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uthor: firsttae
1.15.23 주일설교
(새해 메시지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마태복음 6:31-33
김태환 목사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 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개역개정)
31 “Do not be anxious then, saying, ‘What shall we eat?’ or ‘What shall we drink?’ or ‘With what shall we clothe ourselves?’ 32 For all these things the Gentiles eagerly seek; for your heavenly Father knows that you need all these things. 33 But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to you.”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존스(Jones)라는 사람이 죽어서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천국의 여기저기를 안내해 주면서 한 거대한 창고(warehouse)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창고 안에는 수많은 상자들이 있었는데, 상자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존스는 자기 이름이 쓰여 있는 상자가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다행하기도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상자를 열어보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구해보지 않았던 수많은 복들이 가득 차 있는 것들 보게 되었습니다. 그 복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구하기만 했더라면 모두 받을 수 있는 복들이었는데,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브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이라는 사람이 쓴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 2,000)’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 ‘Breaking Through to the Blessed Life(축복받은 삶으로 나가기)’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습니다. 이 책은 출판된 지 3개월만에 410만부가 팔릴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USA Today, New York Times 등에서 베스트셀러 1위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브루스 윌킨슨은 Dallas Theological Seminary와 Western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한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축복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역대상 4:10에 나오는 ‘야베스’라는 사람의 짧은 기도입니다. “하나님 내게 복에 복을 더하시고 지경에 지경을 넓히시사 모든 환난 걱정 근심 염려에서 벗어나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주의 손으로 도우시사 구하는 것마다 응답 받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이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야베스의 기도’ 앞에 유다의 아들들의 이름이 나오고 그 아들들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족보가 엉망입니다. 아버지 이름이 나오고 아들들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입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야베스’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부모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베스’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역대상 4장에 나오는 유다의 아들들의 족보는 이방인으로서 유다 지파에 들어온 사람들의 족보가 틀림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이방인으로 유다 지파에 편입된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문제는 ‘야베스’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기도가 짧기 때문에 내용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를 축복하셔서 내가 사는 땅을 넓혀 주시고, 모든 환난이나 걱정 근심, 염려에 벗어나게 해 주시고 제가 구하는 것마다 응답 받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윌킨슨은 이런 기도를 해도 된다고 합니다. 윌킨슨은 독자들에게 더 많은 꿈을 꾸라고 합니다. 심지어 사업을 확장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일 야베스가 월 스트리트에서 일을 했더라면 그는 아마도 “하나님 제가 투자한 주식의 가치를 올려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해석하면서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향력’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문제는 윌킨슨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독자들은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를 물질적인 축복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사업의 확장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야베스의 기도’가 사람들의 ‘욕망’과 딱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노래로 만들어지고, 액자로 만들어져 벽에 걸렸습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워십 댄스로 만들어지고,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심지어 이 ‘야베스의 기도’를 아침 저녁으로 외우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윌킨슨은 독자들에게 처음 한 달 동안 ‘야베스의 기도’를 반복하도록 권장하면서 이것을 평생 서약으로 삼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태복음 6:31-33, 본문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야베스의 기도’와는 아주 다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ASB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for you(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 오늘 생각해야 할 중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정체성(identity)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궁극적인 관심(the ultimate concern)’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정체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마실 물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한 동네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습니다. 우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옆 마을과 전쟁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제자들도 먹을 것이 필요하고, 입을 옷이 필요하고, 마실 물이 필요합니다.
