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5)

값싼 은혜는 이제 그만!

No More Cheap Grace

누가복음 9:23-27

김태환 목사

23 예수님께서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24 자기의 생명을 건지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건질 것이다. 25 만일 이 세상을 모두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신의 영광과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한 천사의 영광으로 올 때,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27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은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이다.” (쉬운성경)

23 Then he said to the crowd, “If any of you wants to be my follower,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 take up your cross daily, and follow me. 24 If you try to hang on to your life, you will lose it. But if you give up your life for my sake, you will save it. 25 And what do you benefit if you gain the whole world but are yourself lost or destroyed? 26 If anyone is ashamed of me and my message, the Son of Man will be ashamed of that person when he returns in his glory and in the glory of the Father and the holy angels. 27 I tell you the truth, some standing here right now will not die before they see the Kingdom of God.”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도(discipleship)’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방식을 제자도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자도’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강단에서 ‘값싼 은혜’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죄와 단절하지 못하고 계속 죄를 짓는 삶을 살면서도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고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자’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 끔찍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처음부터 읽어보면 이 사건이 사전에 기획된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외 없이 이 사건에도 율법학자들이 등장하고,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율법학자(teacher of religious law)’는 율법을 두루마리에 필사(筆寫, copy)하는 전문가를 말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서기관(書記官, scrib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고대에는 지금과 같은 인쇄술이 없었기 때문에 일일이 손으로 써서 사본(寫本)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할 때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 이 일을 했습니다. 말씀을 필사하다보니 이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데 늘 앞장을 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말씀에 정통해도 인간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쓴 편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It doesn’t matter if you are circumcised or not. All that matters is that you are a new person).” (갈라디아서 6:15,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바울은 믿음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간음(姦淫, adultery)’은 율법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붙잡힌 여자의 사건이 기획된 사건처럼 보이는 이유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8:6). 이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이런 여자는 율법에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치라.” 신기하게도 예수님의 이 말씀 한마디에 사람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슬그머니 자리를 떴습니다. 이 여자를 끌고 왔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도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I don’t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요한복음 8:11)

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죽음의 현장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시잖아요? ‘은혜(grace)’라는 말은 ‘God’s undeserved favor(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단순히 그 여자가 불쌍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이 여자에게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아 영적으로 죽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It is only by God’s grace that you have been saved).” (5절) 또 이 말씀을 조금 더 읽어가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God saved you by his grace when you believed. It is a gift from God).” (8절)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또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제 전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받은 사람 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이 희미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제자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제 이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하는 결단이 없는 것입니다. ‘결단(決斷)’이라는 말은 ‘결단할 결’자와 ‘끊을 단’자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후에, 예전의 삶과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마음의 결단을 내린 분이 계십니까?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제자도’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제자도는 다른 것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 말인데요. 대표작 본회퍼는 천재 신학자였습니다. 21살에 베를린 대학에서 ‘신자의 공동생활’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때 그를 지도한 사람은 신학계의 거장 칼 바르트(Karl Barth)였습니다. 그리고 24살에 ‘존재와 행위’라는 논문으로 교수 자격논문이 통과되어 교수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음 글은 그의 대표작 ‘The Cost of Discipleship(제자직의 대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 말로는 ‘나를 따르라’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The life of discipleship can only be maintained so long as nothing is allowed to come between Christ and ourselves—neither the law, nor personal piety, nor even the world. The disciple always looks only to his master, never to Christ and the law, Christ and religion, Christ and the world. He avoids all such notions like the plague. Only by following Christ alone can he preserve a single eye (제자도는 율법도, 개인의 경건도, 세상도, 그 밖에 어떤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도록 허용되지 않아야 유지될 수 있다. 제자는 항상 그의 주인만 바라보지 그리스도와 율법, 그리스도와 종교, 그리스도와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마치 전염병을 피하듯이 그런 개념을 피한다. 제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눈을 지켜 나갈 수 있다).”

