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uthor: firsttae
6.19.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3)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I Will Give You Rest
마태복음 11:28-30
김태환 목사
28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볍다.” (쉬운성경)
28 Then Jesus said, “Come to me, all of you who are weary and carry heavy burdens, and I will give you rest. 29 Take my yoke upon you. Let me teach you, because I am humble and gentle at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30 For my yoke is easy to bear, and the burden I give you is light.”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마태복음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구약성경 이사야 55장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사람아, 다 와서 마셔라.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마셔라. 포도주와 우유를 마시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마셔라. 어찌하여 너희는 진정한 음식이 못 되는 것을 위해 돈을 쓰느냐? 어찌하여 만족시켜 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내게 와서 귀를 기울여라.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 (이사야 55:1-3a)
이 말씀은 당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메시지를 그의 신실한 종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이사야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 없었거든요? “값없이 와서 마시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 “너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할 음식을 위해서 애쓰느냐?”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이 말씀을 다시 듣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예수님을 입을 통하여 다시 들음으로써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오늘날까지도 옛 언약을 읽을 때 수건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이 수건이 아직까지 벗겨지지 않고 있는 것은,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14) 이 말씀이 NKJV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Until this day the same veil remains unlifted in the reading of the Old Testament, because the veil is taken away in Christ.” 여러분, 얼굴에 베일을 쓰고 사물을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물을 분명하게 볼 수 없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바로 구약성경을 읽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치 얼굴에 베일을 쓰고 사물을 보는 것처럼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어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베일을 벗겨 주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구약성경을 읽을 때 답답하던 것이 분명하게 이해가 된다는 것 아닙니까? 구약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읽어야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내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수고하고’라는 말과 ‘무거운 짐을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한번 이른 아침에 센트럴 스퀘어에 나가 보시지요. 무표정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탑니다. 그리고 오후 늦게까지 일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내일 또 그런 일을 반복합니다. 내일만이 아니고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피곤하고, 지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이사야서에 있는 “너희 목마른 사람아, 다 와서 마셔라.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마셔라.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마셔라” 이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과 겹쳐 들리지(overlap) 않습니까?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When He saw the multitudes, He was moved with compassion for them, because they were weary and scattered, like sheep having no shepherd, NKJV).” (마태복음 9:36) 예수님의 눈에 비친 당시의 사람들은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목자가 없는 양같이 보였습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들의 길을 인도하는 목자가 없으니까 그들은 흩어져 제 각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줄 목자가 없어서 사람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보시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마가복음 6:34)”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쳐 줄 지도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맞습니까?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휴가나 여행이 아닙니다. 잠시 일을 쉬는 것이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지치고 피곤한 삶이 반복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삶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사는 사람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난과 배고픔을 이길 수 있고, 고난(고생)도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이라는 오스트리아의 신경 심리학자가 주창한 치료법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그는 그 때의 생존 경험을 살려 ‘Man’s Search For Meaning(1946, 한국어 번역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주장한 것이 ‘로고테라피’입니다. ‘로고데라피’는 ‘logos’라는 말과 ‘therapy(치료법)’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logos’는 말, 의미 등으로 번역되는 말이지만, 신학(theology)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로고테라피’를 ‘의미요법”이라고 번역합니다.
빅터 프랭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Life is never made unbearable by circumstances, but only by lack of meaning and purpose(인간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은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미와 목적을 상실했을 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말을 더 들어볼까요? “The meaning of life is to give life meaning(삶의 의미란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다).” “For the meaning of life differs from man to man, from day to day, and from hour to hour. What matters, therefore, is not the meaning of life in general but rather the specific meaning of a person’s life at a given moment(삶의 의미란 사람마다,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에 한 개인이 느끼는 삶의 특별한 의미이다).”