삶에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자연히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gentiles)’이 구하는 것이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들의 방식대로 성경을 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삶에 필요한 것들이 그냥 주어지는 것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져야 합니까? 그렇다면 왜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가 일을 해야 합니까? 그냥 하루 종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글을 한번 보세요. “저도 승리의 간증을 하고 싶어요. 귀하의 책을 11월에 구입한 이후 지금 네 번째 읽고 있습니다. 나는 야베스의 기도를 부지런히 했고, 온 종일 그 기도만 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실직 상태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정말로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내게 임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정말 부탁드립니다.” 윌킨슨의 책을 읽고 어느 독자가 윌킨슨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나도 그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제이시 페니(JC Penney, 1875-1971)라는 사람을 아시지요?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은 James Cash Penney였습니다. 이 사람은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 정육점을 운영하다가 호텔 주방장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가게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 호텔에 고기를 납품하기 위해서 뇌물을 주는 것이 관례였던 때였습니다. 가까스로 사업 실패의 아픔에서 깨어난 페니는 조그만 잡화점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가게 앞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성경 말씀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크게 써 붙였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이 가게를 와 본 사람들은 페니의 친절함과 정직함에 감동해서 계속 가게를 이용했고, 가게가 잘 되었습니다. 이 가게가 미국 전국에 1,600여개 점포를 가진 ‘JC Penney’ 백화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환영을 받습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찾고, 그런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이익과 필요를 먼저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합니다. 나의 생각과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펼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둘째로,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의(His righteousness)’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길래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구해야 합니까? ‘구한다’라는 말은 그리스어 ‘ζητέω(zéteó)’라는 말인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이 말을 ‘seek’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열심히 찾는다는 뜻입니다. 진주 장사가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값진 진주를 찾습니다. 그러다가 값진 진주를 찾으면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마태복음 13:45-46).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ζητέω(zéteó)’입니다. 영어로 ‘seek’입니다. 단순히 찾는다는 뜻이 아니라 ‘to search out by any method(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일들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그것들을 열심히, 끝까지, 모든 힘을 기울여서, 비록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라(aim at or strive after)’는 말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열심히 찾고 구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세상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의 의’를 그렇게 열심히 찾고 구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일보다 이 일을 먼저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톰 라이트(N.T. Wright)라는 영국의 성서학자가 있습니다. 요즘 그의 책들이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그의 신학적인 경향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입니다. 하지만, 그의 신학은 앞뒤가 막힌 폐쇄적인 신학이 아닙니다. “No Compromise(타협은 없다)!”를 외치면서 자기들끼리만 안으로 움츠러드는 폐쇄적인 신학은 우리 앞에 놓은 새 시대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타협을 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시대의 변화와 이슈들에 대하여 책임 있게 응답(應答)하는 열린 신학이 아니면 이 시대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톰 라이트의 신학은 보수적인 신학이긴 하지만 그의 신학은 열린 신학입니다. 그가 쓴 책 중에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한국어로는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로 번역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의 문제는 성경을 구속사적으로만 보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반복적으로 외칠 뿐이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구원에만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자신의 삶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당신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제한시키지 말아야 한다. 구원을 주신 ‘목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 삶이다.”
톰 라이트의 말이 맞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에만 초점을 맞췄지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는 사람도 없었고, 듣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이 성취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것을 찾아서 나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대화하고, 각자가 발견한 것을 서로 공유(共有)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의 화두(話頭)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구하고 있는지,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가지고 밤샘 토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대적인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크리스천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왜 ‘야베스의 기도’에 사람들은 열광할까요? 왜 윌킨슨은 ‘야베스의 기도’를 자신의 욕망을 성취할 도구로 삼고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야망에 불을 붙였을까요? 왜 윌킨슨과 그의 책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들은 ‘야베스의 기도’를 무리하게 해석해서 성숙한 기도로 포장하고 있을까요? ‘야베스의 기도’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소원 성취를 위한 기도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야베스의 기도’를 날마다 외울 필요가 없고, ‘야베스의 기도’를 평생 서약으로 삼을 이유가 없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매우 서툴고, 투박하고, 성숙하지 못한 기도입니다. 신학자들은 ‘야베스’가 ‘겐 족속(the Kenites)’일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겐 족속’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족속인데 ‘미디안’에 속한 작은 부족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겐 족속’이었습니다(사사기 1:16). 사사 시대에 겐 족속은 유다 남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야베스’는 어쩌다가 ‘유다 지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밝혀진 그의 족보도 없습니다. 그의 배경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올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의 기도가 이기적이고 잘못된 기도였다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제한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기도가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의 성공을 위해서 기도했고, 나의 평안함을 위해 기도했고, 나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고, 경제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기도의 수준은 ‘야베스의 기도’의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이방인의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성숙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또 우리 교회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1.1.23 교회소식




