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8.22 주일설교

(대강절 넷째 주일 메시지)

Love Came Down at Christmas

요한복음 3:14-18

김태환 목사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16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18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쉬운성경)

14 And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15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16 “For God loved the world so much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17 God sent his Son into the world not to judge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through him. 18 “There is no judgment against anyone who believes in him. But anyone who does not believe in him has already been judged for not believing in God’s one and only Son.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사랑의 촛불을 켰습니다. ‘사랑의 촛불을 켠다’는 것은 일종의 ‘은유적인 행위(metaphorical action)’입니다. 깜깜한 곳에 촛불을 켜면 주변이 밝아지듯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에 참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들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Christina Georgina Rossetti(1830-1894)라는 영국의 시인이 ‘Love Came Down at Christmas(사랑은 크리스마스에 내려왔네)’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캐럴로 부르고 있습니다.

Love came down at Christmas, 사랑은 크리스마스에 내려왔네
Love all lovely, Love divine; 모두가 사랑스러운 사랑, 신성한 사랑
Love was born at Christmas; 사랑은 크리스마스에 태어났네
star and angels gave the sign. 별과 천사들이 그 표적을 보였네

Worship we the Godhead, 우리는 삼위(三位)의 하나님을 예배하네
Love incarnate, Love divine; 사람의 몸을 입은 사랑, 신성한 사랑
worship we our Jesus, 우리는 예수님을 예배하네
but wherewith for sacred sign? 하지만 무엇으로 성스러운 표적을 (예배할까?)