여러분, 본회퍼가 말한 ‘하나의 눈을 보존한다 혹은 지킨다(preserve a single eye)’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에게 두 개의 눈이 있는데요. 이 두 개의 눈을 가지고 각각 다른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두 개의 눈을 가지고 하나의 대상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회퍼가 말하는 ‘a single eye’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의 눈을 가지고 하나의 대상 즉 주님만 바라보는 것’ 이것이 ‘제자직’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대부분의 번역 성경들은 이 말을 “You must deny yourselves”라고 번역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이 말씀이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너희들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야 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에 대하여 “아니요(No)”라고 대답하고,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예(Yes)”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뜻 안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내려고 합니다. 여러분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면, 내 마음이 위로받을 것 같습니다. 디모데만큼 여러분에 대해 걱정하고 마음 쓰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디모데의 인품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2:19-22) 이기주의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인간의 본능(本能, nature)입니다. 원래 우리가 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연단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우리가 이기주의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Timothy has proved himself. Like a son with his father, he has served with me in preaching the Good News(디모데는 자기 자신을 증명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나와 함께 섬겼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심지어 디모데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디모데후서 1:4). 그리고 바울은 그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디모데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디모데후서 4:9, 21).

디모데가 이기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위에서 소개했던 본회퍼는 어떻습니까? 독일의 나치주의가 극성을 부릴 때 본회퍼를 잘 아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를 비롯한 미국의 신학자들이 본회퍼를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로 초빙했습니다. 그들 생각에 본회퍼를 독일에 그냥 두면 결국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본회퍼로서는 정말 좋은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 때가 1939년, 그의 나이 33살 때였습니다. 교수 초빙을 수락하고 독일로 돌아가지 않으면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독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 때 그가 라인홀드 니버에게 쓴 편지가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그가 쓴 글 속에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 글을 한번 보세요. “I hav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I made a mistake to coming to America. I have to live through the difficult period of our national history with the Christians in Germany. I will have no right to assist with the restoration of Christian life after the war in Germany if I do not share the trials of this period with my people(내가 미국에 온 것이 실수였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사의 어려운 시기를 내 조국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겪어야 합니다. 이 시련의 시간을 내 민족과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나는 전후 독일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회복을 도울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고,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23, 26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통과 전쟁과 질병과 가난이 끊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을 우리와 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고난에 참여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말씀의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직’입니다. 제자의 삶 그 어디에도 이기주의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cheap grace)’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본회퍼의 말을 들어볼까요? “Cheap grace is grace without discipleship, grace without the cross, grace without Jesus Christ, living and incarnate(값싼 은혜는 제자직이 없는 은혜이고, 십자가 없는 은혜이고, 살아 있고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다).”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을 완전히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불가능하게 보여도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밭에 묻힌 보물(마태복음 13:44)’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땅 속에 많은 보물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람은 집으로 돌아와 자기 전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그 밭에 엄청난 보물이 묻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삶’이 꼭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자직을 선택한 사람들은 어찌보면 그 전 재산을 팔아 밭을 산 사람처럼 어리석게 보입니다. 주님은 제자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얼핏 보기에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들(those who lose their lives)’처럼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자기 생명을 건지는 사람들(those who save their lives)’이라고 하셨습니다(24절).

여러분이 잘 아는 C.S. 루이스(C.S. Lewis, 1998-1963)가 그의 대표작 ‘Mere Christianity(순전한 기독교, 1952)’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Until you have given up yourself to Him, you will not have a real self(그리스도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릴 때까지 당신은 진정한 당신 자신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직’을 굉장한 것으로 말할지 모르지만, ‘제자직’은 소수의 사람들만 살 수 있는 특별한 삶이 아닙니다. ‘제자직’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인간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6.26.22 주일설교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4)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Jesus The Good Shepherd

요한복음 10:9-15

김태환 목사

9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10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11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품삯을 받고 양을 돌보는 사람은 사실 목자가 아니며, 양도 자기 양이 아니다. 그 사람은 늑대가 오는 것을 보면, 양만 남겨 두고 멀리 도망가 버린다. 그러면 늑대는 양을 공격하여 양들을 흩트린다. 13 그 사람은 단지 품삯을 받고 양을 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양을 돌보지 않는다. 14 나는 선한 목자다. 나도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알아본다.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안다. 그리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쉬운성경)

