. 예배를 통해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던 것입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읽은 누가복음 17장 본문 말씀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열 사람은 당시의 관습대로 집에서 쫓겨나고, 공동체로부터 쫓겨나서 사마리아 땅과 갈릴리 경계를 맴돌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이곳을 방문하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면서 결사적으로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제사장에게 검사를 받고 병이 나았다는 증서를 받아야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마을로 돌아가는 도중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몸이 깨끗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기쁨이라는 말로 이들의 심정을 모두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한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누가는 이스라엘 사람 아홉 명과 사마리아 사람 한 명을 선명하게 대조하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This man was a Samaritan).” (16절)
이 16절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열 명 중에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면 나머지 아홉 명은 분명 이스라엘 사람들(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자기들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늘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하면서 그들이 사는 땅을 밟지 않으려고 멀리 돌아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반전(反轉)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랑하던 아홉 명 중에는 병을 낫게 해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감사가 쉬운 것 같지만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전(反轉)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당연히 감사를 모를 것 같은 사마리아 사람이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동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서 감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무슨 의미가 있길래 성경에서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감사는 인간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합니다. 우리는 감사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자기 시대가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잊고 살고 있을 때, 이사야는 이렇게 그 시대를 한탄했습니다. “나귀나 소 같은 짐승도 제 주인을 알아보고, 자기를 보살피는 주인에게 고마워하는데,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르는구나!” (이사야 1:3)
자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올바로 사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성경에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But giving thanks is a sacrifice that truly honors me. If you keep to my path, I will reveal to you the salvation of God.” (시편 50:23) 무슨 말씀인가요? 감사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제사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배입니다. 어떤 화려한 예배보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의 말 한마디가 최고로 가치 있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나가는 ‘path(길)’이고,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감사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In ordinary life, we hardly realize that we receive a great deal more than we give, and that it is only with gratitude that life becomes rich(보통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베푸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고 있는다는 사실과, 감사할 때만이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Your faith has saved you).” (19절) 감사를 모르고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은 왜 나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모르니까 다음에 어려운 일이 생겨도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할 지 방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랐기 때문에 나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어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 영국)은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를 두고 “감사는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 배가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맞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는 감사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빌립보서 4:6)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말은 ‘감사함으로’라는 말입니다. NIV 성경은 이 말을 ‘with thanksgiv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감사함으로 기도하라는 말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When you pray) thank God for all he has done(너를 위해서 해 주신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렇게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에 응답이 있는 강력한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 삶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과 돌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있고 믿음생활이 풍성해집니다.
셋째로, 감사는 고통을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합니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하게 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Kōnosuke Matsushita, 1894-1989)’는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기업가입니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파산하면서 한순간에 집안이 몰락했습니다. 어린 마쓰시타도 다니던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어려운 살림을 돕기 위해 고향을 떠나 오사카에 있는 자전거 점포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던 어린 마쓰시타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스물 세 살이 되던 해에 마쓰시타는 100엔을 투자해 회사를 설립합니다. 이 회사가 훗날 내셔널(National), 파나소닉(Panasonic)으로 알려진, 연 매출 5조 엔을 달성했던 ‘마쓰시타 전기(Matsushita Electronics)’입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세계적인 기업가가 된 마쓰시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회장님, 큰 성공을 하게 되었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자의 질문에 마쓰시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 은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은혜, 둘째는 몸이 허약한 은혜, 셋째는 못 배운 은혜입니다. 저는 그 은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깜짝 놀란 기자가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네? 이것들이 하나님이 준 은혜라고요? 그건 모두 불행한 일이 아닌가요?” 마쓰시타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가난 덕분에 일찍부터 성실과 근면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몸이 허약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몸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퇴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고 배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마쓰시타는 직원들에게 사람들이 ‘마쓰시타 전기’는 무엇을 만드는 회사입니까?”라고 물으면 “마쓰시타 전기는 인간을 만드는 회사이지만, 전기제품도 만듭니다” 이렇게 말하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수시로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가 있다면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감옥이라도 감사를 하면 수도원이 될 수 있다”라며 직원들에게 긍정적인 사고를 가질 것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가난과 허약함과 못 배운 것은 불행과 절망과 실패의 조건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환경에서도 감사를 아는 사람들은 가난을 성실함으로, 허약함을 건강함으로, 매순간마다 못 배운 것을 배움의 시간으로 바꿉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을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 들어오는 축복의 통로로 삼습니다. 시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말씀(율례)을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친히 일러주신 그 말씀은, 천만 금은보다 더 귀합니다(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words. Your words are more valuable to me than millions in gold and silver).” (시편 119:71-72)
끝으로,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라는 시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에게는 외로움도 눈물도 아픔도, 절망도, 가시도, 슬픔도, 연약함도, 가난도,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8).