1.1.2023 주일설교
(새해 예배 메시지1)
우리는 예수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That Isn’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에베소서 4:17, 20-24
김태환 목사
17 이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강하게 권고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20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21 나는 여러분이 진정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또 진리 되신 그분 안에 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22 옛 모습을 벗어 버리십시오. 옛 사람은 한없는 욕망으로 점점 더 눈이 어두워져 더 악하고 더러운 모습이 될 뿐입니다. 23 여러분은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24 이제는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모습처럼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쉬운성경)
17 With the Lord’s authority I say this: Live no longer as the Gentiles do, for they are hopelessly con-fused…….20 But that isn’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21 Since you have heard about Jesus and have learned the truth that comes from him, 22 throw off your old sinful nature and your former way of life, which is corrupted by lust and deception. 23 Instead,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24 Put on your new nature, created to be like God—truly righteous and holy. (New Living Translation)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1월을 영어로 ‘재뉴어리(January)’라고 하는데요. 이 말이 ‘야누스(Janus)’라는 로마의 신의 이름에서 왔다고 합니다. ‘야누스’ 신은 처음과 끝, 시작과 변화의 신으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뒤를 돌아보는 얼굴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앞을 바라보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심정을 잘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은 새해를 어떻게 살고 싶으신가요?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때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을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냥 “열심히 믿음생활 해야지!” “열심히 은혜를 사모하고 기도해야지!” 이런 결심만 가지고는 부족한, 절박한 시점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고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시대적인 요청 속에 지금 우리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지금까지의 믿음생활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서 본문 말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Live no longer as the Gentiles do, for they are hopelessly confused, 17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현대어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닫고 깜깜한 어둠에 갇혀 지냅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기준(standard)’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진리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시대입니다. 모두 각자가 믿는 대로 사는, 진리에 대한 주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사는 시대입니다. 여러분, ‘정경(正經)’이란 말을 아시는가요? 많은 성경 문서들 중에서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골라서 ‘정경’으로 정했습니다. ‘정경’을 영어로 ‘Canon’이라고 하는데요. 이 말에 ‘principle’ ‘rule’ ‘law’ ‘norm’ ‘measure’ ‘standard’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교회는 ‘정경’을 결정할 때 66권의 성경이 충분한 삶의 ‘기준’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성경을 ‘기준’으로 삼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디모데후서 3:16 말씀을 아시지요?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제자 디모데에게 썼을 때 디모데는 한창 때의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의 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때입니다. 좋은 쪽으로 가능성이 열려 있기도 하지만 나쁜 쪽으로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청년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디모데에게 인생의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멘토(mentor)’가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그 때 바울이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Run from anything that stimulates youthful lusts. Instead, pursue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Enjoy the companionship of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청년 시기의 욕망을 자극하는 어떤 것도 피해야 합니다. 그대신 의로운 삶과 믿음, 사랑, 그리고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십시오).” (디모데후서 2:22) 저는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 이런 식으로 청년의 시기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고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날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닫으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최상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We are created according to God’ image)”는 창세기 1:26-27 말씀의 뜻입니다. 그런데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서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마음을 닫고,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 23:1 말씀이 바로 이런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고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목자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 우리 모두가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이며, 이런 삶에는 참 만족이 주어진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지난 날의 우리의 삶을 ‘Your former way of life which is corrupted by lust and deception(정욕과 속임수로 타락한 이전의 삶의 방식)’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정욕(lust)’이라는 말을 나쁜 의미로 생각합니다. ‘정욕(情欲)’에 빠져 있는 사람은 형편없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정욕’에 빠져 살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괜찮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정욕’이라는 말은 자기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욕이나 식욕, 욕심을 잘 조절해야 하는데, 조절하지 못하고 본능 대로 행동하는 것을 ‘lust(정욕)’이라고 합니다. 2,000년 전에 바울이 비판했던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삶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정욕’에 이끌려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결심과 마음의 결단이 있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살면 안 되기 때문에 포기한 것들이 있었습니까? 