9 “Yes, I am the gate. Those who come in through me will be saved①. They will come and go freely and will find good pastures. / ①Or will find safety 10 The thief’s purpose is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My purpose is to give them a rich and satisfying life. 11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sacrifices his life for the sheep. 12 A hired hand will run when he sees a wolf coming. He will abandon the sheep because they don’t belong to him and he isn’t their shepherd. And so the wolf attacks them and scatters the flock. 13 The hired hand runs away because he’s working only for the money and doesn’t really care about the sheep. 14 I am the good shepherd; I know my own sheep, and they know me, 15 just as my Father knows me and I know the Father. So I sacrifice my life for the sheep.” (New Living Translation)

‘Seven I AM Statements in the Gospel of John(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I AM)’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I AM’이라는 말은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셨습니다. BC 3세가 중엽에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번역된 성경을 ‘셉투아진트(Septuagint, 70인 역)’라고 합니다. 이 때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는 말을 ‘εγώ εἰμί(ego eimi)’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I AM’이 됩니다.

‘I AM’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I AM’이라고 말씀하신 일곱 개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복음 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복음 8:12).” “나는 문이다(요한복음 10:9).” “나는 선한 목자다(요한복음 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 “나는 포도나무다(요한복음 15:1, 5) 요한복음에만 ‘I AM’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4:27에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Jesus spoke to them at once. “Don’t be afraid,” he said. “Take courage. I am here!①” / ①Or The `I AM’ is here; Greek reads I am. See Exod 3:14 “I am here”라는 말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주(note) ①에 있는 대로 “I AM is here(I Am이 여기 있다)” 이렇게 번역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I AM’이라는 말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낸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고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복음 13:33)”라고 고백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때 경험했던 예수님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만났던 ‘스스로 있는 자’ 그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제가 ‘I AM’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나는 선한 목자다(I am the good shepherd, 11절)” 이 말씀이 ‘I AM’ 구절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I AM is the good shepherd”라고 해야 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바로 ‘I AM’, ‘스스로 계시는 분’ 오늘 우리가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부르는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스스로 계시는 분’을 발음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네 개의 자음으로만 되어 있거든요. 나중에 모음을 붙여서 ‘여호와(Jehovah)’ 혹은 ‘야훼(Yahweh)’라고 발음을 했습니다. 발음을 할 수 없으니까 ‘주님’이라는 뜻을 가진 ‘아도나이(Adonai)’라는 말에서 모음 네 개를 빌려와 발음을 했습니다. 그렇게 발음한 것이 ‘여호와’ 혹은 ‘야훼’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이 말보다 더 잘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윗이 쓴 시편 23편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시편 23:1-2)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He makes me to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the still waters.” (NKJV) 위대한 시인이었던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만족(滿足, satisfaction)’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한자 ‘만족’이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만(滿)’자는 ‘가득차다’는 뜻인데, 왜 여기에 ‘발(足)’이라는 말을 붙였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아무튼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가득하다’는 말에 ‘발’이라는 말을 붙여 ‘만족’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도 그 설명을 들을 때는 왜 ‘발’을 뜻하는 ‘足’자를 썼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가 ‘발(足)’자를 붙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발은 우리 몸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만족하다’는 말은 위로 머리에서부터 우리 몸 맨 끝에 있는 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에도 부족한 것이 없는,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만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람들은 ‘만족’을 느끼는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만족’을 얻느냐 하는 것입니다. “Contentment should be the hallmark of my life, as I put me affairs in the hands of God(나의 일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반드시 만족이 주어진다).” 필립 켈러(W. Phillip Keller, 1920-1997, 케냐)의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선교사의 아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직접 8년 동안 목자의 삶을 경험하면서 발견한 것들을 책으로 썼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A Shepherd Looks at Psalm 23(한 목자가 본 시편 23편, 우리 말로 ‘양과 목자’로 번역됨)’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양들이 목자의 인도를 받음으로써 배불리 먹고, 물을 마시고, 만족을 얻는 것처럼, 우리도 목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Yahweh).” (시편 144:15) 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하는 사람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과 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참 복 있는 사람들인 것을 아시나요? 