<날 구원하신 주 감사>
(1절)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론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2절)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해처럼 높으신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3절) 길가의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사랑의 가정 일용할 양식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4절) 내게 건강 주심 감사 또한 연약함 감사
햇빛을 주심도 감사 구름 또한 감사해
땀 흘리는 수고 감사 저녁의 안식 감사
부요도 가난도 감사 모든 것 다 감사해








11.6.22 교회소식




11.6.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6)
예수님이 보여 주신 본
An Example Jesus Has Set For Us
요한복음 13:4-5, 12-17
김태환 목사
4 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5 예수님께서는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두르신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주기 시작하셨습니다…….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뒤에, 옷을 입고 다시 자리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내가 방금 전에 너희에게 행한 일이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 이해하겠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너희 말이 맞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14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16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쉬운성경)
4 So he got up from the table, took off his robe, wrapped a towel around his waist, 5 and poured water into a basin. Then he began to wash the disciples’ feet, drying them with the towel he had around him…… 12 After washing their feet, he put on his robe again and sat down and asked, “Do you understand what I was doing? 13 You call me `Teacher’ and `Lord,’ and you are right, because that’s what I am. 14 And since I, your Lord and Teac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ought to wash each other’s feet. 15 I have given you an example to follow. Do as I have done to you. 16 I tell you the truth, slaves are not greater than their master. Nor is the messenger more important than the one who sends the message. 17 Now that you know these things, God will bless you for doing them. (New Living Translation)
‘충격요법(Shock Therapy)’이란 말이 있습니다. 환자에게 급격한 충격을 줌으로써 치료 효과를 얻는 방법을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는 말씀을 읽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충격요법’을 쓰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섬김의 삶’이 그냥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충격요법’을 쓰신 것입니다.
‘공관복음(共觀福音, the Synoptic Gospel)’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실 때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이 말씀이 나옵니다.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예수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것입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예수님의 모습은 완전한 종(servant)의 모습이었습니다.
참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닦아주실 때까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로 발을 씻기도록 내 맡겼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주님, (어찌)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려고 하십니까?…..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6, 8절)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중에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7, 8절) 이 말씀을 NIV 성경에서는 “Unless I wash you, you have no part with me”라고 번역했습니다. NLT 성경에는 “Unless I wash you, you won’t belong to me”라고 번역했습니다. 둘 다 훌륭한 번역입니다.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f I don’t wash you, you don’t really belong to me(내가 너의 말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정말 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다).” Good News Translation은 이 말씀을 “If I do not wash your feet, you will no longer be my disciple(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않으면 저는 더 이상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이 일이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an example of service)’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섬김의 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여 주신 본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섬김’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그만큼 중요한 가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10:45 말씀과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주기 위하여 왔다(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오셨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섬김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섬김을 받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하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성 대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이 본성을 이기고 ‘참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의 삶에는 5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섬김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의 삶은 억지로,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Who is more important,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f course. But not here! For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섬기는 사람과 식탁에 앉은 사람 중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이냐? 당연히 식탁에 앉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사람으로 있다).” (누가복음 22:27) 식당의 종업원이 손님들에게 응대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바로 이 모습이 우리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은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Robert K. Greenleaf, 1904-1990)가 처음으로 주장한 리더십 스타일입니다. 그가 1977년에 ‘Servant Leadership’(종의 리더십)’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 ‘A Journey Into the Nature of Legitimate Power and Greatness(정당한 권력과 위대함의 본질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servant-leader is servant first, it begins with a natural feeling that one wants to serve, to serve first, as opposed to, wanting power, influence, fame, or wealth(섬기는 리더십은 섬기는 사람(servant)이 먼저인 리더십이다. 섬기는 리더십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은 자연스러운 감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힘과 영향력, 명성과 부를 원하는 리더십과는 정 반대이다).” 