Love shall be our token, 사랑은 우리의 징표이며
Love shall be yours and love be mine, 사랑은 당신의 것이며 나의 것
Love to God and to all men, 사랑을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Love for plea and gift and sign 간청과 선물과 표적을 위한 사랑을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멀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광야는 삶에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지 않는 곳입니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자라는 식물은 키가 작고 가시가 난 엉겅퀴 같은 것들입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합니다. 인간이 가진 기술과 지식과 경험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인간성의 바닥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였던 모세와 아론을 향해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오신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이었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否定)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신속하게 감사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함으로(with thanksgiving)’라는 말은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사에 대한 꺾이지 않는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과 계획이 들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때에도 감사의 마음을 계속 유지하면 그 때 내 삶의 주인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빌립보서 4:6 말씀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할 때 갑자기 어디서 ‘불뱀들(poisonous snakes)’이 나타났습니다. ‘불뱀들’은 불평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물었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갔습니다. 다급한 모세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민수기 21:9)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모두 치유된 것입니다. ‘구리뱀’에서 무슨 치유의 능력이 나온 것이 아니라,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산다는 말을 믿고 그대로 행했던 믿음이 이 사람들을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14절) ‘The Son of Man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높이 들린다(lifted up)’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린다(lifted up on the Cross)’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나를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Good News)’, 그리스 말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입니다. 아주 쉬운 ‘구원의 길’이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고,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학자들도,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누구나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저 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6절) 이 말씀은 개역성경으로 읽어야 제 맛이 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세상’은 ‘코스모스(κόσμος)’라는 말입니다. ‘우주(universe)’라는 뜻도 있고, ‘질서’라는 뜻도 있고, ‘the whole of creation(모든 피조물들)’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말 속에 저와 여러분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을 때 세상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Live clean, innocent lives as children of God, shining like bright lights in a world full of crooked and perverse people(구부러지고 삐뚤어진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빛들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십시오).” (빌립보서 2:15) 2,000년 전에 이 말씀을 쓴 바울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세상’에는 죄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 속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깨끗한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로 가득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perverse people’은 단순히 ‘삐뚤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들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는 사람들(로마서 1:26-27)’이라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400년 동안 이런 사람들과 소통을 끊고 침묵하셨겠습니까? 누가 이 400년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 기간’이라고 했는데,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 끝에 죄로 물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즉흥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구원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세상에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사람들만 살고 있었다면 독생자가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들을 미워하면 안 되고, 피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사도행전 10:15)”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가 속되다고 피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이유로 세상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사랑이 내려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깨끗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의 별처럼 빛을 비추라고 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드러내라(로마서 12:2)”고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가끔 기도할 때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본심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다음 세대’ 걱정하기 전에 ‘지금 세대’인 여러분 자신들을 먼저 걱정하십시오. ‘지금 세대’가 잘하면 ‘다음 세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음은 ‘지금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pass on)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가상(假想)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universe)를 의미하는 ‘버스(verse)’의 합성어입니다. ‘확장 가상 세계’ 혹은 ‘가상 우주’라고 번역합니다. 현실 세계를 디지털 기반의 가상 세계로 확장해 가상 공간에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메타버스’가 우리의 코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변화될 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 쪽으로 발전되어 나갈 수도 있고, 우리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지금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피하지 말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사명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막중(莫重)해졌습니다. 지금의 목회 형식과 교회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가지고는 변화된 세상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메시지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지난 ‘리뉴(ReNEW)’에 좋은 세미나가 많이 열렸습니다. 저는 김연준 목사님의 세미나에 들어갔습니다. 세미나의 내용은 새로운 시대에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전할 메시지는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메시지의 선포가 아니라 메시지에 대한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세미나에서 제시한 것이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었습니다. 새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스토리텔러들(storytellers)’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내가 복음의 능력으로 고난의 시간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각자의 ‘스토리’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시대는 일방적인 교회의 메시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쓴 ‘스토리(삶의 메시지)’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구체적인 사랑(concrete love)’입니다. 하나님은 ‘His only begotten Son (독생자, NASB)’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진 ‘신적인 특권들(divine privileges)’을 모두 포기하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humility of Jesus(예수님의 겸손)’ 혹은 ‘humiliation of Jesus(예수님의 굴욕)’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빌립보서 2:5-8).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이야기 배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비하’와 ‘창피’와 ‘굴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베들레헴에 방이 없었다는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누가복음 2:7). 여관에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잠을 자게 된 마리아의 요셉은 그날 밤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manger)에 뉘었습니다. 똑 같은 사실을 요한은 “그분이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1:11)”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탄생 이야기에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1-12)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그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인 것을 보여 주는 ‘징조(sign)’였습니다. 이 ‘징조’를 보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서 그 밤에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영접하는 사람,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누구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요한복음 1:12)

Christina Georgina Rossetti의 시 구절 중에 ‘사랑은 우리가 가진 징표(Love shall be our token)’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던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사랑의 ‘징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토큰(token)’이라는 말에 ‘징표’라는 뜻이 있지만, 우리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 같은 것들을 ‘토큰’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내려옴으로써 우리는 주머니 속에 ‘토큰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Rossetti는 ‘Love for plea and gift and sign(간청과 선물과 사인을 위한 사랑)’ 이렇게 그의 시를 마칩니다. 우리 주변에 사랑을 호소하고 간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사랑의 토큰을 나누어 줘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가 사랑의 선물을 줘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사랑의 토큰들을 나누어 주십시오. 우리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의 토큰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는 사인들입니다. 이 모든 일은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내려옴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12.4.22 주일설교

(대강절 둘째 주일 메시지)

길을 내는 삶

A Life Preparing The Way For The Lord

마가복음 1:1-8

김태환 목사

1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2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네 앞에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3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펴라.’”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5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6 요한은 낙타 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습니다. 7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나보다 더 강하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그분 앞에 꿇어앉아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부족하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쉬운 성경) (쉬운성경)