희생한 것들이 있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내 생각을 바꾸고 내 계획을 바꾼 것들이 있었습니까? 아니잖아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생각 대로 살아가면서 주일이 되면 피곤한 얼굴로, 습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새해에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23-24절을 보세요.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Put on your new nature created to be like God—truly righteous and holy(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태도를 바꾸시도록 허락하십시오. 하나님을 닮도록 새롭게 창조된 본성을 옷 입으십시오).”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마음과 태도를 바꾸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닮도록 새로운 본성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결심만 가지고는 결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주체(主體, subject)가 누구인지 보십시오. ‘성령(the Spirit)’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새롭게 만드는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성령께서 당신의 마음과 태도를 새롭게 하시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새로운 삶의 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새로워지는 길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훌륭한 제자의 삶을 가르쳐 준 Oswald Chambers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moral miracle of redemption is that God can put a new nature into me through which I can live a totally new life(구원의 도덕적인 기적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나에게 새로운 본성을 넣어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그러면, 왜 우리는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로마서 12:2) 크리스천의 삶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 뜻을 분별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새 사람’입니다. 어떻게 ‘새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하나님께서 당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도록 허락하라).” 우리는 새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부지런히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저의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저의 설교의 키워드는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이 말은 교회가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책임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난 3년 동안 경험했던 팬데믹은 알게 모르게 많은 분야에서 우 리의 의식구조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팬데믹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는 것들 이 바뀐 것입니다. 이제 세계는 팬데믹 이전의 세계와 팬데믹 이후의 세계로 바뀔 것이라고 예측했던 전문가들의 예측이 하나, 둘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의 말을 들어 볼까요? “We can choose what the world looks like when the pandemic is over(우리는 펜데믹이 끝났을 때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지 금 우리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전문가들의 예측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회사들, 마켓들이 얼마나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요지부동입니다. 바뀐 것이 없습니다. 온라인 예배가 활성화되고, 교회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 예배 후에 있는 친교시간이 간소하게 된 것 외에 본질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은 변화를 수용하고 있는데, 교회는 변화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를 시켜 유다 왕국을 침략하여 망하게 하고, 유다 백성들이 70년 동안 바빌로니아에 포로생활을 하게 한 후에, 자기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려는 하나님의 뜻을 읽지 못했던 당시의 유다 백성들이 예언자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고, 조국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바빌로니아에 저항했던 역사와 흡사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판을 새로 짜고 계십니다. 그런데, 교회들은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읽지 못하고 팬데믹 이전의 교회를 그리워하며 그 때로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감리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도 크고 교인수도 많습니다. 그 목사님은 감리교 안에서 설교를 잘하시는 목사님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저는 그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에 재미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서 교회에 나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에서 시대적인 전환기에 대한 문제 의식이나 위기 의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팬데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일방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던 시대를 끝내고, 이제는 개인 개인의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향해서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 시대를 열고 계십니다. 보세요. “여러분 자신이들이 모든 사람들이 읽고 있는 우리의 편지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사역의 결과로 나타난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2-4) 2,000년 전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썼던 이 편지 구절이 오늘 우리 마음에 확 다가오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개인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여러분의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아, 이 사람의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는구나!”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자기가 나가는 교회의 규모와 크기를 자랑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새 시대는 크리스천 개인들이 얼마나 진실한 크리스천의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을 키워드로 삼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요한복음 4:23-24) 예수님은 당시의 성전 예배를 통해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한복음 4:21).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잘 몰랐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존의 교회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기르는 일을 해야 합니다. 길러서 세상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강의실에서, 실험실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훌륭하게 살아가도록 양육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결정을 해야 할 때 크리스천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섬기는 사람으로, 자신이 희생해야 할 자리에서 망서리지 않는 사람으로, 책임져야 할 자리에서 도망가지 않는 사람으로 양육하는 일을 교회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판을 짜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주어진 사명과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위기(危機, crisis)의 때입니다.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을 목사가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교인들이 이 인식을 함께 공유해야 합니다. 무늬만 크리스천인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던 때는 지났습니다. 우리는 지금 절박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을 올바로 분별하고 응답하지 않으면 우리는 철저하게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을 주장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