그린리프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에게서 섬김의 리더십을 발견하고 이 책을 쓴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 속에 정당한 권력과 위대함의 길이 들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기는 리더십을 닮고 싶은 사람은 먼저 섬기는 리더십의 본질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섬김이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꾸준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섬김에는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말로만, 입으로만 말하는 섬김이 아니라 자신의 귀한 생명을 내 놓을 만큼 진정성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주기 위하여 왔다(마가복음 10:45)”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 주신 것은 섬김의 삶의 연장선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섬김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섬김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섬김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섬기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14절)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의 선생이야! 그러니까 너희가 나의 발을 씻겨줘야 해!” “나는 너희의 주님이야! 그러니까 너희가 나의 발을 닦아줘야 해!” 예수님은 당연히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했면 어떻게 제자들의 발을 닦아줄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He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used to his own advantage, but made himself nothing,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 being made in human likeness(그는 하나님과의 동등함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하지 않고 종의 본성을 가지셨고 인간과 같이 되어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셨다).” (NIV, 빌립보서 2:6-7) 이 구절을 신학자들은 ‘The Humility of Jesus(예수님의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삶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겸손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섬김은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삶의 비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공에 대한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10:43-44)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진정으로 높아지는 삶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맞다는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오히려 반대로 그렇게 출세하려고 애쓰더니 마침내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지 않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리더십은 ‘self-seeking(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이기적인)’, ‘self-serving(자신을 섬기는)’, and ‘domineering(지배하는)’ 스타일의 리더십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리더십입니다. 이런 리더십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런 리더십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잠깐 동안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은 참 인간의 길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길과 다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힘으로,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길이 아니라,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셨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 길로 들어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Elisabeth Johanna Shepping(1880-1934, 독일계 미국인)을 아시지요? 우리 말 이름은 ‘서서평(徐舒平)’입니다. 미혼모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어머니가 미국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9살이 되어서 어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옵니다. 어머니로부터 냉대를 받은 쉐핑은 가까스로 간호학교에 들어가 간호사가 됩니다. 그리고 간호사로 일하는 틈틈이 뉴욕에 있는 New York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합니다. 그리고 1912년 32살의 나이에 간호 선교사로 한국에 오게 됩니다. 외국인이면서도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치마,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검정 고무신을 신으며, 쉐핑은 한국인으로 살았습니다. 조선에서 쉐핑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야 조금 알려진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쉐핑에 대하여 이런 글을 썼습니다. “쉐핑은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사람들을 유익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쉐핑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한국에게 주었습니다. 그녀의 침대 머리 맡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성공이 아니라 섬김)” 1930년경에 미국 장로교회는 전 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쉐핑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고 합니다. 쉐핑은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성공(SUCCESS)’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섬김(SETVICE)’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쉐핑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참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섯째로, 섬김의 삶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f you know these things, you are blessed if you do them(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 (17절) 이 축복은 물질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감사로 충만한 축복입니다. 섬김의 삶은 누가 알아주는 삶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충격 요법’은 효과가 있었을까요? 여러분, 베드로가 쓴 편지 중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돌보십시오. 기쁨으로 그들을 돌보며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섬기며, 돈을 생각하고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 들지 말며, 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십시오(but being examples to the flock).” (베드로전서 5:2-3) 예수님 말씀 그대로 아닙니까?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절대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의 지도자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유혹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 때마다 베드로를 바로잡아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충격요법’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삶의 ‘본(an example)’을 보여 주시면서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1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는데, 주님의 종인 우리가 당연히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섬김의 삶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보다 더 높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면 여러분은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니까!” 이렇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지?”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지?” “왜 나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