우리의 삶의 무게가 힘에 버겁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I will give you rest)”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휴가를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29절에 다시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refreshment(원기 회복)’를 주고, ‘renewal(새로워짐)’ 시켜주고, ‘blessed quiet(복된 평온함)’을 주고, ‘tranquility(평온함)’를 주고, 삶의 ‘satisfaction(만족)’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쉼’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2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멍에(yoke)’는 예수님의 ‘교훈(teachings)’을 의미합니다. 예전에 소에게 일을 시킬 때 소의 어깨에 ‘멍에’를 메웠습니다. 멍에를 메울 때 두 마리 소에게 같이 멍에를 메웠습니다. 멍에를 메면 두 마리 소는 어쩔 수 없이 서로 보조(步調)를 맞춰서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라”고 하신 것은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지내면서 나에게 보조를 맞추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시지요? “예수께서는 열 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습니다(Then he appointed twelve of them and called them his apostles. They were to accompany him).” (마가복음 3:14, 공동번역) ‘accompany’라는 말이 ‘go along with~(누구와 함께 가다)’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므로, ‘나의 멍에를 메고’라는 말씀은 “나와 함께 지내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과 나란히 걸으면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인격을 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에게 배웁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과 다른 랍비들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번 이 말씀을 보세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따라하지는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올리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짐을 지기 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23:2-4)
이것이 예수님의 눈에 비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영어 표현에 ‘take advantage of~’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해서 이익을 취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지도자들이 다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랍비들의 교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것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authority)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1-22)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것은 처음 듣는 새 교훈이다(What is this? A new teaching with authority, 마가복음 1:27)” 하면서 깜짝 놀랐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이용해서 ‘take advantage’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서 뭔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예수님은 그에게 온 사람들에게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참 인간’이 되도록 도우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을 아시지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나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For I came to seek and save those who are lost).” (누가복음 19:9-10) 예수님 안에서 삭개오는 그의 잃어버린 삶을 되찾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예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는 증거는 이후 그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재산을 모으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안에서 재산을 축적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의 조건이나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우리의 삶의 환경은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Logotherapy(의미요법)’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우리를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우리를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서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돈을 쓰고 애를 쓰느냐?”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고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찬양 가사가 생각납니다. ‘O Come, All You Unfaithful(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오세요)’라는 찬양입니다. “오세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요. 연약하고 불안한 사람들도 오세요. 와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세요. 오세요. 열매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은요. 기도에 지친 사람들도 오세요. 와서 당신의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세요. 그리스도가 나셨어요. 그리스도가 나셨어요. 그리스도가 나셨어요. 당신을 위해.” 이런 가사의 찬양입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O Come, All You Unfaithful(Korean subtitle)’ Link https://bit.ly/3QsSnka








6.12.22 교회소식




612.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2)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Christians Think Differently
마가복음 10:42-45
김태환 목사
4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44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쉬운성경)
42 So Jesus called them together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in this world lord it over their people, and officials flaunt their authority over those under them. 43 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44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among you must be the slave of everyone else. 45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New Living Translation)
신약성경의 핵심적인 말씀 시리즈 두 번째 설교는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이런 제목의 설교입니다. 본문 말씀은 마가복음 10:42-45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to serve others)’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에게 ‘섬김의 삶’은 단순히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H. Maslow, 1908-1970)라는 미국의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Maslow’s Hierarchy of Needs(매슬로의 욕구 단계설)’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위스콘신 대학을 졸업한후 콜롬비아 대학의 연구원을 거쳐 위스콘신, 브루클린, 보스턴에 있는 브랜다이스 등의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습니다. 그가 ‘Maslow’s Hierarchy of Needs’를 처음 내 놓은 것이 1943년입니다. 그리고 1954년에 자기 주장을 약간 수정하여 지금의 이론을 완성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론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가 ‘단계설’이란 말을 쓴 것은 욕구가 아래에서부터 위로 단계적으로 생겨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제일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인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입니다. 먹을 음식이 있어야 하고, 옷이 있어야 하고, 잘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단계의 욕구는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 Needs)’입니다. 그 다음이 ‘애정과 소속의 욕구(Love and Belongingness Needs)’입니다. 친구와 가족, 그리고 자기가 소속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욕구입니다. 그 다음이 ‘자기 존중의 욕구(Self-esteem Needs)’ 단계입니다. 인정받고 싶어하고, 성공하고 싶어하고, 지위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권력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 단계입니다. 맨 위에 있는 단계는 ‘자아 실현의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명예에 대한 욕구가 생깁니다. 결론적으로 매슬로는 권력에 대한 욕구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로 본 것입니다.
성경에 ‘고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민수기 16장). 그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에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고라’에게 모세와 그의 형 아론에 대하여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세와 아론과 같은 레위지파 사람인데, 왜 이 두 사람만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지도자로 군림하는가?” 이것이 ‘고라’의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지내던 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고라’의 행위를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라’를 심판하셨습니다. 고라의 반란으로 무려 14,950명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라’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도자가 되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기 힘을 과시하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하고, 힘을 가지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이 다르고 힘을 행사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1901-1978)라는 미국의 인류학자가 있습니다. 인류학(anthropology)의 초석을 놓은 분으로,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는 ‘The Theory of Imprinting(각인 이론)’으로 유명합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Children must be taught how to think, not what to think(어린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하는 지를 배워서는 안 되고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지를 배운다면 그 아이는 개성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지만, 어떻게 생각해야는 지를 배운다면 그 아이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가렛 미드의 이 말이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적인 관점(the biblical point of view)’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이사야 55:8-9) 하나님의 생각은 성경적인 관점을 배우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처음 들은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누가복음 24:11) 또 누가는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은 아테네 시민들이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비웃었습니다(When they heard Paul speak abou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some laughed in contempt, 사도행전 17:32”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세상적인 관점(a worldly point of view)’에서 보면 십자가는 ‘foolish thing(어리석은 것)’에 불과합니다. 논리적으로 도무지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성경의 관점’을 이해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the power of God)’입니다.