1 This is the Good News about Jesus the Messiah, the Son of God. It began 2 just as the prophet Isaiah had written: “Look, I am sending my messenger ahead of you, and he will prepare your way①. / ①Mal 3.1 3 He is a voice shout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for the LORD’s coming! Clear the road for him!’①” / ①Isa 40.3 (Greek version) 4 This messenger was John the Baptist. He was in the wilderness and preached that people should be baptized to show that they had repented of their sins and turned to God to be forgiven. 5 All of Judea, including all the people of Jerusalem, went out to see and hear John. And when they confessed their sins, he baptized them in the Jordan River. 6 His clothes were woven from coarse camel hair, and he wore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For food he ate locusts and wild honey. 7 John announced: “Someone is coming soon who is greater than I am – so much greater that I’m not even worthy to stoop down like a slave and untie the straps of his sandals. 8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대강절 둘째 주일에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400년 동안 침묵을 지키시던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 희망의 촛불을 켜 주시고, 평화의 촛불을 켜 주심으로 자기 백성들과 소통(疏通)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밤, 하늘에서 들려온 천사들의 음성을 기억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lory to God in highest heaven, and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쁨을 받으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또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는 이 말씀이 “Praise God in heaven! Peace on earth to everyone who pleases God(하늘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땅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무렵에 시므온(Sime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실 때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5) 또 같은 시기에 살았던 안나(Anna)와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습니다(누가복음 2:36-37). 바로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those who were looking for the redemption of Jerusalem, 누가복음 2:38)’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good news for all the people, 누가복음 2:10)’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은 ‘라오스(λαος)’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태복음 28:19)”고 명령하신 말씀에 나오는 ‘민족(ἔθνη)’과 같은 뜻을 가진 말입니다. 같은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언어와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 주어졌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옵니다. 이 의는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We are made right with God by placing our faith in Jesus Christ. And this is true for everyone who believes, no matter who we are).” (로마서 3:22) 복음은 그가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조슈아 리브만(Joshua L. Liebman, 1907-1948)이라는 유대인 랍비가 쓴 ‘Peace of Mind(마음의 평화)’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청년이 어느 날 한 현자(賢者)를 만났습니다. 그 현자는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청년은 “첫째는 건강, 둘째는 사랑, 셋째는 재물, 넷째는 아름다움, 다섯째는 재능, 여섯째는 권력, 일곱째는 명예라고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나열했습니다. 그 청년이 나열한 목록을 본 현자는 “아주 훌륭한 목록이구만! 중요한 것부터 잘 나열을 했어! 하지만 자네는 아주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라고 하면서 그 청년이 만든 목록을 펜으로 벅 긁어버리고 거기다 ‘마음의 평화(peace of mind)’라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This is the gift that God reserves for his special protégés, talent and health he gives to many. Wealth is commonplace, fame not rare. But peace of mind he bestows charily(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능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네. 재물을 주신 사람들도 많이 있고, 명예를 주신 사람들도 적지 않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비하심으로 마음의 평안을 주신다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청년이 조수아 리브만이었습니다. 그는 이 깨달음을 가지고 ‘마음의 평안’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듯이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의 내면 세계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마음의 평화’가 없으면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조수아 리브만은 그 책에서 이런 유대인들의 기도 하나를 소개합니다. “O God, Lord of the universe, heap worldly gifts at the feet of foolish people. Give me the gift of the untroubled mind(온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 세상적인 선물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발 아래 쌓아 주시고, 저에게는 마음의 평화를 선물로 주십시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평화’를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 구약성경 이사야 9:6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이사야는 기원전 8세기경 유다 왕국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계산하면 2,800년경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 속에 메시아 탄생에 대한 말씀과 메시아가 통치하시는 시대에 대한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특히 주목을 받는 예언자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가 ‘한 아기(a child)’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에게 다섯개의 이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름 중에 ‘평화의 왕(Prince of Peace)’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사르 샬롬(Shar Shalom)’입니다. 그 뜻은 ‘the one who removes all peace-disturbing factors and secures the peace(평화를 방해하는 모든 원인들을 제거하고 평화를 지켜주는 분)’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사야가 예언한 ‘한 아기’의 탄생이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오래 전에 한 예언자가 가지고 있던 꿈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가사를 보세요. “(1절)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2절)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여러분,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하나의 주제(theme)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과 신약은 두 권이 아니라 한 권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일정한 패턴으로 주어집니다. 