왜냐하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시편 95편에 있는 말씀인데요. “다 와서 엎드려 주를 경배합시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이며 그분이 기르는 양 떼들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6-7절)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장에서 사는 하나님의 양떼들이고, 하나님의 백성들(the people of His pasture)이기 때문입니다.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 미국)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best and most beautiful things in the world cannot be seen or even touched-they must be felt with the heart(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마음을 느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헬렌 켈러는 볼 수 없는 ‘시각장애자’였고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자’였습니다. 하지만 헬렌 켈러는 해가 넘어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느껴 알고 있었고,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장관을 눈으로 본 적은 없었지만 마음으로 느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95편 말씀도 마음으로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7절, 개역성경) 이 말씀이 가슴으로 느껴지시나요? “하나님이 기르시는 그 손의 양이라”는 말씀이 정말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갓난 아기들이 엄마의 손에서 무럭무럭 자라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자랍니다. 이 하나님이 누구인가요? 스스로 계시는 분, 모세가 호렙산에서 만났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제 그 야훼 하나님,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자신을 ‘삯꾼(a hired hand)’과 구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삯꾼’은 돈을 받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 주인은 양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마리 수를 세어서 모자라는 것은 목자가 물어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아 양이 잡혀 먹히거나 할 때는 목자가 그 양을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10절)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My purpose is to give them a rich and satisfying life(나의 목적은 양들에게 풍요롭고 만족한 삶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나와 있고, Amplified Bible에는 “I ca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in abundance [to the full, till it overflows]”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에게 차고 넘치도록 풍성한 생명을 주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풍성한 생명’은 삶의 의미와 목적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조금 전에 소개했던 필립 켈러의 말인데요. “No pastor, no spiritual leader, is ever able to take his people any further than he himself has gone with God(어떤 목사나 영적 지도자도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 이상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갈 수 없다).” 그의 말을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목사나 영적인 리더도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가 될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어떤 목사도, 영적인 리더도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온전하게 하나님께로 인도할 ‘선한 목자’는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로마서 5:8)”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다윗은 나이가 어리고 전투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골리앗과의 싸움이 허락되지 않자 사울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양 떼를 지키던 사람입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을 물어 가면, 저는 그 놈들을 공격하여 그 입에서 양을 구해 냈습니다.” (사무엘상 17:34-35) 다윗은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선한 목자(a good shepherd)’였습니다. 그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이신 예수님의 ‘모형(a copy)’ 혹은 ‘그림자(a shadow)’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잘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양들에 대한(about sheep)’ 정보를 안다는 말이 아니라, 양들의 특징을 알고, 그들의 버릇을 알고, 그들의 건강 상태를 알고, 심지어 양들의 이름까지 안다는 뜻입니다. 양들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It takes some of us a lifetime to learn that Christ, our Good Shepherd, knows exactly what He is doing with us. He understands us perfectly(우리 중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아신다는 것을 배우는데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계신다).”

이 시간, 여러분의 관심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에게 돌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나를 알아본다(They know me).” (14절)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because they know his voice) 그의 뒤를 따른다.” (4절) 양들이 목자를 인격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도 우리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음성을 모르면 그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다가 정말 우연히 목자가 양떼를 인도하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했습니다. 나이가 젊은 목자인데, 양 5-60마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목자가 피곤했는지 잠깐 자리에 앉는 사이에 양들은 금방 여기 저기 흩어져 풀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양들이 멀리 가면 안 되니까 목자가 조약돌을 하나 집어 저만큼 던졌습니다. 그 이상은 가지 말라는 신호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목자가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니까 양들이 금방 목자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신기한 광경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선한 양’이 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선한 양’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다른 사람을 위한 ‘선한 목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목사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Life’s most persistent and urgent question is ‘What are you doing for others(삶의 가장 지속적이고 긴급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