삶의 모든 이슈에 대하여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제가 다윗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강한 인상을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7:9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나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항상 함께 있었고, 너를 위해 네 원수들을 물리쳐 주었다. 나는 너를 이 땅에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만큼 유명하게 해 줄 것이다(Now I will make your name as famous as anyone who has ever lived on the earth).” 사람에게는 유명하게 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도 유명하게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하게 되는 과정과 방법이 다릅니다. 경쟁자를 이기고 그 자리에 앉음으로써 유명해지는 것은 크리스천의 방식이 아닙니다. 보스턴 지역에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대통령 상을 비롯해서 상이란 상은 다 받았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왜 저 사람이 상을 다 받느냐고 보스턴 한인사회를 잘 아는 어떤 분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분이 하는 말이 “말도 마십시오. 그 사람은 자기와 경쟁 대상이 있으면 청와대에 그 사람을 모함하는 투서를 합니다.” 정말 이런 식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가 너를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사무엘하 7:9)”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은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정말 우연히 일어났던 사건 하나가 다윗의 생애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과의 싸움으로 다윗은 단숨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좋은 대리석을 찾아 다니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 이탈리아)는 우연히 밭에 뒹굴고 있던 커다란 대리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리석은 너무 커서 쓸모가 없다고 거들떠보지 않던 것을 미켈란젤로가 발견한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을 가지고 적장 골리앗을 노려보고 있는 ‘다윗 상’을 조각했습니다. 지금 이 ‘다윗 상’이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미술관에 있다고 하는데요. 사람들은 그 뛰어난 조각상을 보면서 성경에 나오는 다윗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다윗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은 세월이 가도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리더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것도 크리스천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42절)”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천 중에서도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야 하고, 훌륭한 정치인도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크리스천에게는 지도자가 되는 방법도 달라야 하고, 지도자에게 주어진 힘을 행사하는 방법도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3-44절) 여러분, 정말 이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servant)’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높여주실까요?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섬김을 받으려고만 했지 ‘종’이 되어 섬겨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높여주시는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섬김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고,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삶’을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섬김의 삶’에 대한 어떤 것도 좋은 예(example)가 될 수 없습니다. ‘섬김의 삶’은 이런 것이라고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삶’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삶’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매슬로의 ‘인간의 욕구의 단계설’에서 본 것처럼, 누구나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데,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선언(宣言)하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새해가 되어 교회에서 제일 연세가 많으신 집사님 부부를 1월 한 달 동안 안내위원으로 주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 부부가 안내위원을 하면서 내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남편 집사님이 저에게 와서 막 따졌습니다. “이 교회에는 우리 말고 집사가 없습니까? 어떻게 나이 많은 우리 부부를 1월 달에 안내위원을 시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아니지 않나요? 예수님께서 섬기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삶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장면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요한복음 13장에 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 ‘섬김의 삶’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발을 닦아주고, 스승이 제자의 발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이 말씀을 한번 들어 보세요. Dieter F. Uchtdorf(1940, 독일)란 사람의 말인데요. “As we lose ourselves in the service of others, we discover our own lives and our own happiness(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 때, 우리 자신의 삶과 행복을 발견한다).” 맞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내가 이 사람들의 스승인데?” 이런 생각을 하셨다면 제자들의 발을 닦아줄 수 있었을까요? ‘섬김의 삶’은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를 시중드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누가복음 22:27) 섬김의 삶은 이런 것입니다.
셋째로, ‘섬기는 삶’에는 자기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내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I came to give my life as a ransom for many(45절)”고 하셨습니다. 자기 희생 없이 자기가 ‘섬기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때 기독교로 개종하려고까지 했던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Service without humiliation is selfishness and egotism(굴욕이 없는 섬김은 이기주의이고 자기 아집에 불과하다).” 진정한 섬김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섬김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삶’에는 굴욕이 따르고,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ransom(대속물, 몸값)’으로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희생이 있었기에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섬김의 삶’의 ‘화룡점정(火龍點睛)’은 자기 희생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섬김의 삶’은 온전한 섬김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among you must be the slave of everyone else.” (43-44절)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씀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정말 이 말씀대로 살면 누구든지 리더가 될 수 있고,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이제 우리의 ‘섬김의 삶’을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