오래 전에 미리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사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조국의 멸망을 예언했던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선포한 예언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땅을 사고 매매증서를 항아리에 넣어서 보관하라고 했습니다.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땅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비록 지금은 조국이 멸망하고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돌아와 무너진 조국을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유다의 역사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사르 샬롬’ ‘평화의 왕’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주시고,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샬롬’을 주실 분은 ‘사르 샬롬’이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말의 표현이 참 좋지 않습니까? 예수님 ‘밖에서’는 하나님의 ‘샬롬’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샬롬’은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멀리 보이는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네가 오늘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하지만 너무 늦었다. 평화의 길이 네 눈에 보이지 않는구나 (How I wish today that you of all people would understand the way to peace. But now it is too late, and peace is hidden from your eyes)” (누가복음 19:42)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안타깝게 말씀하신 ‘평화의 길(the way to peace)’은 ‘사르 샬롬’이신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의 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남긴다. 곧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복음 14:27)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계속 하나님의 ‘샬롬’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의 성경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안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에베소서 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평안을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안이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강절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이 ‘사순절에 드리는 기도’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기도하며 금식하며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그리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시간입니다(It is a time to be with you, Lord, in a special way, a time to pray, to fast, and thus to follow you on your way to Jerusalem).” 나우웬은 사순절이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을 따르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대강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을 반성하면서 ‘특별한 방식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대강절에 생각해야 하는 ‘특별한 방식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내 뒤에 나보다 훨씬 강한 분이 오십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께 돌리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샬롬’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기는커녕 하루 하루 살기에 급급합니다. 웬 일인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했던 말 그대로입니다. “For all the others care only for themselves and not for what matters to Jesus Christ(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21) 우리가 때때로 교회에서 필요한 일에 봉사하고 헌신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좀 생소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의 삶을 반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속적인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Martin Luther King, Jr.(1929-1968) 목사님을 잘 아시지요? 그는 조지아 아틀란타에서 태어나서 1968년, 39살의 젊은 나이에 테네시 멤피스의 한 호텔 발코니에서 제시 잭슨(Jesse L. Jackson)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저격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는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로서 그의 삶은 평범했습니다. 그런데, 1955년 3월에 평범했던 그의 삶을 바꾸어 놓은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알라바마의 몽고메리에서 15살 된 클로뎃 코빈(Claudette Colvin)이라는 당시 임신 중이었던 흑인 여학생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위원회가 고민하는 동안에 몽고메리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로자 팍스(Rosa Parks)라는 42살 된 흑인 여자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그 유명한 Montgomery Bus Boycott 운동으로 번지게 됩니다.

African-American Community의 문제를 다루는 한 작은 위원회의 멤버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클로뎃 코빈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 운동을 이끄는 주요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간디(Mahatma Gandhi)에게서 배운 비폭력 저항 운동을 그의 투쟁 방식으로 채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줄 곳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성경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40:4-5 말씀이었습니다. “골짜기들을 메우고, 산과 언덕들을 낮춰라. 굽은 길들을 곧게 펴고, 험한 땅들을 평야로 만들라.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고 모든 사람이 함께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Fill in the valleys, and level the mountains and hills. Straighten the curves, and smooth out the rough places. Then the glory of the Lord will be revealed, and all people will see it together).”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예수님을 위해 ‘특별한 방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삶’이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그렇게 ‘길을 내는 삶’을 살았기에 흑인들의 인권이 향상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지속적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생각하고 있었고,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특별한 방식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고요. 하나님은 때가 되어 그를 부르셨고,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르 샬롬’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God blesses those who work for peace, for they will be called the children of God).” (마태복음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